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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쪽같은 내 남친-45화 (45/85)

45화

“네… 괜찮아요.”

“그래… 괜찮다니 다행이네.”

“…….”

“미안하게 됐다. 내가 잘 알아보지도 않고 겉만 보고 오해했나 보네. 앞으로는 자제하고 조심하마.”

가만, 아까랑 너무 태도가 다른 거 아니야? 몇 분 전 권시훈의 뒷목을 잡고 짤짤 흔들어 대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혹시 본인 때문에 시훈이 잘못되지는 않았을까 전전긍긍 살피는 모습이 애처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선생님! 아니에요! 지금 쌤은 저놈들한테 속고 있는 거예요! 어서 현실로 돌아오세요!

내 들릴 리 없는 외침은 결국 세상 빛을 보지 못하고 사그라지고 말았다. 거짓말에 순진한(?) 한 사람이 무참히 희생당하는 그야말로 안타깝기 그지없는 이 광경을 눈앞에서 봐야만 한다니. 가슴이 미어지…는 것까지는 아니고. 어쨌거나 좀 보기가 그랬다. 안타깝고 통탄스러워서.

“선생님. 너무 걱정 마세요. 시훈이 괜찮을 겁니다.”

“아, 나도 모르게 또 성격 나와버려서… 미안합니다.”

“에에이. 저한테 미안할 건 아니죠.”

걱정될 만한 말은 자기가 다 해 놓고 이제 와 걱정하지 말라니. 은근 병 주고 약 주면서 심란하게 만드네. 앞으로 오형석을 만날 때는 꼭 한 번 더 생각하고 정신 바짝 차리고 대화에 임해야겠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저 뻔뻔한 연기에 눈 뜨고 코 베이게 생겼네. 무서운 놈.

“…에휴.”

그런데 어쩐지 오형석의 위로(?)에도 부장 선생님은 어두운 기색을 거두지 못하고 무언가 고민이 있는 사람처럼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갑자기 왜 저래? 영문을 알지 못하는 권시훈과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부장 선생님을 바라보자 오형석은 신경 쓸 필요 없다는 듯 손을 휘휘 저으며 퍽 선생 같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시훈아. 윤진아. 잠깐만 기다릴래? 시간 늦었으니까 선생님이 바래다줄게.”

“…저희 집 바로 이 근처라서 괜찮은데.”

사지 멀쩡한 남고생 두 명을 바래다준다는 게 효율적인 행동은 아닌 것 같아 정중히 거절했다.

“선생님이 걱정돼서 그래. 너희 들어가는 거 봐야 안심될 것 같으니까 잠깐만 여기서 기다려 줘.”

하지만 오형석은 시훈의 거절을 거절했다. 말투도 친절하고 표정도 다정했지만, 마주친 눈이 번뜩이고 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이대로 오형석의 말을 무시해 버리고 집에 가버리면, 후폭풍이 엄청날 것이라는 예감이 들어 시훈의 옆구리를 꽉 꼬집으며 조용히 하라는 사인을 보냈다.

“공 선생님 시간이 너무 늦었네요. 택시 불러 드릴게요. 가시죠.”

“어어. 그래. 이 녀석들. 딴짓 거리 하지 말고 얌전히 선생님 기다려야 한다.”

“네에.”

내 대답을 들은 오형석은 부장 선생님을 부축하듯 어깨를 붙잡고 느릿느릿 우리에게서 멀어졌다.

무슨 심각한 이야기를 하는지 둘은 나란히 한숨을 쉬었다가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기도 하며 대화를 멈추지 않았다.

딱히 가십이나 다른 사람 이야기에 관심 가지는 스타일은 아니지만, 부장 선생님의 지킬 앤 하이드급의 태세 전환의 이유는 궁금했다. 그래서 할 수 있는 한 최대로 귀를 활짝 열고 권시훈에게 손짓했다.

‘이리 와. 시훈아.’

눈치껏 내 쪽으로 걸어온 시훈의 팔목을 살짝 잡아당기자 끄는 대로 저항 없이 내 곁으로 다가왔다.

‘뭐야? 왜 저렇게 심각해?’

시훈은 집중하느라 굳은 내 얼굴이 신경 쓰였는지 슬쩍 말을 걸어왔다.

‘응?’

‘형석 씨랑 부장 쌤.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심각하잖아.’

귓가에 숨결이 가까이 다가와 간질거리는 기분에 눈을 살짝 돌리니, 자연스럽게 팔을 들어 손목을 잡고 있던 나의 손을 제 손으로 그러쥐었다.

‘네가 아픈 척해서 놀라셨나 보지 뭐.’

맞잡은 손을 내려다보며 무심하게 대답하니, 머리 위로 불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정도 가지고? 누가 보면 내가 자기 때문에 쓰러져서 실려 간 줄.’

‘너한테는 별일이 아닐지 몰라도 당하는 사람은 놀랄 수 있어. 난 네 연기에 늘 놀라는걸.’

‘아, 정말? 몰랐네.’

…여태 몰랐다니 그건 그것 나름대로 참으로 대단하구나. 눈을 흘기다 그냥 고개를 돌려 버렸다.

‘자기한테는 조심해야겠다. 놀라지 않게 미리 말해 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네.’

‘끝까지 안 하겠다는 말은 안 하는구나.’

‘저쪽에 집중이나 해.’

권시훈의 핀잔에 짜증이 울컥 솟구쳐 시선을 내려 두 선생을 바라보았다.

걸어가는 두 사람의 뒷모습 너머로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렸다. 주변이 조용한 덕인지 대화 내용이 꽤 정확히 들렸다.

“아까는 욱해서 성격대로 질렀습니다만, 아무래도 들은 이야기가 있으니 마음에 걸려서요.”

“…아.”

부장 선생님의 말에 오형석은 안타까운 듯 탄식을 내뱉었다.

“나도 참. 나이를 먹었으면 나잇값을 해야 하는데. 언제까지 초임 시절처럼 굴 수도 없고.”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전무님도 별 생각 없이 하신 말일 겁니다.”

“대체로 높으신 분들의 한 마디는 생각 없이 들으면 안 되더군요. 이대로라면 위험하다든가 하는 말은 더.”

“에이. 아무리 그래도 하루아침에 재단 일을 정리하진 못하죠. 후원 끊기더라도 교사 감축한다는 확신도 없고요.”

홍주석 박사의 정보에 따르면 금주고등학교는 K제약 산하의 ‘금주재단’이라는 재단에서 후원을 받고, 암암리에 K제약의 연구에 도움을 주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했다. 때문에 지원도 후하고, 특히 교직원들의 처우가 매우 좋아 고등학교 교사라면 누구나 한 번쯤 희망하는 ‘꿈의 직장’이라고…

그런데 후원이 끊긴다는 말은 K제약이 학교를 포기한다는 뜻인데, 그런 일이 하루아침에 가능하다고?

“부장님. 걱정이 과하면 병 됩니다. 아직 정해진 것도 없는데 너무 의기소침해하지 마세요~”

“아이고. 그래야죠.”

“어! 저기 택시 온다.”

오형석은 부장 선생님이 택시에 올라 떠날 때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다, 택시가 저만치 가서 보이지 않을 때쯤 우리에게 돌아왔다.

“아이고. 미안합니다. 시훈 씨. 갑자기 부장 쌤이 덮쳐서 놀라셨죠.”

“…네?”

“제가 그냥 가자고 그렇게 말씀드렸는데 약주를 조금 과하게 하셔서 이런 사달을 냈네요.”

오늘은 태세 전환이 컨셉일까. 부장 선생님도 그렇고, 오형석도 그렇고 너무 갑작스러운 거 아냐? 방금 전까지 진짜 선생이라도 된 양 굴더니, 순식간에 오형석 연구원으로 돌아가 버리면 적응이 안 되잖아요.

“아뇨. 네. 괜찮아요, 아니, 괜찮습니다.”

시훈도 적잖이 놀랐는지 눈을 빠르게 깜박이며 더듬더듬 대답했다. 제아무리 연기에 목매는 설정 장인이라 하더라도 본인이 아닌 다른 사람이 저와 똑같은 짓을 하면 당황하게 되나 보다.

“저, 그런데 아까 이야기는 뭡니까.”

“네?”

놀란 건 놀란 거고. 이제 의문을 해결할 차례이다.

“제가 들으려고 한 건 아닌데 부장 선생님이랑 가실 때 재단이 어떻고 하는 이야기를 들은 것 같아서요. 혹시 이야기하기 곤란한 내용이면 굳이 말씀해 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사실, 너희가 속닥거리는 이야기에 아주 관심이 많아서 내 모든 신경을 청각 세포에 쏟아부어 훔쳐 들었다고 말할 수 없었다.

“아아! 오늘 파란만장했습니다. 아주.”

다행히 비밀이야기는 아니었는지 오형석의 입은 생각보다 쉽게 열렸다.

“오늘 김 전무님께서 몇몇 교직원들과 간단히 회식 자리 마련해서 이야기 나눴거든요.”

“김태준 그 개새… 아니, 모기업의 전무가 연구소도 아니고 학교 직원들과 자리를 가졌다고요?”

“네. 공문 내려갈 거지만 모기업의 사정이 그닥 좋지 않아서 재단 지원이 대폭 줄어들 수 있다고.”

“아니, K제약이 동네 구멍가게도 아니….”

분명 내가 대답하려고 했다. 그런데 대답은 시훈이 더 빨랐다.

“그 이야기를 굳이 교직원들만 따로 불러서 했다고요? 한 기업의 전무이사가?”

오형석은 갑자기 질문의 대상이 바뀌자 당황한 듯 눈을 껌벅이며 권시훈을 바라보았다.

“어, 어 그게요. 저도 내부 사정은 모르지만 신사업 육성 때문에 재단에 투자할 예산이 없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런데 아무래도 제 생각에는 ‘YOUNG’ 프로젝트가 생각보다 진행이 더디니 그쪽에 몰아주려는 게 아닐까 싶은데.”

아무리 그래도 회사 내부 사정인데 묻는 말에 너무 솔직히 대답해 주는 건 아닌가 싶어 팔짱을 끼고 둘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오형석은 모른척했고, 권시훈은 내 쪽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아! 시훈 씨가 걱정할 건 없고요. 이건 학교와 재단의 문제라서 전무님께서 적당히 처리하실 겁니다.”

“…프로젝트가 난항이라는 이유로 바로 재단 지원을 끊고 교직원들 임용 문제에 손을 대는 게 도의적으로 말이 안 되는 것 같아서 여쭤본 겁니다.”

“그거야… 저도 모르죠. 저는 연구소 소속이지 학교 소속이 아니니.”

우리와 같은 처지임을 피력한 오형석은 관자놀이를 긁적이며 실없이 웃었다. 모르는 게 당연하겠지. 우리는 가짜로 학교에 다니고 있는 가짜 학생이고 선생이니까.

“자아! 우리는 우리 일만 열심히 합시다. 윤진 씨 모니터링 업로드하셨나요? 제가 오늘 종일 전무님이랑 다니느라 메일 확인을 못 했네요.”

“걱정 마세요. 오전에 완료했습니다.”

“어휴, 하루 종일 답답해 죽는 줄 알았어. 감사합니다.”

“별건 없어요.”

“별일 없는 게 우리에게는 좋은 일입니다.”

그건 그렇지. 동의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슬슬 피곤해졌다. 본래대로라면 진작에 꿈나라로 떠나고도 남을 시간이었는데, 달밤에 벌어진 소동으로 정신이 혼란스러웠다.

“나머지 일은 내일 하시고, 이만 돌아가는 게 좋겠습니다. 형석 씨.”

내 상태가 좋지 않다는 것을 눈치챈 시훈은 내 어깨를 감싸며 오형석에게 말했다.

“아아.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요. 얼른 들어가셔서 쉬세요.”

언제는 바래다준다더니 역시나 공갈이었나보다.

짧게 묵례하고 시훈의 손을 잡고 자리를 피하려 했다.

“아! 윤진 씨!”

자리를 뜨려는데 갑자기 나를 부르는 오형석의 목소리에 옮기려는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김 전무님께서 프로젝트 합류 건으로 직접 연락 주신다고 하시네요.”

“네?”

“꼭 받으라고 누차 강조하셨어요. 윤진 씨 전무님하고 사이 안 좋습니까?”

“…….”

“아무리 껄끄러워도 일인데 좀 받아주세요. 김 전무님은 윤진 씨 좋게 생각하고 계시던데.”

왜, 나는 김태준이 나와 이야기하고 싶다는 전언을 권시훈과 함께 있는 이 시점에 들어야만 하는 것인가.

마지막까지 눈치는 쓰레기통에 처박아 버린 오형석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나는 참으로 운 없는 편이 틀림없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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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린 장편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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