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김 전무라는 사람.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네.”
시훈의 중얼거리는 혼잣말에 움찔 어깨가 떨렸다. 그리고 뒤에 이야기는 말에 주먹을 꽉 쥐었다.
“…알아서 뭐 하게.”
“우리 사귀기 전에 그 사람 때문에 힘들어하던 건 기억나는데 어떤 사이였는지 말해 주진 않았던 것 같아서.”
“알아서 좋을 게 없으니 말 안 한 거야. 대학 선후배 사이고 그때 잠깐 가깝게 지낸 것 빼곤 없어.”
당연히 버럭버럭 역정을 내며 그 새끼랑 무슨 일이 있었냐, 왜 아직도 미련을 못 버리고 집적거리냐 등등 온갖 추궁을 해댈 거라 생각했다.
“그래.”
그런데 이상하리만치 권시훈은 차분했다. 마치 김태준 따위와 있었던 일은 알 필요도 없다는 듯이.
되레 조바심이 난 내가 눈 둘 곳을 찾지 못하고 불안해할 만큼.
“…더 안 물어봐?”
“응?”
“그게 다냐고.”
“네가 말해 주기 싫은데 더 물을 필요가 있나.”
“…….”
“윤진아. 네가 싫으면 나도 싫어. 네가 안 하는 건 나도 안 할 거야.”
“시훈아….”
“그러니까 이 이야기는 그만하자.”
앞서 현관으로 들어서는 권시훈의 넓은 등을 빤히 보다 한숨을 내쉬었다. 분명 무언가 잘못되어가고 있었다. 문제는 그 이유를 모르겠다는 것이다.
왜? 왜 아무것도 묻지 않는 건데? 김태준 따위는 별거 아니니 신경 쓸 필요도 없다는 의미일까. 그게 아니라면 이제는 화내고 질투할 만큼 나를 좋아하지 않게 되어서?
나는 갑자기 불안해졌다.
겉으로는 권시훈이 집착을 해서 곤란하다 피곤하다 불만을 토로하지만 사실, 이 속의 반대편에는 내 오래된 연인조차 믿지 못하는 못된 마음이 자리 잡고 있었다. 끊임없이 확인받아야 하고, 곁을 떠나면 안 된다. 이 삐뚤어진 마음은 김태준 때문일까? 김태준이 망가뜨려 놓은 조각을 주워 담지 못한 탓일까.
심장이 두근거리고 머리가 멍해졌다. 귓속에서는 삐- 하고 이명이 들렸다. 시훈의 침묵이 깨지길 기다리는 이 순간이 길고도 길었다.
“…하나만 물어보자.”
그때, 현관에 들어선 시훈의 발이 우뚝 멈췄다. 나는 뒤따라 들어가다 시훈의 몸과 닫힌 현관문 사이에 갇혀버렸다.
순간 당황해 주춤 뒤로 물러났다.
몸을 돌려 나를 내려다보는 눈빛이 뜨거워 데일 것도, 너무 차가워 얼어버릴 것도 같았지만 도망갈 곳도, 피할 곳도 없었다.
“…….”
마른침을 삼켰다. 목구멍이 바짝 말라 안쪽이 따끔거렸다.
“박윤진은… 김태준 그 새끼 때문에 얼마나 힘들었어?”
“…시훈아.”
“그거 하나만, 하나만 대답해 줘.”
“…….”
힘들지 않았다고 웃어 버릴 수 없었다. 하지만 죽을 만큼 힘들었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힘들게 했냐고? 그 새끼 하나 때문에 내 20대가 망가졌고, 사람을 믿지 못하게 되었어. 보는 것만으로도, 같은 공간에서 숨 쉬고 있는 것만으로도 끔찍해. 하지만 피할 수 없어.
입술을 꽉 깨물고 눈에 힘을 주었다. 이런다고 나오려던 눈물이 멈출 리는 없겠지만.
“윤진아. 형.”
뺨을 감싸는 따뜻한 기운에 천천히 눈을 들었다.
“과거 캐묻자고 질문한 거 아니야. 그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괴롭혔던 게 무엇이었는지 알고 싶을 뿐이야.”
“…….”
“그런데 얼굴 보니 대답은 충분히 된 것 같다.”
그대로 내 연인의 허리를 끌어안고 품에 기대어 모른 척 울어버리고 싶었지만 너무 이기적인 짓 같아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들어가자.”
* * *
꿈에 김태준이 나왔다.
꿈속에서 우리는… 믿을 수 없지만, 함께 살고 있었다.
김태준은 여유롭게 소파에 앉아 신문을 보고 있었다. 아주 오래전 학총 때 주워들은 정보에 의하면 김태준은 LP판을 모으는 취미가 있다 했다.
‘이거 구하기 어렵다는 음반이야. 넌 구경도 못 해 봤을걸.’
속을 긁는 말에도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결국 아침부터 초면인 음악을 들어야만 했다.
처음 들었을 때는 꽤 좋은 선율이라고 생각했는데 몇 시간째 같은 노래를 듣고 있으니 속이 울렁거리는 것 같았다.
주방에서 점심때 사용한 그릇을 정리하고 커피를 내려 그의 앞에 가져다 놓을 때까지도 김태준은 나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신문에 집중하고 있었다. 대체 뭘 보는 건가 싶어 곁눈으로 훔쳐보니, 영어로 잔뜩 쓰여 있어, 한눈에 들어오지 않아 무슨 내용이냐고 물어보려다 그냥 포기했다. 꿈에서조차도 나는 김태준이 굉장히 멀게 느껴졌다.
불현듯 허기가 졌다. 뭐라도 먹으려 찬장을 뒤지니 라면이 나왔다. 실제 김태준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꿈속의 김태준은 라면 따위 먹지 않기 때문에 한 봉지만 꺼내어 물을 올리고 수프를 찬물에 죄다 쏟아 넣어버렸다.
‘라면 몸에 안 좋은 거 알지?’
흠칫 놀라 소파 쪽을 바라보니 김태준은 여전히 신문에 눈을 갖다 박은 채 중얼거리듯 말했다. 틀림없이 나에게 말하고 있었다. 먹지 말라는 무언의 경고다. 꿈이 아니었다면, 그대로 라면 끓이기를 멈췄겠지만, 지금은 꿈이다. 나는 김태준의 말을 무시하고 펄펄 끓는 물에 그대로 면을 넣어버렸다.
‘박윤진. 넌 여전히 내 말 들을 생각하지 않지. 하라는 대로 하고, 얌전히 내 울타리 안에서 살면 아무 문제 없는데 왜 튀어서 일을 그르쳐.’
아니라고 말해야 했다. 말하려 입을 열었지만, 목소리가 완전히 먹혀 버린 듯 아무런 소리도 낼 수 없었다.
‘봐. 내 말 안 들으니 망가져 버렸지.’
‘…… ’
‘넌 어차피 거기까지야. 남들 뒤나 봐주며 빌빌거리는 멍청이. 그러니 앞으로 개처럼 바짝 엎드려 살아.’
소파에 앉은 채 차갑게 웃는 김태준에게 소리 없는 욕설을 고래고래 질렀지만 끔찍한 고요만 있을 뿐이었다. 달려가 뺨을 내려치고 싶었지만 다리는 땅에 붙어버렸는지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으음.”
어디서 라면 냄새가 나는 것 같아 잠에서 깨어났다.
지금 꿈인가….? 벽에 걸린 시계를 보니 12시가 조금 넘었다.
떠지지 않는 눈꺼풀을 겨우 들어 올려 주변을 둘러보니 방 안이 환했다. 어쩐지…. 눈이 욱신거리면서 아프더라니.
“아, 목 아파….”
꿈속에서 너무 소리를 지른 탓일까. 잠에서 깨어나니 갈증이 나, 비척거리며 몸을 일으켜 문을 열고 거실로 나왔다.
“어? 깼어? 내가 시끄럽게 했나?”
아니, 너 말고. 냄새가 날 깨웠지.
권시훈이 식탁에 앉아 라면을 먹고 있었다. 어디서 찾았는지 양은냄비에 야무지게도 본가에서 가져온 김치도 내어놓았다.
“갑자기 웬 라면?”
“잠이 안 와서.”
“내일 얼굴 붓는다.”
“이것만.”
굳은 표정을 완전히 지우고 조용히 웃는다.
천천히 다가가 앞에 가서 서자, 시훈의 커다란 손이 내 머리 위에 얹어지며 가볍게 머리칼을 흩트려놓는다. 몽롱한 기분에 머리를 만져 주는 감촉이 좋아 눈을 접으며 웃었다.
그런데 시훈은 나의 얼굴을 가만히 보더니, 짐짓 심각한 얼굴이 되었다.
“자기, 약 먹었어?”
“으응? 어떻게 알았어.”
“눈.”
시훈의 손가락이 나의 눈꼬리에 가 닿는다. 생각보다 뜨거운 느낌에 어깨가 살짝 움츠러들었다.
“눈꼬리가 빨게. 형 약 먹으면 여기 빨갛게 되잖아.”
몰랐다.
무안해져 괜히 눈가를 매만졌다. 아프지는 않고 조금 부은 것 같다.
“어디가 안 좋은데. 약 잘 먹지도 않잖아.”
“그냥, 머리가 좀 아파서. 잠도 안 오고.”
“날 부르지.”
“너도 심란할 텐데… 정리할 시간이 있어야지.”
내 말에 시훈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잠 깨서 어떻게 하나. 다시 못 잘 거 아냐.”
“라면 한 입만 줘 봐.”
“…엉?”
“꿈에서 라면 먹으려고 했는데 깼어. 네가 라면 끓여서 잠결에 냄새 맡았나 봐. 그러니까 한 입만 줘 봐.”
“참나….”
시훈은 헛웃음을 터트리며 젓가락 가득 라면을 건져 올린다. 김도 별로 안 나는 데 후-후- 입김을 불어 식히더니 한 손으로 받쳐 나에게 내민다.
“너무 많은데.”
“그냥 먹어. 보나 마나 자기 저녁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약 먹었으니 속 아파서 깬 거야.”
“그래도.”
“어차피 한 입 먹고 안 먹을 거면 줄 때 많이 먹어.”
고집도 쓸데없는 데에 잘 부린단 말이야. 나는 마지못해 입을 크게 벌리고 라면을 받아먹었다. 얼마나 많이 건졌는지, 입꼬리가 찢어질것 같이 아파 와 눈물이 살짝 맺혔다.
입 안 가득 라면이 들어차 제대로 씹히지도 않는다. 겨우겨우 턱을 움직여 우물거리며, 시훈을 밉지 않게 째려보자 한껏 눈을 찡그려 웃으며 기다란 손가락으로 눈물을 닦아 준다.
“나 이것만 먹고 같이 자자. 재워 줄게.”
“내가 애냐….”
“자기, 지금 나 필요하잖아.”
“너도 피곤할 텐데. 괜찮아. 일도 많이 남았다면서.”
“깬 거 다 봐버렸는데 일이 손에 잡히겠어? 그냥 옆에 있게 해 줘. 내가 그러고 싶어.”
“…….”
“단순하게 생각해. 자기가 내 눈치 보는 거 싫어. 나는 박윤진이 좋으니까 다 이해하고 싶고 내 옆에서 편안했으면 좋겠어.”
그게 다야.
그 말을 끝으로 시훈은 다시 먹는 데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기뻐야 하는데 왜인지 기쁜 것보다는 가슴이 먹먹하고 무언가에 절여지는 것만 같다.
완전히 믿지 못하는 내가 원망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이 추한 속까지 나의 연인이 모두 이해해 주었으면 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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