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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쪽같은 내 남친-47화 (47/85)

47화

또다시 며칠이 흘렀다. 김태준 새끼가 내 과거뿐 아니라 현재에까지 손을 뻗치려 한다는 것을 권시훈이 알게 된 그 날 이후로 우리 두 사람은 암묵적으로 서로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 무진 애를 썼다. 아니, 정확히는 내가 시훈의 눈치를 보느라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어 피곤에 찌들어 버렸다 하는 편이 맞겠다.

여태 김태준의 ㄱ자도 꺼내지 않은 걸 보니 정작 시훈은 김태준에 대해 까맣게 잊어버렸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시훈이 김태준이라는 이름을 기억하게 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기분이 가라앉았다.

나는 내 연인이 나에 대해 일말의 의심이나 의문을 가지게 되는 것이 끔찍이 싫었다. 아주 작은 균열이라도 언젠가는 커다란 둑을 무너트릴 수 있으니까.

“자, 졸지 말고 여기 똑바로 봐. 너희 자꾸 뺀질거리면 불시에 수행 공지할 거다.”

“아. 쌔에엠. 너무 잔인해요!”

“선생 앞에 두고 헤드뱅잉 하고 있는 너희가 더 잔인한 거 아니냐?”

“5교시잖아요!”

하아. 머리 아파.

김태준 일만 해도 피곤한데, 사는 데 별 필요도 없는 수업을 온종일 듣고 있어야 한다니. 그냥 다 때려치우고 드러누워 자고 싶다.

진짜 고등학생 시절에는 나의 컨디션이 곧 학교의 위상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었던 지라 선생님 중 그 누구도 나의 숙면을 방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서른두 살 현재, 사회인 박윤진은 졸음 바이러스가 창궐한 교실에서 홀로 고군분투하고 있는 선생님이 안쓰럽게 보여 엎드릴 수조차 없었다.

“…….”

그런데,

졸리다.

자꾸만 아래로 떨어지려는 고개를 억지로 끌어올리려다 결국 힘에 부쳐 손으로 머리를 괴고 눈두덩이를 꾹꾹 누르며 졸음을 쫓았다. 하지만 심각한 수면 부족 탓에 뇌세포가 아예 멈춰버렸는지 멍한 정신은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게 다 권시훈 때문이야.

어젯밤, 10시면 자리에 누워야 하는 나를 붙잡고 미주알고주알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대는 바람에 잠들 타이밍을 놓쳐 버리고 말았다.

‘자기야.’

‘응.’

‘자기. 나 사랑하지.’

‘그 말을 굳이 이 한밤중에 졸고 있는 사람을 상대로 듣고 싶니?’

‘아, 빨리.’

내가 워낙 잠에 있어 예민하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는 인간이 생전 안 하던 짓을 하니 처음에는 무슨 일이 났나 싶어서 감기는 눈을 부릅뜨고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었다. 그동안의 냉전 아닌 냉전이 신경 쓰였던 것도 한몫했다. 그런데 가만 듣고 있자니 나를 사랑하니, 얼마나 사랑하니, 평생 사랑하니 등등 기상천외한 개소리를 시전하는 것이다.

당장에라도 눈이 감길 것 같아 내일 이야기하자고 밀어내고 싶었다. 하나, 며칠 동안의 냉전 아닌 냉전을 풀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던지라 무시할 수 없었다.

‘사랑해. 너무 사랑해서 미칠 것 같지. 그러니까 왜.’

‘으응. 그냥 듣고 싶어서.’

‘…? 시훈아. 너 뭐 잘못 먹었니? 새삼스럽게 고백 듣자고 자려는 사람 붙잡았던 거야?’

‘그건 아닌데….’

‘…뭔데. 들어줄게. 말해 봐.’

‘있잖아. 윤진아….’

처음 대화는 그간의 학교생활과 반 아이들 이야기로 시작했다. 어느 과목 선생님 수업이 괜찮고, 옆 반의 누구누구가 누구를 좋아한다더라 하는 시시콜콜한 이야기.

서두가 긴 걸 보니 분명 내게 환영받을 만한 주제는 아닌 모양인데… 대충 맞장구를 쳐가며 침착하게 본론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우리 반에 예솜이 있지. 걔 오빠 결혼한다더라.’

‘결혼? 몇 살인데?’

‘이제 스무 살?’

‘뭐? 미친 거 아냐? 속도위반이라도 했대?’

‘아니, 그건 아니고. 둘이 너무 사랑해서라던데.’

‘웃기네. 꼬맹이들이 무슨….’

‘자기야. 그런 거 다 편견인 거 알지.’

‘편견이라니. 넌 결혼이 쉬워? 인륜지대사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야. 둘만 좋으면 끝이야? 신경 쓸 게 얼마나 많고, 책임질 것도 얼마나 많은데.’

줄줄이 결혼에 신중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설교하고 있는데 불현듯 따가운 시선이 느껴져 눈을 돌려 시훈을 마주 바라보았다.

‘…?’

이 타이밍이면 웃고 있어야 할 권시훈이 어쩐 일로 미간을 좁히고 고개를 살짝 기울인 채 나를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너랑 나는 다를 수 있지 않을까.’

‘… 뭐? 너 또 청혼하는 거니?’

‘왜. 안 돼?’

‘되겠니? 교복 입고 구청 가서 저 남자랑 혼인신고 하러 왔는데요! 라고 발표라도 하려고?’

‘미국 가야지.’

또 시작이네. 너무 당연하게 말하니 이젠 새삼스럽지도 않다.

‘그 꼴로?’

‘내 꼴이 뭐 어때서. 외관상으로 보면 별다를 거 없어. 다른 사람들은 내가 어떤 모습이건 아무 신경 안 쓴다니까?’

‘아니, 그분들이 널 어떻게 보건 상관없이, 비행기 탔다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 위험하다는 생각 안 들어?’

‘위험할 게 뭐 있어. 지금도 일상생활 잘하고 있잖아. 비행기 타는 것도 똑같겠지.’

‘기압 차이가 있잖아!’

그 이후로 ‘기압 차이에 따른 신체의 변화’에 대해 차분히 설명했지만 이미 결혼이라는 행위에 꽂혀버린 경주마 권시훈 씨는 내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순간 욱하는 마음에 이를 악물었다. 대관절 그놈의 결혼이 뭐길래 당장 하지 못해 안달인 건지. 내가 어디 도망가는 것도 아니고, 우리 사이에 이상기류가 생긴 건 더더욱 아니건만.

…사실대로 말하자면 아주 이상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건 이리도 성급하게 구는 것은 아니다 이거다.

‘시훈아. 지금은 네가 원래대로 돌아가는 것만 신경 써. 다른 건 그다음에 해도 늦지 않잖아.’

‘늦어.’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만약 내가 돌아가지 못하면?’

‘… 뭐?’

‘임상에 계속 실패한다면? 그렇게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도 기약이 없다면 그때도 언제까지 기다릴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있어?’

‘시훈아.’

‘난 모르겠어.’

시훈은 한숨과 함께 어깨를 늘어뜨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 한숨에 내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것만 같았다.

‘너만큼 나도 불안해. 내가 병신 되어버리면, 그래서 너를 지켜 줄 수 없게 되면 네가 나를 떠나 버릴 것 같아.’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아니야.’

‘아니야? 내 옆에 평생 남아 있겠다고 약속할 수 있어?’

‘당연하지.’

내 단호한 대답에도 불구하고 권시훈을 고개를 저었다.

‘확신할 수 있어?’

‘뭐?’

‘약속도 결국 완전하지 않아. 찾으려 하면 날 떠날 이유는 차고 넘치겠지.’

‘권시훈.’

근래 들어 권시훈의 약한 모습을 자주 마주하는 것 같다. 그래서 마음이 아팠다. 늘 웃는 상에 세상 물정 모를 것 같은 밝고 맑은 낯에 떠오른 짙은 상실감과 불안함은 나의 불안감을 가중시켰다.

‘그러니까 지나가는 농담이라고 넘기지 말고 진지하게 생각해 봐. 장난 아니니까.’

내가 이토록 이기적이었다. 시훈이 나를 온전히 믿어주었으면 하면서 믿을만한 행동은 하지 않았다.

미안했다. 그리고 죄스러웠다. 내가 조금만 더 솔직했다면, 더 표현할 줄 아는 다정한 성격이었다면 권시훈은 제 사랑에 대해 고뇌를 할 필요도, 조금의 근심이나 의심, 그리고 불안 따위는 가질 필요 없었을 테다.

만약 정말 권시훈이 내 곁을 떠난다면 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내 손으로 내쳤다는 죄책감으로 평생을 괴로워할 것이다.

그 마음은 시훈도 마찬가지였나보다. 결국 권시훈과 나는 같은 갈래의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

잔잔히 흐르는 여름 바람에 흔들리는 창문을 바라보았다.

드극드극.

창틀끼리 부딪쳐 적당히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만들어 내었다.

창 사이로 불어오는 미적지근한 바람마저 시원한 오후의 교실, 반절은 엎드려 있고 반 아이들의 반은 나처럼 창밖을 바라보고 있고, 나머지 몇 명만 선생님의 필기를 열심히 적어 내려가고 있었다.

생각을 너무 했는지 관자놀이가 지끈거렸다. 근래 쭉 이 상태이다. 좋았다가 불안했다가, 멍했다가 또 또렷해졌다가.

정작 원흉인 권시훈은 별 표정 없는 얼굴을 하고, 그 큰 몸을 책상에 구기고선 무언가를 열심히 적고 있었다.

갑자기 공부에 대한 열정이라도 생긴 걸까. 뭐가 되었건 나는 지금 머리에 과부하가 온 것 같은데.

툭.

“아.”

뺨에 따끔하게 무언가 닿았다 떨어졌다. 고개를 돌리니 지난주, 내 오른쪽 대각선 뒷자리로 자리를 옮긴 권시훈이 해맑게 손을 들어 보였다.

저거 저거 또 장난질이지. 흘겨보니 손가락으로 제 책상을 가리킨다. 자연스럽게 시선이 아래로 내려갔고 작은 쪽지를 발견했다.

쌍팔년도도 아니고 웬 필담인가 싶어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마침 한창 필기하다 뒤를 돌아본 선생님과 눈이 마주쳐 얼른 고개를 책상에 박고선 입술을 깨물었다.

예쁘게도 접힌 학을 차례차례 옛 기억을 떠올리며 원래대로 펼쳤다. 화려한 색에 대비되게 색종이 뒤는 깨끗한 흰색이었다.

자기야. 오늘 수업 마치고 데이트하자.

뭐? 지가 진짜로 옛날 사람도 아니고 쪽지로 데이트 신청을 한다고?

쪽지를 읽고 시훈이 있는 쪽을 돌아보니 싱글싱글 웃는 채였다. 그 눈빛이 너무 진심이어서 나도 모르게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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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쪽같은 내 남친

한가린 장편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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