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너희 진짜 나 떼어놓고 가려고? 대체 어디 가려고 그러는 거야아!”
“데이트한다고 몇 번 말하냐? 어?”
“나도 같이 하면 되잖아!”
“미쳤냐? 세 명이 어떻게 데이트를 해!”
“권시훈. 넌 너무 편견에 사로잡혀 있어. 마음만 먹으면 세 명이 아니라 열 명도 함께 데이트할 수 있는걸.”
“…변태냐?”
“…너 무슨 생각을 하길래 변태라고 하냐?”
“아, 됐고 꺼져! 오늘은 진짜 안 돼! 이렇게까지 말하면 눈치껏 빠져줘야 하는 거 아니냐?”
“이씨….”
시훈이 아무리 만류해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들러붙으려는 규하를 억지로 집에 보내고 교문을 나섰다.
말이 거창해 데이트지, 밖에 나와보니 학생 신분으로는 할 수 있는 게 그다지 많지 않았다. 밥 먹고, 커피 마시고, 영화 보고… 이렇게 보니 어른일 때랑 별다른 게 없긴 하네. 아, 학생일 때는 돈이 없어서 이것저것 하기에는 부담되려나.
아무튼, 몇 개의 선택지 중에 권시훈이 고른 선택지는 자전거였다.
“타.”
“어, 으응.”
매일 타는 뒷자리인데도 어쩐지 부끄러워져 뺨을 한번 쓸고 얼른 시훈의 허리를 잡고 뒤에 올라탔다. 내 뺨이 제 등에 닿는 것을 느낀 시훈은 천천히 페달을 밟아 자전거를 출발시켰다.
바람이 거의 불지 않아 잔잔히 흐르는 주홍빛 강물 위로 우리의 그림자가 천천히 지나갔다. 바퀴가 부드럽게 흙바닥을 밀어내며 어설프게 다듬어진 포장도로 위로 올라섰다.
곧 인적이 드문 강 둔치에 다다랐고 높게 자란 풀들과 강물을 가로질렀다.
“이것도 나쁘지 않지?”
한참 동안 자전거 운전에만 몰두하던 시훈이 불쑥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그의 등에 뺨을 기댄 채 멍하니 일렁이는 강물을 바라보고 있던 나는 놀라 고개를 들었다.
“응?”
“잤어? 목소리가 영 이상하네.”
“아니. 가라앉아서 그래.”
“자면 안 돼. 떨어진다.”
어쩐지 시훈이 떨어질지도 모른다고 겁을 주니 정말 바닥으로 고꾸라질 것 같아, 허리에 두른 팔에 힘을 더 꽉 주었다. 운전 기사님께서는 숨 막히니 적당히 하라 짜증 냈지만 자전거가 조금씩 좌우로 휘청이는 것 같아 힘을 뺄 수 없었다.
머지않아 자전거는 강둑 아래에서 멈춰 섰다. 안장에서 내려온 시훈은 몸을 한 팔로 감싸 안으며 내가 넘어지지 않게 부축했다.
“어휴.”
시훈은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은 가방을 아무렇게나 내팽개치곤 낮은 둑 위에 걸터앉았다. 나도 곁으로 다가가 옆자리에 앉았다.
사람의 손을 거의 타지 않은 콘크리트 둑은 여기저기 갈라져 잔디와 잡초가 듬성듬성 갈라진 틈으로 비집고 나와 있었다.
“데이트라는 게 이거였어?”
“응. 왜, 별로야?”
“아니, 그건 아닌데 의외여서. 네가 데이트를 강둑에서 하자고 할 줄은….”
여태껏 권시훈은 ‘데이트’는 자고로 ‘돈’이 들어가야 하는 것이라고 스스로 정의 내리고선 갖가지 이벤트를 선보여 왔었다. 침대 위 장미꽃잎은 기본이고, 차 트렁크 속의 하늘을 나는 풍선, 케이크 속에 숨겨둔 반지-커플링이었는데 얼마 못 가 둘 다 같은 날에 잃어 버렸다-.
물론 나는 그때마다 기겁하며 도망가거나, 재수 없어 붙잡히는 날에는 머리에 내 얼굴보다 큰 리본을 쓰고 사진을 찍히는 굴욕을 당해야 했다. 부루퉁한 표정은 당연한 옵션이었다.
그런데 근 7년 만에 권시훈이 바뀌었다.
눈을 크게 뜨고 시훈을 돌아보았다. 나와 눈이 마주친 시훈은 무안한 듯 제 볼을 긁적이며 딴청을 피웠다. 본인도 본인의 바뀐 모습이 무안하겠지. 더 놀리려다 정말 삐질 것 같아서 그냥 웃고 말았다.
“너 개과천선했구나. 시훈아.”
“보통 이런 걸 두고 개과천선했다고 하진 않는데.”
“어쨌거나 난 이편이 좋아. 특별하지 않고 평범한 것.”
“그게 재미있어?”
“넌 너무 자극적인 걸 좋아해. 좀 과한 것 같아.”
“흐음. 그렇게 보이는구나.”
본인의 과함을 7년 만에 알았다는 것도 놀랍다.
딱히 잔소리하기도 뭣해 눈앞에 흔들리는 여름빛 풀들과, 천천히 바다로 흘러가는 강물에 시선을 돌렸다.
춤을 추듯 위로 봉긋하게 솟았다 아래로 호선을 그리며 떨어지는 물결들을 멍하니 보고 있노라니 묘하게 땅 아래가 붕 뜨고 묘한 느낌이 들었다. 꼭 저 강물이 나를 부르는 것 같이.
“물 너무 오래 보고 있으면 안 된다던데.”
마침 내 속마음을 꿰뚫기라도 한 듯 시훈이 불쑥 입을 열었다. 갑작스러운 음성에 놀란 나는 어깨를 움찔하며 옆으로 물러났다.
“…왜, 왜?”
“물귀신이 잡아간대.”
“…무슨. 세상에 귀신이 어디 있어.”
“몰라?”
“다- 지어낸 이야기야. 그렇게 따지면 풀 귀신, 땅 귀신, 공기 귀신도 있겠다.”
“어? 어떻게 알았어? 세상 만물에는 다 귀신이 있대. 우리를 지켜 주기도 하고, 기분 나쁘면 해하기도 하고. 항상 우리 곁에 있다던데.”
“…어휴.”
정말이지, 애도 아니고 말도 안 되는 유치한 낭설에 현혹되어서는 나까지 혼란스럽게 만들다니. 이건 또 7년 전이랑 지금이랑 다를 게 없다.
“넌 언제 철들래.”
정말, 진심을 다해서 물었다.
“남자가 철들면 죽을 때가 다 된 거라던데.”
하지만 전혀 타격이 없었나 보다.
그냥 웃었다. 이런 시시껄렁한 농담에 또 아무렇지 않게 풀어지는 우리가 우습고 또 좋아서.
우리의 7년이라는 시간은 늘 사랑이 충만하고 아름답지만은 않았다. 상대방이 내 기준에 맞지 않으면 맞춰주길 바랐고, 입 밖으로 내지 않을 사소한 일이 하나둘 쌓여 분기별로 크게 싸우곤 했다.
나는 소심한 성격이지만 막상 화가 나면 앞뒤 가리지 않고 무식하게 달려든다. 권시훈 또한 오래 참았다가 터지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때문에 다툼이 생기면 서로의 감정을 끝까지 건드리고 서로의 상처를 후벼 파는 말을 서슴지 않다가, 막상 돌아서서 저지른 짓을 복기해 보면 경솔하기 짝이 없어 몰래 머리를 쥐어뜯곤 했다.
갈등은 잠시였지만 후회는 온종일 이어졌다. 싸우고 난 그날 밤에는 불안감에 떨며 잠을 설치거나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고는 했다. 왜냐하면, 불안해서. 밤이 지나고 아침이 되면 내 옆자리가 차갑게 식어 있을까 봐.
‘윤진아.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그러니까 이제 화 풀어 응?’
냉전은 오래가지 않았다. 박윤진이 제 감정을 이기지 못해 입을 다물면 권시훈은 대화가 단절되는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먼저 손을 내밀었다.
그렇게 못 이기는 척, 우리는 다시 서로의 손을 잡을 수 있었다.
모난 돌끼리 만나 7년을 부대끼니 겨우 둥글게 변했다. 그 긴 시간 동안 우리는 서로에 대해 본인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이라 믿어 의심치 않게 되었다.
“…윤진아.”
“응.”
“나 돌아갈 수 있겠지.”
“…글쎄.”
“모르겠다는 거지.”
“내가 확신할 수 없는 문제를 아는 것처럼 말할 수는 없잖아. 그건 거짓말인데.”
시훈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입꼬리에 맺힌 씁쓸한 미소가 슬퍼 보였다. 가슴 한쪽이 먹먹해지며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그의 불안을 내가 어찌 해 줄 수 없다는 상실감이 밀물처럼 몰려들었다.
괜한 말을 해서 내 연인을 슬프게 했나 싶어 손을 뻗어 시훈의 손등 위에 내 손을 얹으며 꼭 잡았다.
시훈은 내게 잡힌 손을 한참 동안이나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이 일 끝나면 윤진아.”
“…….”
“결혼, 진지하게 생각해 주면 안 될까?”
다시, 또 그 이야기. 이 상황에서 가당키나 한 이야기냐고 화를 내려 했지만, 시훈의 이어지는 말에 그만 말문이 막혀버리고 말았다.
“불안해서 널 묶어두려는 것도 맞고, 그게 내 이기심인 것도 알아.”
“…….”
“그렇지만… 윤진아. 난 너 없으면 죽어.”
“…….”
“나 살고 싶어. 정말.”
아, 너는 왜 이렇게 나를 가슴 아프게 해.
안타깝고 애처로워 손을 뻗었다. 열이 올라 뜨거운 뺨을 감싸자 내 손이 닿은 쪽으로 고개를 기울이며 눈꺼풀을 스르르 닫았다.
손바닥에 닿은 피부가 퍼석하고 까칠했다. 눈물이 날 것 같아 고개를 치켜들고 깊게 심호흡했다.
하지만 이미 터져 버린 슬픔 때문에 내 숨은 볼품 없이 떨리고 있었다.
“윤진아. 나 때문에 울지 마.”
“울면, 떠날 거야?”
“아니.”
뺨을 감싼 손 위로 시훈의 손이 겹쳐졌다. 마주 바라보니 그는 눈꺼풀을 내려 겹쳐진 두 사람의 손을 가만 바라본 채였다.
“싫다 해도 놓아주지 않을 거야.”
손을 내리곤 손목의 안쪽 피부를 엄지손가락으로 살살 매만진다.
시훈의 눈이 나를 응시했다. 길고 새까만 속눈썹이 눈동자 위로 드리워 감았다 뜰 때마다 밤빛 눈동자에 별처럼 물이 차올라 내 슬픈 얼굴이 희미하게 비쳤다.
시훈은 천천히 나를 끌어안아 주었다.
“윤진아. 사랑해.”
“…나도. 사랑해. 시훈아.”
우리, 제발 이 시간이 지나고 많은 역경이 있더라도 그대로이길.
나의 시간, 나의 우주를 다 쏟아서라도 너를 지키고 싶은 내 마음은 모르더라도, 너는 나의 연인이자 가족이기에 아끼고 또 아끼는 마음만은 알아주길 간절히 바라고 또 바랬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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