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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쪽같은 내 남친-49화 (49/85)

49화

권시훈과 나는 하루에 한 번, 현재 금주고의 보건 선생으로 위장 잠입한 오형석 연구원이 상주하고 있는 보건실에서 학교에서의 생활과 신체적인 변화를 보고한다.

권시훈의 신체 계측 이후에는 내가 수업 중이나 일과 중에 틈틈이 적은 모니터링 시트를 검토하고 그에 관련된 몇 가지 질문을 한다. 매일 하는 일이라 특별한 변화는 없었지만, 원래 연구라는 게 아주 미세한 변화도 놓치면 안 되니, 과학자들에게는 아주 중요한 일이다.

물론, 권시훈은 왜 매일 똑같은 짓을 반복해야 하냐고 성질을 냈지만.

“오늘도 수-고 하셨습니다.”

“형석… 쌤도 고생하셨습니다.”

시훈은 부캐와 본체가 혼동을 일으킨 듯 더듬대며 감사를 표한 후 고개를 까딱 숙여 보였다. 묵례도 아니고 뭣도 아닌 이상한 인사였지만 오형석은 꽤 기꺼운 듯 껄껄 웃으며 자연스럽게 옆에 앉은 나에게 보고서 뭉치를 넘겨주었다.

“이걸 날 왜 줍니까?”

당연한 질문이었는데 오형석은 왜 그런 질문을 하냐는 듯 언짢은 얼굴로 나를 째려보았다.

“거, 박사님. 인간적으로 이렇게 분량이 많으면 같이 검토 좀 합시다. 혼자 하려면 퇴근 전까지 보지도 못해요.”

“그건 그쪽 사정이지.”

“아아아. 제발요. 제발! 박사님. 제발!”

“아이고. 시끄러워!!”

결국, 오형석의 성화에 이기지 못하고 책상에 마주 앉았다.

연구소에서는 랩실에만 틀어박혀 있고, 학교에서는 보건실에만 틀어박혀 있어 입을 열 일이 없으니 기회가 생겼다 하면 따발총이 되는가 보다. 이해하고 싶어도 화자는 청자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 데시벨로 말하니, 거짓말이 아니고 귀청이 떨어져 나갈 것 같다.

“저기, 나한테 볼일 끝났으면 나가도 되지?”

나와 오형석이 서류를 검토하는 시간이 길어질 것 같아 보이니 여태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던 권시훈의 엉덩이가 들썩이기 시작했다.

“점심시간 얼마 안 남았는데 어딜 가려고.”

그래. 오래 버텼지.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지만, 기특하다는 티를 냈다간 헤벌쭉 웃으며 뒤도 안 돌아보고 뛰어나갈 게 뻔해서-그 웃는 게 왜 그리 얄미워 보이던지- 괜히 표정을 굳히고 물었다.

하지만 이미 정신이 운동장으로 떠나버린 권시훈은 내 표정 변화 따위는 전혀 보이지 않는 듯했다.

“밖에.”

“곧 수업 시작인 건 알지?”

“어차피 5교시 체육이라 먼저 나가 있으려고.”

“지금 뛰고 5교시 때 또 뛴다고? 이 더위에 대단하다.”

“아, 됐고. 나가도 되지?”

“말린다고 안 갈 거니?”

“역시 자기는 날 사랑하는 게 틀림없어. 그럼 난 간다. 이따 봐!”

얼마나 마음이 급했으면 대충 손을 흔들더니 부리나케 복도 밖으로 뛰어나가 버렸다.

콰앙.

“에휴.”

부서져라 닫힌 문짝을 황망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초딩도 저것보다는 참을성이 좋지 싶다. 물론 초딩 권시훈 어린이는 제외하고.

“흐음….”

오형석은 무언가 겸연쩍은 듯 홀로 중얼거렸다. 이 사람은 또 왜 이러나 싶어서 보고서를 넘기다 말고 옆을 돌아보았다.

“뭡니까. 그 꿍꿍이 있는 표정은?”

“꿍꿍이라뇨. 시훈 씨 상태가 심상찮은 것 같아서 생각 좀 하고 있었던 것뿐입니다.”

“…네?”

네? 라고 되물었지만, 오형석은 미간을 찌푸린 채 ‘이건 아닌데…’라는 말만 반복했다. 뭐가 아닌데? 내가 보기엔 너무나 어제 그대로인데? 대체 뭐가 다르다는 거지?

“오형석 씨. 어떤 문제인지 알아야 저도 대처를 할 것 아닙니까? 뭔데요.”

답답한 마음에 슬쩍 짜증을 내비치자 염불 외우듯 홀로 중얼거리던 오형석은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아아. 아무래도 시훈 씨 성장검사를 다시 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

“성장검사라뇨? 무슨 문제 있습니까?”

“제가 보기에는… 물론 추측이지만 성장이 좀 더딘 것 같아서요.”

“일반적인 청소년도 지금쯤이라면 성장이 멈춰가는 시기 아닙니까? 특별할 건 없어 보이는데.”

“시훈 씨의 경우에는 조금 다르죠. 저희 예상대로라면 지금쯤은 원래 시훈 씨의 나이의 특성이 나타나야 하는데 어느 순간 아예 성장이 멈춰버려서 18세 상태 그대로입니다.”

“멈췄다고요? 그게 언제부터입니까?”

“정확히 추적하려면 시간이 좀 걸려요… 뭐, 부작용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고. 생체리듬이 원활하지 않은 건 분명하니 일단 검사부터 하는 게 좋겠어요.”

이미 고등학교 때 모든 성장이 멈췄던 나로서는 신체나이 18살이 성장이 멈췄다는 데이터가 얼마나 큰일인지 피부로 와닿지 않아 그저 입술을 내밀고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러면 그다음은 어떻게 됩니까?”

“저도 모르죠.”

“…아는 게 뭡니까 대체.”

“이게 처음이니까 뭐라 확신할 수 있는 게 없어요. 잘 아시는 분이 왜 이러실까.”

“불안감 조성하는 건 오형석 씨 쪽이거든요?”

“에이. 성공이야 무조건이죠. 불안해할 필요 없습니다.”

알기야 알지. 아는데 걱정되는 걸 어쩌라는 거야.

‘YOUNG’ 프로젝트의 수장에게 개인적인 원한이 있다 뿐이지, 과학자로서의 시선으로 본다면 이 프로젝트는 성공할 수밖에 없는 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었다. 김태준이 이를 갈고 섭외한 유능한 연구진, 쏟아지는 지원, 그리고 혹시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했을 때 수습해 줄 든든한 뒷배까지. 물론 이 모든 건 권시훈이 휘말리지 않았다면 관심조차 두지 않았을 테다.

이게 문제다. 내 가장 소중한 사람이 이 프로젝트의 유일무이한 임상 대상이라는 것. 제아무리 날고 기는 천재 과학자라도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에게 제가 만든 약을 먹여보라고 하면 망설이게 되는 게 당연하잖아. 혹여 순간의 잘못된 판단 때문에 내 손으로 내 사람을 해치는 꼴이 될까 봐.

“저도 제 애인이 걸린 문제만 아니라면 오형석 씨처럼 말할 수 있겠네요.”

“…아이고, 제가 말을 생각 없이 했네요. 죄송합니다.”

“사과 듣자고 꺼낸 말 아닙니다.”

“크흠.”

분위기가 싸해지니 오형석은 괜히 차트를 뒤적였다.

“흠, 흠. 죄송합니다만 박사님. 질문 하나만 더 해도 될까요?”

싫다 해도 물어볼 거면서, 그리고 내가 답하지 않을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 꼭 저렇게 물어보네. 재수 없는 놈.

“네. 하세요.”

“오! 감사합니다.”

떨떠름하게 수락했더니 금세 쩔쩔매던 기색을 거두고 신이나 눈을 반짝이며 내 쪽으로 바짝 붙어 앉는다. 으휴, 단순하기는. 이놈이나 저놈이나 다 똑같아. 한숨을 푹 내쉬면서도 옆으로 비켜 앉으며 자리를 내어주었다.

“최근에 시훈 씨에게 이상한 점 못 느꼈습니까? 행동을 평소와 다르게 한다든가, 외모 변화라든가.”

“이상한 점이요? 별로 특별할 건 없었는데.”

“그래도 저 같은 생면부지 남이 보는 것 보다, 애인만이 느낄 수 있는 차이점 같은 게 있을 거 아닙니까.”

오형석의 물음에 나는 근래 시훈의 행동을 되짚어 보았다. 하지만 대답하려 머리를 굴려보아도 딱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어, 일단 생각나는 건 컨셉질이 점점 과해지고 있는 것?”

“그건 그냥 원래 성격이고요.”

권시훈이 지독한 컨셉러에 연기 중독인 걸 오형석도 알아버린 모양이다. 가만있어 보자. 본인에게 취해 정신 못 차리는 것 말고 또 뭐가 있었지.

“아… 최근에 운동에 좀 심하게 집착하는 것 같은데.”

“운동? 단순히 몸을 움직이는 겁니까? 아니면 스포츠?”

“둘 다인 것 같은데.”

권시훈은 본 성격이 부지런하고 집에서도 한시도 쉬지 않을 만큼 기운이 넘치는 사람이다.

그리고 워낙 운동을 좋아해서 어른일 때도 틈만 나면 운동장을 뛰거나 헬스장, 수영장, 테니스장 등등 각종 스포츠를 섭렵하곤 했다. 그 열정은 18세로 회춘하고 나니 더욱 들끓어 올라, 고등학교에 재입학하자마자 저와 비슷한 신체구조를 가지고 있는 놈들을 모아 놓고 하루가 멀다고 공을 차고 다녔다.

“방금도 봤잖아요. 축구 해야 한다고 만사 제쳐놓고 달려 나가는 거. 원체 운동을 좋아해서 그냥 그러려니 하긴 하는데 학교 오고 좀 심해진 것 같아요. 꼭 못 뛰면 죽는 병 걸린 사람처럼.”

“하긴. 어지간히 급해 보이긴 하던데….”

“아, 그러고 보니 집에 있다가 난데없이 밖으로 뛰어나갈 때도 많습니다. 뭐, 몸이 간지럽다나.”

간지럽다는 말에 오형석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간지럽다고요?”

“네. 안에서 뭐가 기어 다니는 것 같다는데 뛰면 좀 낫다고 하더라고요. 전 그냥 성장통 같은 건가 보다… 했는데. 아닙니까?”

“그것만으로 판단하기는 좀 애매하긴 한데. 예상과는 다른 경우긴 하네요.”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보통 열여덟의 나이에 성장통이 오는 경우는 많지는 않겠네.”

“사람마다 다르긴 하니까. 아직은 모든 게 가설일 뿐이니 일단 더 지켜보는 수밖에 없겠네요. 성장검사는 일정 잡히면 알려 드리겠습니다.”

“하아. 뭐 하나 쉬운 게 없네.”

뭐든 처음이 이래서 힘든 거다. 아는 게 없으니 무엇을 해야 할지도 모르고 맨땅에 해딩해가며 삽질하고 막상 결과는 복불복이라 마냥 지켜보는 수밖에 없다.

아무런 정보가 없으니 둘이 머리를 맞대도 뾰족한 수가 나오지 않았다. 일단은 내일을 기약하며 오형석에게 인사를 건네고 보건실을 나섰다.

“후우. 답답하네.”

습관적으로 한숨이 나온다. 명치에 뭐가 걸린 것같이 갑갑하고 불편하다.

명쾌하게 ‘언제, 어디서, 어떻게.’ 원래대로 돌아온다는 확신이라도 있으면 좀 나을 것 같은데, 이건 뭐 복권도 아니고 까봐야 안다는 게 너무 짜증이 났다.

“하… 다 때려치우고 싶다. 씨이바….”

“윤진아.”

막 욕설을 뱉으려 했던 그때, 문 옆에서 누군가가 내 이름을 불렀다. 당황한 나는 다급히 입을 틀어막으며 주춤 물러났다.

“규, 규하야.”

김규하가 보건실 문 옆 벽에 몸을 비스듬히 기댄 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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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쪽같은 내 남친

한가린 장편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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