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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쪽같은 내 남친-50화 (50/85)

50화

“윤진아. 어디 아파? 한참 기다려도 안 나오길래 들어가 볼까 했는데.”

“아, 아니야. 괜찮아. 나 기다렸어?”

“응… 갑자기 말도 없이 사라지길래 무슨 일 있나 싶어서. 이제 체육이라 옷도 갈아입어야 하는데 불러도 대답도 않고, 혹시 어디 아픈 거 아닌가, 이제 좀 걱정이 돼서 따라왔는데. 아, 절대 스토커 짓을 한 건 아니고….”

그냥 걱정되어서 따라왔다고 하면 될 걸 참 길게도 늘여서 말한다. 정말 괜찮다고, 그만하라고 말리려다가 우물우물 움직이는 입술 모양이 귀여워 모른 척 규하의 변명을 감상했다. 키도 덩치도 나보다 한참이나 큰 남자애가 내 앞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있으니 뭐랄까. 좀 우쭐한 기분도 드는 것 같고.

“나 안 아파. 보건 쌤이랑 이야기할 게 있어서 잠깐 들른 거야.”

“왜? 보건 쌤이 너한테 뭐라고 했어? 네가 뭘 잘못했다고 여기까지 불러서 훈계질인데?”

“으, 응?”

“생긴 것도 마음에 안 들었는데 하는 짓도 사이코 같네. 요즘 학생 불러다 꼰대질하면 범죄인 거 모르나.”

“아니, 이야기가 왜 그렇게… 아니야. 그런 거. 상담할 게 있어서 내가 먼저 찾아간 거야.”

“상담?”

“응. 그런 게 있어. 그러니까 이제 그만.”

내가 제지하니 규하는 머쓱한 듯 제 뒷목을 긁적였다. 저렇게 세게 긁으면 상처 생길 텐데. 문득 규하의 목덜미의 생채기들이 떠올랐다. 하지만 굳이 묻지는 않았다.

“그런데 규하 넌 왜 옷도 안 갈아입고 있어. 체육이라며.”

“아, 그냥 오늘은 너랑 구경하려고.”

“응? 나랑?”

“벌써 수업시간도 많이 지났고, 너 더운 거 싫어하잖아.”

수업시간이 지난 것과 내가 더위에 약한 게 무슨 상관관계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규하는 체육수업에 참여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그냥 오늘은 나랑 놀자. 혼자 있으면 심심하잖아.”

아무래도 체육 시간마다 내가 혼자 그늘에 앉아 있는 게 영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권시훈 행동 양식 관찰 겸, 병약 미소년 컨셉에 충실하기 위해 일부러 몸 움직이는 활동에는 참여하지 않은 건데 본의 아니게 규하가 오해해 버렸네. 이유를 사실대로 말해 줄 수는 없고, 그렇다고 거짓말을 하기엔 양심에 찔려서 그냥 웃어 보였다.

“심심하지 않은데. 애들 구경하다 보면 시간 금방 가. 정 지루하면 책 읽어도 되고.”

“혼자 있는 것보다 누구라도 같이 있는 게 낫잖아.”

규하는 시원하게 미소 지으며 나를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나는 웃지 못했다. 단 한 번도, 혼자 남겨졌다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었는데, 규하의 한마디에 홀로 앉아 있어야 하는 한 시간이 어쩐지 허전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거슬리게 안 할게. 옆에 앉아 있게만 해 줘.”

“…….”

“응?”

“알았어.”

내 옆에 있는 게 뭐라고. 기껏해야 망부석처럼 자리 지키고 있는 게 다일 텐데.

“나갈까?”

대답할 새도 없이 규하는 내 손목을 잡아 쥐고는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손목에 닿은 규하의 손이 뜨끈했다. 아마 에어컨도 나오지 않는 복도에서 꽤나 오랜 시간 동안 나를 기다린 모양이었다.

* * *

“야! 이쪽으로 패스해!”

“그대로 뚫어! 그냥 달리라고!”

규하와 나는 나란히 스탠드에 앉아 권시훈과 아이들이 축구 하는 것을 구경했다.

“이 뙤약볕에 덥지도 않나. 다들 열심히도 뛰어다니네.”

혼잣말을 중얼거리자 규하가 나를 슬쩍 내려다보더니 나와 같은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게.”

“신기해. 쟤들 점심시간 내내 뛰던 애들이잖아. 왜 하나도 지쳐 보이질 않을까?”

“그러게?”

아, 맞다. 너도 쟤들이랑 동갑이지. 돌을 씹다 못해 쇠도 씹어먹을 나이.

“규하 넌 운동하는 거 안 좋아해?”

“자기랑 있는 게 더 좋지.”

“…아니. 농담하지 말고.”

“진짠데.”

“…….”

표정이 진지한 걸 보니 거짓말은 아닌 것 같은데 말도 안 되는 대답인지라 무시하고 고개를 돌려 버렸다.

“미안. 농담이야.”

1분도 지나지 않아 바로 사과할 거면서 왜 농담을 할까.

“윤진아아. 화났어? 미안해. 화내지 마. 응?”

얄미워 눈을 흘기니 눈썹을 추욱 늘어트리고 내 눈치를 슬쩍슬쩍 살핀다. 그 모습이 꼭 강아지 같아 속으로 웃음을 삼키며 규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화 안 났어. 네가 자꾸 장난치니까 나도 장난친 거야.”

“으응.”

“에고. 놀랐구나. 미안해.”

“아니야. 미안한 건 내가 미안하지. 미안해애, 윤진아.”

“알았어….”

내 기분이 풀린 것 같으니 규하는 얼른 내 옆에 붙어 앉아 팔짱을 끼고 어깨에 머리를 대고 부벼댔다. 딱히 뿌리칠 이유는 없어 그냥 하는 대로 두었다.

작열하는 태양 볕에 아이들이 발을 내디딜 때마다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저런 모래는 어디서 오는 걸까? 그래도 학교로 들어오는 건데 안 좋은 성분들은 어느 정도 걸러냈겠지? 하지만 역시 저런 흙먼지는 분명 폐에 안 좋을 거야. 간만에 과학자스러운 생각을 하며 눈으로는 권시훈을 쫓았다.

그때, 머리 아래로 규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윤진아.”

“…왜.”

“웃어 봐.”

“뭐?”

갑자기? 당황해 규하를 내려다보았다.

순간 나를 올려다보는 눈이 너무 커서 움찔 놀랐다.

“이렇게.”

내 표정이 굳어 있으니 친절히 예시도 들어준다. 선이 굵고 날카로워 보이는 얼굴이 단번에 순둥하고 무해한 얼굴로 변하는 모습은 언제봐도 적응이 되지 않는다.

“넌 웃는 게 예뻐. 보면 기분 좋아져.”

“…고마워. 그런데 좀 민망하다.”

“왜. 사실인데.”

고맙긴 한데 맥락 없이 웃으라고 하니 입꼬리가 움직이지 않아 이상한 얼굴이 되어버렸다.

“시훈이랑 있을 때만 웃어주니까 서운해서 그래.”

“내가 그랬나.”

“불공평해. 너 좋아하는 마음은 나도 권시훈이랑 똑같은데.”

그야 시훈이랑 있으면 마음이 편하니까. 그 아이는 내 연인이니까. 속의 말을 삼키며 그냥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규하도 딱히 내 대답을 기다렸던 건 아니었던 듯 아무 말이 없었다.

“…….”

덥다.

운동장을 매운 남자아이들의 외침이 간간이 들리고, 더운 바람이 나와 규하 사이를 파고들어 어깨에 닿은 머리칼을 흩트렸다. 얇은 셔츠 위로 부드러운 감촉이 스치니 팔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규하의 손이 팔 안쪽을 쓸어내리는 게 느껴졌지만 내려다보았다 눈이라도 마주치면 민망할까 봐 애써 시훈을 열심히 쫓았다.

시훈이 웃는다. 해사한, 너무도 싱그러운 소년의 웃음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시훈은 요 몇 년간 본 모습 중 가장 밝아 보였다. 등줄기가 축축하게 젖었는데도 흘러내리는 땀을 닦을 생각도 없이, 마치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운동장을 종횡무진했다. 티셔츠 사이로 드러난 시훈의 팔은 태양 빛에 반사되어 하얗게 빛이 났다. 본래 타고나길 하얗게 태어난 모양이다.

“윤진아. 재밌어?”

멍하니 시훈을 향하던 시야 사이에 불쑥 규하가 비집고 들어왔다.

가까이서 본 김규하는 권시훈보다는 선이 조금 굵은 얼굴을 가진, 소년보다는 청년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아직 면도가 서툴러 중간중간 수염 자국이 있는 턱조차도 마초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열여덟의 시훈이 이른 여름에 소나기 뒤에 솟아오르는 새싹이라면 규하는, 장마 후에 훌쩍 커버려 묘목의 모습을 벗어버린 성목 같았다.

“아니. 그냥 보는 거야.”

뚫릴 것 같은 눈빛이 어쩐지 쑥스러워 슬쩍 눈을 돌렸다. 시선을 거두지 않았는지 오른쪽 뺨이 따가웠다.

“너, 너도 가서 뛰지. 난 혼자 있어도 되는데.”

“이미 늦었다니까.”

“그래도….”

“윤진아. 나 신경 써 주는 건 고마운데 지금은 그냥 네 옆에 앉아 있게 해 주는 게 내가 원하는 거거든? 그러니까 가라는 말하지 마.”

“…….”

어쩐지 대답하면 목소리가 떨릴 것 같아 입을 닫고 운동장 쪽을 바라보았다. 나는 지금 곤혹스러워 눈 둘 곳이 없는데 운동장의 권시훈은 아이들에게 손짓하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여기 좀 봐주지. 그럼 규하의 이 눈빛을 모른 척 피할 수 있을 텐데.

“너 어디 봐?”

“응?”

불현듯 내게 말을 거는 규하의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돌아보았다.

이 여름, 눈 부신 태양 아래 마주한 소년의 눈은 묘한 빛을 띠고 있었다. 마치 나를 그대로 흔적도 없이 삼켜 버릴 것같이.

“윤진아. 내가 먼저 너 보고 있었는데. 자꾸 다른 데로 눈 돌리면 내가 오해하지.”

“…무슨 오해?”

내가 되묻자 규하의 입술이 비죽 올라갔다.

“네가 생각하는 그런 오해?”

“무슨 말이야. 알아듣게 이야기해.”

“내가 너 보고 있을 때는 딴 데 보지 말라고.”

“그러니까 대체 왜?”

“질투 나잖아.”

마주친 눈동자는 여전히 나에게 똑바로 고정된 채 선연한 빛을 띠었다. 눈을 피하려 했지만, 느릿하고 낮은 톤의 목소리가 내 얼굴에 달라붙어 고개를 돌릴 수 없게 만들었다.

“지, 질투라니. 너 말이 좀 이상하다.”

“왜. 질투 나는 걸 질투 난다고 하지 그럼 뭐라 해.”

애써 모른 척, 못 본 척하며 몸을 뒤로 물렸다. 그러자 물린 거리만큼 규하가 성큼 다가왔다.

코가 맞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나와 규하의 숨이 엉켰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더운지, 분명 그늘에 앉아 있는데, 100미터 달리기를 하고 난 뒤보다 더 더운 것 같아.

물러나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 피하는 게 맞았는데 내 앞의 남자에게 압도되어 도저히 움직일 수 없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쳇바퀴 돌 듯 반복되는 대화에 짜증이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었다.

당혹스러웠다. 평소의 김규하는 피아 가리지 않고 플러팅을 해대는 박애주의자 인지라 이런 류의 말은 지겹게 들어왔지만, 이번만큼은 어쩐지 농담 같지 않았다. 그런데 어째서? 이해할 수 없었다.

“김규하. 너 아까부터 계속 이상하게 구는데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돌려 말하지 말고 똑바로 말해.”

참다못해 규하의 눈을 똑바로 마주하며 일갈했다. 뭐가 어떻게 되었건 이 아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알아야 했다.

“윤진아.”

“…….”

“윤진아.”

몇 번이고 내 이름을 부르던 규하는 뭐라 더 말할 듯 입술을 달싹이다 이내 눈을 질끈 감고선 한숨을 내쉬었다.

딱딱해진 입술 사이에서 낮은 숨이 터져 나오더니 이윽고 일자로 굳어졌다. 투명한 듯 깊이를 알 수 없는 눈동자가 천천히 얼굴을 샅샅이 훑고 올라와 나에게 향했다.

“내가 널….”

“야!! 권시훈!!”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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