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규하가 입을 염과 동시에 누군가가 시훈의 이름을 크게 외쳤다.
“권시훈! 괜찮아?”
“야. 인마! 정신 좀 차려봐.”
“쌤! 시훈이 쓰러졌어요!”
“뭐? 야! 아까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놈이 왜 이래? 권시훈 인마, 정신 차려!”
순식간에 환호로 가득하던 운동장이 놀람과 탄식으로 소란스러워졌다. 들려오는 아이들의 외침, 어쩐지 보고 싶지 않았지만, 입술을 꽉 깨물고 규하에게 붙잡혀 있던 눈을 천천히 돌렸다.
그와 동시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방금까지 운동장을 열심히 달리고 있던 권시훈이 흙바닥에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었다.
“…아.”
너무 놀라서 말조차 나오지 않았다. 아래턱이 덜덜 떨리고 다리가 후들거려 무릎이 휘청 꺾일 뻔했다.
“윤진아! 괜찮아?”
막 옆으로 넘어가려던 때, 규하의 팔이 내 몸을 감아 안으며 부축했다. 겨우 눈만 돌려 규하를 바라보았는데 얼굴에 걱정이 가득했다.
“…으응?”
“너 넘어질 뻔했어! 알아?”
“아….”
뭐라 대답해야 하는데 입 밖으로 나오는 것이라곤 어눌한 탄식뿐이었다. 감당하기 어려운 충격을 받으면 머릿속이 하얗게 되면서 몸이 굳어버린다더니 그 말이 거짓은 아니었나 보다.
거의 규하에게 몸을 안기다시피 서서 눈만 껌벅였다. 바로 서야 하는데, 당장 권시훈에게 뛰어가야 하는데 도저히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여기 잠깐 앉자.”
내 몸을 부축한 채 운동장을 바라보던 규하는 도저히 안 되겠는지 스탠드에 나를 앉히고 그 앞에 꿇어앉아 차갑게 식은 손을 주물거리더니 내 얼굴을 걱정스럽게 올려다보았다.
“윤진아. 잠깐 혼자 있을 수 있겠어?”
“…왜?”
“내가 시훈이 괜찮은지 보고 올게.”
“아, 아니야. 내가, 내가 가야 해.”
“몸도 제대로 못 가누면서 무슨 수로 내려가려고. 금방 올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안 돼… 나 두고 가지 마. 규하야. 나 시훈이 봐야 해. 응?”
“…얼른 올게.”
일어서지도 못하는 주제에 입만 살아서 생떼를 썼다. 규하는 무거운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고는 내 앞머리를 한번 쓸어올려 주고 곧바로 스탠드를 뛰어내려 가버렸다.
“규하야. 시훈이 좀 업어. 일단 보건실로 가자.”
“갑자기 왜 쓰러진 건데? 아까까진 괜찮았잖아.”
“몰라. 이쪽으로 뛰어오다 그냥 픽 쓰러져 버렸어. 일사병 같은 건가 봐.”
“일단 들어가자.”
아이들에게 별 의미 없는 자초지종을 듣던 규하는 권시훈을 둘러업고 건물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나도 따라가야 하는데 열기에 몸이 녹아 버린 건지, 놀란 마음에 기력이 빠져 버린 건지 몸이 좀처럼 움직이지 못했다.
굴러가지 않는 머리를 억지로 돌리며 그동안의 관찰일지와 여러 가지 가설들을 대입해 보았다. 생각해야 해. 윤진아. 권시훈이 어째서 아무런 징조 없이 정신을 잃게 된 것인지 이유를 알아내야 해.
“아.”
순간, 오형석이 말했던 부작용이라는 단어가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설마.
설마는 곧 확신이 되었고, 곧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어갔다.
아, 예상도 하고 각오도 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빨리 일이 터질 거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달아나려는 의식을 애써 붙잡고 비척대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마지막 힘을 다해 보건실로 내달렸다.
제발. 시훈아. 무사해야 해.
그냥 오늘 햇빛이 유난히 강해서 잠깐 정신을 잃은 거라고, 그렇게 믿을게.
쾅!
부서질 듯 보건실 문이 열렸다. 곧이어 등에 권시훈을 둘러업은 김규하와 반 아이들, 체육 선생님 그리고 내가 차례로 뛰어들어 왔다.
“뭐, 뭐야. 오늘 여기서 모임이라도 해? 규하야. 너네 지금 수업 중 아니야?”
“선생님! 빨리요. 권시훈 좀 봐주세요.”
“…뭐?”
한잔의 커피와 함께 느긋하게 서류를 검토하던 오형석은 갑작스러운 소란에 자리에서 일어나 우리를 차례로 둘러보았다. 그러다 규하에게 업혀 있는 시훈을 발견하곤 매우 놀라 소리쳤다.
“이게 무슨 일이야!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거야? 운동장에서 사고라도 났었어?”
“아뇨. 달려가다가 갑자기 정신 잃고 쓰러져 버렸어요.”
“멀쩡하던 애가 갑자기? 아니… 왜?”
“제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
“어. 그, 그래 일단 여기에 시훈이 눕혀. 고생했다. 규하야.”
오형석이 내어준 침대에 시훈을 눕힌 규하는 그제야 허리를 펴고 가쁜 숨을 몰아쉬며 이마에 흐른 땀을 거칠게 닦아 내었다.
“나는 담임선생님께 말씀드리러 다녀올 테니까 규하랑 너희는 교실로 들어가 있어. 오 선생님. 바쁘실 텐데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어서 가 보세요.”
“네. 그럼.”
시훈이 자리에 무사히 누운 것을 확인한 체육 선생님은 규하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곤 급하게 자리를 떴다.
오형석은 여전히 놀란 기운이 가시지 않았는지 사색이 된 채로 축 늘어져 의식 없는 시훈을 이리저리 살피더니 이윽고 얼굴을 심각하게 굳혔다.
“너희들은 이제 나가봐.”
“…많이 안 좋아요?”
규하가 조심스럽게 되묻자 오형석은 무겁게 고개를 저었다.
“뒷일은 선생님이 알아서 할 테니까 너희는 가서 수업마저 듣고 규하는 교무실에 가서 시훈이 조퇴증 좀 끊어와라.”
“저도 있으면 안 돼요?”
“여기에 다 몰려 있는다고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아. 다른 전달할 거 있으면 윤진이한테 전달할 테니까 얼른 가. 얼른!”
“…알겠습니다.”
규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잠시 오형석과 나를 바라보다가 이내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문이 닫히자마자 오형석은 서랍에서 진단 키트를 꺼내와 검사를 시작했다.
“어떤 것 같습니까? 많이 안 좋은 겁니까?”
“열사병은 확실히 아니고… 약물 부작용이 맞는 것 같네요. 체온도 정상이고 열도 없는데, 혈압이 너무 떨어져 있어요. 이대로면 위험할 것 같은데.”
확실히 권시훈은 여름날에 축구 하다 쓰러진 사람치고는 땀도 많이 흘리지 않았고, 얼굴도 달아오르지 않았다. 오히려 하얗게 질려 있다고 보는 게 맞을 정도로.
“바로 연구소 들어가서 채혈하고 검사해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요?”
“여기서 의식 찾는 건 힘들어 보이고. 무슨 수를 쓰려거든 더 늦기 전에 장비 하나라도 더 있는 곳으로 이동하는 게 나아요.”
말을 함과 동시에 오형석은 빠르게 짐을 챙기며 휴대폰으로 지원인력을 호출했다.
“그럼 저도 같이 가요.”
“무슨 소리입니까. 가족도 아닌 친구가 조퇴까지 해가며 친구를 따라간다고 하면 담임선생님이 허락해 주겠어요?”
“그래도… 보호자도 필요할 거고….”
“여기서 공식적인 성인은 저 하나인 건 기억하시는 거죠? 지금 권시훈의 보호자는 오형석 선생입니다.”
맞다. 나는 현재 교복을 입은 고등학생이고 권시훈과는 피 한 방울 안 섞인 완벽한 타인이다. 권시훈을 따라갈 명분도, 이유도 만들 수 없었다.
“별문제 없을 겁니다. 일단 수업 마치고 댁에 돌아가 계세요.”
“권시훈 때문에 학교에 있는 건데, 권시훈 없으면 무슨 의미입니까.”
“상황 종료될 때까지는 현상 유지를 해야 할 거 아닙니까.”
“…….”
“만약이라는 게 있으니 조심하자는 뜻입니다.”
“…알겠습니다.”
“…걱정하지 말라 해서 걱정 안 할 것 같진 않은데, 일단 걱정 마세요. 잘 해결될 겁니다.”
그때, 마침 문이 열리고 보건실 안으로 들것을 든 두 명의 남자가 들어왔다. 운동장 밖에는 앰뷸런스가 대기 중이었고, 우리 반 아이들뿐 아니라 복도를 지나가던 학생들과 선생님들은 저들끼리 모여 웅성웅성거리고 있었다.
오형석은 그들을 못마땅한 눈으로 흘겨보았다가 몸을 숙이고 나에게만 들릴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잘 들어요. 지금 권시훈은 열사병 때문에 응급실에 가는 거고, 윤진 씨는 담임선생님께 재가 보호자로 따라가니까 걱정하지 마시라고 전해 주세요. 알겠죠?”
“정말 제가 안 가도 되겠습니까.”
“오히려 따라오는 게 방해된다고 하면 포기하겠어요?”
“…알겠습니다.”
오형석은 이후 몇 가지 주의사항을 일러두고는 권시훈과 함께 보건실을 나섰다.
“아….”
홀로 남은 나는 갑자기 몰아닥친 상황에 현기증이 일어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오형석은 괜찮다고 했지만, 괜찮을 거라 장담할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내가 잘 알고 있었다. 임상을 마치지 않은 약은 언제 어디서 문제가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나 다름없다. 혹시 잘못되더라도 아무도 책임져 주지 않고, 결국 피실험자만 모든 것을 떠안아야 할지도 몰랐다.
해서는 안 될 생각이 자꾸만 꼬리에 꼬리를 물고 따라왔다. 혹시 시훈이 잘못되기라도 하면? 나는 어떻게 하지? 내가 권시훈 없이 하루라도 살 수 있을까. 아니, 숨은 제대로 쉴 수 있을까?
아, 왜 우리에게 이런 일이 생겨서 이토록 괴롭게 만드는 건지. 하늘이 원망스럽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스스로가 너무 바보같이 느껴졌다.
“윤진아.”
눈물이 고여 거칠게 눈을 비비고 있는데 간 줄 알았던 규하가 보건실 안으로 조심스럽게 들어왔다.
“아… 흐읍. 규하야. 안 갔어?”
다급히 눈가에 맺힌 물을 닦아 내며 억지로 웃어 보였다. 그런 내 얼굴을 가만 보던 규하는 아직 정돈되지 않은 숨을 고르며 내 앞에 다가와 섰다.
“교무실 다녀왔어. 권시훈 병원 갔다고.”
“아, 내가 갔어야 했는데… 대신 말해 준 거야?”
“돌아오는데 권시훈 실려 나가는 걸 봐서.”
“고마워.”
힘없이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웃을 마음도 뭣도 없었지만 이렇게라도 웃지 않으면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트릴 것만 같았다.
“윤진아. 너 괜찮아?”
아니, 안 괜찮은 것 같은데.
“…괜찮아.”
“거짓말. 너 당장이라도 울 것 같아.”
규하는 내 어깨를 그러쥐며 허리를 숙여 나와 눈을 맞춰왔다. 다정한 시선에 나는 고개를 떨구지도, 규하와 눈을 맞추지도 못해 그냥 눈을 감아 버렸다.
가슴 어디 한 구석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운동에 환장한다고 욕할 게 아니라 한 번이라도 더 살펴봐 줄걸. 함께한 시간이 오래되어 익숙해졌다는 이유로 그동안 시훈에게 소홀했던 게 너무도 후회되었다.
“시훈이 괜찮을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
“…흐. 규하야.”
“하아, 진짜. 왜 울려고 그래. 속상하게.”
꼬맹이 주제에 네가 뭘 안다고 권시훈이 괜찮을 거래.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규하에게 쥐어진 어깨에서 뜨거운 열기가 전해져왔다.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떠 규하를 마주 바라보았다. 다정했던 눈빛은 어쩐지 처연하게 변해 있었다.
“윤진아. 네가 울면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흡. 나 안 운다니까.”
“그래. 울지 마. 괜찮을 거니까. 울지 마.”
네가 뭘 어쩐다고. 뭘 어떻게 해 줄 건데. 네가 아무리 날고 긴다 한들 시간을 돌려 시훈이 괜찮아지게 만들어 줄 수 없잖아. 라고 말해 주고 싶었지만, 입 밖으로 낼 수 없었다.
규하의 손은 너무도 뜨거웠고, 마주친 눈동자는 지나치게 깊었다. 슬펐다. 그런데 마음 한구석에서는 정말 괜찮을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일말의 기대감이 피어올랐다. 어쩌면 나는 당장 권시훈을 고칠 수 있다는 호언장담이 아닌, 그냥 다 괜찮을 거라는 위로의 한마디가 필요했는지도 모르겠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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