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진짜, 진짜 괜찮은 거지? 거짓말하는 거 아니지?”
“같은 말을 몇 번 하는 거야. 저는 괜찮다고요. 박윤진 씨.”
“안 되겠다. 내가 지금 가야겠어. 네 말로는 안심이 안 돼.”
“와 봤자 출입 안 될 거라고도 몇 번 말했던 것 같은데….”
“하. 씨…… 시훈아. 내가 미쳐버릴 것 같아서 그래.”
“우리 자기가 오빠 걱정 많이 했구나?”
“그걸 말이라고 해!”
퉁퉁 부어서 떠지지도 않은 눈을 마구 비볐다. 이래서야 가라앉기는커녕 내일 아침이 되면 아예 눈이라는 게 없어져 있을 것이다.
시훈을 보내고 오형석의 말대로 일단 교실에 돌아왔지만, 수업이 제대로 귀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꾸역꾸역 시간을 보내고
수업을 마치자마자 나를 붙잡는 규하를 뿌리치고 집으로 달려와 얼마나 울었나 모르겠다. 울어서 해결될 일도 아니었지만, 그냥 눈물이 나오는 걸 어떻게 해.
저녁도 거르고 몇 시간을 병신처럼 울고 있는데, 영상통화가 걸려왔다. 시훈이었다. 그때는 정말이지… 불구덩이 속에서 건져진 것 같은 기분이었다.
화면 속 시훈은 걱정했던 것보다 좋아 보였다. 의식을 잃은 상태로 연구소로 옮겨졌고, 몇 시간 동안 죽은 듯 있다 깨어난 지 얼마 안 되었다고 했다.
“이씨. 억울해.”
“어? 뭐가 억울해.”
“넌 왜 죽었다 살았는데도 잘생긴 건데에!”
작은 화면 속의 얼굴이 멀끔하게 잘생겨서 또 눈물이 나왔다. 무슨 상관이냐 하겠지만 한번 감정의 둑이 터지고 나니 권시훈 코끝에 콕 박힌 점도 슬퍼 보였다.
그래서 또 휴대폰을 붙잡고 꺼이꺼이 소리 내어 울었다.
“다 울었어?”
“흐읍… 아니. 아직.”
“뚝 그쳐야 내가 걱정 안 하고 얼른 나아서 가지.”
“시훈아. 나 너 없으면 못 사는 거 알지? 어디 가고 그러면 안 돼?”
“아이고….”
나이 서른둘에 이렇게 감정동요가 심할 줄 누가 알았을까. 나올 눈물도 없는데, 또 울 것 같다. 이놈의 눈물샘은 몸 안의 수분을 모두 쥐어짜려고 하는 건지 조금 잦아들었다 싶으면 금세 눈을 촉촉하게 만든다.
“나야 자기 기분 다 풀릴 때까지 기다려 줄 수 있지. 그런데 너무 많이 울었어. 몸 상할까 봐 걱정돼.”
“흐읍. 미안해.”
“안아주고 싶은데 안아 줄 수도 없고.”
“알았어….”
내가 좀 진상 같아 보일지 몰라도 어쩔 수 없다. 매일 함께 지내던 집에 혼자 있는 기분이 어떤지. 시훈 말대로 시훈이 있었다면 내가 밤새 울었더라도 내 기분이 다 풀릴 때까지 말없이 옆을 지켰을 테다. 위로의 말도, 달램도 일시적인 거라고, 그냥 울고 싶을 때는 실컷 울어야 한다고.
그런데 옆에 없잖아. 그게 문제야. 난 지금 당장 네가 필요한데 너는 왜 내 곁에 없는 건데.
시훈은 내 오열이 멈출 때까지 아무 말 없이 지켜보기만 했다. 울지 말라 달래지도 않았고, 같이 눈물 흘리지도 않았다. 그저 묵묵히 울렁거리는 내 마음이 진정될 때까지 기다렸다.
어느덧 통화 시간은 1시간이 훌쩍 넘어갔고, 기운이 다 빠져 눈물도 나오지 않을 때쯤 권시훈은 그제야 입을 열었다. 나 괜찮다고.
“오형석은… 흡, 뭐라는데?”
“뭐라 뭐라 하던데 못 알아들어서, 자기한테 따로 연락해 준대. 요는… 여기 몇 주간 있어야 할 것 같다는 거.”
“뭐? 며칠도 아니고 몇 주씩이나? 왜??”
“그건 나도 모르지… 괜찮은 것 같은데 왜 안 보내 주는 거지.”
“이 새끼들이 약을 얼마나 엉망으로 처 만들었길래 사람을 몇 주 동안 감금시켜. 내가 가만두나 봐!”
“또, 또 흥분한다.”
“흥분 안 하고 배겨?”
열이 머리꼭지를 뚫고 나올 것 같아 버럭 소리 질렀다. 화면 속 시훈이 움찔하는 게 여기까지 보였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그 새끼들은 겉만 번지르르했지 사실 사이비 돌팔이 약쟁이들이었나 보다. 역시. 김태준 개새끼 회사가 어디 가겠어. 오너가 사기꾼이니 회사도 공갈꾼 집합소구나.
“나도 그렇게 하겠다고 했어. 또 언제 이렇게 쓰러질지 모르는데 하루라도 빨리 낫는 게 좋잖아.”
“그래도….”
“나도 보고 싶지. 윤진아. 내가 더 보고 싶지.”
걱정이 가득 묻어 나오는 목소리에 또 울컥하고 말았다.
아, 당장 화면을 뚫고 들어가서 목에 매달려 안겨 버리고 싶다. 절대 안 떨어질 자신 있는데.
“조금만 참아보자. 여기서 할 것도 없으니 자주 연락할게.”
“…….”
“자기라도 나랑 놀아줘야지. 그치?”
“그거야 당연하고….”
“아, 일도 할 거야. 우리 자기 굶길 수는 없지.”
“진짜! 너 장난하니? 지금 돈이 중요해?”
“얼굴 풀고 웃으라고.”
아직은 앳된 얼굴의 열여덟 시훈이 다정한 눈빛으로 서른두 살 박윤진을 위로해 준다.
너무도 의연한 시훈의 태도에 오히려 내가 머쓱해져 버렸다. 나 지금 애-생긴 것만- 앞에서 어른답지 못하게 혼자 오버해서 징징 짜고 있던 건가. 정작 울고 싶은 사람은 내 앞의 시훈일지도 모르는데.
“알았어. 흐읍… 이제 안 울게.”
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를 휘휘 저어 눈물기를 날려버렸다. 조금 긴 내 머리카락이 뺨을 마구 때리는 우스꽝스러운 광경에 시훈은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며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았다. 다 보이거든? 얄미워 눈을 흘기니 손을 들어 입을 가려 버린다.
“흐흣. 자, 자기 머리 많이 길었네? 곧 묶이겠는데.”
“으응. 그렇더라. 요새 정신이 없어서.”
목을 반쯤 덮은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빗어 내렸다. 남들보다 머리가 빨리 길어지는 편이라 손질을 자주 하지 않으면 지저분해지는데, 최근 한꺼번에 너무 많은 일이 닥쳐오는 바람에 나를 돌볼 틈이 나지 않았다.
엄청 꼴보기 싫겠는걸. 무안해져 괜히 머리끝을 만지작거리다 걸리적거려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그러자 그 모습을 한참이나 빤히 보던 시훈이 불쑥 입을 열었다.
“자기야. 나 다 나아서 나가게 되면 소원 하나만 들어주면 안 되나?”
“뭔데?”
“그… 자기 머리 한 번만 묶어 보면 안 될까?”
“…뭐?”
아니. 난데없이 웬 머리 타령? 어이가 없어 미간을 확 찡그리고 시훈을 쳐다보니 본인도 민망한지 손가락으로 뺨을 긁적이며 슬쩍 시선을 피한다.
“그게… 옛날부터 자기가 머리 길어서 묶으면 진짜 예쁘겠다고 생각했었거든. 자기가 목이 길고 가늘어서 뒷덜미가 보이면 섹시할 것 같… 아! 알겠지만 나 변태 아닌 거 알지? 그냥 어, 취향이야. 취향.”
“…….”
침울한 분위기를 와장창 깨버리는 것도 재주라면 재주다. 나오려던 눈물도 쏙 들어가 버리고 대신 그 자리에 정색이 자리 잡았다.
정말이지… 한시라도 진지한 꼴을 못 보지. 권시훈.
“그래. 무사히 나오기만 해. 그다음에는 묶든 땋든 네 마음대로 해.”
“…어? 진짜?”
“응.”
내 대답에 시훈은 오히려 당황한 듯 눈을 크게 뜨고 되물었다. 욕이 날아올 줄 알았는데 너무 쉽게 승낙하니 놀란 모양이다.
“나 네 거잖아. 그러니까 얼른 돌아와서 네 마음대로 해.”
“와… 윤진아. 자기가 그런 말 하니까 너무….”
“너무. 뭐?”
“당장 잡아먹고 싶은데.”
“참나.”
헛웃음을 터트리며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속 깊숙하게 박혀 있던 마지막 슬픔까지 모두 토해내니 조금은 정신이 맑아지는 듯했다.
그래. 네가 돌아오기만 한다면 뭔들 못하겠어. 난 네가 없으면 아무것도 아닌데.
“뜻대로 하세요.”
내 한마디에 나의 연인은 웃음을 터트렸다.
* * *
다음 날, 다행히 눈은 뜰 수 있어 학교로 향했다. 마음 같아서는 이불 뒤집어쓰고 잠이나 자고 싶었지만, 이놈의 습관이라는 게 알람도 없는데 절로 눈을 뜨게 했다.
권시훈이 없는 학교는 나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하지만 시훈은 적어도 본인의 치료가 마무리될 때까지만 학교를 나가주었으면 좋겠다고 부탁했다. 나의 등교와 시훈의 완쾌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게 분명했지만, 그냥 모른 척 알겠다고 했다.
“윤진아. 눈이 왜 이래. 많이 울었구나?”
규하의 커다란 손이 내 눈을 덮었다. 밥 먹고 손만 컸는지 내 얼굴을 몽땅 가릴 정도로 컸다. 규하의 손에서는 옅은 담배 향이 났다.
차가운 손이 아직 부어서 뜨끈한 눈두덩에 닿자 열감과 욱신거리던 통증이 사그라졌다. 조금 편해지는 것 같아 나도 모르게 눈을 감고 어깨를 늘어뜨렸다.
“그냥 어제 좀 놀라서.”
“네 얼굴 보고 내가 더 놀랐다.”
“…왜.”
“예쁜 얼굴이 마카롱이 됐잖아. 이게 뭐야아.”
대체 마카롱 같은 얼굴은 뭘까. 되물어 보려다가 당장 울 것 같이 눈이 그렁해져서는 내 뺨을 두 손으로 감싸고 눈, 코, 입, 얼굴 곳곳을 살피는 통에 차마 입을 열 수 없었다.
“그런데 너무 세게 잡으니까 아픈데, 규하야….”
“아! 그래? 내가 힘 조절을 못 했구나. 미안.”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니 규하는 화들짝 놀라며 뺨을 감싼 손을 떼어내었다. 꼭 그럴 필요까지는 없는데… 싶어 머쓱하게 웃었더니 길게 내려온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주며 마주 웃는다.
“어제 바래다주려고 했는데 엄청 빨리 뛰어가더라. 너 육상 같은 거 했었어?”
“어, 어… 예전에 잠깐.”
“어쩐지! 달리는 품이 예사롭지 않더라니!”
그게 뭐 별거라고 규하는 환하게 웃으며 멋지다고 칭찬한다.
빤한 수에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왔다. 위로에 서툴러 괜히 수선떨다 상대방을 웃어 버리게 만드는 게 열여덟 살 김규하의 위로 방식인가 보다.
“시훈이는 괜찮아?”
“응. 그런데 당분간 학교는 쉬어야 할 것 같아.”
“…많이 안 좋은가 보네. 너무 건강해 보여서 지병 있는 줄도 몰랐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덜 놀릴걸.”
그동안 권시훈을 괴롭혔던 게 내심 양심에 걸리는지 눈썹을 아래로 축 늘어트리며 미안한 얼굴을 한다.
나는 슬쩍 아래로 떨어지는 규하의 손목 언저리를 가볍게 잡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네 잘못이 아닌데 왜 슬픈 얼굴을 해.
“다시 돌아오면 놀리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 친구잖아.”
퍽 삼촌 같은 말이었다고 생각했는데 규하는 눈치채지 못했는지 머리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응. 그래야지. 그래도 꼭 미안하다고 전해 줘.”
“당연하지.”
“진짜지?”
“알았다니까아.”
몇 번이고 전하겠다는 대답을 듣고 나서야 규하는 표정을 풀고 빙긋 웃었다. 호랑이를 닮은 스산한 눈이 한껏 접히며 순둥해지고, 시원하게 뻗은 입매가 보는 사람도 함께 미소 짓게 했다.
귀엽긴. 역시 덩치만 컸지 김규하는 아직 아기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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