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권시훈이 없는 학교생활의 빈자리는 당연하게도 김규하가 차지했다.
사소하게는 함께 점심을 먹는 것부터 조금 더 나가자면 하굣길을 함께 하는 것까지. 권시훈과 해 왔던 일상을 함께했다.
“윤진아. 어디 봐?”
“으응? 아, 나 저기 산을 좀….”
“아파트밖에 안 보이는데?”
“…….”
이제 와 낯가린다고 하면 웃을지도 모르겠지만, 잠시 잠깐 데면데면했던 것은 사실이다.
처음에는 어색해서 눈도 마주치지 못했다. 그래서 괜히 딴 곳을 쳐다보며 시선을 피하거나 급한 일이 있는 척 자리를 뜨기도 했다.
이럴 때 시훈이 있어야 하는데… 당연히 있어야 할 사람의 부재는 나를 너무도 곤란하게 했다.
사실 굳이 같이 다닐 필요는 없었다. 그런데 시훈의 부탁 겸 당부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나 없는 동안 김규하 옆에 딱 붙어 있어.’
‘웬일이야. 당장 김규하부터 멀리하라고 할 줄 알았는데?’
‘자기 혼자 있으면 내 걱정한다고 울고불고 그러다 밥도 못 먹고 잠도 못 잘 거 아냐. 걔랑 놀러도 다니고 맛있는 것도 먹으면서 기분 풀어.’
‘…….’
‘김규하 그 새끼, 썩 마음에 들진 않지만 차악이라도 선택해야지 어쩌겠어. 나랑 의리가 있으니 적어도 허튼짓은 안 하겠지.’
‘그걸 어떻게 장담해.’
‘자기야. 질투 나서 돌아버리겠는 거 겨우 참고 있는 거니까 그냥 그렇게 해 줘.’
‘…….’
‘바람 피우지는 말고.’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거기에 대고 싫으니까 네가 당장 와달라 하는 건 좀 생떼인 것 같아서 마지못해 알겠다 했다.
“윤진아아. 먼저 가버리지 말고 이야기 좀 해 봐아.”
“마, 말해.”
“너 내가 싫어지기라도 한 거야? 아니면 내가 뭐 잘못했어?”
“…아니야. 그런 거.”
“그런데 왜 나 피해? 왜 내가 안으면 밀어내고 왜 내가 말 걸면 고개 돌리는 건데!”
나의 변덕에 피해 보는 것은 당연히 규하였다. 하루아침에 영문도 모르고 팽당한 거나 다름없으니 얼마나 황당하고 기가 막혔을까.
“아, 아니. 그런 게 아니라… 그게.”
차마, 널 보면 너무 어색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할 수 없었다. 연장자의 자존심도 있고, 그리고 또….
“미안. 이제 안 그럴게.”
그냥 모르겠다. 내 성격이 이상한 탓인가보다.
객관적으로나 주관적으로나 김규하는 나쁘지 않은– 굳이 말하자면 좋은 쪽에 가까운 친구였다. 친절하고, 다정하고, 사려 깊고, 그리고 잘생겼다. 왜 잘생긴 게 좋고 나쁨을 가르는 기준이냐 묻는다면 기왕지사 눈에 보기 좋은 쪽을 선호하는 편이라 해두자. 내가 권시훈에게 홀라당 넘어간 이유도 삼할 정도는 눈이 부셔 똑바로 볼 수 없는 외모 덕이 컸으니까.
규하는 그 나이대의 아이답게 새로운 것을 좋아하고 어른이 된 지 한참이 지난 나에게는 생소한 것들을 많이 알고 있었다. 예를 들자면 새로 나온 게임이라든가, 요즘 유행하는 옷이나 음식, 장소 같은 것들. 권시훈과 셋이 다닐 때는 취향 맞는 두 사람끼리 딴 곳으로 새는 일이 많아서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지 알지 못했는데, 둘만 남고 보니 두 사람의 하교 후 일상을 알 수 있었다.
“그동안 나 집에 바래다주고 이런 데 다녔다는 거야?”
“왜? 오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어?”
“아니. 그건 아닌데… 너무 의외여서.”
하교 후 가방을 다 챙기기도 전에 손을 잡아끌기에 대체 어딜 가나 했더니 규하가 향한 곳은 학교 뒤 언덕이었다. 언덕치고는 산에 가까운 높이라 정상까지 올라가면 동네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하고 많은 장소 중에 고른 곳이, 언덕. 그 이유가 ‘경치가 좋아서’라니. 나만 고루한 취향인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두 놈도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아래 내려다보면 진짜 시원하고 좋아. 이리 와서 봐.”
“싫어. 무서워.”
“너 겁 많구나?”
난간 끝에 간당하게 기대 있는 네가 겁 없는 게 아닐까.
여름 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즐거워하는 규하의 뒤에 멀거니 서서, 바람에 날려 눈을 찌르는 머리칼을 대충 쓸어올렸다.
다리 아파. 운전해 다니는 게 익숙해져서 걷는 게 습관이 되어 있지 않아, 언덕 조금 올랐다고 허벅지가 욱신거리고 목에서 피 맛이 났다. 거기에 온몸에 흐르는 땀은 덤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이렇게 높은 곳은 차를 가지고 왔어야지! 라고 역정을 내거나 당장 택시를 부르고 싶었지만, 망할 고등학생 롤 때문에 어금니를 깨물고 고통을 참았다.
“아, 덥구나. 부채질해 줄게.”
참다못해 셔츠 아랫단을 펄럭이며 땀을 식히고 있는데 규하가 다가와 손부채질을 해 주었다. 나는 힘들어 죽겠는데 쟤는 뭐가 그리 좋은지 내가 흘겨보아도 만면에 웃음기가 가득했다.
“시훈이는 그렇다 치더라도… 네가 이런 곳에 시간 내서 올 줄은 몰랐어.”
“시훈이는 되는데 나는 안 되는 이유라도 있어?”
“어. 그게… 시훈이는 나랑 오래 같이 다녀서 알게 모르게 취향이 비슷하거든. 좀 조용하고 정적이고… 그런 거.”
“그런데?”
“너는 좀 더 재미있는 걸 좋아한다고 생각했지.”
“흐음.”
내 말에 딱히 오류는 없었는데 규하의 한쪽 눈썹이 삐딱하게 올라갔다 내려왔다. 왜, 왜? 내가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니고 그냥 느낀 점을 이야기한 건데.
“나 시끄러운 거 싫어해. 애들끼리 몰려다니면서 헛짓거리하는 것도 싫고. 있는 척 잘난 척하면서 다른 애들 괴롭히는 건 더더욱 취향 아니고.”
“그건… 알지. 그래도 그런 거 있잖아. 고등학생이라면 좋아할 수밖에 없는 것들. 그런 데에 관심 없다니 신기해서.”
“너는 꼭 고등학생 아닌 것처럼 말한다?”
아. 망했다.
더위에 정신 줄을 놓아버렸나. 어린 척해도 모자랄 판에 아저씨 같은 말투라니.
“가끔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수상하네.”
“무, 뭐?”
“너 혹시 나이 속인 거 아냐? 알고 보면 나보다 한참 나이 많고….”
“서, 설마! 그럴 리가. 상식적으로 그게 가능이나 하니? 너 괜히 사람 매도하고 그러지 말아라?”
눈을 마주치면 들켜버릴까 봐 고개를 푹 수그린 채 소심한 반항을 주억거렸다.
“…그래? 그런데 자꾸 꺼림칙하단 말이지.”
“흐읍!”
변명거리를 생각하느라 바로 코앞까지 규하가 다가온 줄도 모르고 있던 나는, 고개를 들자마자 내 앞을 떡하니 막고 있는 커다란 인영에 급하게 호흡을 들이마셨다.
당장 규하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 줄 몰라 긴장되어 바짓자락을 쥔 손가락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설마 눈치챈 건 아니겠지. 아니야. 그 한마디로 내 나이를 알아챌 정도로 기민하다면 김규하는 진작에 무슨 말을 했어도 했을 테다.
하지만 아니라 생각하면서도 긴장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 그게. 나도 그런 건 별로라서… 그래서 너랑 나랑 비슷한 점이 많구나- 싶어서. 반갑잖아. 이런 애늙은이 같은 취향이 흔한 것도 아니고. 하하… 하.”
“아아. 그래?”
“그럼. 그러엄!”
여덟 살 아이가 들어도 말도 안 된다고 코웃음을 칠 테다. 역시나 규하는 피식 실소를 터트렸다.
“아쉽네.”
“…으응?”
뺨을 툭 건드리는 손마디가 까칠해 시선을 올려 규하를 바라보았다.
“진작 알았으면 권시훈 버리고 같이 오는 거였는데.”
“걔를 왜 버리고 와. 오려면 다 같이 와야지.”
내 대답을 들은 규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눈꼬리를 가늘게 접으며 미소 지었다.
“있잖아. 윤진아. 사실대로 말하자면… 권시훈은 내 취향 아니야. 너랑 친해지고 싶어서 용기 내서 말 걸었는데, 걔가 자꾸 귀찮게 구니까 질리게 해서라도 떼어놓으려고 했었던 건데… 어쩌다 보니 친해져 버려서.”
“…….”
“아무튼 내 처음은 너였다는 거.”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여태 둘이 실컷 다녀놓고 이제 와서? 방금까지 뒷목을 뻐근하게 만들었던 긴장감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리고 황당함만 남아 미간을 구기며 규하를 노려보았다. 그런데 얘는 뭐가 그리 좋은지 실실 웃고 있었다.
“아, 윤진아. 그렇게 보지 마. 또 반할 것 같아.”
“너, 정말 농담 적당히 해!”
결국 짜증이 폭발해 버린 나는 방금 전 규하에게 내몰렸던 상황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손바닥으로 규하의 몸을 내려치기 시작했다. 이게 진짜 어른을 놀리는 데에도 정도가 있지. 해도 해도 너무하잖아.
“아아! 아파. 윤진아. 아파!”
“그러게! 왜! 사람을 놀려. 어? 자꾸 화나게 할래?”
“진심이야. 농담도 아니고. 거짓말도 아니라고!”
“뭐? 야. 이거 안 놔?”
“못 놔. 놓으면 때릴 거잖아.”
양 손목이 붙잡혀 버렸다. 당연히 벗어날 수는 없었다. 몸부림을 치다 이를 악물며 노려보아도 놓아주지 않았다.
“아, 규하야. 나 아파.”
“이제 안 때릴 거야?”
“네가 먼저 화나게 했잖아!”
“에이. 아직 덜 혼났네.”
싱긋 웃으며 잡은 손을 끌어당기자 뜨거운 열기에 달궈진 몸이 끈적하게 맞닿았다.
자연스럽게 시선이 얽혀 들어갔다. 순간, 규하의 눈에 삼켜버릴 듯한 이채가 돌았다. 그 눈빛이 너무도 위협적이어서 온몸이 굳어 움직일 수 없었다.
다리가 맥없이 풀리려 해 무의식적으로 규하의 팔을 붙잡았다. 그러자 규하는 내 허리를 한 팔로 감싸 안았다.
머릿속에서 경고등이 울리기 시작했다.
이대로는 위험하다고, 무슨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고 외쳐댔다.
“규하야. 놓아줘.”
“…….”
“응?”
왜인지 모르게 애원하게 되었다. 이럴 일이 아닌데도 더 있다가는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
“하아.”
규하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눈꺼풀을 내렸다가 다시 눈을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눈 속에는 약간의 포기와 체념이 섞여 있었다.
“진짜 이런 말 하기 싫었는데 역시 피는 못 속이나 봐. 보는 눈이 무섭도록 똑같네.”
무슨 뜻이냐 되물어 보려는데 다시 규하의 입술이 열렸다.
“기분 더러운데 어쩔 수 없다.”
살짝 새어 나오는 낮은 웃음소리와 함께 규하는 고개를 저으며 내 머리를 담백하게 쓰다듬고는 뒤로 물러나더니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나도 맥이 풀리는 것 같아 그 앞에 엉덩이를 대고 앉았다.
규하의 손길이 닿은 자리에 손을 대 보았다. 아직 체온이 남아 있어 따뜻했다. 대체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이었지만 왜인지 되물어 보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제발 이대로 모든 일이 정리될 때까지 아무도 몰라야 할 텐데. 어쩌면 규하에게는 들켜버릴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 모든 일이 끝나면 나는 규하에게 사실을 말해야 하는 걸까? 아니면 처음부터 없던 사람인 것처럼 사라져야 하는 걸까.
이것 또한 알 수 없어 입 안이 썼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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