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박윤진, 박창희 오늘 잊지 말고 미술실 청소하고 가라. 나중에 검사한다.”
수업을 모두 마친 후, 부산스러운 교실에 종례랍시고 들어온 담임은 저 한마디 하고 다시 바쁘게 교실을 나섰다. 명색이 담임인데 하루에 얼굴 비치는 시간이 1분도 안 되는 것 같다. 그렇게 시간 없으면 그냥 종례를 하지 말지. 좀 성의 없어 보이잖아.
그리고 청소? 지금 우리 집 꼬라지도 말이 아닌데 어디를 청소하라는 거야. 권시훈이 보면 엉덩이를 걷어찰 만한 상태로 며칠째 잘 살고 있는데, 별 필요도 없는 일에 기력 낭비하고 싶지 않다고.
이제 보니 담임은 항상 미술실 청소에 진심이었다. 오전에 복도에서 마주쳤을 때도, 교무실에 과제 내러 갔을 때도 청소 빼먹고 도망가면 정수리를 뜯어 놓겠다는 협박을 하며 으르렁거렸다.
미술실에 무슨 꿀이라도 발라 놓은 건지. 평소에는 자물쇠까지 걸어놓고 아무도 오가게 하지 못하는 곳에 뭘 숨겨 놓기라도 한 걸까.
비효율적이야. 학교는 역시 나랑 안 맞아. 권시훈만 아니었으면 당장 짐 싸서 도망가고 남았겠지. 교권이 이래서 땅바닥에 떨어지는 거야. 선생이 선생답게 굴어야 학교 다닐 맛이 날 거 아냐. 이 나라의 새 일꾼이 될 인재들을 돌려가며 부려 먹는데 이거야말로 인력 낭비 아니냐고.
“윤진아. 힘들면 당번 바꿔줄까?”
속으로 오만 욕을 다하며 책가방에 교과서를 쑤셔 넣고 있을 때였다. 앞자리에 앉아 있던 규하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평소에는 번뜩이지만 나를 볼 때만큼은 순둥한 눈이 되는 저 잔망스러움과 이목구비를 빚어놓은 듯한 사기급 얼굴 덕분에 기분이 바닥을 찍는데도 입가가 씰룩대며 올라가려 한다.
음, 역시 잘생겼어. 권시훈이 없어서 주변에 잘난 얼굴 볼 일이 없었는데, 규하 덕분에 주변 미남 농도가 조금 올라갔다.
“아니야. 됐어. 어차피 순서대로 돌아가는 거라 언젠가는 해야 하잖아. 대충하고 치워 버리지 뭐.”
“요즘 피곤해 보이던데. 아프다고 하지 그냥.”
“네가 하나 모르는 게 있는데 난 언제나 피곤하고 아프단다.”
알아듣게 충분히 설명한 것 같은데도 영 못마땅한 표정이다. 김규하는 뭔가 마음에 안 드는 일이 있으면 미간을 좁히고 눈을 가늘게 뜨며 나를 빤히 바라보는 버릇이 있는데 지금 딱 그 표정이다.
“왜, 또 그러니. 이번에는 뭐가 마음에 안 드셔서.”
“아냐.”
웃긴 게, 뭐가 불만인지 이야기를 해 주면 될 텐데 이유는 죽어도 말 안 한다. 다른 때는 물어보지 않아도 알아서 종알종알 제 기분을 표현하시더니 정작 물어보니 내외하네.
“그럼 끝날 때까지 기다릴게. 아니, 아니다. 그냥 같이 가자.”
“네가 같이 가서 뭐 하려고?”
“너 박창희 잘 알지도 못잖아. 걔 성질 더럽고 괴팍해서 상대하기 힘들걸?”
“괜찮다니까 그러네. 자꾸. 내가 박창희랑 수다 떨러 가는 것도 아니고, 그냥 청소하러 가는 건데 뭐가 중요해.”
“내 눈에 네가 안 보이면 불안해서 그래.”
얘가 진짜 저번부터 왜 이런데. 영화관에서도 그렇고 언덕에서도 그렇고, 계속 수수께끼 같은 말만 해서 속이 싱숭생숭했는데, 이젠 아예 대놓고 멘트를 쳐?
“너, 정말 나 좋아하니?”
“응. 여태 몰랐어. 몇 번이나 말한 것 같은데. 이쯤 말했으면 이제 좀 기억해 줘야 하는 거 아닐까.”
기가 막혀 웃음도 안 나온다. 김규하는 뭐가 좋은지 또 바보같이 헤실댄다.
“우길 걸 우겨라. 그리고 네가 하는 말은 믿을 수가 없어.”
“어?? 왜? 내가 너한테 뭐 잘못한 거라도 있어?”
“자꾸 좋아하니 뭐니, 말도 안 되는 농담으로 장난하잖아. 미안한데 그런 거 하나도 안 재밌거든?”
“장난?”
내 말에 규하는 눈을 크게 뜨고 한동안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어떻게 네가 나한테 그런 말을 할 수 있냐는 듯한 눈빛이 옆통수에 파바박 꽂혀 따가웠다.
“윤진아. 난 너한테 장난이었던 적 없는데. 아, 물론 가끔, 아주 가끔 장난치고 싶을 때는 있지만 그때 말고는 모두 진심이었어.”
안다. 눈길을 받는 당사자가 나인데 모를 리가 없지.
보고 있으면 가슴을 쿡쿡 찌를 정도로 슬퍼졌다가 몸속 어딘가가 간질거릴 정도로 다정하기도 한 눈빛을 몰랐다 하면 양심 없는 새끼 아닐까.
그래도, 이건 아니지. 아무리 네가 진심이었다고 해도 내 의사는 물어보지 않은 일방적인 마음이잖아. 어차피 네가 받으라고 손에 쥐여줘 봤자 받을 수 없어. 난 이미 권시훈 말고는 다른 누군가에게 줄 마음 따위 남아 있지 않은걸.
“설마….”
“설마 뭐….”
“혹시 너 나와 같은 마음이라 쑥스러우니까 일부러 과민반응하는 거?”
“에휴. 그냥 말을 말자.”
“어디 가?”
“청소하러 간다!”
이상한 소리 듣기 전에 얼른 도망가야지. 나는 규하의 뒷말을 더 듣지도 않고 급히 가방을 챙겨 들고 도망치듯 교실을 나섰다.
* * *
미술실은 본관과 조금 떨어진 별관건물이었다. 최근 리모델링을 마친 본관과는 다르게 세월의 흔적을 직격으로 맞은 별관은 당장 바람이라도 불면 바스러져 버릴 것처럼 낡아 있었다. 기왕 돈 들일 거면 조금 더 쓰지. 돈 쓰는 수준도 모기업의 모 전무처럼 쪼잔하다.
청소를 목적으로 반 아이들이 번갈아 들른다는 이야기만 들었지, 미술실이 어디에 붙어 있는지, 어떻게 생겼는지 전학생인 나는 전혀 알지 못했다. 박창희가 없었더라면 분명 본관 뒤뜰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 담임을 만나 머리를 쥐어박혔을 것이다. ‘한심한 놈. 그 나이가 되도록 길 하나 못 찾아!’라면서.
낡고 닳아 제 기능을 할 수 있을지 의심스러운 빗자루를 들고 터덜터덜 박창희의 뒤를 따랐다. 박창희는 오다가다 인사만 한 게 다인 ‘그냥 같은 반 애’였다. 이름도 출석부에 붙어 있어서 알았지 저 아이의 자리가 어딘지도 모른다.
고릴라같이 커다란 덩치에 제 몸의 반만 한 대걸레를 들고 앞서가는 모습이 살찐 펭귄이 뒤뚱뒤뚱 걷는 것 같아 좀 귀여워 보이기도 했다. 물론 얼굴을 보면 험상궂은 인상 때문에 식겁하겠지만.
“아오. 무슨 먼지가 이렇게 많아. 청소를 한 거야. 만 거야.”
안 쓴 지 오래됐다더니 진짜 그냥 버려두었었나 보다. 온몸의 구멍으로 들어오는 유해물질에 절로 기침이 나오려 해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구배가 맞지 않아 심하게 삐걱대는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서자 문틈에 끼어 있던 먼지가 올라오며 연기처럼 자욱하게 퍼졌다.
분명, 이건 그간 꾸준히 청소를 해 왔다던 컨디션이 아니었다.
이 새끼들 청소하라고 보내놓았더니 전부 땡땡이치고 다른 곳으로 튀어버렸구나. 요령 피우는데 급급한 불성실한 놈들 같으니. 그 말인즉슨 내 앞번호였던 권시훈과 김규하도 앞의 녀석들과 똑같은 전철을 밟았다는 것이다. 젠장.
하지만 나는 그럴 수 없지. 아무도 보는 이가 없더라도 어른답게 모범을 보여야 이다음 아이들에게 교두보가 될 테니, 내 힘이 닿는 데까지는 치워놓고 말겠어.
나는 마치 청소업체 직원에 빙의하여 오만상을 찌푸려가며 청소에 집중했다. 마스크라도 끼고 올걸. 일단 창문을 모두 열고 집기 위에 내려앉은 먼지를 털었다. 창틀에 먼지가 빡빡하게 끼어 있어 여는 데도 한참 걸렸다.
구석에 아무렇게나 처박혀 있던 빗자루를 들어 바닥을 쓸고 먼지와 쓰레기가 거둬진 자리에 대걸레를 열심히 문질렀다.
“야.”
바닥에 거의 붙기 직전까지 대걸레를 박박 문지르고 있을 때였다. 여태 한마디도 않고 있던-솔직히 도망간 줄 알았다-박창희가 불쑥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야, 박윤진.”
내가 대답이 없으니 아니꼽게 인상을 찌푸리며 다시 한번 내 이름을 불렀다. 이 새끼는 하라는 청소는 안 하고 왜 자꾸 불러제끼기만 해. 부아가 치밀어 아예 모른 척할까 하다가 차마 혼자서 이 넓은 미술실을 쓸고 닦을 용기가 나지 않아 천천히 박창희를 돌아보았다.
“왜.”
“권시훈 많이 아프냐?”
나는 순간 벙쪄 버려 눈을 느릿하게 깜박이며 박창희를 돌아보았다. 따귀 한 대 때릴 것 같은 험악한 인상으로 시훈의 안부를 걱정하다니. 뭔가 굉장히 안 어울리는데 한편으로는 고맙기도 하고, 놀랍기도 하고… 아무튼 기분이 이상했다.
“좀 안 좋아서 병원에 입원했어. 얼마 동안 학교 못 온대.”
“그래? 그런데 왜 쓰러진 거라냐?”
“이유는 나도 잘 몰라.”
“모른다고? 구라 아냐?”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너 권시훈 옆에 껌딱지처럼 붙어 다니는 거 모르는 사람도 있냐? 그 새끼 고추 몇 센티인지도 알고 있는 거 아니었어?”
안다! 그래서 부럽냐! 라고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말 잘못 했다가 뼈도 못 추릴 것 같아 그냥 입을 다물었다.
하여간 이 새끼나 저 새끼나 나만 보면 권시훈이 자동연상 되는 건지, 입 밖으로 나오는 말이 죄 권시훈 관련된 이야기뿐이다. 박창희도 권시훈의 숨어 있는 팬 이런 건가? 오늘 하루 내 안부를 물어본 애는 김규하밖에 없다.
“궁금하면 네가 직접 물어보든가….”
내 시큰둥한 대답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박창희는 아예 손에 든 대걸레까지 버려두고 내 뒤를 졸졸 쫓아다니며 질문을 쏟아부었다.
“야.”
“…왜.”
“너 권시훈이랑 사귀냐?”
그것도 예민하고 무례하기 짝이 없는 질문들만 쏙쏙 골라서.
“그걸 알아서 뭐 하게.”
“아, 맞냐고. 아니냐고.”
“아니니까 저기 걸레나 들고 하던 거나 마저 해.”
“그런데 너 말본새가 약간 그렇다? 원래 말을 좀 재수 없게 하는 편이냐?”
이게 진짜 쌍소리 내는 걸 보여 줘야 입을 닥치려나.
내 마음속에서는 한 번 더 참아야 하나, 이대로 성질을 터트려야 하나를 놓고 치열한 공방전을 펼쳤다. 하지만 그 고민은 길지 않았다. 인간이란 본디 인내심을 발휘하는 것보다는 분노를 터트리는 분출하는 데에서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때문이다.
“남이사 입에 걸레를 물었든, 쓰레기를 물었든 네가 무슨 상관인데.”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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