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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쪽같은 내 남친-57화 (57/85)

57화

단전에서부터 짜증이 솟구쳐 올라 들고 있던 빗자루를 아무 데나 집어 던져버렸다. 박창희는 내 행동에 당황했는지 눈을 끔벅이며 나와 저 멀리 굴러가 버린 빗자루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너 나랑 친해? 아는 사이야? 기껏해야 같은 교실에서 오다가다 본 게 다인 주제에 선 넘는 질문만 해대면 내가 알겠습니다. 하고 대답해 줘야 해?”

“와… 박윤진. 말 잘하네. 의외다?”

“이게 어디서 함부로 박윤진이래!”

나도 모르게 ‘어린놈이’라는 말이 튀어나올 뻔했지만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 참아내었다.

진정해. 윤진아. 아무리 화가 났더라도 기본 규칙은 지켜야지. 저 새끼와 같은 인간이 되지 않기로 하자. 넌 참을성 있는 이 시대의 어른이잖아.

깊게 심호흡했다.

고작 저 덩치 큰 꼬맹이가 뱉는 말 같지도 않은 말에 대꾸할 가치조차 없다는 것쯤은 나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박창희의 삐딱한 시선과 마주하고 있자니, 나의 진짜 학창시절 동안 지독하게도 나를 괴롭혔던 아이들의 멸시와 무시가 문득 떠올라 자꾸만 발끈하게 되고 거친 말을 뱉게 되었다.

“개어이없네. 너 지금 나한테 개기냐?”

“말 같지도 않은 걸 지껄이니 상대할 가치가 있어야 말이지.”

“하, 그런데 이 새끼가 보자 보자 하니까 끝도 없이 기어오른다?”

발끈한 박창희가 성큼 발을 뻗어 내 앞으로 다가왔다.

아, 이건 좀 위험한데. 가까이 다가온 박창희는 덩치가 거의 내 두 배만 했고 키는 김규하만큼 컸다. 요즘 고등학생들은 뭘 먹고 크길래 애들이 다 이렇게 거대해? 발육이 이렇게 사기급이어도 되는 거야?

“좀 예쁘장하게 생겨서 권시훈 없는 동안 예뻐해 주려고 했는데, 말버릇이 좀 지랄 맞네? 빡치게.”

한 걸음, 두 걸음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다 결국 벽에 등을 부딪치고 말았다.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어 당황한 나는 다급히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덩치를 비집고 나갈 틈 따위는 보이지 않았고, 어쩌다 운이 좋아 밀치고 도망가더라도 금방 잡히고 말 게 뻔했다.

“뭐, 오히려 잘됐네. 난 고분고분한 것보다는 조금 반항하는 게 더 맛있더라.”

“뭐라고?”

“이제 와서 좀 새삼스러운데, 너 낭창하니 내가 꼭 한 번 어떻게 해 보고 싶었거든.”

“…너, 취향이 그런 쪽이야?”

“그런 쪽?”

“남자 좋아하냐고. 새끼야.”

“아아.”

씨익 누런 이를 드러내며 웃는데 그 모습이 너무 괴기스러워 팔과 목덜미에 소름이 좌악 돋았다.

“아니? 나 여자 좋아하는데? 그런데.”

“그런데?”

“넌 좀 궁금하더라고.”

박창희는 음흉하게 웃으며 손을 아래로 뻗어 내 엉덩이를 틀어쥐었다.

“야! 지금 뭐 하는 건데. 이거 안 놔?”

“이야. 박윤진. 너 생각보다 더 대단한데?”

인간적으로 이건 아니지. 그냥 장난인 줄 알고 좋게 넘기려 했는데 지금 이 상황은 농담으로 넘기기에는 너무 심각해져 버렸다.

“이거 완전 미친놈 아냐? 비켜! 비키라고!”

“비키라고 하면 얌전히 그만둘 것처럼 보이냐?”

그건 맞네. 쓸데없는 것에 수긍하려다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이 상기되어 한숨을 내쉬었다.

“너, 너 대체 왜 이러는 건데. 내가 뭐 잘못했어?”

“아니? 아, 죄가 있다면 예쁜 죄?”

“미친. 말 같잖은 소리를….”

어떻게든 주의를 돌려 벗어나려 했는데, 애석하게도 박창희의 눈은 이미 맛이 간 상태였다. 이대로 가다간 여기서 한참 어린놈한테 몹쓸 짓을 당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있는 힘껏 놈을 밀어내었지만, 돌기둥을 밀어내는 것 같이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만하라고 했지!”

그만하라고 아무리 외쳐봤자 무용지물이었다. 그의 손이 점차 안쪽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지금 이 장소에서, 내가 느껴서는 안 될 감각이라 박창희의 손을 억지로 뜯어내고 틈이 보이지 않도록 하체를 벽에 바짝 붙였다.

그러자 박창희의 눈에 번쩍 살기가 떠오르더니 내 양손을 한 손으로 우악스럽게 잡아채 머리 위로 바짝 올려붙였다.

“만지기만 해도 흥분되냐?”

“미친놈아. 뚫린 입에서 나오는 게 다 말인 줄 알아? 돌았어?”

“남자끼리는 여기로 한다면서? 어때?”

“미친 변태 새끼야! 닥치라고!”

“미친놈이 어디서 소리를 질러!”

짝!

날카로운 소리가 공기를 가르고 눈에 불꽃이 튀었다.

“너, 너… 너.”

“하, 더 맞기 싫으면 입 다물고 가만히 있어.”

고개가 홱 돌아갈 정도로 세게 뺨을 얻어맞았다.

눈물이 흐를 것 같았다. 아픈 것보다 저 버르장머리 없고, 한참 어린 개새끼한테 뺨을 얻어맞았다는 사실이 수치스러웠다.

“그만! 그만! 야아아! 박창희! 좀 놓아줘!”

점점 부어오르는 볼을 신경 쓸 새도 없었다. 박창희가 마구잡이로 내 몸을 더듬기 시작했다. 마치 더러운 구더기가 몸에 달라붙은 것 같았다. 박창희가 나를 더듬는 만큼 나도 박창희를 주먹으로 닥치는 대로 때렸다. 아무리 체급 차이가 난다고 하더라도 같은 남자가 온 힘을 다해서 때려대는데도 놈에게는 기별도 가지 않았다.

“아, 미친. 쪼그만 게 손 졸라 맵네.”

“허억, 그러니까… 비키라고 좀.”

“그건 안 되겠는데? 이렇게 된 거 끝을 한번 보고 싶어지는걸.”

“…뭐라고?”

이해가 단번에 되지 않아 다 갈라져 버린 목소리로 박창희에게 되물었다. 오랜 실랑이로 온몸은 땀투성이에 사지가 완전히 지쳐버려 머리가 느리게 돌아갔다. 박창희가 또다시 비열하게 웃었다.

“너 똑똑한 줄 알았는데 이해력이 좀 딸리는구나?”

“…?”

“머리가 있으면 생각이라는 걸 좀 해 봐. 이 상황에서 끝이라면 뭐겠냐?”

삐걱삐걱, 느리게 움직이던 생각은 어떤 가설에 다다랐다. 이윽고 나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 박창희의 팔을 붙들고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제발, 제발. 박창희 그만해. 누가 들어오면 어쩌려고 그래.”

“난 상관없는데? 오히려 좋은걸? 권시훈 애인이랑 잤다고 소문나면 학교에서 어깨 좀 세우고 다닐 수 있을 것 같은데?”

“아, 제발. 박창희 이건 범죄야. 해서는 안 될 행동이라고.”

내 말에 박창희는 정말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쳐들며 코웃음을 쳤다.

“씹꼰대 나셨네. 네 눈에는 내가 법 잘 지키는 모범 학생으로 보이냐? 황송해서 눈물이 다 나려고 하네.”

“이, 이건 교칙 어기는 데서 끝나는 문제가 아니야. 너도 알잖아. 요즘 학교 폭력이 얼마나….”

“아! 말 진짜 많네!”

다시 한번 박창희의 손에 내 얼굴이 팩 돌아갔다. 이번에는 흥분해 힘 조절에 실패했는지 목이 욱신거리고 다리에 힘이 풀려 볼품없이 휘청였다.

박창희의 팔 사이에 갇힌 채로 뺨을 부여잡았다. 입 안에서 비릿한 피 맛이 났지만 뱉어내지 못하고 목구멍 너머로 삼키며 눈물도 함께 참았다.

“!!!”

그때, 내 교복 셔츠가 놈의 손에 거칠게 뜯겨 나가며, 단추가 바닥에 떨어져 굴러가 자취를 감추었다.

“아, 미안. 그냥 건드려 본다는 게 뜯어져 버렸네?”

아… 이게 무슨 일이야. 허망하게 드러난 내 가슴팍을 바라보았다. 소리를 지르면 누가 들으려나. 이곳은 본관과 한참 떨어진 별관이고 청소하는 당번 2명을 제외하고는 드나드는 사람이 없다. 애석하게도 그 두 사람이 나와 박창희였다.

인간이 이토록 폭력 앞에서 약하다. 틈을 보고 있다 죽을 각오를 하고 도망 나가면 어떻게든 벗어날 수 있겠지만, 혹시 실패했을 때의 뒷일이 두려워 결국 그 앞에 굴복하고 만다.

머릿속에 본능만 남은 짐승이 되어버린 박창희를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아마 없을 테다. 반항하다가는 방금처럼 아니, 지금보다 훨씬 심하게 얻어맞을지도 모르겠다.

“너 골방에 틀어박혀서 햇빛도 안 보고 사냐? 미친 개햐얗네. 꼭 밀가루같이 하긴, 매일 입도 벙긋 안 하고 빌빌거리기만 하는 게 맥없이 멀건 거랑 잘 어울린다.”

“…….”

“권시훈이랑 김규하가 왜 너를 그렇게 싸고돌았는지 이제 알겠네.”

“…뭐?”

“남자 새끼들 생각하는 게 다 똑같지 않겠냐? 그 새끼들도 너 한번 어떻게 해 보려고 그러는 거 아냐. 그런데 어쩌나. 박윤진 뒤는 내가 먼저네?”

그냥 이렇게 당하는 수밖에 없는 건가. 힘이 다 빠져버려 박창희를 밀어내던 팔을 툭 떨구었다. 어제 너무 울어서 눈물이 안 나올 줄 알았는데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흐읍… 흐. 그만해. 제발. 그만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만하라는 말 한마디와 비참함에 눈물 흘리는 것뿐이었다.

정말이지 얼마나 바보 같은 생각이었는지. 내가 나이가 많고 내가 어른이니까, 한참 어린 학생에게 질 리 없다는 생각은 철저한 오만이었다. 누구에게나 언제든 위험은 도사리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어른임을 피력하면 꼬리 내릴 수도 있지 않을까. 아니야. 박창희의 태도를 보아서는 내가 저보다 몇 살이 많건, 하다못해 노인일지라도 힘으로 깔아뭉개고 제 맘대로 했을 것이다.

눈을 꽉 감고 입술을 깨물었다. 예의라고는 없는 거칠고 무례한 손놀림이었다. 차라리 눈을 감으면 기절해버렸으면 좋겠다. 그리고 눈을 뜨면 우리 집 침대였으면 좋겠다. 오늘 이 일이 긴 악몽이었고 절대 현실이 아니라고 누군가 말해 주었으면 했다.

시훈아, 제발 나 좀 구해 줘. 도저히 안 될 것 같아. 제발…

끼- 익 드르륵.

나무가 바닥을 긁는 듣기 싫은 문소리가 조용한 미술실에 울려 퍼졌다. 잘 열리지 않는지 몇 번 턱에 걸리는 덜컹거리는 소리가 났다가 이윽고 다시 끼이익 소리를 내며 완전히 복도와 미술실의 경계를 지워버렸다.

“윤진아아. 아직도 청소하고 있어? 얼른 가야 컵볶이 먹을 수 있는데….”

그리고, 정말 기적처럼, 문가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낮고 굵직한 저음이지만 나를 부를 때는 장난기가 가득한 아이의 목소리. 나는 눈물로 흐려진 시야를 애써 다잡으며 소리가 난 쪽을 돌아보았다.

한꺼번에 쏟아지는 오후의 햇빛을 온전히 받은 남자아이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이윽고 빛이 거둬지며 아이의 모습이 온전히 드러났다.

“…윤진아?”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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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쪽같은 내 남친

한가린 장편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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