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커다란 눈이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순간, 박창희는 그대로 굳어버렸고 나는 꾹꾹 참아왔던 눈물을 쏟고야 말았다.
“규하야….”
당장에라도 목 놓아 울어버릴 것만 같았지만 가까스로 참아내며 규하의 이름을 불렀다. 비록 내가 그토록 바라던 권시훈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반가운 얼굴이었다. 어쨌거나 김규하를 안 이래, 이토록 반가웠던 적은 단연코 없었다.
미술실 문을 열 때까지만 해도 어리둥절했던 규하의 얼굴이 빠르게 굳어갔다.
아프고 슬픈 것보다는 수치심과 민망함에 몸 둘 바를 모르겠어 도저히 규하를 똑바로 볼 수 없었다. 김규하가 딱히 눈치가 빠르지 않더라도, 이 몰골은 방금까지 여기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었는지 단번에 눈치챌 수 있을 터였다.
“김규하? 네가 왜 여기 있어?”
“…….”
전혀 의외의 인물의 등장에 박창희는 인상을 찌푸리고 규하를 노려보았다. 규하는 문가에 삐딱하게 기대어 서 있다 시선을 돌려 박창희를 텅 빈 눈으로 마주 바라보았다.
규하는 벽 한구석에 널브러져 만신창이가 된 나와, 잔뜩 흥분해 씩씩대고 있는 박창희를 번갈아 바라보더니 쯧 하고 혀를 찼다. 어떠한 말도 하지 않았다. 당연히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감정을 알 수 없는 시선이었다. 그런데 순간, 뒷목이 서늘하게 식는 느낌에 몸을 잘게 떨었다. 뭐지. 이 기분은.
규하는 이윽고 저벅저벅 빠른 걸음으로 이쪽을 향해 걸어왔다.
“야. 왜 왔냐고 묻잖아. 사람 말이 말 같지 않아?”
박창희는 짜증스러움이 가득한 목소리로 쏘아붙였지만, 규하는 아랑곳하지 않고 점점 거리를 좁히고 있었다.
김규하는 박창희와 딱 한걸음 떨어진 자리에서 멈춰 섰다. 여전히 입은 닫은 채였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박창희에게 주먹을 날렸다.
“어억!”
“김규하!”
박창희는 갑작스러운 공격에 그대로 나가떨어져 한쪽 구석에 쌓여 있는 책상 더미에 파묻혀 버렸다.
우당탕 책상 탑이 무너지는 소리가 귀를 찢을 듯이 울려 퍼지고, 미처 털어내지 못한 먼지가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커헉. 컥.”
규하는 바닥에 처박혀 끙끙대고 있는 박창희 쪽으로 걸어가 표정 없는 얼굴로 박창희의 가슴에 자비 없이 발길질해대기 시작했다.
퍽! 퍽! 퍽! 퍽!
소름 끼치게 규칙적인 소리였다.
“기, 김규하! 그만해! 미친 새끼야!”
“…….”
“야!! 그만하라고 했지!”
“미친놈아. 입 닥쳐.”
김규하는 분명 온 힘을 다해 박창희를 패고 있는데, 이상하게도 표정은 화나 보이지 않았다. 다만, 차갑게 식은 눈빛과 꽉 다문 입술에서 이따금 튀어나오는 살벌한 욕설이 지금 김규하의 분노의 크기를 반증했다.
“미친 새끼가 감히 어디 손을 대. 나도 아까워서 만져 보지도 못했는데. 버러지만도 못한 새끼가.”
“으어억. 제, 제발 그만. 그만해. 그만….”
“그만 못 해. 오늘 여기서 초상 치르게 해 줄 테니까 유언이나 남겨놔.”
“컥, 커어억.”
그만하라는 말만 앵무새처럼 반복하던 박창희의 입에서 곧 피를 토할 것 같은 기침이 미친 듯이 튀어나왔다.
“너, 너 이러고도 무사할 것 같아? 내가… 쌤한테 다 말할 거야!”
“어. 해 봐. 제발 해 줘. 선생이건 부모건 할 수 있는 만큼 떠들어봐. 누구 뒷배가 더 센지 보게.”
“이익… 켁!”
시종일관 웃는 낯에 싫은 소리 하는 법이 없던 김규하였다. 가끔 멍 때리거나 무언가에 집중할 때 나오는 무표정조차 어색하게 느껴질 만큼 잘 웃는 아이였다.
그런데 지금 내 눈앞에서 살벌한 눈으로 사정없이 발길질하는 저 사람이 동일인이라니. 도무지 믿기지도 않았고 믿고 싶지도 않았다.
“그만! 규하야! 쟤 죽겠어!”
피떡이 되어버린 박창희가 불쌍해서가 아니라 이대로라면 장기 하나쯤은 너끈하게 망가트릴 것 같아, 어디에선가 봤던 드라마처럼 규하의 허리를 붙잡고 매달렸다.
“나 괜찮아. 괜찮으니까 화내지 마. 이러다 네가 큰일 나겠어!”
“그럴 일 없으니까 비켜.”
“아, 규하야. 제발.”
“…….”
잘못한 건 없지만 죄인처럼 애원했다.
규하는 허리를 있는 힘껏 부둥켜안고 고개를 젓는 나를 한번 내려보더니, 잠시 숨을 고르고는 박창희 옆의 책상을 발로 차 넘어뜨렸다.
“아악!”
책상 더미가 제 쪽으로 무너져 내리자 박창희는 몸을 웅크려 머리를 감싸 쥐고 비명을 질렀다. 운이 좋았는지, 뭔지 책상이 몸 위로 떨어지진 않았지만, 지레 겁을 먹은 불쌍한 영혼을 그만 눈을 뒤집고 기절해버렸다.
“하아….”
기절한 박창희를 경멸 어린 시선으로 노려보던 규하는 천천히 눈을 감고선 깊게 심호흡을 했다. 숨이 부들부들 떨리는 걸 보니 어지간히도 화가 났었나 보다. 나는 너무 미안한 마음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규하는 안정을 찾으려는 듯 몇 번이나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 한참 뒤, 떨림이 잦아들 때쯤 천천히 눈을 떴다.
“왜 앞을 다 풀어헤치고 다녀. 누가 보면 어쩌려고.”
그리고 여즉 허리에 매달려 있는 나를 내려다보며 말을 건넸다.
“아, 이거….”
청소하다가 새파랗게 어린놈한테 겁탈당할 뻔했다는 이야기를 맨정신에 하기에는 내가 너무 면이 서질 않아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떨궜다.
“알았어. 굳이 말하지 않아도 돼.”
규하는 내 말을 막아버리며 고개를 저었다. 나 역시 더 말하고 싶지 않아 입을 꾹 다물고 단추가 몇 개 떨어져 후줄근해진 셔츠를 쥐어 여몄다.
“…이리 와.”
꼼질거리는 내가 영 못 미더워 보였는지 규하는 입고 있던 제 교복 셔츠를 벗어 나에게 입혀 주고 목 끝까지 꼭꼭 단추를 잠가 주었다.
“안에 뭐라도 입고 다녀.”
“오늘따라 귀찮아서. 덥기도 하고.”
사소한 생활규칙조차 어지간해서는 잊어버리지 않았는데 오늘은 이상하게 기상 시간이 늦어 버려 대충 입고 나오다가 이 사달이 나고 말았다.
권시훈이 있었다면 현관을 나서려는 걸 잡아서 기어코 티셔츠를 입혔겠지만, 지금 내 곁에는 그가 없었다.
“가자.”
티셔츠 차림이 된 규하와 한참 품이 큰 교복 셔츠를 입은 내가 함께 미술실을 나섰다.
먼지 가득한 퀴퀴한 공기에서 벗어나자, 순간 긴장이 풀려 다리가 꺾여버린 나를 규하가 어깨를 감싸 안으며 부축했다.
“윤진아. 많이 힘들어?”
단단하게 몸을 붙드는 팔 힘에 그나마 제대로 설 수 있었다. 더 이상 폐를 끼치고 싶지는 않아 무겁게 고개를 저었다.
“조금만 참자. 금방 갈 거야.”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미안하다고 하기엔 너무 죄스러워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고, 고맙다고 하기엔 부족했다. 그리고 –염치없지만, 꼭 기절까지 시킬 정도로 박창희가 잘못했느냐고도 묻고 싶었다. 하지만 그 말만큼은 절대 내가 해서는 안 되었다.
그렇게 얼기설기 얽혀 버린 마음의 실타래를 풀지 못한 채 건물 밖을 나섰다.
터벅터벅.
비틀대며 길고 긴 흙길을 지났다. 3분도 되지 않는 거리인데도 30분을 걸은 것처럼 숨이 차고 다리가 욱신거렸다.
또 한참을 걸었다. 별관이 내 눈에 보이지 않을 때쯤, 그제야 규하는 몸을 돌려 나를 마주 바라보았다.
“미안.”
“…….”
“널 혼자 보내는 게 아니었어. 느낌이 안 좋아서 가지 말라고 하고 싶었는데, 네가 할 일 미루는 거 싫어하는 거 아니까….”
“…….”
“정말 미안해. 혼자 둬서.”
어깨를 조심스럽게 매만지던 손이 천천히 위로 향해 뺨에 붙은 머리칼을 떼어준다. 눈을 들어 아이를 올려다보니, 차갑게 식은 손바닥이 잔뜩 부풀어 오른 눈과 뺨으로 가 내려앉았다. 열병이라도 난 듯 뜨거운 뺨을 감싼 규하는 눈썹을 축 늘어뜨리며, 서글픈 얼굴이 된다.
“무서웠지.”
“…규하야.”
“예쁜 얼굴 다 상했네. 어디 미친 새끼가 얼굴을 건드려.”
따뜻한 눈빛, 부드러운 손길. 나를 향한 미소. 어느새, 내가 알던 다정한 김규하로 돌아와 있었다.
방금 내가 본 게 현실이 아닌 것만 같았다.
사실, 눈이 돌아 내게 달려들던 박창희도 무서웠지만,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살벌하게 사람에게 발길질을 하던 규하도 무서웠다. 아니, 훨씬 더 무서웠다.
“규하야….”
“응. 윤진아. 어디 아파? 못 걷겠어? 안아줄까?”
“무서워….”
박창희도 무섭고, 너도 무서워. 다른 사람 같아서 소름 돋았어.
단순히 친구인 내가 당하고 있는 모습에 화가 나서였을까. 박창희라는 인간을 원래 좋아하지 않았던 것일까. 그게 아니라면, 김규하는 대체 무엇 때문에 그렇게까지 박창희를 때렸을까.
아, 어쩌면 이 아이의 진짜 모습은 내가 아는 모습이 아닐지도.
규하의 무표정은 멍하거나 집중할 때만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이따금 서늘하게 식은 눈으로 어딘가를 바라볼 때면 피곤해서 멍한가보다, 정도로 생각하고 넘겼었는데 사실은 무언가 위험한 생각을 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제 안 무서워. 무서워하지 마. 윤진아. 내가 있잖아.”
두 뺨을 커다란 손이 감쌌다. 내 눈을 덮어주었을 때처럼 시원한 기운에 얼얼하던 통증이 조금 가셔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눈을 들어 규하를 마주 바라보았다. 걱정이 가득 담긴 커다란 눈동자에 엉망이 된 내 모습이 반사되어 비쳤다.
“이제 절대 혼자 두지 않을게.”
규하는 삐딱하게 잠긴 셔츠 단추를 제대로 잠가주고는 나를 품에 끌어당겨 안았다.
옅은 담배 냄새와 먼지 냄새, 그리고 규하의 체향이 뒤섞여 엉망진창이었다.
한 번 보인 이면은 쉽게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 김규하를 볼 때마다 오늘의 살기 어린 눈이 생각날 것이고, 흡사 폐허의 모습이 된 미술실에 널브러진 박창희가 떠오를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너무 고되고 힘들다. 누군가 나를 위로해 주었으면 좋겠는데, 맨 처음 떠오른 그 사람은 내 옆에 없다.
정말, 정말 이러면 안 되지만 오늘 하루만 이 아이의 품을 빌리고 싶어, 모른 척 눈을 감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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