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시훈이….”
“시훈이? 권시훈 말하는 거야?”
“규하야. 시훈이한테는 오늘 일 말하지 말아줘.”
“아니, 왜? 걔도 알 건 알아야지. 네가 이렇게 당했는데 권시훈이 모른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
“말하지 말아줘. 제발. 응? 알면 걔 죽어. 못살아. 흐윽….”
“하, 윤진아….”
애가 닳아 걸음을 멈추고 규하의 손을 붙잡았다.
규하는 잡힌 제 손목을 잠시 내려다보다 무언가 울컥 복받쳐 오른 듯 입술을 깨물었다.
“네 옆에 있는 건 난데 넌 끝까지 권시훈 생각을.”
“규하야….”
“하아, 아니다.”
하지만 지금 제정신이 아닌 나에게 뭐라 해 봤자 아무 소용 없을 것이라 판단했는지 무겁게 고개를 저었다.
“알았어. 말 안 할게. 절대로 안 할 테니까. 울지 마.”
“고마워. 흐어어엉.”
“후우….”
집 앞에 도착할 때까지 나는 규하에게 추태를 부렸다.
규하의 손을 붙들고 울었다가, 무섭다고 보챘다가, 종국에는 현관 앞에 서서 시훈한테 말하지 말아 달라고 빌기까지 했다.
다혈질에 박윤진 일이라면 열일 젖혀두고 달려드는 권시훈이 본인이 부재중일 때 제 연인이 불미스러운 사고를 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아마 죄책감 때문에 미쳐 버릴지도 몰랐다. 그 모습만은 보고 싶지 않았다.
“권시훈 걔 성질 더러워서 박창희 죽이겠다고 칼 들고 쫓아갈 거야. 별 몇 개를 달아도 신경 쓰지 않을 거라고.”
“그 상황에서 눈이 안 돌면 정상이야? 나도 그 새끼 죽여 버리려고 했어.”
“너는 내가 말리면 내 말 들어주잖아. 걔는 돌아버리면 경주마처럼 아무것도 못 봐. 말릴 수가 없어.”
“…….”
“아, 어떻게 해. 어떻게 해. 규하야….”
“하아.”
규하는 시시각각 변하는 내 모습에 복잡한 얼굴이었지만, 인내심 있게 내 얼토당토않은 개소리를 진지하게 받아주며 괜찮다며 다독여 주고 따뜻하게 안아주었다.
“윤진아. 윤진아. 이제 그만 진정해. 권시훈 귀에 절대 안 들어가게 할 테니까. 응? 걱정될 만한 일 절대 만들지 않을게.”
“흐윽… 고마워.”
어렵게 고개를 끄덕이자, 빙긋 웃어 보인다. 왜인지 오늘만큼은 규하가 다 큰 어른으로 보였다.
한참이 지났다. 어느 정도 정신은 돌아왔지만, 여전히 떨림은 멈추지 않았다. 떠올리려 하지 않아도 입만 다물고 있으면 박창희 그 개새끼의 거친 숨소리와 게걸스럽게 내 몸을 훑어대던 눈빛이 계속 생각나서 몸이 덜덜 떨리고 눈물이 쉬이 멈추지 않았다.
“윤진아. 혼자 있을 수 있겠어? 집까지 같이 올라가 줄까?”
“아니야. 괜찮아. 혼자 갈 수 있어.”
“정말 괜찮은 거 맞아? 다리가 막 떨리고 있는데?”
규하의 말에 그제야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휘청대고 있는 내 다리가 눈에 들어왔다. 이대로라면 엘리베이터까지 어찌어찌 걸어간다고 하더라도 현관까지 가는 것을 걱정해야 할 것이다.
“아니, 안 괜찮아. 흐흑. 몸이 내 마음대로 안 돼.”
“…….”
어쩐지 서글퍼져 어깨를 늘어뜨렸다. 하다 하다 이제 내 몸도 내가 마음대로 못하는 지경에 왔구나. 그깟 거 잠시 잠깐 일어난 해프닝이라 생각하고 훌훌 털고 잊어버리면 그만인데, 어째서 떨치려 할수록 더 생각나는 건지.
“지금 잠깐 놀라서 그러는 거니까 괜찮아.”
규하의 손이 천천히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내가 어디서 봤는데 사람은 좋은 일보다 나쁜 일을 더 오래 기억한대. 하지만 더 좋은 기억으로 덮으면 된다고 그랬어.”
“흡. 누가 그래.”
“내 일기장이.”
웃기지도 않은 농담에 나도 모르게 픽 웃음이 튀어나왔다.
“어? 웃었네?”
내가 웃자, 규하도 실없이 웃었다.
“봐. 웃으니까 훨씬 예쁘잖아.”
“내가 너한테 예뻐 보이려고 웃는 줄 알아?”
“응. 그래 주면 더 좋고.”
규하는 시원하게 입매를 끌어올리며 밝게 미소 지었다.
결국, 제대로 걷지 못해 삐걱대던 나를 규하가 둘러업고 집 안까지 들어오게 되었다. 부모님과 권시훈 이외에 등에 업혀 본 일이 없는데, 외간 남자(?)의 등도 꽤 넓고 편안했다.
볼일을 끝낸 규하를 그냥 보내기가 뭣해 우물쭈물거렸다. 얘를 손님이라고 해야 할지 그냥 지나가는 사람이라 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규하는 전혀 어색함 없이 냉수 한잔을 시원하게 원샷하더니 소파에 털썩 기대앉으며 눈을 감아 버리는 것이다.
“너 진짜 안 가도 되니?”
“같은 말을 몇 번 하게 해. 괜찮다니까. 오늘 너 혼자 두는 게 걱정되어서 그래.”
“…괜찮다니까.”
“제대로 걷지도 못해 업혀 왔으면서 괜찮긴.”
“혼자 걸을 수 있었거든?”
“응. 그렇겠지.”
…나는 내 눈앞에 벌어진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어리둥절한 채로 규하를 내려다보았다. 한참이 지나도 감은 눈을 뜰 생각을 하지 않기에. ‘너 안 가니?’ 하고 물어보니, ‘응. 나 좀 재워주라.’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당연히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이 집은 이사한 이래 권시훈과 나를 제외하고는 설치 기사님들만 발을 들여놓았던 ‘권시훈과 박윤진’만의 공간이었다. 그런 곳에 난데없이 김규하라는 낯선 이가 끼어들어 올 것이라고는, 아니, 끼어들 생각을 했다는 것 자체가 나를 당황스럽게 했다.
“나 집에 사람 들이는 거 싫어해. 규하야.”
그래도 도와준 사람을 매몰차게 쫓아낼 순 없어 나름 소심하게 눈치를 주었지만 김규하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들어봐. 윤진아. 너 방금까지 나 붙잡고 무섭다고 울었지?”
“…그렇지.”
“다리 떨려서 제대로 못 걸어서 내가 업고 왔지?”
“…….”
“내가 널 두고 돌아갔어. 그런데 갑자기 집에 혼자 있는데 무서운 생각이 들어 아무것도 못 하겠는데 권시훈은 지금 올 수 없잖아. 그래서 뒤늦게 날 불러봐도 우리 집은 여기서 한 시간 넘게 걸리는데 그사이에 네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어떻게 해. 난 그러면 못 살아. 윤진아.”
기막혀. 이렇게 말을 잘하는 아이였다니. 그동안 어리바리했던 모습은 다 컨셉이었나.
“나 되게 얌전해. 거슬린다면 여기 앉아서 아무것도 안 하고 눈으로만 너 보고 있을게. 그러면 되지?”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그게 되겠니?”
“아냐. 할 수 있어.”
개소리에 개소리를 더하니 미친 소리가 탄생했다.
하지만 이미 김규하가 집 안에 발을 들여놓은 이상 쫓아내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고, 설득해서 내보내려 해도 남의 말을 절대 듣지 않는 고집쟁이를 이길만한 체력이 부족했다.
“…그런데 너 집에 이야기 안 해도 돼? 부모님이 걱정하시지 않아?”
집에 부모님이 계실 텐데 따위의 고차원적인 생각은 아이의 생떼를 이기지 못하고 하룻밤 룸메이트를 허락한 뒤였다.
“우리 집은 외박해도 신경 안 써. 다들 집에 잘 안 들어오거든.”
꽤 꺼림칙한 이유였지만 남의 가정사이니 더 뭐라 할 수 없어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잘게 몸을 떠는 나를 보던 규하는 차마 씻겨주지는 못하겠다며, 무서우면 욕실 문을 조금 열어놓으라 하곤 후다닥 몸을 돌려 욕실 옆 벽에 등을 기대고 섰다. 보디가드도 아니고 뭐 하는 짓인가 싶어 저리 가라고 소리쳤지만, 내가 가버리면 여기 남아 있는 의미가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규하를 쫓아 보내는 것에 실패해 졸지에 샤워 쇼를 하게 된 나는, 수건을 손에 든 채 한동안 문과 샤워부스를 번갈아 보았다.
그래도 도의상 문을 닫을까 하다 혼자 욕실에 남을 생각을 하니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아 바짝 붙어서야 겨우 틈이 보일 정도로만 문을 열어두었다.
규하는 욕실 문 앞에 등을 돌리고 서서 누군가에게 문자를 보내고 있었다. 진짜, 얘가 나를 동갑으로 알고 있기에 망정이지, 내 실제 나이를 들었다면 아저씨가 날 능욕했다고 쌍욕하면서 도망갔을지도 모른다.
샤워를 마치고 슬쩍 밖으로 나와 보니 여전히 규하는 등을 보이고 선 채였다.
“너도 이제 씻어. 내가 옷 꺼내 줄게.”
“으응?”
슬쩍 규하의 뒤로 다가가 말을 거니, 흠칫 놀라며 휴대폰을 주머니에 쑤셔 넣는다.
“뭐 그리 놀라. 나 모르게 이상한 짓 하고 있었어?”
“어? 어? 아, 아냐.”
“…옷 가져다줄게. 들어가 있어.”
“어, 어 고마워.”
내 대답을 듣기도 전에 규하는 후닥닥 욕실로 들어갔다. 왜 저럴까. 조금 의아했지만 여친이라도 되나 싶었다.
옷장에서 시훈의 옷을 꺼내 가져왔다. 아무리 뒤져보아도 내 옷은 규하에게 너무 작았다. 시훈이 나중에 뭐라 할 것 같지만… 한 번만 봐달라고 졸라봐야겠다.
욕실 쪽으로 돌아가니 규하가 씻는 중인지 물소리가 들려왔다. 욕실 문은 여전히 반쯤 열린 채였다. 옷을 바닥에 둘까 하다가, 그래도 손님 옷인데 그냥 두기 뭣해 잠시 고민했다.
뭐, 샤워 부스 안에 있으면 수증기 때문에 보이지 않을 테고, 같은 남자끼리 뭐 어떠냐 싶어 욕실로 들어갔다.
“으헉!”
“…깜짝이야. 윤진아. 노크를 하고 들어 왔어야… 아, 문을 열어 놨구나.”
젠장. 마침 샤워부스에서 막 나오던 규하와 딱 마주쳐 버렸다. 다행히(?) 수건으로 밑에는 가려서 서로 간의 민망한 상황은 피했지만, 너무 놀라서 가지고 온 옷을 가슴에 끌어안고 숨을 몰아쉬었다.
“오, 옷 가져왔어. 시훈이 건데… 맞으려나 모르겠네.”
“아, 그냥 바닥에 두지, 번거롭게.”
규하는 고맙다고 말하며 얼른 옷을 꿰입었다.
언뜻 흘겨본 규하의 맨몸에는 가슴부터 배까지 흉터가 길게 남아 있었다. 꼭 어디에 찢겼다가 제대로 치료를 못 해서 아문 모양이었는데 왜 이러냐고 물어보기가 좀 그랬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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