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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쪽같은 내 남친-60화 (60/85)

60화

다음날, 아침부터 학교가 소란스러웠다. 혹시 박창희가 일찌감치 헛소문을 퍼트리고 다닌 게 아닐까 싶었는데, 그 새끼는 학교에 아예 오지도 않았다. 듣자 하니 어디가 부러져서 병원에 입원했단다. 덩치는 산만 한 새끼가 그깟 책상에 좀 깔렸다고 뼈가 부러지다니 웃기지도 않지.

담임은 박창희에게 대체 미술실에서 뭐를 어쨌기에 책상에 깔릴 수 있는 거냐고 물었지만 녀석은 입을 꾹 닫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규하의 살벌한 입단속이 효과가 있었던 모양이다.

“박윤진. 솔직히 말해라. 너희 둘 싸웠지?”

졸지에 나만 교무실에 끌려가서 담임에게 갖은 질문세례를 받아야 했다.

“아뇨. 서로 이름만 아는 사이인데 왜 싸워요.”

“그런데 왜 박창희는 피떡이 돼서 병원에 드러누워 있고, 너는 얼굴이 죄 부었느냐는 말이야. 네가 생각해도 좀 말이 안 된다고 느끼지 않니?”

“말씀드렸잖아요. 전 제 구역 먼저 끝내고 집에 가다가 전봇대에 부딪혀서 이렇게 되었고, 박창희가 왜 그렇게 됐는지는 전혀 모른다고요.”

“히야… 독한 것들. 끝까지 잡아떼네.”

암만 물어봐라. 내가 대답해 주나. 괘씸해서라도 절대 말 안 할 테다.

실랑이를 하다 보니 담임은 박창희가 질이 좋지 않은 놈이라는 것과 자기보다 약한 아이들을 이유 없이 괴롭히는 것이 주특기인 것을 뻔히 알면서도 나와 그 자식을 붙여 놓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말인즉슨 불미스러운 일을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지만, 말수 없고 조용한 박윤진은 박창희가 무서워 아무 말도 못 할 것이라 여겼다는 것이다.

“너 나중에 학폭위 열어서 뒷북치지 말고, 말할 거 있으면 지금 말해라.”

“없어요.”

“진짜?”

“못 믿으시겠으면 도장이라도 찍을까요? 어디 사인이라도 해드려요?”

누가 보면 선생님한테 건방지게 구는 학생이라고 손가락질하겠지만, 사실 나와 담임의 나이 차이는 나와 규하의 나이 차보다는 적으니 괜찮다고, 괜찮은 거라고 혼자 속으로 세뇌했다.

* * *

김규하는 그날 이후로 아주 내 껌딱지가 되기로 작정한 듯 보였다. 싫다고 밀어내고, 귀찮다고 도망가도 집요하게 내가 가는 곳마다 따라붙었다. 아무리 난리 쳐도 도통 들어먹지를 않으니 그냥 포기했다. 언젠가는 제풀에 지쳐 떨어져 나가겠지 싶어 하고 싶은 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윤진아. 내 쪽으로 와. 거기 위험하잖아.”

“윤진아. 여기 와서 앉아. 바닥에 앉으면 차가워. 감기 걸려.”

“윤진아. 이것 좀 먹어볼래? 아니, 그건 먹지 말고. 이상하게 생겼잖아.”

“윤진아. 얼굴에 뭐 묻었다. 닦아 줄게.”

처음 하루 이틀은 괜찮았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날이 가면 갈수록 내 뒤를 따라다니는 걸로 모자라 나를 신생아 취급한다는 것이다.

“규하야. 나 진짜 괜찮아. 좀 비켜어.”

“안 돼. 넘어져서 다치면 어떡하려고.”

“계단 3칸 정도는 혼자 내려갈 수 있어….”

허락만 해 준다면 하루 종일 업고 다닐 수도 있다는 게 농담이 아닌 것 같아 등에 식은땀이 났다.

규하는 내가 자기랑 동갑이라고 굳게 믿고 있기 때문이라지만, n살이나 많은 아저씨가 맨정신에 어린애한테 챙김을 받는 건 어지간한 멘탈이 아니고서야 불가능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학교에서만 이러면 어떻게 참아보겠는데, 하교하는 순간부터 집 앞에 도착할 때까지 졸졸 쫓아와서는 기어코 내가 집 안에 들어가는 걸 보고서야 돌아간다.

“내일부터는 따라오지 마. 알겠지?”

“윤진이 이제 내가 귀찮아? 싫어졌어?”

“아니, 그게 아니라… 미안해서 그러지.”

“네가 미안해하는 게 난 더 서운한데.”

“아… 규하야. 제발.”

“…눈물 날 것 같아.”

나와 완전히 정반대에 살고 있는 걸 뻔히 아는지라 따라오지 말라고 매번 말해도 자기가 불안해서 도저히 발이 떨어지질 않는다며 울먹거린다. 저 커다란 눈에 당장 눈물이 후드득 쏟아질 것 같아 더 뭐라 하지도 못하겠고…

“규하야아. 이러면 내가 널 볼 면목이 없잖아. 울지 마. 응?”

“눈물이 나는 걸 어떻게 해.”

“아휴… 정말 미치겠다. 다 커가지고 왜 이러는 거야.”

“히잉.”

미치겠네. 키는 나보다 한참 큰 녀석이 히잉이란다.

쟤는 귀여운 척이 생활화되어 있는 걸까. 권시훈의 담백한 애교만 보다가 김규하의 치명적인 애교를 당하니(?) 뒷목이 뻐근한 게 곧 담이 올 것 같다.

“…어떻게 하면 뚝 그칠래?”

잠시 잠깐 울망한 저 얼굴을 무시하고 들어가 버릴까 갈등했다. 하지만 이 아이를 달래놓지 않으면 마음 편히 발 뻗고 누울 수 없을 것 같아서 혹시 원하는 바가 있는지 슬쩍 물었다.

“…말하면 다 해 줄 거야?”

뭐지. 뭔가 당한 것 같은 기분은.

“…들어보고.”

“그럼 나 들어가도 돼?”

“어딜.”

“너희 집.”

“아, 왜 또!”

“나 배고파.”

“배고프면 집에 가서 밥 먹어. 왜 우리 집에서 먹을 걸 찾아.”

설마 했는데 또 시작이네. 혹시나 했던 내 촉을 원망한다.

지난번의 하룻밤 이후, 규하는 거의 매일 우리 집 문턱을 넘으려 한다. 그 짧은 새에 정이라도 든 건지, 아니면 나 모르는 사이에 집 안에 뭘 숨겨 놓기라도 한 건지. 내 공간에 낯선 이가 들어오는 것을 반기지 않는 나로서는 영 껄끄러운 요구가 아닐 수 없었다.

“나 현기증 나. 집에 가다가 쓰러지면 어떻게 해.”

“그 정도면 병원에 가야지.”

“뱃가죽이 등에 달라붙었다고.”

“거짓말하네….”

“진짠데? 만져 볼래?”

“야아!! 뭐 하는 거야!”

규하는 본인의 뱃가죽 사정을 증명해 보이겠다며 불쑥 내 손을 잡더니 제 배에 갖다 대었다. 너무 갑작스러운 외간 남자(?)와의 스킨십에 화들짝 놀라 손을 거두며 뒷걸음질 쳤다.

“봐. 진짜 홀쭉해졌지?”

가죽은커녕 근육이 틈도 없이 붙어 있더만.

“그래서 나보고 뭐 어떻게 하라고. 밥이라도 해달라는 거야?”

“어? 진짜? 밥해 줄 거야?”

“너무 기다렸다는 듯이 말하는데. 너 솔직히 말해. 처음부터 노린 거지.”

“아니? 에이… 설마.”

설마라고 하는 것 치곤 너무 반색하던데. 무안 좀 주려고 눈을 흘겼지만, 전혀 개의치 않는 듯 싱글벙글 웃는 낯이다. 내가 또 웃는 얼굴에 약한 건 어떻게 알고.

“집에 아무것도 없어. 가도 라면만 먹어야 할 수도 있어.”

“나 아무거나 잘 먹어! 윤진이가 해 준 건 다 먹을 수 있어!”

거짓말하네. 너 편식 엄청 심하면서.

“아싸. 나 윤진이랑 단둘이 밥 먹는다.”

내 표정이 조금 풀어진 것 같으니, 냅다 팔짱을 껴오며 목덜미에 머리통을 들이밀고 부벼댄다.

“…그렇게 좋니.”

“당연하지! 나 진짜 아무거나 괜찮으니까 부담은 가지지 말고. 힘들면 내가 요리해도 돼!”

“또 어떻게 그래….”

“히히.”

네가 강아지냐… 푸슬푸슬한 머리칼이 맨살에 닿아 간지러워 몸을 자꾸 비트니 아예 허리를 끌어안고서는 놔주지 않는다.

아, 정말 얘가 왜 이래. 자꾸 이러면 나 오해해. 너에게 말 안 했지만, 나, 남친 있는 남자야. 이렇게 함부로 끌어안고 그러면 안 된다고.

사실, 정말 솔직히 말하자면 환멸 날 정도로 싫지는 않았다. 아직도 박창희한테 당한 것만 생각하면 손발이 덜덜 떨렸으니까. 이렇게 온종일 김규하가 옆에서 정신없게 해 주면 나쁜 생각이 좀 덜 드는 것 같았다.

“으아아아. 너무 좋다.”

한 번 와 본 게 다면서 규하는 마치 여기가 본인 집인 양 현관에 신발을 벗자마자 소파에 대자로 뻗어 누워 기지개를 켰다. 권시훈이 봤으면 씻지도 않았는데 옷까지 안 갈아입고 소파에 눕는다고 기함을 하며 대번에 엉덩이를 걷어찼을 광경이었다.

“야. 씻고 누워.”

“응? 씻으라고? 나 자고 가?”

“이야기가 왜 그렇게 되는 거지….”

“씻으면 옷도 갈아입어야 하는데 나 옷도 없고, 그 상태로 밥 먹고 나면 집에 가기 싫어질 것 같은데.”

“…….”

“나 진짜 밥만 먹고 가려고 했는데 윤진이가 원한다면 지금에라도 당장 옷 벗을게.”

“아니야. 됐어. 그냥 누워 있어라.”

내가 말을 잘못했네. 김규하는 지금 당장 여기서 팬티까지 싹 벗을 수 있는 위인이었다는 것을 간과하고 있었다. 패배를 시인하는 뜻에서 몸을 돌려 주방으로 터덜터덜 걸어 들어갔다.

규하는 몸을 뱅글 돌려 엎드리더니 분주히 주방을 왔다 갔다 하는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보고 있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데일 듯 뜨거운 시선이 정수리에 꽂히는 게 아주 고스란히 느껴졌으니까.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고 냉장고에서 자투리 채소를 꺼내 모두 닳아 없애 버릴 기세로 박박 문질러 닦고선 도마 위에 차례로 올려 두었다.

쟤는 뭐 눈알에 화산을 달아 놓았나. 왜 저리 이글이글거리냐.

또다시 침묵이 이어졌다. 무슨 요리를 할지 정하지도 않았으면서 괜히 당근을 새끼손톱보다 잘게 썰고, 즙으로 보일 정도로 마늘을 다졌다.

아, 너무 어색해 미치겠다. 김규하는 원래 저런 눈빛을 가지고 있는 놈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넘겨 버리면 그만일 텐데, 그게 잘되지 않는다. 물론 내가 저 아이에게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어 특별하게 느껴지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라면 모를까.

짓이겨져 못쓰게 된 마늘을 개수대에 버리고, 이번에는 양파를 집어 들었다. 이건 또 어떻게 잘라놓아야 저 시선을 잊어버릴 수 있을까. 쉽지 않겠지.

“윤진아.”

이대로 녹을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이 들 때 즈음, 내내 말이 없던 규하가 불쑥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어?”

내내 의식하고 있었으니 당연히 반응도 빨랐다. 나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아앗!”

내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자각이 없었던 게 화근이었다.

나도 모르게 짧은 비명을 내지르며 들고 있던 칼을 아무렇게나 내려놓고 다급히 뒤로 물러났다.

양파를 썰려던 칼이 그만 내 손끝을 살짝 찌르고 말았다. 가까스로 손을 거두어 아주 잘리는 것은 막았지만, 그사이에 꽤 베이고 말았는지 벌어진 상처 사이로 빨간 피가 스멀스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윤진아!”

내가 물러남과 동시에 소파에 한 몸처럼 붙어 있던 규하가 튕겨 나오듯 달려와 내 손목을 붙잡았다.

“아….”

잡힌 손목이 뜨거웠다. 생각지도 못한 부상에 당황한 나는 아픔도 느끼지 못하고, 어떻게 해 볼 생각도 못 한 채, 눈만 들어 규하와 손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손끝에서 시작된 선혈이 손가락을 타고 천천히 내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순식간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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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쪽같은 내 남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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