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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쪽같은 내 남친-61화 (61/85)

61화

“자, 잠깐. 규하야.”

규하의 입술이 주저 없이 내 손가락을 집어삼켜 버렸다.

내 손가락이 붉은 입술 사이로 자취를 감췄고 이윽고 피가 멎은 손가락이 천천히 빠져나왔다.

아, 이게 무슨. 지, 지금 김규하가 내 손가락을 입 안으로 넣어서… 그렇게 한 거야? 대체 반응을 어찌해야 할지 몰라 그대로 굳어버렸다. 이렇게 노골적인 방법으로 지혈 받게 될 거라고는 정말이지 상상조차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 멎었다.”

난 미치겠는데, 규하는 아무렇지도 않은가 보다. 그저 덤덤한 얼굴로 손가락을 살피다 주변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뭘 찾는 거냐고 물어보려다 괜히 입을 열었다가 떨고 있다는 걸 들켜버릴까 봐 발갛게 벌어진 상처와 규하를 얼뜬 얼굴로 바라보다 고개를 푹 숙여 버렸다.

“윤진아. 집에 소독약이랑 밴드 있어? 그냥 두면 안 될 것 같은데.”

“어? 아. 으응 거실 테이블 아래에….”

“응. 알았어.”

내가 가지고 오겠다 말하려 했는데, 규하의 몸은 어느새 거실로 향하고 있었다. 바로 전에 본인이 했던 행동 따위는 싸그리 잊어버린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제 와 따라가는 것도 이상한 것 같아 선 자리에서 구급함을 뒤지고 있는 규하의 뒷모습을 한참 응시했다.

방금도 그렇고 김규하는 예상을 뛰어넘다 못해 내 입장에서는 기예에 가까운 짓을 서슴없이 하는 재주가 있었다. 세상에. 아무리 급했다 하더라도 어떻게 손가락을 빨 생각을 했을까. 나라면 차라리 휴지나 그것도 없으면 옷자락이라도 갖다 댈 텐데.

역시 어려서 뭘 모르는 걸까. 세월을 역행하기에는 나는 아직 경험과 용기가 부족한 걸까. 뭐가 되었건 별로 내키진 않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규하는 밴드와 소독약, 그리고 연고 몇 개를 손에 들고 돌아왔다. 자연스럽게 손에 시선이 갔다.

여기저기 상해있는 몸과 달리 손가락은 흠집 하나 없이 깨끗했다. 꼭 누군가의 정성스러운 관리를 받은 것 같은, 속된 말로 부티가 났다. 우리 시훈이 손도 컸었지. 내 얼굴을 한 번에 다 덮을 만큼.

“아프면 말해.”

내가 넋을 놓고 손가락을 감상하고 있는 사이, 내 앞에 바짝 다가온 규하는 다시 내 손목을 붙잡고 알코올 냄새가 물씬 풍기는 면봉을 상처에 가져다 대었다.

“윽.”

고개를 끄덕이기도 전에 차가운 솜뭉치가 손가락 곳곳을 훑고 지나갔다. 빠르게 번지는 따끔하고 홧홧한 느낌에 인상이 절로 구겨졌다.

“아파?”

“아니. 아, 안 아파.”

“진짜? 눈물 맺혔는데?”

설마. 혹시나 해서 눈가를 훔쳐보니 진짜 축축한 물기가 묻어 나왔다. 이상하다. 평소 고통 같은 거 잘 참는 편인데 오늘따라 온 통각이 한 곳에 몰리기라도 한 듯 욱신거리고 뻐근하기까지 했다.

뒤늦게 인지한 불쾌한 감각에 미간을 좁혔다. 그러자 규하의 손가락이 부드럽게 나의 손가락 사이를 얽혀 들어와 조심스럽게 매만졌다.

“보기보다 깊게 베였나 보다.”

“…그러게.”

어쩐지 명치가 간질거리는 것 같아 슬쩍 허리를 비틀었다.

“조심하지. 칼질할 때 손가락 안쪽으로 굽히고 하는 거 몰랐어?”

“…알아.”

“그런데 왜… 아, 너 딴 데 봤구나. 칼 들고 다른 데 보면 위험해.”

“네가 불러서 너 본다고 다친 건데.”

“어? 나 때문이었어?”

“…몰랐니?”

규하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을 껌벅이며 나를 내려다보았다.

얄미워라. 바로 30초 전, 진득한 새까만 눈빛은 어디에 갖다 팔았는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순진무구한 청소년만이 남았다. 정말 모르는 건지 모르는 척하는 건지, 전자라면 곰탱이가 틀림없고, 후자라면 약아 빠진 여우일 테다.

“에휴. 됐다. 더 말해 봐야 내 얼굴에 침 뱉기지.”

“아니아니. 윤진아. 자기야. 잠깐.”

“아유! 됐어!”

다 끝난 마당에 시시비비를 가리느라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아 규하의 손에 들린 밴드를 빼앗아 손끝에 대충 둘러 붙였다.

“아니야. 난 이야기 안 끝났는데? 나 때문에 다친 거라며. 그럼 내가 책임져야지!”

“뭐? 책임?”

“응.”

“아니 됐어. 치료해 준 것만으로도 충-분해. 더 뭐 할 필요 없어! 아무것도 하지 마!”

“안는 것도 안 돼?”

“넌 책임을 껴안는 걸로 져야 하는 편이니?”

“꼭 그렇지는 않은데 윤진이가 원하니까.”

“내가 대체 언제 원했다고.”

정말 미치겠네. 다친 건 손가락인데 왜 머리가 욱신거리는 걸까.

얘랑 이야기하고 있으면 도무지 대화 패턴을 종잡을 수 없다. 어느 정도 예측 가능한 선에서 움직여야 마음의 안정을 찾는 나로서는, 규하와의 대화가 그야말로 냉탕과 온탕을 계속 옮겨 다니는 것과 같이 느껴졌다.

이제는 무슨 말을 해도 다 김규하의 입맛대로 휘둘리게 될 것 같아. 아니, 이미 그렇게 되어가고 있는지도.

RRRR- RRRR.

“어! 전화 온다!”

언제 무슨 일이 터질지 모르는 불편한 공기를 가르고 진동음이 우렁차게 울려대었다. 내 것인지 규하 것인지도 모르면서 이 상황을 벗어날 수 있다는 반가운 마음에 얼른 뒤를 돌아 소리가 나는 쪽으로 달려갔다.

다행히 진동의 주인공은 내 휴대폰이었다. 누군지 모르지만 정말 고맙다! 나중에 보게 되면 사례라도 해야겠어!

“네. 박윤진입니다.”

답지 않게 발신자 확인도 해 보지 않고 휴대폰을 집어 들고 냅다 인사말을 날렸다. 지금 심정으로는 스팸 전화라도 반갑게 받을 수 있을 것 같으니까.

-프흐흐.

내 목소리가 너무 밝아서였을까. 수화기 너머의 사람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앳된 듯, 성숙한 듯 부드럽고 따뜻한 웃음소리.

-자기야. 기분 좋은 일 있어? 왜 이리 목소리가 밝아.

“시훈아아!!”

권시훈이었다.

요 며칠 동안 실험 때문에 바쁘다며 얼굴을 보는 건 고사하고 이따금 톡만 했던 게 다였는데, 목소리를 들으니 너무 놀라고 반가워 그의 이름을 크게 부르며 반색했다.

“뭐야. 이제 실험 끝난 거야? 잘 끝났어? 언제 나올 수 있대? 너 몸은 괜찮아? 밥은 잘 먹고 있고?”

-자기야. 하나씩 물어도 되는데.

수화기 너머의 낮은 웃음소리가 너무 익숙해서 그리움이 울컥 솟아올랐다. 하지만 여기서 울어버리면 모처럼의 통화가 엉망이 되어 버릴까 어금니를 꽉 물며 눈물을 참았다.

-실험은 아직 진행 중이고, 잠깐 나와서 전화하는 거야. 이제 막바지니까 몇 주 내로 나갈 수 있을 것 같고, 내 상태는 아주 괜찮아. 밥도 잘 먹고, 잠도 잘 자고. 자기 생각하면서 밤에….

“어어어! 어! 잘 지낸다니 다행이다!”

또 뻘소리를 하려 하기에 큰 소리로 말을 끊었더니 뭐가 재미있는지 또 웃는다.

-그렇지? 윤진이 못 보는 것 빼고는 다 괜찮아. 걱정 안 해도 돼.

“으응.”

-자기는 나 안 보고 싶어?

“…나?”

당연히 보고 싶지! 라고 소리치려다 그제야 내 옆에 우두커니 서 있는 규하를 돌아보았다. 규하는 방금 전 장난기 가득한 표정을 지우고 무미건조한 얼굴로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보, 보고 싶지. 나도.”

-뭐야. 대답이 시원찮네? 자기 벌써 다른 차 갈아탄 거 아니지?

그게 아니라… 옆에 네 친구 김규하가 도끼눈을 뜨고 우리를 지켜보고 있어. 여기서 사랑 고백했다가는 대놓고 커밍아웃하는 거랑 다를 게 없다고.

“아니야.”

-다행이네. 난 자기 믿어.

“으응.”

어물어물 넘어가려 해서 화낼 줄 알았는데 의외로 별말 없이 넘어가 주었다.

-자기는 괜찮아?

“…어?”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을 때였다. 불쑥 시훈이 내 안부를 물었다.

너무도 의외의 물음에 눈이 크게 뜨였다. 내 시나리오상에는 권시훈이 박윤진에게 질문하는 항목은 없었기에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기다리는 거 힘들지 않아?

다시 시훈이 물었다. 그 순간, 이루 말할 수 없는 감정이 확 복받쳐 올랐다.

당연히 나에겐 권시훈이 먼저였다. 그러니 권시훈의 이야기를 먼저 묻는 게 당연했다. 반면 그가 없는 동안 나 또한 힘들었노라고 칭얼대고 싶기도 했다.

머릿속으로는 시훈이 나보다 곱절은 힘들 테고 고생하고 있을 테니 마음 쓰는 일 만들지 말자고 다짐했었다. 그런데 그의 걱정 한마디에 기껏 다잡았던 마음이 와르르 무너지려 했다. 아마 7년 동안 이렇게 오랫동안 떨어져 본 적이 없었기에 그리워서 이러나 보다.

-… 만 기다려. 내가… 하면… 할게.

“응? 뭐라고?”

-…… 어?

갑자기 전파가 이상해지기라도 한 건지 시훈의 목소리가 드문드문 끊겨 들리기 시작했다. 혹시 전화가 끊겼나 싶어 휴대폰을 다시 들여다보았지만, 통화 시간은 착실하게 늘어가고 있었다.

-아, 신호가 왜 …… 야. 들려??

“어, 나는 들리는데? 안 들려?”

-이상하네. 방금 … 는… 어…?

“자, 잠깐 시훈아. 내가 위치를 좀 옮겨 볼게. 밖으로 나가면 더 잘 들릴지도 몰라. 끊지 말고 기다려.”

혹시 전화가 끊길까 봐 밖으로 나가려 다급히 걸음을 옮겼다. 이번에 끊기고 나면 다시 연락할 수 있는 기약이 없기에 더욱 간절했다.

“잠깐… 제발. 시훈아. 잠… 어어!”

그 순간, 뒤로 잡아당기는 힘에, 몸의 균형을 잃고 휘청거리다 규하의 몸 위에 풀썩 쓰러지고 말았다. 다행히 맨바닥이 아닌 소파 위에 떨어져 뇌진탕은 면할 수 있었다.

내 등을 끌어안은 팔이 단단히 몸을 붙잡았다. 당황한 나는 휴대폰을 붙든 채, 규하의 품에 안겨 눈만 깜박이다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억지로 몸을 일으켜 나를 고꾸라뜨린 장본인에게 소리쳤다.

“뭐, 뭐야! 깜짝 놀랐잖아! 왜 잡아당기고 그래!”

“윤진아. 너 내가 안 당겼으면 저 의자에 걸려서 넘어졌을 거야.”

“…어?”

규하가 가리킨 방향을 보니, 정말 내가 지나가려던 자리에 낮은 스툴이 떡하니 자리 잡고 있었다. 규하 말대로 잡아주지 않았다면 그대로 앞으로 넘어져 코 수술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놀랐다면 미안. 나도 모르게 너무 세게 잡아당겼다.”

“아냐. 괜찮아. 내가 오해했네.”

“…너 그런데 전화 안 받아?”

아, 맞다. 전화.

뒤늦게 깨달아 몸을 일으켜 휴대폰을 들어보았다. 하지만 전화는 이미 끊겨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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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쪽같은 내 남친

한가린 장편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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