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아….”
다시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연결이 되지 않는다는 음성만 흘러나왔다.
아아. 이럴 수가. 이야기도 많이 하지 못했는데 이렇게 끊겨 버리면 나는 어떡하라는 거야. 적어도 10분, 아니, 5분. 1분 만이라도 더 시간을 주었다면 이리 허무하지는 않았을 텐데.
온몸의 힘이 다 빠져버려 몸을 받치고 있던 팔이 툭 꺾이려 했다. 하지만 규하가 붙잡아 주어 무너지진 않았다.
“기대.”
짧은 한마디에 고개를 돌렸다.
마주한 규하의 눈은 알 수 없는 빛을 띠고 있었다. 검기도 하고 붉기도 해서 화가 난 건지,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 건지 한 번에 알 수 없었다.
규하는 한숨을 뱉어내곤 위태롭게 구부러진 내 팔을 끌어당기더니 등을 감싸 안았다. 졸지에 품에 안긴 모양이 되어 놀란 나는 몸을 일으키며 팔에 힘을 주었지만 아무리 끙끙대도 도무지 벗어날 수 없었다.
“규, 규하야.”
“그냥 잠깐만 이러고 있어.”
“…….”
“내가 속상해서 그래.”
“…네가 왜 속상해.”
내 물음에 규하는 말없이 내 등을 토닥이며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왜냐고 이유가 뭐냐고 재촉하고 싶었지만, 물어봤자 대답해 줄 것 같지 않아 속으로 말을 삼키고 조용히 대답을 기다렸다.
“네가 슬퍼하는 거 보고 있는 게. 생각보다 힘드네.”
“무슨….”
규하가 한 단어, 한 단어 말할 때마다 피부를 간질이는 숨결과 까슬한 입술 감촉에 절로 어깨가 떨렸다.
“윤진아. 앞으로 위로는 나한테만 받으면 안 될까?”
“…응?”
“권시훈 여기 없잖아. 당장 네가 필요할 때 없는 사람을 왜 찾는 건데.”
“그야….”
권시훈이 내 연인이니까. 내 하나뿐인 반려이니까. 라고 솔직하게 고백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김규하에게 우리 사이를 들키는 것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나의 경솔한 한 마디 때문에 여태까지 쌓아왔던 것들을 망가트릴 수도 있다는 불안함 때문이었다.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았는데,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모두 원래 자리로 돌아갈 텐데, 아무것도 모르는 이 아이에게 씁쓸한 기억을 남겨주고 싶지 않았다.
“이제 내가 옆에 있을게. 네가 다 괜찮아질 때까지 떠나지 않을 테니까… 조금쯤은 내게 기대 주었으면 좋겠어.”
그런데, 김규하는 자꾸만 내가 그어놓은 선을 넘으려 한다. 막아야 한다. 그만하라 거절해야 한다고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외치고 있었다.
하지만 이 치기 어리지만 솔직한 마음을 마냥 밀어내기에는 나는 김규하를 꽤 많이 아끼고 있었고, 또 인간적으로 좋아하고 있었다.
“아, 혹시 나로 부족하다면… 그건 어쩔 수 없지만.”
머리 위에서 웅얼대는 규하의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에 코끝이 시큰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너를 밀어날 수밖에 없다. 기대는 것도, 슬퍼하는 것도, 그리워하는 것도, 전부 너의 몫이 아니기에.
“신경 쓰였다면 미안. 하지만 규하야.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게. 네가 신경 쓰지 않아도 돼.”
겨우 목소리를 내어 사과를 건네니 대답 없이 등을 토닥인다.
“사과 안 받을래.”
“뭐? 아니, 저기….”
“이제부터 내 마음대로 할 거야. 그러니까 너도 네 마음대로 해.”
* * *
깜박 잠이 들었다가 눈을 뜨니 내 방 침대 위였다.
“…….”
멍하니 침대에 누워 아무 무늬 없는 흰 천장을 바라보았다. 군데군데 주름 같은 것이 져 있는데 아무래도 계절을 반복하면서 벽지가 울어버린 모양이다. 시훈이 오면 도배를 다시 하자고 할까. 아니다. 여기 원래 우리 집 아니지. 남의 집 도배해 줘서 뭐 해. 돈만 아깝게.
여름 초입에 도망치듯 나오게 된 우리 집이 떠올랐다. 안 가본 지 꽤 오래된 것 같은데 괜찮을까. 소파에 곰팡이 피어 있는 건 아닐까. 여름이라 환기 잘 시켜야 집 안 물건들이 살아남을 수 있을 텐데. 안 되겠다. 이번 주말에는 꼭 시간 내서 집에 가봐야겠다.
“…나 생각보다 괜찮네.”
정말이다. 권시훈과의 짧은 통화의 후유증은 생각보다 짧았다. 눈물이 나오지도 않았고, 가슴이 찢어질 것 같지도 않았다. 분명 강제로 통화가 끊겼을 때는, 당장에라도 죽을 것 같았는데, 잠에서 깨고 나니 전화야 또 걸면 되니까, 언젠가 또 연락할 수 있는 날이 오겠지. 라는 긍정적인 생각이 들었다.
“어? 일어났어?”
살짝 열린 방문 사이로 규하의 머리가 쑥 튀어나오더니 나를 보고 환하게 웃는다.
자다 깨서 봐도 역시 잘생겼다. 쟤는 거울 볼 때마다 얼마나 행복할까. 드라마나 영화도 볼 필요 없을 거야. 본인 얼굴이 서사 그 자체니까.
“…응. 그런데 너 아직 안 갔니?”
“응.”
“왜?”
“가기 싫어서.”
주인은 자고 있는 집에서 혼자 뭘 한 거냐고 따지려다 관두었다.
만약 규하가 가버렸다면 나는 이 집에 홀로 덩그러니 남아 있어야 했을 테니까. 권시훈이 없는 수많은 날을 잘 버텨왔지만, 오늘만큼은 혼자 있기 싫었다. 지독히 이기적인 생각이었다.
“심심하지? 영화 볼래?”
“방금 일어난 사람한테 영화 보자는 소리가 나오니?”
“그럼 밥 먹을까?”
이제 막 눈 뜬 사람에게 같이 놀자 졸라대고 밥 타령을 하는 게 흡사 권누구누구를 보는 것 같네.
“밥맛도 없어. 밥도 없어서 해야 하는… 아 맞다! 나 아까 양파랑 썰어놓은 거 그대로 뒀는데!”
당장 몸을 일으켜 이불을 젖혔다. 규하의 시선을 피한다고 열심히 조사 놓았던 비운의 채소들. 지금쯤이면 흐물흐물 물이 되고도 남았을 테다.
“아, 도마 위에 있던 거? 내가 다 모아서 볶음밥 해 놨는데.”
“아아! 그래? 고마워. 다 버릴 뻔했네… 그런데 너 소금이랑 기름 어디 있는지 알고 있었어?”
“찬장 열어보니 나오던데. 내가 애도 아니고 없으면 찾아서 할 수 있을 정도는 되거든.”
“…그래. 고맙다.”
“나 잘했지? 그럼 내가 한 밥 먹으면서 영화 볼까?”
“…너 이러면서 은근히 집에 눌러앉으려고 그러지.”
“어떻게 알았지.”
정곡을 찔렸는지 너스레를 떨며 종종걸음으로 다가와 침대에 반쯤 기대어 있던 내 옆에 앉아 헤헤 웃어 버린다.
“진짜 집에 좀 가라. 부모님이 걱정하지 않으셔?”
“윤진이 넌 가만 보면 꼭 늙은이 같이 말해.”
“뭐? 늙은이?”
진짜 늙은이여서 속으로 움찔했지만, 가까스로 겉으로 티 내진 않았다. 규하도 눈치채지 못했는지 눈썹을 세운 채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그래. 늙은이. 네가 내 삼촌이야? 계속 그렇게 가르치듯 말하면 서운해?”
“허….”
“그리고 집에 연락하고 말고는 네가 신경 쓸 일 아니잖아.”
“그건 그런데 내가 좀 찔려서 그러지.”
“찔릴 일이 뭐가 있는데?”
그런 게 있다. 꼬맹아. 아저씨는 그래도 최소한의 양심은 가지고 살고 싶어. 너랑 꼭 뭘 하는 건 아니고 뭘 하려는 건 아니지만 난 엄연히 남친이 있고, 그 남친이 지금 아파서 끌려 들어갔단 말야.
이런 상황에서 네가 아무리 아무것도 모른다 한들 외간 남자랑 시간을 보낸다는 사실은 변하는 게 없거든.
꼰대라 욕해도 어쩔 수 없어. 어쨌거나 고딩인 척하고 있어도 마음만은 서른이 넘은 어른이란 말야.
“아무튼… 영화 보고 밥 먹는 건 괜찮은데 오늘은 집에 가서 자. 알았지?”
“응. 응. 오늘은 꼭 집에 갈게. 약속.”
새끼손가락을 내미는 규하를 황망하게 바라보다 마지못해 손가락을 내밀었다.
“와. 윤진아. 너 말은 늙은이처럼 하면서 새끼손가락은 완전 애기 같네.”
애랑 어른도 아니고. 이 손가락 길이 차이 어쩔 건데… 유난히 짧은 내 새끼손가락을 못마땅하게 내려다보니, 규하의 기다란 새끼손가락이 내 손가락에 걸어 버린다. 히죽거리고 있는 게 속으로 엄청 놀리고 있는 게 틀림없어.
분명해. 얘는 나를 애 취급하고 있다. 이럴 때마다 확 내 주민등록증을 보여 주며 정체를 밝혀 버려 규하의 입에서 ‘아이고 형님!’ 소리를 듣고 싶기도 한데… 그건 절대 안 되겠지.
“너, 헛소리할 거면 집에 가.”
“안 갈래. 약속했잖아. 오늘 할 일 다 하기 전에는 안 갈 거야.”
“…….”
“나 내 마음대로 한다고 했잖아. 아쉬우면 너도 네 마음대로 해.”
시원하게 입매를 끌어올리며 자연스럽게 내 손을 잡아 쥔다. 언제봐도 규하는 웃는 모습이 참 멋졌다. 이것도 처음에는 어색해서 빼기 바빴는데 이제는 그냥 하는 대로 둔다. 뭐 닳는 것도 아니고 손잡는 것 정도야 싶더라.
문득 옛 생각이 머릿속을 스친다. 내 고등학교 때는 어땠더라. 어이없어. 떠올려 봤자 뭐 한다고. 고개를 떨구며 혼자 헛웃음을 터트리니 규하의 허리가 휙 숙여지며 나를 물끄러미 마주 본다.
“윤진아. 무슨 생각해?”
“응, 아니. 아무것도.”
“아, 혹시 내 생각 했나?”
“아닌데.”
“그런데 왜 웃었어?”
널 보니 내 옛날이 떠올라서 웃었다고 절대 말할 수 없지. 말했다가 무슨 놀림을 받으려고.
“난 네 생각 해야만 웃니?”
“아쉽다. 난 네 생각 했는데.”
“뭐래….”
저 능글거림은 분명 권시훈이랑 닮았는데, 담백하게 웃는 모습이라든가, 유치한 멘트는 고등학생 김규하가 맞았다. 그래서 끝까지 정색하지 못하고 웃고 마는 건지도 모른다.
“그, 그냥 웃었어.”
“내가 아는 윤진이는 절대 실없이 웃는 스타일이 아닌데.”
“…너 날 되게 잘 아는 것처럼 말한다?”
“더 많이 알고 싶긴 하지.”
잡은 손을 쭉 끌어당기며 나를 일으켜 세운 규하는 알쏭달쏭한 마지막 말을 끝으로 입을 닫았다. 더 물었다가는 분위기만 이상해질 것 같아 나 또한 입을 닫았다.
“…….”
맥없이 규하의 손에 이끌려 거실로 나가면서 규하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정돈하지 않아 약간 흐트러진 짙은 갈색 머리칼, 흰 티셔츠 사이로 언뜻 비치는 상처가 의미 없이 눈에 들어왔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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