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쪽같은 내 남친-63화 (63/85)

63화

규하는 또 권시훈 영화를 골랐다. 이쯤 되면 내가 권시훈과 아주 깊은 관계라는 것을 눈치채고 일부러 이러는 건가 살짝 의심이 갔지만, 가장 좋아하고 존경하는 영화감독이라며 눈을 빛내는데 도저히 딴지를 걸 수 없었다.

실력에 있어서는 업계 최고를 달리는 시훈이었지만 대중들에게는‘배우보다 잘생긴 감독’이라는 이미지로 각인되어 인기를 누리고 있었으니 외모로 실력을 숨긴다는 농담이 나올 정도였다. 나 또한 숱한 권시훈의 팬들을 봐 왔지만, 외모를 쏙 빼고 순도 100%로 작품만으로 열광하는 팬은 처음 보는지라 흥미롭기도 했고, 신기하기도 했다. 시훈이 원래대로 돌아오면 사인이라도 해 주라고 해야 하나. 아니지. 함께 어울렸던 시간이 있으니 밥이라도 같이 먹고 오라고 해야 하려나.

<말해야만 하는 비밀>

좋아하는 마음을 숨기다 짝사랑 상대의 연애사를 모두 지켜보게 되는 주인공이 겪는 심적 변화를 그린 작품이다. 상대방에게 연인이 있어서, 내가 여유가 없어서, 상대방의 마음에 대한 확신이 없어서… 온갖 이유와 핑계로 자신의 마음을 숨겨버리고 홀로 남겨진 집에서 슬픔을 삼켜내다 주인공은 결국 불면증과 심한 우울증에 시달리게 된다. 그리고 ‘좋아한다.’는 말 한마디를 끝내 하지 못해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고 만다. 주인공에게 남은 것은 그리움과 외로움, 그리고 망가져 버린 몸과 피폐해진 마음이었다.

그러니 요는 ‘병나기 전에 할 말을 하고 살자.’라고 할 수 있겠다. 아, 이건 내가 너무 멋없게 표현한 걸까.

여하튼 김규하의 영화 취향은 200년 된 소나무만큼 한결같았다. 시훈의 영화뿐 아니라 다른 감독의 영화 중에서도 매우 서정적이고 해석이 난해한– 심지어 결말이 찜찜한 작품을 최애로 꼽았다.

“넌 이런 게 왜 좋아?”

내 애인 영화를 폄훼하는 것 같아 좀 미안한 기분이 들었지만, 규하가 내게 읊어주었던 영화목록들은 하나같이 내 취향이 아니었기 때문에 매우 순수하게 궁금한 마음으로 물었다.

“재미있어서.”

“…저 답답 고구마 일색이 재미있다고?”

내 쪽은 보지도 않고 화면에 눈을 고정한 채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기에 그 정도로 인가 싶어 나도 화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 수윤아. 보고 싶어. 아니야. 보고 싶으면 안 되지. 나는 그럴 자격이 안 되니까. 나는 수윤이의 뭣도 아니니까.’

독백만 들었을 뿐인데 가슴이 꽉 막히고 목구멍이 답답해지는 것 같아, 사과 주스를 꿀꺽꿀꺽 들이켜며 그냥 고개를 돌려버렸다.

어휴. 속 터져라. 저럴 거면 가서 말을 하던가, 말을 안 할 거면 깨끗하게 잊고 새 출발을 하던가. 혼자 끙끙대고 있으면 뭐가 달라져.

이 영화의 시나리오 집필을 완료하고 시훈이는 주인공의 말 못 하고 홀로 끙끙 앓는 성격은 박윤진의 성격 중 일부분을 따온 것이라 일러준 적이 있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는 권시훈과 연인이 된 이후 처음으로 진심을 다해 정색하며 짜증을 냈었다. 네가 나에 대해 뭘 아냐고. 아무리 연인이라 하더라도 우리가 모든 것을 다 알 수는 없다며, 네가 본 나의 모습이 내 전부가 아니라고 몇 시간 동안 설교를 늘어놓았었다. 모르긴 몰라도 그때 권시훈은 귀에서 피 좀 흘렸을 것이다.

사람들은 내 성격이 소심하니 사랑에 있어서도 제 할 말 못 하고 혼자 끙끙 앓을 것이라 여기곤 하는데,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물론, 무뚝뚝하고 쑥스러움이 많아 낯간지러운 말이나 애정 표현이 뜸한 편이긴 하지만.

제 할 말을 1도 가감 없이 다 하고 사는 시훈이나 규하 같은 아이들이야 내가 답답해 보이겠지만, 나도 나름대로 해야 할 말이 있으면 직설적으로 이야기한다.

아, 어쩌면 그게 가능한 것은 상대가 권시훈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일 수도 있긴 하겠다.

“말을 할 거면 하지. 왜 혼자 울고만 있는 건데. 본인이 짝사랑하는 상대에게 큰 잘못한 것도 아니고, 오히려 그 여자는 호감까지 있는 것 같은데. 대체 왜?”

“용기가 없어서…가 아닐까?”

“어휴. 답답해.”

“그렇지? 나도 별로야.”

“그런데 왜 계속 보고 있어?”

“나는 저렇게 하지 말아야지. 라고 스스로 반성하는?”

“…넌 걱정 안 해도 될 것 같은데.”

할 말 못 하고 속앓이하는 김규하는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오히려 하지 않아도 될 말을 뱉어버려서 일을 그르치지나 않으면 다행일 것이다.

“아니야. 나도 말 못 할 때 많아. 말주변이 없기도 하고, 용기도 부족한 편이고.”

“정말, 설득력 없다. 규하야.”

“진짠데….”

‘으허어엉. 수윤아아.’

어처구니없는 김규하의 개소리에 헛웃음을 터트린 사이, 화면 속 남자가 침대를 쥐어뜯으며 수윤이를 부르짖는다. 울음소리가 마치 고라니 울음소리 같아 미안하지만 하나도 슬퍼 보이지 않았다.

“윤진아.”

숨이 넘어갈 것 같은 울음소리 사이로 규하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파에 나란히 앉아 있던 나는 고개만 돌려 규하를 바라보았다.

“사람은 모두 각자만의 마음의 잔이 있는데 그 잔이 넘쳐버리면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속마음이 튀어나와 버린대.”

“뜬금없이 잔 이야기가 왜 나와.”

“저 영화의 주인공은 마음의 잔이 엄청 큰가 봐. 그래서 결국 끝까지 말하지 못하는 거겠지.”

“…?”

“별로 좋진 않은 것 같아.”

지금 영화 감상 발표 시간인가. 뜬금없이 잔이니, 뭐니 알 수 없는 소리를 하는 규하의 의중을 모르겠다.

직관적이고 분명한 것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규하가 지금처럼 뜬구름 잡는 화법을 사용할 때마다 도통 의미를 이해할 수 없어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요컨대 마음의 잔이 넘치게 되면 내가 싫어도 내 진심을 말하게 된다. 이 말이야?”

“응. 잘 이해했네. 똑똑하네. 윤진이.”

“이런 걸로 칭찬 듣고 싶지는 않은데.”

뚱한 말투로 되받아치니, 빙긋 웃어버린다. 또 그 웃음이 예뻐서 못마땅했지만, 마음은 누그러져 그냥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녀를 떠올리면 화가 났다가, 슬펐다가, 웃음이 났다가, 또다시 슬퍼지고는 한다. 나는 결국 내 사랑의 끝이 슬픔이 되어버릴까 두려워 결국 오늘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화면에서 주인공의 독백이 시작되고, 우리는 잠시 말이 없었다. 불 꺼진 거실에, 조명 하나 없이 오로지 프로젝터에서 새어 나오는 빛만이 서로의 존재를 확인시켜주었다.

‘언제쯤 말할 수 있을까? 아니, 말하고 싶긴 한 건가? 내가 내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하니, 나는 그대로 이 혼란 속에서 길을 잃은 미아가 되어버리고 만다.’

슬쩍 눈을 돌려 규하의 옆얼굴을 훔쳐보았다. 영화의 빛깔이 바뀔 때마다 잘 깎인 조각 같은 옆모습이 빨갛게 되었다, 하얗게 바뀌어 이채로운 광경을 만들어 내었다. 집중하고 있는 것 같아 다시 영상으로 고개를 돌렸다. 함께 같은 화면을 응시하고 있었지만 내 옆의 김규하가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아마, 나와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겠지.

아무래도 상관없나. 규하는 내가 아닌, 남인데.

“윤진아.”

잔잔한 피아노 반주가 깔리며 주인공이 강둑을 걸을 때 즈음, 규하가 내 이름을 불렀다. 지루한 눈으로 화면을 응시하고 있다 천천히 고개를 돌리니, 규하는 화면이 아닌 내 쪽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괜히 목구멍이 따가운 것 같아 마른침을 삼켰다. 그리고 천천히 규하의 입술이 열렸다.

“방금 내가 했던 말 기억나?”

“뭐?”

“이제부터 내 마음대로 할 테니까 너도 네 마음대로 하라는 말.”

“으응. 기억나지.”

“지금부터 해도 되지?”

뭐라는 건가 싶어 그냥 무시하려는데 짙은 동공이 내 속을 모조리 꿰뚫을 것처럼 응시한다.

“뭘 지금부터 해. 마음대로 하는 거?”

“응”

“뭐, 뭔지는 모르겠지만… 미리 뭐 할 건지 말해 주고 하면 안 될까? 내가 심장이 좀 안 좋아서.”

노려보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꿀을 담고 다정하게 보는 것도 아닌데 시선에 갇혀 헤어나올 수 없었다. 혹여 숨이라도 잘못 쉬면 심장이 목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이 떨리기 시작했다.

“후우.”

규하는 내 말을 듣고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건 좀 위험하다는 것을.

“윤진아.”

“…….”

“혹시 내가 너 좋아한다면 어떻게 할래?”

“뭐, 뭐라고?”

“그냥. 물어보고 싶어서.”

“넌… 참 물어볼 말도 없다. 질문을 해도 꼭… 내가 싫다고 하면 어쩌려고.”

놀라서 머리가 터져 나갈 것 같았지만 애써 아닌 척, 아무것도 아닌 척하며 고개를 저었다.

미안한데 규하야. 난 싫다고 할 수밖에 없어. 왜냐하면 나는 너랑 무려 띠동갑이 넘게 차이 나고, 너는 날 고딩으로 알고 있고… 아니 무엇보다 난 애인이 있어. 남친이 있다고. 무려 미래를 약속한!!…라고 차마 이야기할 수 없어 입 안 살을 씹으며 규하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런데 나는 굉장히 심각하게 말했는데 막상 규하의 표정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싫으면 뭐 어떻게 해. 기다려야지.”

엄마야. 얘가 지금 뭐라는 거야.

“뭐…?”

“왜 놀라. 윤진이 네가 내가 마음에 안 들면 마음에 들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아니아니아니! 너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파악이 안 되는 모양인데 너 네가 무슨 말 했는지 기억은 다 하지?”

“누굴 빡통으로 아냐. 너는.”

“아니, 그 말이 아니라.”

“무슨 말인지 잘 알겠고 네 말뜻도 다 알아들었어. 윤진이 네가 지금 부담스러워서 나한테 헛소리하고 있다는 것도 알아.”

“…….”

“하지만.”

하지만, 뭐.

되물어 보려다가 규하의 뒷말에 그만 목이 막혀 버리고 말았다.

“내가 여태 너한테 말한 것 중 그냥 한 말은 한마디도 없어. 그것만 알아주라.”

“나, 난….”

“알겠으니까. 그만.”

가슴이 팍 쪼그라들었다 쫙 펴지기를 반복하니 온몸에 힘이 쭉 빠지는 것 같다. 머리 좋다. 똑똑하다. 영민하다. 들어온 세월이 십수 년인데 김규하의 말 한마디에 나는 바보가 되고 말았다.

“대답 안 들을래. 들으면 마음 아플 것 같아.”

점점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머리가 지끈거리고 무거워. 뻑뻑한 눈꺼풀에 힘을 빼고 눈을 감았다.

“마음은 고마운데 못 들은 걸로 할게.”

“…무슨 뜻이야.”

“말 그대로. 내 마음은 너와 같지 않다는 뜻이야.”

“윤진아.”

“나 좋아하는 사람 있어. 그 사람도 날 좋아하고 있고. 이런 고백 듣는 것도… 그 사람한테는 못 할 짓이야. 그러니까… 못 들은 걸로 할게.”

“그냥 좋아하는 것도 안 돼? 너한테 바라는 거 없어. 그냥 이 마음만 가지고 있게 해 주면 안 될까.”

“아니, 그것도 안 될 것 같아.”

눈을 들어 규하를 바라보았다. 미안하고 죄스러웠지만 차마 거짓을 말할 수는 없었다. 차라리 확실히 거절해 희망을 주지 않는 편이 나았다.

“네가 쉽게 마음 접지 못하겠다면… 이제 우리는 안 보는 편이 나을 것 같아.”

“…….”

“여지 주는 것도… 못 할 짓이잖아.”

사람과의 관계가 이렇게 힘들었었나. 누군가와 마음을 나누었던 경험이 많지 않았기에, 이 타래를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 난감했다. 하지만 나는 어른이고, 어렵다는 이유로 피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난 그렇게 못해. 너에게 미안해서라도 쉽게 포기할 수는 없어.”

“…무슨 소리야?”

“김태준.”

놀라 뭐라 말도 나오지 않아 입을 벌린 채로 그대로 굳어버렸다. 여기서 그 인간의 이름이 왜 나오는 거야? 아니면 나와 규하가 함께 알고 있는 놈 중에 동명이인이 있었나.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내 기억 속 김태준은 단 한 사람이었으니까.

딱딱하게 굳은 김규하의 얼굴, 무언가 더 말할 것처럼 달싹이는 입술이 눈에 들어오자 목이 턱 막혀 버린 것 같아 헛기침했다.

제발 말하지 마. 마음속으로 빌고 또 빌었다. 하지만 내 바람과는 달리, 규하는 다시 입을 열었다.

“김태준 때문에라도 그럴 수는 없어.”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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