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뭐? 김태준?”
믿을 수 없어 다시 한번 되물었다. 내 물음에 규하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K제약 김태준 전무.”
“…그 사람 이름이 여기서 왜 나오는데.”
“그 사람이 내 아버지야.”
쿵. 순간 땅 밑이 꺼지는 것 같아 손으로 바닥을 짚었다. 지금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는 건가. 김태준이 김규하의 아버지라고?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
“거짓말하지 마. 누가 누구 아들이야?”
“내가 김태준 아들이라고.”
“미친… 너 지금 나 놀라게 해서 어떻게든 넘어가려고 헛소리하는 거지?”
“김태준. K제약 전무. 박윤진과 같은 대학 같은 과 출신. 19살에 낳은 아들 있음. 거주지는 평창동. 보유 차량은 총 3대. 뭐 더 필요해?”
“…….”
“지어낸 이야기라면 이 정도로 정확하지는 못할걸.”
믿고 싶지 않았다. 인정하고 싶지도 않았다. 우연이라면 기가 막히고, 의도된 일이었다면 괘씸할 것 같아서.
“놀랐지. 끝까지 말 안 하려고 했는데… 나도 모르게 튀어나와 버렸네.”
“놀라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잖아. 왜 숨겼느냐가 중요하다고 생각 안 돼?”
“이렇게… 네가 화낼까 봐 무서워서.”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방금 전, 좋아한다 고백할 때만 해도 뻔뻔할 정도로 기세가 좋더니 내 한마디에 금세 꼬리 내리고 슬픈 눈을 한 채 눈치만 보고 있으면 꼭 내가 나쁜 놈 된 것 같잖아.
“어디까지 알아?”
“…뭐를?”
“나에 대해서.”
“글쎄. 아마도 프로필에 나오는 내용 정도는 알고 있지 않을까?”
“뭐? 그럼 혹시 내 나이도 알아?”
“…응.”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
“…응.”
곧 땅을 파고 기어들어 갈 듯한 목소리로 대답한 규하는 뒷머리를 마구 헤집으며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리고 나는 얼굴이 터질 듯 달아올라 다급히 뒷걸음질 쳤다.
“너! 뻔히 알고 있었으면서 왜 나한테 반말하는 건데?”
“학교에서 존대하면 티 나잖아. 모른 척하려고 말 놓던 게 습관 돼서 그래.”
“미쳤다….”
진짜 미쳤나 봐.
기어코 변명거리를 만들어 내는 김규하의 임기응변에 박수를 보내고 싶었다.
아, 정신 차려, 박윤진. 이대로 가다간 김규하의 페이스에 말려버려 제대로 화도 못 내보고 대화가 끝나버릴 거야. 어떻게 해서든 이 수많은 의문을 풀어야 한다고.
끓는 속을 가라앉히려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여전히 머릿속은 갑작스러운 사랑 고백과 진실 고백 때문에 엉망으로 엉켜 있었지만 지금 묻지 않으면, 다시는 김규하에게 같은 질문을 할 수 없을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후. 그래. 말 못 했던 이유가 있겠지.”
“…미안.”
“사과 듣자고 묻는 거 아니야.”
“…….”
“너 나한테 이런 말을 하는 저의가 뭐야. 김태준이 네 아버지인 거랑 네가 나를 포기 못 하는 거랑 무슨 관련이 있는데. 엄연히 따지면 별개의 문제 아니야?”
내 물음에 당황했는지 규하의 동공이 굴러떨어질 것처럼 커졌다가 이내 무언가 체념한 듯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게….”
한참을 머뭇거리며 대답을 고른다. 재촉하는 대신 먼저 입을 열 때까지 기다리는 게 나을 것 같아 나는 입술을 꾹 다물고 규하를 바라보았다.
“우연히 아버지와 비서가 이야기하는 걸 들었어. 우리 학교에 그것도 우리 반으로 이번 프로젝트를 모니터링하는 연구원과 피실험자가 임상 때문에 들어오게 되었다면서, 관련 인물들 입단속 잘 시키라고. 그러려니 하고 별생각 없이 넘어갔는데, 바로 다음 날에 너와 권시훈이 전학 왔어. 그때 알았지. 아. 아버지가 말한 사람들이구나.”
“처음부터 우릴 알고 있었다고? 그런데 왜 모른 척했어?”
“나랑 상관없는 일이잖아. 그냥 아버지 일에 참견하고 싶지 않았어. 말해 봤자 믿을 것 같지도 않았고.”
하긴, 아는 척한들 달라질 것도 없는데 괜히 끼어들었다가 골치 아픈 일이라도 생기면 짜증 나겠지. 어차피 아들에게는 어른들의 일일 테니까.
“그런데 너희가 전학 온 그날 밤에 아버지가 누군가와 네 이야기를 하더라. 이용하기 좋은 놈이 나타났다고. 적당히 이용한 다음에 버리자면서.”
그 뒤로 규하의 입에서 나온 말은 실로 분노를 일으키는 말뿐이었다. 김태준은 정체불명의 사람에게 박윤진은 멍청하고 순진해서 버림받아도 모른다는 망언을 지껄이는 걸로 모자라 내 상처를 들먹이며 낄낄대었다고 한다.
“알고 있겠지만 아버지는 그런 사람이야. 필요하면 취하고 쓸모없어지면 가차 없이 내치고.”
“…….”
“우리 엄마랑 나도 가차 없이 버렸다가 뒤를 이을 후계가 없어 승계 싸움에서 불리해지니 당장 보육원으로 찾아오더라.”
“보육원? 어머님은 어디 계시고?”
“죽었어. 10년 전에.”
너무도 덤덤한 얼굴로 어머니의 죽음을 말하기에 깜짝 놀라 규하를 바라보았다.
“돌아가셨다고?”
“응. 하도 오래되어서 이젠 얼굴도 잘 기억 안 나.”
웃고 있지만, 안은 텅 비어 있는 듯 허전했다. 뭐라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주먹을 폈다 쥐었다 반복했다.
“아버지 정말 나쁜 사람이야. 용서하고 싶지도 않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을 만큼.”
“…….”
김태준은 고등학교 시절, 당시 여자친구였던 규하의 생모와 하룻밤을 보냈는데, 그만 덜컥 임신이 되고 말았다. 당연히 졸업 후 김태준과의 결혼을 생각했던 규하의 어머니였지만 김태준은 매몰차게 그녀를 버리고 먼 곳으로 전학을 갔다고 한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었던 어머니의 집안은 임신한 딸을 제대로 돌봐주지 못했고, 결국 규하의 어머니는 홀로 규하를 낳은 뒤, 하루하루 전전긍긍 살았다고 한다.
그동안 김태준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대학에 입학했고, 박윤진이라는 또 다른 피해자를 남겨둔 채 미국으로 건너가 모 재벌가의 막내딸과 결혼했다.
그나마 다행이라 할 건, 그 새끼의 첫 결혼은 얼마 못 가 실패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유는 김태준의 외도와 아내의 불임.
김태준은 집안의 압박으로 결혼 상대를 찾고 있었고, 마침 그를 눈여겨보던 재벌가에서 먼저 손을 내밀었다.
그들의 만남에서 결혼까지는 석 달도 채 걸리지 않았다. 서로의 이름도 제대로 부르지 못하고, 성격이나 성향 따위는 알아볼 틈이 없었다. 물론 서로 알려 하지도 않았다. 서로를 너무 몰랐던 두 사람은 처음부터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결혼이라는 것은 후계자를 낳기 위한 수단, 비즈니스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던 김태준과 K제약의 지분을 노리던 그의 부인. 그들은 후계를 낳기 위해 강박적으로 똑같은 루틴의 생활을 해야만 했고, 관계도 정해진 날짜에 의무적으로 행해야 했다.
하지만 최소한의 애정도 없는 두 사람은 각자의 생활에 바빴다. 서로의 얼굴을 볼 수 있는 날이 관계하는 날일 정도로. 결국, 그 끝은 지저분한 파국이었다.
얼마나 요란하게 이혼했으면 세상만사에 관심 없는 나마저도 K제약의 다음 후계자는 없을 것이라는 기사를 매일 보게 될 정도였다. 그리고 얼마 뒤, 길고 긴 소송이 끝나고 두 사람은 각자의 길을 가게 되었다.
“난 그때 엄마 돌아가시고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 원망하면서 보육원에서 매일 울었는데. 정작 아버지는 내가 살아있는지도 모르고 있었더라.”
“네가 세상에 태어난 것도 몰랐다는 말이야?”
“그러니 찾지 않았겠지. 관심 가질 가치도 없는 과거였을 테니 잊어버리고 있었을지도.”
하기야 제 이익을 위해서라면 물불 가리지 않는 김태준이 제 약점이 될 게 분명한 후계자의 부재를 그냥 두고 볼 리가 없었다. 숨겨진 자식이 있다는 걸 알았다면 지구 끝까지라도 쫓아가서 데리고 왔겠지.
“그러면… 넌 언제 김태준 집에 들어온 거야?”
“몇 년 안 되었어. 한 2년 정도 되었나.”
“그때까지는 아버지가 있는 줄도 몰랐다고?”
“응. 엄마가 말을 안 해 줘서. 나는 아버지가 죽은 줄 알았는데 멀쩡히 살아 있더라.”
믿을 수 없는 일의 연속이어서 정신이 혼미해졌다. 세상에 이런 일이 가능하구나. 뉴스에서나 보던 재벌가의 뒷이야기의 주인공이 실재했었다니. 그것도 바로 내 옆에.
도저히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곁눈으로 규하의 눈치를 살폈다.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잃은 것도 큰 충격이었을 텐데, 보육원 생활에, 뒤늦게 찾아온 아버지라는 인간은 철저히 본인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놈이라니. 이제 와 보니 김규하의 삶이 애처롭고 안쓰러웠다.
“난 아버지가 미워.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는데 그냥 싫어. 엄마를 사지에 내몬 것도 원망스럽고, 이제 와 나에게 아들 노릇 하라는 것도 역겨워.”
“…그럴 수 있지.”
차마 그런 아버지라도 이해해야 한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나조차도 김태준을 증오하는데, 혈육에게 버림받은 이에게 용서하라 하는 건 위선이었다. 그래서 규하의 분노에 동조할 수밖에 없었다.
“윤진아.”
긴 정적이 지나고 얼마 뒤, 규하의 목소리가 내 이름을 불렀다. 마음속의 괴로움을 방증하듯, 낮은 음성은 잔뜩 갈라진 채였다. 눈을 들었다.
“내가 너를 좋아하는 건 그냥 책임감 같은 거야. 사귀고 싶거나 가지고 싶은 게 아니라, 네가 좋으니까….”
“…….”
“윤진아. 난 태어나서 여태까지 사람을 믿는다거나 마음 준 적 없어서 잘 몰라. 어떻게 말해야 이 마음을 제대로 전할 수 있을지도 몰라. 그런데 하나 확실한 건 너를 지키고 싶어. 그냥 그게 다야.”
규하는 그렁한 눈을 한 채 나를 바라보았다. 당장에라도 눈물을 떨굴 것처럼. 나 또한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몰라 한숨만 내쉬었다.
혼란스러워하는 규하를 마주하고 있자니 나 또한 마음이 불편해졌다. 말해야 할까. 잠시 고민되었지만, 이 말을 하지 않고서는 계속 쳇바퀴 도는 대화만 반복될 것 같아 주먹을 꽉 쥐고 입을 열었다.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나 시훈이랑 7년째 만나고 있어. 그리고 이 일이 해결되고 나면 결혼할 거야. 그게 무슨 의미인지는 알지?”
규하의 동공이 천천히 내 쪽을 향했다. 권시훈 이야기는 하지 말았어야 했을까. 아니야. 맹목적인 열여덟의 감정을 잘라내려면 조금은 극단적인 방법을 사용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일 거야.
“알아. 알고 있어. 그러니까 더 놓을 수가 없어.”
“뭐?”
“줏대 없는 놈이라고 볼 수 있는데 나 시훈이도 많이 좋아하고 있어. 친구랍시고 잠깐 어울려 놀았던 놈들과는 달라. 나에게는 너도 소중하고 권시훈도 소중해.”
“규하야….”
이 혼란스러운 마음을 어떻게 정의 내려야 할까.
안타까웠다. 한참 어른처럼 보이더니, 이제 보니 김규하는 한없이 작은 아이였다. 사랑받지 못한 채 몸만 훌쩍 커버려 사랑의 수많은 갈래를 구분할 줄 몰랐다.
“아, 모르겠어. 뭐라 설명해야 할지. 내가 말을 잘못한 건가? 대체 어떻게 말해야 네가 오해하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을지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안 나와.”
“…….”
“그냥 하나만 알아줘. 난 너희 둘 사이를 갈라놓으려는 게 아니야. 단지 나는 너를 좋아하고 있고, 권시훈을 좋아하고 있으니 너도, 시훈이도 나를 좋아해 주었으면… 좋겠어.”
“규하야….”
“정말, 그게 다야.”
아이의 외로움은 내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크고 깊었다. 범람해 밀려오는 슬픔을 어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끝까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이의 얼굴을 똑바로 볼 수 없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여 규하의 발끝으로 시선을 돌렸다.
규하 또한 말이 없었다. 나를 보고 있는지, 다른 곳을 보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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