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쪽같은 내 남친-65화 (65/85)

65화

오형석은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이마에 흐르는 식은땀을 닦아 내었다. 내 앞에서 창피하니 내색하지 않으려 하는 듯했지만, 언뜻 보기에도 곤란함을 숨기지 못해 곤란해하는 꼴이었다.

“어… 거참. 윤진 씨답지 않게 왜 이러십니까. 면회라니요. 안 된다는 거 뻔히 알면서 쳐들어오시면 저만 난감해진다고요.”

규하를 보내자마자 내가 향한 곳은 시훈이 머물고 있는 K제약 연구소였다.

당장 권시훈을 봐야만 했다. 이 더러운 기분을 떨칠 수 있는 것은 권시훈밖에 없다. 외국이나 볼 수 없는 곳에 있는 것도 아니고 같은 하늘 아래 있는데 보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연구소는 ‘YOUNG’ 프로젝트 기간 동안 보안상의 이유로 외부인의 출입을 엄격하게 통제하고 있어, 자문 연구원이자 권시훈의 보호자인 나조차도 쉽게 드나들 수 없었다. 온갖 절차서 작성은 당연했고, 프로젝트 총책임자인 김태준의 결재를 받아야만 출입이 가능했다. 김태준이 내 이름이 적힌 절차서를 검토한다는 것만으로도 소름 돋는데, 그보다 더 싫은 건 김태준에게 나와 시훈의 관계를 공식적으로 알리게 되는 격이 되어버리는 것이었다.

물론, 내 주변인들은 모두 시훈과 내 사이를 알고 있지만, 김태준 그 입 더럽고 음흉한 새끼한테는 알리고 싶지 않았다. 이미 다 알고 있을 가능성이 높긴 했지만. 설사 알고 있더라도 내 앞에서 아는 척해 주지 않길 바랐다.

그래서 선택한 방법이 ‘무작정 찾아가서 정면 돌파하기’였다. 경비실만 여차여차 통과하면 그 뒤로는 임시 출입증을 사용하거나, 정 이도 저도 안 되면 오형석을 부르면 되겠지 싶어서.

걱정과는 다르게 경비원은 내 얼굴을 보자마자 어서 오시라며 경례까지 붙였다. 뭔가 싶어서 걸음을 멈추니, 프로젝트 소속 연구원들 명단에 사진이 있어서 알아봤다고 했다. 이젠 하다 하다 난생처음 보는 경비원까지 아는 척을 하는구나. 어쨌거나 나에게는 잘된 일이니 얼른 묵례하고 자리를 떴다.

하지만 또 다른 문제에 직면했다. 임시 출입증을 가져오지 않은 것을 입구에 다다라서야 알게 된 것이다. 여기까지 와서 돌아가야 하나 싶어 순간 짜증이 솟구쳤다.

“윤진 씨. 미리 연락 좀 하고 오지 그러셨어요. 어휴. 얼마나 놀랐는지 압니까?”

갑작스러운 내 연락에 한번 놀라고, 연구소 앞이라는 데에 까무러칠 뻔한 오형석은 5분도 되지 않아 낯빛이 하얗게 질린 채로 뛰어 내려왔다. 문만 열어주면 될 걸 굳이 왜 내려왔나 의아해하기도 전에, 나를 연구소 안으로 잡아끌고선 여기에 왜 왔냐고, 김 전무님이 보면 어쩔 거냐고 왁왁대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뭔가 쎄한 느낌이 들었지만, 굳이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어 권시훈을 만나러 왔다고 말했다. 그러자 외부인 출입 금지가 어쩌고, 사칙이 저쩌고, 줄줄줄 뜻 모를 소리를 늘어놓는 것이다.

“어려운 일인 거 압니다. 그래서 이렇게 부탁드리는 거잖습니까.”

“박윤진 박사님. 피실험자와 외부인은 접촉 금지라는 건 숙지하고 계신 거죠?”

“제가 언제부터 외부인이 되었습니까? 자문 연구원 따위는 프로젝트 일원으로 껴주기 싫다는 뜻입니까?”

“아니아니! 그 뜻이 아니라! 에휴….”

의도한 대로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지 오형석은 손을 퍼덕대다 제 가슴을 쿵쿵 두드렸다.

오늘만큼은 져주고 싶지 않아 눈썹을 삐딱하게 세우고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 이런 말은 좀 윤진 씨가 불쾌하다 여길 수 있을 것 같은데… 프로젝트 막바지라 전무님께서 특별히 보안에 신경 쓰라고 당부하셨어요.”

“그러니까 그 보안이랑 저랑 무슨 상관인데요.”

“K제약 소속 연구원들을 제외한 외부 연구인력들에 대한 경계를 강화하겠다는 지침이 내려와서….”

“네?”

“여튼… 여기저기 보는 눈이 많습니다. 지금 연구소 내부 분위기도 썩 좋지 않고요,”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람. 프로젝트 막바지라면 연구 성과가 어느 정도 나왔다는 뜻이고, 치료제도 무리 없이 개발되고 있다는 뜻인데 내부 분위기가 좋지 않다니.

“자세히 말하자면 깁니다. 이건 정말정말정말 극비라 말해드리기가 좀 그래요.”

“…….”

자문 연구원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비밀이라. 분명 김태준이 무슨 꿍꿍이를 꾸미고 있는 게 분명한데 더 다그쳐봤자 말해 줄 것 같지도 않고, 지금 내 용건은 비밀 캐내기가 아니었기 때문에 본래 목적에 집중하기로 했다.

“그 극비는 그쪽들이 알아서 잘 숨겨보시고 권시훈 좀 만나게 해 주세요.”

“아, 윤진 씨. 그건 곤란하다고 몇 번이나 말씀드렸잖아요.”

“안 된다는 거 압니다. 곤란하다는 것도 알고요. 그래서 이렇게 부탁드리는 거 아닙니까.”

“어느 정도 실현 가능성이 있어야 들어드리죠.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건 제 관할이 아니라니까요.”

이렇게까지 거절한다면 물러나는 게 맞았다. 오형석이 선임연구원이라 할지라도 멋대로 피실험자를 외부에 노출시키는 것은 꺼려질 게 당연했다. 그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는 머리는 이제 그만 하고 돌아가자 했다.

분명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런데 내 마음이, 몸이 이대로는 절대 돌아갈 수 없다고 아우성을 쳤다.

이대로 가면 오늘 밤, 울지 않을 자신 있어?

계속 기다리게 되더라도 지치지 않을 자신 있어?

대답은 ‘아니’였다.

“윤진 씨…?”

무겁게 고개를 가로젓는 오형석의 팔을 붙잡았다. 내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란 오형석은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돌아보았다.

“정말 잠깐이면 됩니다. 벽에 대고 이야기해도 좋으니까, 10분 만이라도 보게 해 주세요. 보호자든, 연구원이든 뭐라도 갖다 붙여서. 앞으로 필요한 게 있으면 뭐든 협조하겠습니다. 제발. 한 번만 부탁드릴게요.”

“아니… 참나.”

“제발….”

“…갑자기 찾아와서 이러는 이유가 뭡니까. 이유라도 좀 압시다.”

이유? 그런 거 없다.

“보고 싶어서요.”

그저, 권시훈이 너무 보고 싶었다. 정말 바로 앞에 있는데 옷자락조차 보지 못하고 돌아가게 된다면 오늘은 정말 견디기 힘들 것 같았다.

“하….”

“꼭 좀 부탁합니다.”

내 마지막 부탁을 끝으로 무거운 정적이 이어졌다. 오형석은 한숨을 내쉬었다가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가 또 한숨을 내쉬길 반복했다.

“…….”

왜 이리 간절해지는지 모를 일이었다. 곧 볼 수 있는 사람인데도 오늘 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일 분이 한 시간 같고, 찰나가 한나절처럼 느껴졌다. 입술을 꽉 깨물어도 아무런 감각이 없을 만큼 온몸이 마취된 것처럼 무뎌졌다.

“딱 30분 드릴게요.”

그리고 그때, 무겁게 가라앉은 오형석의 목소리가 긴 침묵을 깼다.

“지금 나 혼자 있기 망정이지 김 전무님에게 들켰다가는 저 모가지입니다. 아셨죠?”

“그 말 지금 몇 번째인지 아십니까? 알겠다고요.”

“어휴. 걱정되니까 그렇죠! 30분입니다! 30분이요! 알겠죠? 늦으면 안 돼요?!”

“붙잡고 있는 시간에 한마디라도 더 하겠습니다! 비키세요. 좀!”

오형석 이 자식은 허락했으면 쿨하게 보내 줄 것이지, 뭐 얼마나 걱정할 거리가 있다고 내 옆에 찰싹 붙어서 끊임없이 잔소리를 주절대었다.

“그리고… 아시겠지만, 오늘 일은 김 전무님이나 홍 박사님… 아무튼 다른 분들에게는 다 비밀입니다?”

“알았다고요!! 그러니까 얼른 가!”

큰 소리 내면 안 된다고 해 놓고선 오형석이나 나나 목청껏 왁왁대고 있었다. 이러다 누구한테 말실수하기도 전에 온 연구소 사람들이 우리 구경을 하러 올 것 같아 오형석의 등을 억지로 떠밀었다.

“이따가 데리러 올게요!!!”

마지막까지 온 동네 떠나가라 소리치는 오형석을 뒤로하고 문을 열었다.

시훈이 머물고 있는 숙소-말이 숙소지 정확히 말하면 격리실-는 보안 시스템을 몇 번이나 통과해야만 들어갈 수 있었다. 오형석이 빌려준 출입증 덕에 별 무리 없이 지날 수 있었지만, 만약 혈혈단신으로 들어왔다면 문 하나도 열지 못하고 그대로 집으로 돌아가야 했었을 테다.

[보안 시스템 해제합니다. 게이트 열립니다.]

꽤 미래도시에서 나올 법한 기계 음성과 함께 두꺼운 철문이 열렸다.

삭막한 연구실이 나타날 거라 생각했는데 문 뒤는 꽤 익숙한 풍경이었다. 소파, 식탁, 각종 주방 도구들… 나름 침실도 분리되어 있어 살림살이 없는 가정집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였다. 오형석 말로는 이 층 전체가 권시훈을 위해 설계되어서 생활공간과 운동 시설, 심지어 본업에 필요한 장비까지 준비되어 있다니… 이건 실험이 아니라 사육이 아닐까?라는 합리적 의심이 들 정도였다.

“저기….”

텅 빈 거실에서 조심스럽게 입을 열어보았다. 오늘은 실험 경과를 지켜보는 날이라 특별한 일정이 없다고 했는데, 안은 아무도 없는 듯 조용했다.

“…시훈아?”

갑자기 찾아오는 바람에 시훈에게 미리 말하지 못했다. 아직 잠자리에 들기에는 이른 시간이라 숙소가 아닌 다른 곳에 있을 가능성도 있었다. 전화해 볼까 했는데 식탁 위에 올려진 시훈의 휴대폰을 발견해버려 그것조차 관두어야 했다.

“30분밖에 없는데… 찾으러 나가야 하나.”

그러기에는 시간이 너무 없는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허망히 거실에 서 있다 어느새 2분이나 흘러가 버렸다. 1초가 흐를 때마다 점점 초조해지는 마음을 다잡기 힘들어 뒷머리를 헤집으며 거실 이곳저곳을 배회했다.

그때,

“윤진… 아?”

등 뒤에서 그토록 그립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음 편에서 계속)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65)============================================================

금쪽같은 내 남친

한가린 장편 소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