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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쪽같은 내 남친-68화 (68/85)

68화

홍주석은 심각하게 썩은 내 낯을 보고서 하려던 말을 속으로 삼키고 가열차게 헛기침을 시작했다.

“…….”

그 앞에 앉은 나도 입을 열었다가는 욕만 나올 것 같아 빨대만 잘근잘근 씹었다.

“…….”

침묵이 길어지니 남는 것은 어색함 뿐이었다. 우리가 일 이년 보는 것도 아니고 입 닫고 마주 보고 있는다고 민망할 만큼 먼 사이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몇십 분이 넘도록 한마디도 하지 않는 것은 좀 문제가 있었다.

“야.”

정확히 우리가 대화를 멈춘 지 35분째, 참다못한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어.”

내 짧은 부름에 홍주석은 흠칫 놀라더니 우물쭈물 대답했다.

“나한테 할 말 없니?”

“으, 으으어?”

“뭐래. 똑바로 말 안 하냐.”

“어, 어. 그래. 할 말, 그래. 있지.”

뭐라는 거야. 어물쩡 대답하며 머리를 벅벅 긁는 홍주석이 꼴 보기 싫어 인상을 팍 썼다. 그러게 누가 눈치받을 짓을 하래? 마음 같아서는 머리통 날리고 싶은데 겨우 참고 있는 거야.

너 때문에 아주 되는 일이 하나도 없어!!

시훈이 연구소에 격리된 이후 내 애인 얼굴 좀 보자고 하다못해 메일이라도 주고받게 해달라 간청하고, 매달리고, 애원하고, 싹싹 빌어보아도 어디서 개가 짖나 식으로 무시하던 홍주석은, ‘내 애인 이리저리 굴려 회춘약 만들어서 평생 안 뒤지고 사실 작정?’이라고 메시지를 보내자마자 제 발로 기어 나와 머리를 조아렸다.

“홍주석아. 나 지금 터질 것 같은 거 엄청 참고 있거든? 같은 말 또 물어보게 하지 말고 똑바로 대답해.”

“…….”

“지금 너희 프로젝트에 문제 생긴 거 맞지?”

“…어휴. 그게 말이지 윤진아.”

“대답이나 해! 둘러댈 생각은 집어치우고!”

“아, 말할 거야. 할 거라고! 정리가 안 돼서 그러니까 잠깐만 있어 봐.”

“그 정리 지금 36분째 하고 있는 거 알고는 있어?”

“알아….”

본인도 답답한지 가슴을 퍽퍽 치면서 냉수를 들이켠다. 그리고 뭐라 말할 듯 입을 열었다가,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쉬었다가… 흡사 원맨쇼를 보는 것 같기도 하고 그냥 정신 줄을 놓은 것 같기도 하다.

다 식어버린 커피를 앞에 두고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대었다. 어깨가 아파 팔짱을 풀고 목 언저리를 두드렸지만 뻐근함은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비가 오려나. 왜 이래.

“저기. 윤진아.”

파스라도 붙여야 하나 생각하고 있는데 불쑥 홍주석이 입을 열었다.

“뭐.”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일단 미안하다.”

냅다 테이블에 머리를 갖다 박는다. 반응하기도 귀찮아서 심드렁하게 살짝 허전해진 정수리를 내려다보았다. 앞뒤 잘라먹고 미안하다 하면 내가 다 이해해 줄 줄 알았나 보지? 안됐지만 이번만큼은 절대 그냥 넘어갈 생각이 없다고.

“뭐가.”

“어, 엉?”

“다 알면서 모른 척 되묻지 말고. 네가 사과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을 거 아냐. 대체 뭐가 그렇게 미안하세요?”

“에이씨. 꼭 그걸 내 입으로 말해야 하냐?”

“알았어. 그럼 민 원장한테 보고하지. 뭐. 소속 연구원이 반인륜적인 실험을 일삼으면서도 함구하고 있다고. 대쪽 같은 민 원장이 차암 좋아하겠다. 그치?”

이 자식에게 말해 봤자 내 입만 아플 뿐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을 것 같아 지체없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러자 홍주석은 화들짝 놀라더니 당장 도살장에 끌려갈 것처럼 다급히 내 팔을 붙잡았다.

“야야야야! 안돼! 민 원장은 제발 끌어들이지 말아라. 그 사람 엮이면 골치 아파져.”

“골치 아플 건 뭔데. 원장이 결재했으니까 프로젝트 진행하는 거 아냐.”

“그건 맞는데… 민 원장 우리 프로젝트에 좀 회의적이어서 되도록 책잡힐만한 일 만들면 안 돼. 잘못 걸리면 나 잘릴지도 몰라.”

“뭐? 그럼 처음부터 우리 쪽이랑 하기로 계획된 프로젝트가 아니었던 거야?”

“그렇지. K제약에서 먼저 시작한 연구를 내가 끌고 온 거니까.”

“아, 네 마음대로 발 담근 거다? 원장 모르게?”

“벌려놓고 수습하는 게 결재받으려고 굽신대는 것보다는 낫겠더라고. 내 선에서 해결 안 되면 김태준 전무 손 빌리면 되니까.”

스스로를 야망캐라 칭하는 홍주석 박사는 예전부터 기존 것들을 개선해나가는 시시한(?) 일보다 누구나 헉할 만큼 큰 프로젝트에 참여하길 원했다. 특히 ‘YOUNG’ 프로젝트는 근 몇 년간의 연구 중 가장 화제성이 높았으니 어떻게든 끼고 싶어 안달이 났었을 테다.

하지만 JI센터의 수장 민 선우 원장, 그러니까 민 원장은 우리 원 소속 연구원들이 타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겨왔다. 거기에 더해 조금이라도 제 기준에 어긋나는 연구라면 특유의 경멸 어린 눈으로 노려보며 온갖 독설을 퍼붓는지라 그 누구도 감히 민 원장에게 섣불리 말을 꺼내지 못했다.

아마 ‘YOUNG’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싶다고 했다면… 그래. 뭐가 날아와도 날아왔겠지.

“그 인간 아무것도 안 하는 것 같아도 소식이 어찌나 빠른지… 여튼 그 사람 때문에 프로젝트 들어오고 나서도 초반에 관두네, 마네 말 많았어.”

“왜?”

“민 원장 성격 알잖냐. 이게 윤리적으로 맞는지부터 시작해서 활용 가능성, 지속 가능성 어쩌고 따져가면서 딴지 거는 거.”

“그런 것 정도는 원장이라면 당연히 물어야 하는 거 아냐?”

“아오. 이번에 지랄했던 거 생각하면 진심 퇴사하고 싶다. 생전 안 그러던 인간이 내 방에 직접 전화까지 해서 원래 가지고 있는 과제 잘리고 싶냐고 협박까지 하더라니까? 김태준 전무랑 엮이는 일은 절대 하지 말라고?”

“그 말에는 동의하는 바이다.”

고개를 끄덕이니 기분 나쁜지 이를 드러내고 노려본다.

이 지랄 맞은 프로젝트의 처음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K제약이 있고, 그 위에는 김태준이 있다. 뭐, 업계에서 김태준의 악명은 이미 차고 넘칠 정도로 높으니 경계심 많은 민 원장이 싫어할 만도 하다.

“아무튼… 그 시훈 씨 일은 미안하게 됐다. 나도 임상 단계가 늘어난 것까진 알았는데 그 정도로 무분별하게 실험하고 있는 줄은 몰랐어.”

“너희 프로젝트는 서로 교류라는 걸 안 하니? 오형석도 그렇고 왜 다들 몰랐다는 말만 하는 거야?”

“…오 박사님도 그랬어? 하하.”

“하하 웃을 게 아니라 이 정도면 좀 심각한 거 아냐? 책임자라는 놈들이 현황 파악도 제대로 못 하고 있으면 프로젝트는 누가 관리하는데? 김태준 전무? 그 사람은 경영인이지 과학자가 아니잖아.”

할 말을 잃은 홍주석은 입술을 삐죽이면서도 차마 반박은 하지 못했다.

나는 답답하고 기가 막혀 가슴을 치며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연구원이 된 이래 적지 않은 프로젝트를 진행해 왔지만, 이 정도로 상호 교류가 되지 않는 경우는 듣도 보도 못했다. 그것도 모자라 피실험자를 철저히 외부와 차단시키고, 무분별한 실험을 감행하다니.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는 당사자의 부탁만 아니었더라도 진작 검찰로 뛰어가서 고소장을 제출했을 것이다.

“어휴. 정말 지겹다. 지겨워. 맥주 한번 잘 못 마셨다가 별일을 다 겪는다.”

이건 과학자도 뭣도 아닌 인간 박윤진으로서의 한탄이다. 우리가 대체 무슨 잘못을 했기에 인생을 살면서 굳이 겪지 않아도 될 일을 겪어야 하는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도통 알 수 없었다. 나중에 얼마나 좋은 일이 있으려고 이러는 건지.

맥주 때문에 그만큼 데어놓고 답답하니 또다시 맥주 생각이 난다. 나도 참 나네. 정신 차리려면 멀었어.

“그런데 윤진아.”

스스로가 한심해 고개를 젓고 있는데 홍주석이 슬며시 말을 꺼냈다.

“이건 정말 내 개인적인 추측인데….”

추측? 뜬금없이 이 상황에서 무슨 추측인가 싶어 미심쩍은 눈으로 홍주석을 돌아보았다.

“우연치곤 희한하지 않냐?”

“뭐가. 또.”

“왜 하필 너희 동네 편의점에 그런 맥주가 흘러 들어갔고, 왜 하필 그 맥주를 시훈 씨가 가져와서, 하필 왜 그 캔을 마셨을까.”

“…시 쓰니? 짜증 나니까 결론만 말해.”

“아니, 내가 생각을 해 보니 어쩌면 실험 타겟이 이미 정해진 상태에서 프로젝트가 시작된 게 아닐까 싶은 느낌이 들더라고.”

“뭐라고? 너 지금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고 말하는 거야?”

“그러니까 추측이라고 하잖냐. 그냥 내 생각이라고!”

황당했지만, 사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아주 말이 안 되는 가설은 아니었다. 나도 누군가가 나나 시훈을 음해하려고 일부러 꾸민 일이 아닐까라는 음모론을 상상한 적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 가설 또한 어디까지나 확인되지 않은 추측일 뿐이고 어떠한 물증도 없으니 확신을 가지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하지만 홍주석은 다르다. 나보다는 프로젝트에 대한 정보를 많이 가지고 있을 것이고, 이 모든 것이 계획된 일이라는 가설은 어느 정도의 데이터를 바탕으로 수립된 것일 테다.

“정말 추측만이야? 그게 다야?”

“어??”

“너 솔직히 말해. 뭔가 더 알고 있지?”

“지, 진짜 모른다니까? 너 자꾸 나 의심할래? 이러면 뭐 다른 거 알아내도 말 안 해 준다?”

“협박하니?”

“그게 아니라, 너무 억울해서 그래!”

이것은 합리적인 의심이다. 인간 홍주석과 연구원 홍주석을 모두 알고 있는 박윤진의 의심. 아니나 다를까 흔들리는 동공이 모든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아, 모르겠다. 지나 보면 뭐든 나오겠지. 음모라고 생각하면 끝도 한도 없어. 그러잖아도 스트레스받아서 잠도 안 오는데, 걱정거리 불리고 싶지 않다.”

“…그래. 어디까지나 추측이니까.”

“결론은 너한테 뭐라 해 봤자 너는 전혀 몰랐던 일이고, 내가 더 왈왈 대어 봤자 아무 소용없다는 거지.”

“에휴… 미안하다.”

하지만 어깨를 추욱 늘어뜨리며 미안하다 하는데 오랜 동료이자 친구로서, 더 이상 몰아세우기에는 내 속이 더 쓰렸다. 어쨌거나 거짓말하는 것 같진 않으니 그냥 넘어가는 쪽이 속이 편하겠지….

나는 이게 문제다. 끝까지 물고 늘어져야 하는데 주변 사람의 상황이나 사정 때문에 눈치 보느라 일을 그르치는 것.

권시훈이 늘 걱정하던 나의 약점인데, 살펴줄 사람이 없으니 또 내 마음대로 하고 만다.

“그래도 내가 알아볼 수 있는 한은 최대한 알아볼게. 내 생각에도 이건 좀 아닌 거 같아.”

“소속 연구원도 세부 사항을 모르는 폐쇄적인 환경에서 뭘 더 캐내겠다고.”

“야. 속고만 살았냐? 내가 너랑 같이한 세월이 있는데 의리로라도 믿어 봐라. 적어도 너한테 손해 되는 일은 안 할 테니까.”

“…그래. 알아서 해.”

대답을 마치자 갑작스럽게, 파도처럼 피로감이 몰려와 등 뒤를 덮쳤다. 무겁게 가라앉으려는 어깨가 욱신거리고 눈두덩이가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그냥, 어서 집에 돌아가 침대 속에 파묻히고 싶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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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쪽같은 내 남친

한가린 장편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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