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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쪽같은 내 남친-69화 (69/85)

69화

여름방학이 시작되었다.

규하는 학교에서 나를 볼 수 없는 게 어지간히 슬펐는지 내 옷자락을 붙잡고 울먹였지만, 얼른 집에 돌아가고 싶었던 나는 김규하가 쫓아올세라 얼른 학교를 벗어났다.

“요새 누가 검은 머리를 해. 날도 더워지는데 염색해 보는 게 어때?”

“저는 아무거나 괜찮아요.”

“이렇게 기호가 없어서야… 이제 눈치 보지 말고 윤진 씨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되잖아.”

이런저런 기호가 없던 나에게 디자이너가 밝은 빛의 브라운 컬러를 추천해 주었다. 다소 튀지 않을까 걱정되었지만, 방학이니 괜찮겠지 싶어 웃으며 그냥 그렇게 해 달라 했다.

“역시, 내 안목이 맞았다니까. 앞으로는 고집 피우지 말고 내 말 들어요. 윤진 씨.”

몇 시간이 지났을까, 거울 속의 내 모습은 내가 맞나 싶을 정도로 바뀌어 있었다.

“그러게요. 제가 새로운 걸 해 보는 게 굉장히 오랜만이라. 좀 무서웠었거든요.”

“원래 안 하던 짓 하려면 누구나 다 무서운 법이에요. 그래도 사람이 어떻게 만날 똑같은 것만 하고 살아. 발전도 있고 변화도 있어야지.”

“그게 말처럼 쉽지가 않네요.”

“이왕 이렇게 된 거 머리 색만큼 긍정적으로 살아.”

“칭찬 감사합니다.”

“오늘 진짜 신경 써서 세팅했으니까 데이트라도 해.”

“데이트는 무슨…. 가 볼게요.”

괜히 씁쓸해져 자리에서 일어나 실장에게 인사를 건네니 실장은 웃으며 자리를 떴다.

“만날 사람이 있어야 데이트지. 뭐….”

마음이 헛헛해지는 것 같아 괜히 울리지도 않는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또다시 내 남자친구는 연락이 없다.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소식은 없으니 잘 지내고 있는 게 맞겠지만 어쩐지 기분이 쎄했다.

이제 곧 뭔가 일어날 것 같은 느낌.

drrr -

갑자기 진동이 연속으로 오기 시작했다. 깜짝 놀라 휴대폰을 들여다보니 한동안 조용하던 회사 단체 채팅방에서 오는 알람이었다. 곧 인사이동 시즌이 다가온다며, 주요 인사들과 주변 사람들의 거취를 묻느라 안팎으로 시끄러웠다.

걔 중 모두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뉴스는 단연 ‘YOUNG’ 프로젝트의 수장을 맡고 있는 김태준 전무의 거취였다.

유하나 연구원

여러분, 소식 들었어요? 김 전무 있잖아요.

기세나 연구원

김 전무 왜왜?? 무슨 일?

유하나 연구원

young 프로젝트 인원 충원한다고 하던데? 그러면서 우리 연구소 쪽 총괄로 내려온대!

기세나 연구원

엥? K제약 연구소는 어쩌고? 우리 쪽으로 내려오는 게 가능해?

유하나 연구원

나도 뭔 말인가 했는데 이번에 K제약에서 우리 연구소 인수합병 하려는 모양이야. 윗사람들은 다 알고 있다던데?

유하나 연구원

@홍주석 선임님! 이거 진짜에요???

홍주석 선임연구원

이야. 소문 빠르네. 공람 읽을 필요가 없네.

기세나 연구원

대박…

안성훈 연구원

벌써 발령 받아서 다음 주부터 출근이라고 하던데… 진짜입니까?

홍주석 선임연구원

이 쪽으로 출근 하실지는 잘 모르겠어. 아무래도 본사에 적이 있으신 분이니. 자세한 건 다음주에 공지 올라오면 확인하도록 해~

안성훈 연구원

퇴사각인가… 김 전무 일처리 진짜 살벌하게 한다고 소문이 자자한데.

기세나 연구원

전 K 부회장 정도로 승진 할 줄 알았는데 의외네.

유하나 연구원

그럼 인원 충원도 사실인가보네요. 거기 연구원들 이야기 들어보니 개빡세다고 하던데. 제발 지명 차출만 아니어라 ㅠㅠ

안성훈 연구원

ㅇㄴ 제발…

듣기에 김태준은 K제약의 지난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마친 공이 커, 부회장으로 승진을 할 거라 했다. 그런데 왜 굳이 프로젝트 하나를 위해 연구소를 인수합병하고 직접 실무에 뛰어든다고?

왜… 굳이?

김태준을 생각하니 그 새끼의 냉랭한 눈빛이 떠올라 절로 표정이 일그러졌다. 일전에 함께 일하자는 제의를 받았던 것도 마음에 걸리고, 그냥 그놈 얼굴을 보며 일할 생각을 하니 별로 내키지 않았다.

‘내가 얼굴 볼 일 있겠어. 홍주석이 알아서 하겠지.’

아무리 그래 봤자 높으신 임원님이 나와 마주칠 일이 얼마나 있을까 싶어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휴대폰을 다시 가방에 집어넣고, 잔에 남은 커피를 마저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 혹시… 박윤진 씨?”

계산을 마치고 숍을 나서려 하는데 전혀 반갑지 않은 목소리가 내 발길을 붙잡았다.

‘아… 하필.’

뒤돌아보지 않고 그냥 갈까 하다 예의는 차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심호흡을 한번 하고 미소 띤 얼굴로 목소리가 난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아, 안녕하세요. 하영 씨.”

“어머, 너무 오랜만이에요. 머리 색이 바뀌어서 혹시나 했는데. 진짜 잘 어울린다!”

“네… 감사합니다.”

하영은 내 직장 후배였다. 지금은 퇴사했으니 후배라고 하기도 뭣하다만… 직속은 아니라 자주 마주치지는 않았어도, 같은 연구실을 사용하고 있어, 얼굴 보면 인사는 하는 사이. 연구소에서는 꼬박꼬박 선배라고 하더니, 나이가 동갑이라는 이유로 퇴사 후에는 자연스럽게 윤진 씨라고 하는 게 영 거슬려 마주치기 껄끄러웠다.

“와아! 이렇게 보니 너무 반갑네요! 요새 뭐 하고 지내요? 아직 연구소 다니시나?”

“뭐… , 회사 다니죠.”

“이직하셨구나? 어디로요?”

“그냥, 관련 계열이에요.”

“정말요? 하긴 윤진 씨는 능력 있으니 어딜 가든 환영받겠네요!”

“네… 뭐.”

“회사는 어때요?”

“일하는 게 별다를 것 있나요. 다 똑같죠.”

“아, 그렇구나~ 애인은 있어요? 아, 혹시 벌써 결혼하셨나?”

조금 불편한 마음이 들어 대답을 망설였다. 하영은 내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눈을 깜박이며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알려줘서 안 될 건 없지만… 친하지도 않은 사람이 나에 대해 물어보는 게 언짢아 시선을 피해 그녀의 어깨 너머를 바라보았다.

“……어.”

그런데 저쪽에서 하영보다 더 익숙한 사람이 그녀의 뒤로 다가오고 있었다.

젠장. 남자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대번에 표정을 굳혔다. 나는 한숨과 함께 고개를 돌려버렸다. 하영은 일그러진 내 표정을 보더니 고개를 갸웃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우리 쪽으로 다가오던 남자를 향해 반갑게 인사했다.

“태준 씨! 빨리 왔네요? 나 기다릴까 봐 빨리 왔구나?”

큰 키에 날카로운 인상을 가진, 뱀의 눈을 닮은 남자.

방금까지 내 심기를 어지럽혔던 김태준 전무였다.

“기다렸습니까. 일이 좀 늦어져서.”

“흐응. 그래도 태준 씨가 데리러 오니까 기분 좋네? 아! 윤진 씨. 이분은 김태준 씨예요. 태준 씨. 이분은 제 전 직장 선배님. 박윤진 박사님이세요.”

“…….”

어떻게… 김태준이 이하영이랑 같이.

주먹을 꽉 쥐었다. 온몸이 부들부들 떨려왔지만, 밭 끝에 힘을 주고 입술을 깨물며 참았다. 김태준의 상황도 별 다를 바 없었는지 멍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응? 두 사람 아는 사이에요?”

기류가 심상찮음을 느낀 하영은 나와 김태준을 번갈아 보며 물었다.

“좀 예전에. 알았어요.”

명치끝이 끓어오르는 것 같았지만, 표정을 갈무리하며 겨우겨우 목소리를 내었다.

“아아, 그럴 수도 있겠네요. 태준 씨도 어쨌든 윤진 씨랑 같은 업계이니 어디선가 봤을 수도 있겠어요.”

아니, 아니야. 우리는 그렇게 아는 사이가 아니야.

“그런데 두 사람은 어떻게…?”

“아, 태준 씨. 제 남자친구예요.”

거침없는 하영의 발언에 김태준은 당황해 얼굴을 붉히며 그녀를 제지했다.

“하영 씨!”

“응? 왜요? 비밀은 아니잖아요. 곧 결혼도 할 건데. 이 사람, 재혼이라고 저한테 무슨 죄지은 것처럼 이렇게 안절부절못한다니까요? 요새 이혼이 뭐 흠이라고.”

“아무리 그래도 지금 여기서 이런 말 하는 건 좀….”

“네? 왜요?”

“…아닙니다.”

머리부터 피가 쭉 빠져나가는 것 같은 현기증을 느꼈다. 갑작스레 맞닥뜨린 것도 모자라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에게 굳이 듣고 싶지 않은 소식을 전해 듣고 말았다.

“…그렇죠. 요새 이혼이 죄도 아니고. 비밀로 할 일은 아니죠.”

“어머, 축하받자고 일부러 말한 건 아닌데, 어쨌거나 고마워요.”

아무것도 모르는 하영은 그저 밝게 웃을 뿐이었다.

항상 포커페이스에 차가운 표정으로 일관하던 김태준의 보기 드문 당황한 표정이 참으로 가관이었다.

“뭘요, 두 분 잘 어울리시네요. 다음에 뵈면 식사라도 해요.”

“미안해요. 제가 너무 오래 붙잡아 두었죠? 윤진 씨 번호 그대로예요? 결혼 전에 청첩장 줄게요. 태준 씨랑도 아는 사이라면 꼭 오셔야겠네요. 제가 연락드릴게요. 알았죠?”

“…네. 연락주세요. 저는 일이 있어서 먼저 가 보겠습니다.”

끝까지 김태준은 한마디도 하지 않고,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기만 했다. 뭘 어쩌라고.

나는 하영에게 가볍게 묵례를 하고 도망치듯 숍을 빠져나와 차로 도망쳤다. 등 뒤에서 누군가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못 들은 척 무시하고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탁.

“후….”

망할 놈.

차 문이 닫히자 참았던 욕설이 튀어나왔다.

그냥 너무 짜증 났다. 왜 하필 방학의 시작에 개새끼의 소식을 듣게 되었고, 낯짝까지 보게 될 줄이야. 운도 지지리도 없지. 차라리 하영을 모른 척하고 지나갔으면, 김태준의 존재도 알 수 없었을 텐데.

RRRR-RRRR.

조수석 시트에 아무렇게나 던져둔 휴대폰이 웅웅대며 진동을 울렸다. 발신자를 확인하지 않아도 누구인지 알 것 같아, 그냥 무시하고 차에 시동을 걸었다.

RRRR-RRRR.

액셀을 꾹 밟으며 차를 출발시켰다. 주차장을 빠져나와 큰길을 지나고, 교차로를 통과해 집에 도착할 때까지도 진동은 멈추지 않았다.

“개새끼.”

진동음이 길어질수록 내 속의 화도 점점 끓어올랐다. 하지만 풀어낼 곳이 없는지라 나는 운전대를 주먹으로 쾅쾅 두드리며 화를 쏟아 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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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쪽같은 내 남친

한가린 장편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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