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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쪽같은 내 남친-70화 (70/85)

70화

기분을 완전히 망쳐버려 정처 없이 방황했다. 운전대를 꽉 잡아도 보고, 음악을 크게 틀어 보아도 답답한 마음이 가시질 않았다.

나는 왜 화가 난 것일까. 동경했던 사람의 재혼 때문에? 절대 그럴 리 없다. 무려 10여 년이나 지난 일이다. 나는 처음부터 김태준이 결혼을 했든, 재혼하건, 또 이혼하고 새사람을 찾는 것은 나와는 관련 없다 생각해 왔다. 그 새끼의 연애사업 따위는 나와 아무런 관련이 없었으니까.

그런데 왜? 어째서 속이 뒤집히는 것 같고, 목구멍이 바짝 타는 것 같은 걸까. 질투가 아니라면 이 분노는 어디에서부터 온 것일까.

이하영의 눈치 없다 할 만큼 밝은 미소, 그 옆에서 곤란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던 김태준. 혹여 내 입에서 재혼에 방해되는 이야기라도 나올까 전전긍긍해 초조함이 묻어나오던 눈빛. 그래, 그 눈빛이 문제였다. 처연하고 사연 있어 보여 마치 나에게 용서를 구하고자 하는 듯한.

이하영 앞에서 착한 척하던 그 눈깔이 자꾸 떠올라 뺨을 손바닥으로 찰싹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때렸다. 하지만 정신이 들긴커녕 오히려 멍하고 욱신거리는 느낌만 남았다.

웃기지도 않지. 내가 구렁텅이에 떨어져 있을 때는 모른 척 등 돌려놓고선. 그것도 모자라 뻔뻔히 다시 내 앞에 나타나 일상을 들쑤시고 내 전부나 다름없는 권시훈마저 빼앗아갔으면서.

“되는 일이 없네.”

정말, 아무것도 뜻대로 되는 게 없다. 아무래도 이 정도면 권시훈, 김규하, 김태준… 아무튼 주변의 모든 놈이 이 악물고 내 인생을 망치려는 게 아닐까 싶다.

“…….”

정신을 놓고 도로를 달리다 보니, 해는 이미 넘어가 주변이 깜깜해진 뒤였다. 이 와중에 밤 운전은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어 집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터덜터덜 동네로 나왔다.

목적지는 없었다. 발길이 멈추는 곳에 들어갈 요량이었다.

“권시훈은 뭘 하기에 하루 종일 연락이 없어. 정말 무슨 일 있는 거 아니겠지.”

습관적으로 휴대폰을 꺼내 보았다. 모르는 번호로부터 와 있는 수십 건의 부재중 전화와 메시지 – 아마 김태준이겠지. 그리고 홍주석과 오형석으로부터의 톡, 규하의 부재중 전화.

하지만 정작 기다리고 있는 사람에게는 여전히 연락이 없다.

전화를 해 볼까 하다 관뒀다. 바쁘니 연락이 없겠지. 어차피 걸어도 받지 못할 것이다. 혹여 받더라도 시훈이 아닌 오형석이나 홍주석일 테고, 이 기분에 내 남자친구가 아닌 다른 놈 목소리라도 들었다간 분노의 폭주를 멈추지 못할 것 같아 작은 기계를 주머니 속에 쑤셔 넣고 발걸음을 옮겼다.

-월야-

월야는 동네 골목 어귀에 있는 작은 술집이다. 혼자 자주 방문하기도 하고 시훈과도 자주 들렀던 곳이다. 약간 우리만의 아지트랄까.

테이블도 없는 10평 남짓 되는 공간에 나무로 만들어진 바는 많아야 5명 정도 앉을 수 있었다. 워낙 구석에 숨어 있어 아는 사람이 많지 않은지, 갈 때마다 손님은 나와 혹은 시훈뿐이었다.

주인장도 돈을 벌려는 목적보다는 본인 취미생활 정도로 운영하는 가게인지라 손님이 들어와도 특별히 살갑게 말을 걸거나 하지 않아, 마음이 복잡할 때마다 방해받지 않고 생각하기 좋았다.

제 주인의 마음을 어찌 알고, 발은 착실하게 이곳으로 윤진을 안내한 것이리라. 하지만 반면, 제 주인의 마음을 전혀 모르는 휴대폰은 진동 하나 없이 잠잠했다. 괜시리 착잡해져 오늘은 더 이상 시훈에게 연락하지 않기로 속으로 다짐했다.

드륵 -

허름한 미닫이문을 여니, 이 시간에 정적에 휩싸여 있어야 정상인 가게 안에는 어쩐 일로 누군가의 대화 소리가 웅웅 퍼지고 있었다.

“어후, 무슨 냄새가 이렇게 독해.”

문을 열자마자 농밀한 블랙 체리 내음이 공기를 타고 훅 끼쳐와 손으로 코를 틀어막고 인상을 썼다. 역할 정도로 진한 향에 절로 속이 울렁거려 손을 휘휘 저어 보아도 쉬이 향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런 후미진 술집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화려한 향인데… 대체 어느 손님이 이런 향수를 쓰는 건가 싶어 고개를 빼고 안을 둘러보았다.

한 칸, 두 칸 눈을 들고 확인하다 시선 끝에 두 남녀가 보였다. 그들은 나란히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연인인가. 퍽 다정해 보이는 모습에 배알이 꼴려 그냥 나갈까 하다 여기까지 온 걸음이 아까워 제일 구석 자리에 앉으려고 발걸음을 옮겼다.

아니, 옮기려 했다.

“…?”

문득 고개를 돌려 보니 바깥쪽에 앉은 남자 손님의 얼굴이 매우 익숙했다.

익숙하다 못해, 실루엣만 봐도 알아볼 수 있을 단정한 옆얼굴. 가지런히 뻗은 속눈썹과 끝이 둥글지만 날렵한 콧대. 붉고 도톰한 아랫입술.

“…아.”

권시훈이었다.

그런데 혼자가 아니었다.

문고리를 잡은 자세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의 옆자리에 앉은 사람은 금발의 머리칼에 하얀 피부를 가진 여성이었다. 스쳐 지나가다 보더라도 미인이라고 엄지를 치켜세울 만한 화려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두 사람은 열린 문틈 사이로 눅눅한 바람이 밀려 들어와도 전혀 개의치 않고 서로를 마주 보고 웃고 있었다.

봐서는 안 될 것을 본 기분이었다. 어린 시절 엄마 몰래 야한 만화책을 빌려왔을 때보다 훨씬 더 심장이 떨리고 기분이 이상했다. 두 사람은 아름다웠다. 그리고 너무도 잘 어울렸다. 서로를 향해 웃고 있는 얼굴이 행복해 보였다.

그래서 감히 내가 끼어들어도 될까라는 생각이 들자, 나도 모르게 주춤 발이 뒤로 물러났다.

“손님, 안 들어오고 뭐 하십니까?”

그때, 한참 문 앞에 서 있던 나를 발견한 주인장이 그에게 말을 붙여왔다. 그와 동시에 끝자리의 남녀가 나를 바라보았고, 남자와 정면으로 눈이 마주친 나는 그대로 몸이 굳어버려 움직일 수 없었다.

착각했다. 다시 보니 남자는 권시훈이 아니었다.

“문 오래 열어두면 벌레 들어와요! 얼른 들어오세요.”

“다, 다음에 올게요. 죄송합니다!”

주인장의 재촉이 이어지자, 나는 그제야 화들짝 놀라 문을 닫는 것도 잊고 빠르게 골목을 벗어났다.

닥치는 대로 내달렸다. 나는 왜 도망가고 있는 걸까. 이유 따위는 알지 못했다. 남자와 눈이 마주친 순간, 시훈이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챘었지만 좀처럼 발을 멈출 수 없었다.

얼마나 뛰었을까. 집 앞까지 도착하자 터질 것 같은 심장을 부여잡고 밭은 숨을 내쉬었다.

“허억, 허억.”

미친 듯이 뛰어서인지, 권시훈을 닮은 사람을 우연히 목격해서인지, 아니면 그 사람이 여자랑 있었던 게 충격이었는지, 귓속에서 맥박이 쿵 쿵 쿵 요란한 소리를 내며 울려댔다.

문을 열자마자 났던 블랙 체리 향은 아마 그 여자의 것이었으리라.

속이 매슥거렸다. 나와는 관련 없고, 이름 모를 사람들인데 그 여자가 권시훈과 닮은 사람과 마주 바라보고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기분이 나빴다.

“하… 기분 진짜 더럽네.”

남자는 내가 처음 보는 옷을 입고 있었고, 손가락에 반지가 없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목구비가 닮았다 뿐이지 전체적인 인상이 달랐다.

그리움이 만들어 낸 일시적인 내 착각이 분명했다. 분명했는데… 충격은 쉽사리 가시지 않았다. 순간 내게 권태로움을 느낀 권시훈이 나 몰래 여자를 만나는 건가 싶어 억장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오죽했으면 권시훈이 아이가 되었던 것도, 지금 연구소에 들어가 연락 두절이 된 것도 다 의도된 건 아닐까 하는 의심마저 들었다.

그건 아니지. 절대 그럴 리가 없지. 권시훈이 나를 내칠 리가 없잖아. 넌 죽어도 날 떠나지 않을 거잖아. 언제나 그 자리에 내 옆에 있을 거잖아.

심각한 집착이었다. 나는 이따금 시훈에게 그만 집착하라고 짜증 냈지만 사실, 필요할 때마다 습관적으로 시훈을 찾는 버릇을 그만둬야 할 사람은 바로 나였다.

그길로 택시를 타고 도망갔다. 김태준과의 만남으로 기분이 더러워져 소주나 한잔 마시고 털어버리려 했는데… 재수 없는 일은 한 번에 일어난다더니 틀린 말은 아니었구나.

“…….”

차창 밖으로 흩어지는 야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충동적으로 도망을 택했지만, 무엇을 위한 도망일까. 그 남녀는 내가 누군지조차 모를 텐데. 나에게 그 남자를 닮은 연인이 있다는 것은 금시초문일 테고.

“뭐 안 좋은 일 있어요? 젊은 친구가 표정이 왜 그래.”

무겁게 가라앉은 택시 안의 공기가 어색했던지, 택시 기사가 조심스럽게 말을 붙여왔다.

“아, 제 얼굴이요?”

“그래. 잔뜩 굳어 가지고 말이야. 화가 어지간히 났나 봐.”

“아뇨. 화는 무슨….”

“애인이랑 싸웠어?”

“에? 애인이요? 아니에요.”

“딱 봐도 애인이랑 싸운 얼굴이구만. 뭐.”

“…….”

그 애인은 지금 연락 두절이라 싸울 수도 없어요.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속이 답답해져 차창에 머리를 기대고 한숨을 내쉬었다. 화가 났다기보다는, 당장이라도 눈물을 쏟고 싶었다.

택시 기사의 시선이 백미러 너머로 느껴졌다. 아마 내 눈치를 보는 모양이다.

“…뭔지 모르겠지만, 그냥 화해해요. 헤어질 것도 아니잖아.”

“헤어질… 수가 없죠.”

얼굴도 볼 수 없는데 헤어지는 게 가능할 리가 없잖아요.

“지나고 나서 후회하지 말고 있을 때 잘해요. 언제까지 옆에 있을 것 같은데, 그게 아니더라고. 다 겪어봐서 이야기하는 거야.”

지나간 인연이라 하면 나에게는 그런 사람은 없다. 나는 자연스럽게 ‘지나갈지도 모르는’ 인연을 떠올렸다.

‘권시훈….’

멀어지고 나니 우리 사이에 벌어진 틈이 신경 쓰인다. 항상 함께였기에 알아채지 못했던 서로에 대한 의심과 실망, 서운함이 틈 사이로 툭툭 튀어나오며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내 탓일까. 아니야. 내가 얼마나 너를 사랑하는데. 난 최선을 다했어. 네가 조금 더 노력해 줬으면 이런 일 없었잖아. 네 탓이야. 네가 곁에 없었기 때문이야.

결국 곁에 없는 연인을 원망한다. 7년 내내 받기만 해 놓고 아직도 상처받을까 봐 나를 온전히 내주지 못한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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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쪽같은 내 남친

한가린 장편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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