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쪽같은 내 남친-71화 (71/85)

71화

연락이 올 데도 없으면서 오기로 휴대폰을 꺼버리고 H호텔 스카이라운지 바로 향했다.

사람 없고, 누구도 나에게 말을 걸지 않은 분위기가 꽤 마음에 들어 아무도 마주치고 싶지 않을 때, 또 괜히 술 한잔에 비싼 돈을 지불하는 사치를 부리고 싶을 때 이따금 찾는 곳이었다.

“어휴….”

올 때마다 느끼지만 장사가 되긴 할까 의심스러울 정도로 내부는 조용했다. 차라리 다행이다 싶었다.

바 한쪽 구석 자리에 자리를 잡고 앉아 헤네시 샷을 단번에 비워냈다. 평소라면 각오하고 넘겨야 하는 독한 술이지만 오늘은 쓴지도 모르겠다. 그 정도로 기분이 더러웠다.

이제 막 한 잔째인데 벌써 취할 것 같은걸. 하지만 여기서 뻗어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오늘은 집에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아주 혹시나 갈 곳 잃은 내 이성이 집 대신 월야로 쳐들어가 깽판을 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잠은 곧 죽어도 집에 가서 자야 하는 집돌이 박윤진을 권시훈이 또 흔들어 놓고 말았다. 대체 하루에 뭔 놈의 일이 이리도 많이 일어나는지. 완전히 지쳐버려 한숨만 나온다.

이상하게도 김태준과 이하영의 모습은 흐릿하게 자취를 감춰버리고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행복하게 웃고 있던 시훈을 닮은 남자와 이름 모를 그녀의 얼굴이 자꾸만 떠오른다.

어이없다. 그리고 허탈했다. 그런데 뒤이어 따라오는 감정은 ‘화’ 였다.

대체 왜? 무엇이 그렇게 나를 화나게 했을까. 돌이켜 보면 정말 아무 일도 아니었는데.

“이제 배가 불러서 별 쓸데없는 고민이나 하고 혼자 심란해하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 분노의 이유가 또렷하지 않았다.

지금 내 곁에 권시훈이 없어서? 월야 그 자리에는 권시훈을 닮은 남자와 여자가 아닌, 진짜 권시훈과 박윤진이 있어야 했어서? 정말이지 알량하고 쪼잔하기 그지없는 핑계였고 치졸하기 그지없는 질투였다.

머릿속이 시끄러우니 필요한 건 알코올뿐이었다. 두 번째 잔을 집어 들고 망설이지 않고 입 속으로 털어 넣었다.

대상과 이유가 구체적이지 않은 부정적인 감정은 되레 스스로를 괴롭게 만들 뿐이니 차라리 이렇게라도 다 잊고 털어 버리는 게 나았다.

“그렇게 마셔대다 급성 알코올 중독 걸려서 쓰러집니다.”

“히익!”

나는 난데없이 튀어나온 목소리에 놀라 꼴사나운 괴성을 터트렸다. 고개를 돌리니 바 맨 끝자리에 웬 남자가 벽에 등을 기댄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아까는 왜 안 보였지? 별로 어둡지도 않은데 사람이 앉아 있다는 것도 몰랐다고? 나 혹시 노안인가?

“박윤진 씨, 우리 꽤 구면인데 얼굴 봤으면 아는 척 정도는 하죠?”

구면? 아는 척? 뜻밖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남자를 바라보았다.

저 남자는 날 아는 것 같은데 어둑한 모습만 봐서는 도통 기억해 낼 수 없었다.

누구지? 베일만큼 멀끔한 정장을 차려입은 걸 보니 꽤 잘나가는 사람인 것 같고, 보는 사람을 얼려 버릴 듯한 냉한 눈이 보통 성격은 아닌 것처럼 보였다.

흰 피부에 대비되는 붉은 입술, 생각을 읽을 수 없는 그 무표정. 그와 대비되게 잔 끝을 훑는 가늘고 기다란 손가락이 꼭 무언가를 연주하는 것 같이 토독, 토독 소리를 내며 느릿하게 움직였다.

토독, 토독. 규칙적인 소리를 듣자 기억 끄트머리에 박혀 있던 누군가의 이름이 떠올랐다.

딱 일 년에 4번, 그것도 본부에 들어가야만 만날 수 있는 대에단하고 비싼 사람.

“아, 원장님. 안녕하십니까.”

“…네. 안녕합니다.”

민 원장. 본명 민선우. 성별 남자, 나이 모름. 중학교 때 이미 대학과정을 마친 후 세계 각국을 돌며 강의와 이런저런 연구에 참여 하다, 3년 전 최연소 원장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우리 연구소에 입성했다.

민 원장은 본원에 있고, 나는 근무지가 분원인지라 물리적인 거리뿐 아니라 진행하는 연구과제도 상이했다. 때문에 분기별 성과발표나 공동 과제가 아니고선 그를 좀처럼 볼 일이 없었다. 오죽했으면 우리 원 사람들은 그를 유니콘이라고 지칭할 정도로. 그런데 그 얼굴 보기 힘들다는 민 원장을 호텔 바에서 보게 될 줄이야.

“여기는 어쩐 일입니까? 박윤진 박사가 이런 곳에서 술을 즐길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저는 이런 곳에 오면 안 됩니까.”

“음, 미안합니다. 삐딱하게 들으라는 의도는 아니었는데.”

“기분이 너무 더러워서 술 좀 마시려고 왔습니다. 얼마나 더러운지 소주로는 안 될 것 같아서요.”

“아, 기분이 뭐 같으면 독주만 한 게 없지.”

민 원장은 잠시 말없이 나를 바라보더니 이내 몸을 일으켜 천천히 내 쪽으로 다가왔다. 갑작스럽게 다가오기에 무의식적으로 어깨를 움츠리며 위를 올려다보았다.

그가 몰고 온 공기에는 옅은 담배 향이 났다.

“한 잔 더 해요.”

어느새 내 옆자리에 자리 잡은 민 원장은 스윽- 내 앞으로 알코올이 가득 찬 잔을 내밀었다.

“아, 네. 감사합니다.”

가볍게 감사를 표하고 술잔을 입가에 가져다 대었다.

“으윽.”

그런데 썼다. 써도 너무 썼다. 입 안이 온통 불쾌한 향으로 꽉 차버린 것 같아 나도 모르게 인상을 팍 찌푸리고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러자 민 원장은 제 앞에 있던 잔을 내 쪽으로 밀어주었다. 방금까지 내가 마시고 있던 헤네시였다.

“독주 필요하다길래 술 잘하는 줄 알았는데 제 판단이 틀렸네요.”

“아, 아닙니다. 너무 놀라서.”

“마시던 거나 마셔요. 새로운 건 나중에 천천히 경험해도 되니까.”

그 말을 끝으로 민 원장은 더 이상 나에게 말을 걸지도, 질문하지도 않았다.

당황한 것은 오히려 내 쪽이었다. 들을 필요가 없어서였을까. 직장 상사를 최악의 상태에서 만나 갖은 질문을 당할 거라 생각했는데 예상과는 다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이 타이밍쯤이면 왜 기분이 더럽냐, 이 시간에 왜 혼자 이곳에 왔느냐, 애인이랑 싸웠냐 등등… 관심을 가장한 오지랖이 나와야 당연한데, 민 원장은 그저 술을 한 잔 더 주문할 뿐이었다.

“그런데… 정말 말씀 없으시네요.”

“상대방이 대답하고 싶지 않은데 이것저것 말 붙이는 행동이 실례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으니까?”

“그래도 아무것도 안 물어보시니 어색하네요.”

“그렇다면 예의상 한 번 물어볼게요. 혹시 실연당했습니까.”

“아니요.”

진짜 실연당하지는 않았지만 어쩐지 차인 기분이라고 말하지 못해 앞에 놓인 술을 단숨에 비워내었다.

“한 잔 더 필요한가요?”

“…네.”

내 대답에 민 원장은 바텐더를 부르더니 이름을 알 수 없는 술을 주문했다. 이윽고 작은 잔에 금빛으로 반짝이는 술이 앞에 놓였다. 그게 뭔지 궁금하지도 않아 잔을 들고 단숨에 들이켰다. 식도부터 위장까지 독한 알코올이 타고 내려갔다.

“급하게 마시면 체합니다.”

“술에 체한다는 이야기는 처음 듣네요.”

“처음 듣겠지. 내가 방금 지어냈으니까.”

농담 따위와는 벽을 쌓은 얼굴을 하고 개소리를 지껄이는 민 원장을 황당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영 의중이 구분되지 않는 대답을 내뱉고 난 그는 잔을 만지작거릴 뿐, 여전히 표정이 없었다.

어색하다.

쓸데없는 사설이 없어 좋긴 한데, 사람이 옆에 있는데 없는 것처럼 조용하니 괜히 긴장되었다.

뭐라도 말해야 해. 절대 저 찬 기운이 풀풀 풍기는 인간과 친해지고 싶지 않지만, 이 어색함을 타파하기 위해서는 시시콜콜한 잡담이라도 필요하다.

“그나저나… 원장님은 여기 어쩐 일이세요? 그것도 혼자서.”

“미친 사이코 냉혈한이 친구가 있겠습니까.”

“…….”

“그것뿐입니까? 때와 장소 안 가리고 선비질 해대서 이젠 아무도 저랑 놀아주지 않습니다.”

“하… 하. 농담을 참 재밌게 하시네요.”

선비질이라는 단어까지 사용하는 걸 보니, 그는 사내에서 떠도는 자신의 별칭을 모두 알고 있는 듯했다. 매사 무심하다 여겼는데 알고 보니 저 사람은 천리안에 소머즈급 청력을 가지고 있나 보다.

심지어 맨 처음 미친 사이코 냉혈안이라고 말했던 건 다름 아닌 박윤진이었다. 혹시 내가 욕하는 것도 어디선가 듣고 있었나.

괜히 찔려서 모른 척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다행히 민 원장도 더 추궁할 생각은 없었는지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말을 돌렸다.

“윤진 씨야말로 이 시간에 혼자 온 거 보니 심하게 까였나 보네.”

“…아닙니다. 까일 거리도 없는걸요.”

“그렇다면 다행이고.”

“…진짜입니다.”

“아, 못 믿는 것 같아서?”

“아닙니다.”

더 말해도 믿어 줄 것 같지 않아 말없이 술잔을 기울였다. 슬쩍 보니 민 원장은 전혀 취기가 없어 보였다.

그리고 민 원장은 퍽 좋은 술 동무였다. 잔이 비면 다시 채워 넣고, 채워지면 다시 비웠다. 질문은 깊지 않았고, 딱히 궁금해하는 기색도 없었다. 이따금 대화의 물꼬를 트면 몇 마디 거들어 주는 게 다였다.

“정말… 원래 이렇게 말이 없으세요?”

“같은 질문을 두 번씩이나 하는 거 보니 어지간히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네. 내가 박윤진 씨 옆에서 조잘조잘 떠들었으면 합니까?”

“아니, 그건 아닌데, 너무 조용하시니까.”

“원래 말이 많은 편은 아니라… 굳이 말하자면 듣는 쪽이라고 해두죠.”

“아, 저도 그런데… 하하.”

“특히 오늘은 박윤진 박사가 기분 더러워 보이니 기분 풀릴 때까지 기다려 줄까 싶어서 자리 지키고 있는 겁니다.”

그냥 남한테 관심이 없는 타입인 줄 알았는데, 그 침묵이 사실 자신을 배려하고 있다는 것에 조금 미안해졌다. 그런 줄도 모르고 속으로 저 인간은 왜 입 꾹 닫고 술만 처먹고 있나 했지.

‘넌 왜 아무것도 안 물어봐?’

‘물어봐 뭐 하나. 들어서 좋은 것도 아니고.’

‘권시훈. 넌… 참 무심해.’

‘무심한 게 아니라. 모르는 게 약일 때도 있는 거야.’

‘그래도 궁금하지도 않냐고.’

‘알면.’

‘…알면?’

‘자기 마음 아프게 한 그 새끼 내가 가서 죽여 버릴 수도 있을 것 같아서.’

“…….”

문득 누군가가 생각이 나, 휴대폰을 꺼내 보았다. 전원이 꺼진 휴대폰 액정이 새까맣게 빛나며 내 마른 얼굴을 비췄다.

아직도 실험 중이려나. 아니야. 시간이 몇 시인데 아직도 일을 시키겠어. 전화 한번 해 볼까. 아니야. 내가 괜히 전화 걸었다가 사이클 망가지면 어떻게 해. 그냥 미친 척하고 진상 짓 한번 해 볼까. 아니야. 내가 무슨 권리로. 연구 책임자도 아니면서.

나는 이성과 감정 사이에서 잠시 고민하다, 이내 그만두고 휴대폰을 민 원장에게 건네었다.

“…뭡니까.”

“이거 좀 맡아주세요.”

휴대폰과 나를 번갈아 바라보는 그의 얼굴에 처음으로 표정이 떠올랐다. 의아한 듯 눈썹이 꿈틀 움직였고, 질문하고 싶어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혹시 제가 술 마시고 누구한테 전화해서 진상 부릴까 봐요.”

“진상이요?”

“네. 그러니까 달라고 해도 주지 마세요.”

“부탁입니까?”

“네. 부탁입니다.”

민 원장은 그 말에 피식 미소 지었다. 날카롭던 눈매가 휘어지며 그의 냉한 기운이 조금 물러갔다.

저 사람도 웃을 수 있구나. 해사한 시훈의 웃음과는 다른 느낌이었지만, 웃는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어쩐지 그와 조금 더 가까워진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어떻게 알지? 누구한테 진상 부릴 거 같다고.”

“…그런 게 있습니다.”

어제만 됐었더라도 예전과 같이 전화를 걸어 어디 있냐며, 어서 돌아오라며 밑도 끝도 없이 투정을 부렸을 테다.

하지만 오늘 알아버렸다. 권시훈과 박윤진은 어디까지나 타인이고, 그저 긴 시간을 함께 알아 왔을 뿐, 언제든 서로를 떠날 수 있는 위태로운 사이라는 것을.

어쩌면 저 먼 미래에는 우리의 옆에 각자 다른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다음 편에서 계속)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71)============================================================

금쪽같은 내 남친

한가린 장편 소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