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애인?”
“네.”
“왜?”
“그 이상은 사생활입니다.”
“제발 물어봐 달라고 죽을상을 하고 있으면서 사생활이라고 입을 닫아버리는 건 무슨 심보입니까.”
“그러게나 말입니다. 에휴….”
민 원장은 황당한지 헛웃음을 내뱉더니 한숨짓는 나의 옆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보거나 말거나, 나는 어깨를 늘어트리고 연거푸 술잔을 비워대었다.
“무슨 일인지 말해 줄 수는 없고?”
“조금 전까지 전혀 관심 없으신 것 같았는데, 사실 궁금하셨나 봐요.”
“궁금하니 물어보는 거 아닐까.”
“말해도 몰라요. 어쩌면… 아니, 그냥 내 문제인 것 같아요.”
불현듯 답답해져 고개를 떨어뜨리며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술잔에 비친 내 눈을 보았다. 울지도 않았는데 눈꼬리가 발개져 있었다. 이 꼴을 보고도 아무 말 없는 민 원장도 참 대단하다. 시훈이었다면 대번에 눈썹을 늘어뜨리고 걱정할 텐데.
적당히 취기가 올라와 몸이 살짝 달아오르고 몽롱해졌다. 반면 기분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무겁게 늘어 붙은 향은 바람에도 날아가지 않고 끈질기게 내 옷자락에 붙어 있었다.
“…?”
문득 시선이 느껴져 반쯤 감았던 눈꺼풀을 올리며 민 원장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그는 무미건조한 표정이었다.
그런데 그의 눈과 마주친 순간, 무언가 뒤틀린 기분에 등 뒤가 서늘해졌다. 왜인지 앞으로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 닥칠 것만 같았다.
“문제라.”
“…….”
“나한테 휴대폰 맡긴 것과 관련 있는 문제인가 보네요.”
“…아닙니다.”
“아, 혹시 김태준 전무 결혼하는 것 때문에 그러나?”
민 원장의 입에서 김태준의 이름이 나오자 절로 눈이 휘둥그레 뜨여졌다. 나는 빈 잔을 손가락으로 빙글빙글 돌리다 말고 그를 바라보았다.
“원장님이 김태준 전무를 어떻게 아세요?”
나의 물음에 민 원장은 반쯤 엎드려 있던 허리를 일으켜 앉았다.
“일단 ‘문제’의 범주에 김태준은 포함되지 않는 모양이군.”
“…네?”
“박윤진 박사. 저번부터 물어보고 싶었는데.”
“…?”
“나 기억 못 하는가 보네?”
“…네?”
정말로 당황해버려 입술을 벌린 채, 민 원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게 무슨 일이야? 저 사람은 김태준 전무뿐 아니라 박윤진도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언제 어디서 어떻게 만났는지 도통 기억이 나지 않았다.
민 원장은 언뜻 스쳐 지나가도, 뇌리에 박힐 만한 수려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만약 어디선가 내가 그를 보았다면 기억 못 할 리 없을 만큼.
“하긴 그럴 수도 있겠군. 워낙 오래된 일이니.”
“원장님. 저는 대체 무슨 상황인지… 모르겠는데.”
미치겠다. 대체 내가 저 인간을 어디서 봤지? 그리고 민선우는 김태준을 어떻게 아는 거지? 아무리 기억을 뒤져보아도 민선우와 김태준 그리고 박윤진의 접점이라곤 같은 분야의 전공을 했다는 것 정도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김태준 전무랑 나랑 대학 동기거든.”
“네? 원장님은 중학교 때 대학과정 미쳤다고 들었는데…?”
“남들이 말하는 캠퍼스의 낭만이란 게 얼마나 대단한 건지 경험해 보고 싶어서 나이 채우고 몇 년 다녔어요.”
“…아. 경험. 네. 그럴 수도 있겠네요.”
젠장. 망했네. 나는 속으로 욕설을 내뱉으며 드럽게 좁은 이 업계를 저주했다.
이래서 어디서 죄짓고 못 산다더니. 민 원장까지 김태준이랑 엮여 있을 줄이야. 김태준 이름이 나왔을 때부터 낮의 일이 생각 나 시원하게 욕이라도 해 줄 참이었는데, 아쉽게도 나의 상사는 김태준과 꽤 안면 있는 사이 같아 보였다.
순간 머릿속에 가정이 스치고 지나갔다. 김태준과 대학 동기, 가까운 곳에서 그 새끼의 일상을 지켜보았을 위치. 그렇다면 어쩌면….
“원장님. 하나 여쭤봐도 될까요?”
“말씀하세요.”
“대학 때 절 알고 계셨다면… 혹시 그 일도… 알고 계세요?”
조심스럽게 물었다. 자랑할 만한 일도 아니고 나쁘게 말하면 치부나 다름없는 일이었으니 기왕이면 민 원장이 모르고 있길 내심 바랐다. 어쨌건, 상사에게는 좋은 인상으로 남는 게 앞으로도 좋으니까.
“안타깝게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사람에게 관심 있는 편은 아닌데, 이상하게 윤진 씨는 머리에 남더라고. 신입생이 본인 학교생활은 제쳐두고 김태준 뒤만 졸졸 쫓아다니는 게 신기해서 그랬나.”
“아….”
“이제 와 말하지만 그리 조용하고 자기 밥그릇 챙길 줄 모르던 사람이 섭외 대상 연구원 명단에 있어서 많이 놀랐었습니다.”
첫 면접 때 너무 반갑다며 나에게 손을 내밀던 민 원장이 떠올랐다. 기껏 돈으로 꼬셔서 데리고 온 선임연구원이 외지고 가파른 연구소 위치에 질려 도망갈까 무서워 융숭하게 대접하는 건가 싶었는데 모두 나를 기억하고 했던 행동이었다니.
“지금은 김태준이랑 어때요? 잘 못 지내지?”
“네… 뭐 그다지.”
“잘했어요.”
“…네?”
“그다지 좋은 놈은 아니잖아. 김태준.”
지난 대학 생활을 되돌려 보았다. 일행이었지만 늘 겉돌았고, 철저하게 이용만 당했던 날들.
김태준은 항상 유흥에 바빴다. 당연하게도 그 새끼의 학점을 책임지는 것은 나의 몫이었다. 부족한 시간 안에 두 사람의 과제를 해내느라 나는 늘 수면 부족에 시달렸고, 때문에 매사 예민하게 굴었다.
답답하고 고된 하루하루였다. 그러나 내가 좋아하고 동경하는 사람을 행복하게 해 주기 위해서는 나의 희생만이 최선이라 여겼기에 묵묵히 그에게 맞추었다.
결국, 그 행동이 나를 망치리라는 것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김태준은 머리가 나빠. 아둔하다고 해야 할까. 손안에 든 걸 지킬 생각은 못 하고 항상 그 위를 좇아. 그렇게 이용하려고만 하면 주변 사람이 지치는 것도 모르고.”
“…….”
“그러니 거짓말이 일상이고, 힘없는 사람 이용하는 허튼 술수나 쓰지.”
“…네?”
“아, 나는 개인적으로 복잡한 건 싫어해서요. 그 새끼는 영 깔끔하지가 않으니 함께 있으면 속이 안 좋아지더라고.”
잘 기억나지 않지만, 김태준에게서는 묵직하고 쌉싸름한, 그리고 건조한 향이 났던 것 같다. 한 번에 알 수 없는, 아리송한 향이었다. 복잡한 빌딩 숲에서 자라나 빌딩을 집어삼키고 있는 나무가 있다면 딱 김태준의 향과 어울릴 것이리라 생각한 적 있다. 나 역시 복잡한 향만큼 김태준을 알 수 없었다.
“전 조금 이해하기 힘드네요. 원장님은 김태준 전무와 꽤 친한 사이라고 알고 있는데 그렇게 따지면 원장님도 그 새…아니, 그분과 비슷한 성향이어야 하는 거 아닌가.”
“가깝게 지냈다고 다 같은 부류는 아니잖아. 아까 말했다시피 난 단순한 사람이라 김태준처럼 머리 굴리고 계산하지 않아.”
“…….”
“그래서 김태준이 윤진 씨 괴롭힐 때 신경 쓰기 싫어서 모른 척했던 거고.”
“…네?”
“좀 뜬금없지? 그런데 기회가 왔으니 이 말은 꼭 하고 싶네.”
“…….”
“많이 늦었지만, 그때 방관했던 일, 사과하고 싶어요. 받아 줄 건가?”
나에게 대학 시절의 일은 깊은 상처였다. 강제 아웃팅을 당하고도 수업에 출석해야 했던 하루하루는 정말이지 지옥이었다.
하지만 피해자는 있는데 가해자는 없었다. 내 괴로움에 대해 사과를 건네었던 사람은 여태 단 한 명도 없었다.
“정말 다 알고 계셨군요.”
“설마 농담일 거라고 생각했나?”
“그건 아니지만….”
“갑작스러운 거 압니다. 괘씸하면 받아주지 않아도 돼요. 그저 예전부터 꼭 하고 싶었던 말을 지금에서야 하는 거니까.”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우습지만 이렇게 늦게나마 사과를 건네주는 이가 있으니 가슴 속 어딘가 꽉 막혀 있던 것이 조금은 풀어지는 느낌이었다.
“이제 와서 용서해 달라 하는 것도 성미에 차지 않긴 하지만 말하고 나니 홀가분하네.”
민 원장은 한결 가벼워진 얼굴로 살짝 웃어 보였다.
“제가 느끼기에 원장님은 보기보다 훨씬 더 단순하신 것 같네요.”
“그런 말 종종 듣습니다. 아, 설마 복잡한 게 박윤진 씨 취향인가.”
“…아뇨.”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 역시 복잡하게 생각하는 것은 질색이다. 하지만 이제는 단순하게 흘러가는 대로, 내미는 손을 무작정 잡았다가 마음까지 빼앗겨버려 상처받고 싶지 않다. 지난날의 잘못된 선택으로 너무 긴 시간을 홀로 괴로워했다.
“저도 단순하게 좋아요. 그런데 저한테는 힘든 일이더라고요. 달라지고 싶은데 쉽지 않네요.”
“아.”
“잊느라 몇 년을 폐인처럼 살았어요. 이제 좀 괜찮아졌는데 괜찮아졌을 뿐이고, 떠올리면 기분 더러운 건 여전해서 열 받아요.”
그저, 그 자식과 어울리는 자리에서 잘 살아주길 바란다. 아무 힘 없는 나를 괴롭힐 생각 따위 들지 않게. 수십 번 결혼하고 이혼하고 다 좋으니 이제 그만 나에게 신경 꺼줬으면.
“아, 내가 괜한 말을 했나 보네요. 미안합니다.”
“아니요. 괜찮아요. 숨길 일도 아니고.”
말실수했구나 싶었는지 민 원장은 슬금슬금 내 눈치를 살폈다.
“이제 김 전무님 이야기는 그만하고 싶네요. 술이나 한잔 더 사주 세요.”
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지금은 옆에 있는 사람을 벗 삼아, 안주 삼아 알코올의 힘을 빌려 오늘 하루는 이렇게 흘려보내고 싶었다.
김태준은 파국임을 알고 있으면서도 끝까지 나를 이용했다. 결국 상처 입고 마음을 닫아 버린 쪽은 나였다.
하지만 헛헛한 마음을 채우려 아무나 만나 형식적인 달콤한 말을 속삭이고, 데이트하고 섹스하다 질리면 헤어지는 인스턴트 연애만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사랑이라는 감정 자체를 꾹꾹 누르고 살았었다.
그리고 그때 내 앞에 나타난 게 권시훈이었다. 권시훈은 나를 변화시켰다. 그를 만나서 숨을 나누고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으며 천천히 마음을 열었다.
그의 위로는 따뜻했고 다정했다. 그래서 함께 있으면 좋았다. 누구를 만나도 뛰지 않던 심장이 권시훈을 보기만 해도 미칠 듯이 요동쳤다. 그 감정이 사랑임을 깨닫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나, 형 좋아해. 아니, 사랑해.’
첫눈에 반했다는 장난 같던 고백 이후, 시훈은 무리해서 다가오지 않았다. 하지만 어느 날, 김태준이 남기고 간 상흔으로 힘들어하던 내 곁을 지키다 결국 밑바닥에 꼭꼭 숨겨두었던 말이 터지고 말았다.
‘뭐…?’
‘농담 아냐. 거짓말도 아니고. 진심이니까 흘려듣지 말아줬으면 좋겠어.’
시훈의 폭탄선언에 내 눈은 그야말로 튀어나올 것처럼 크게 뜨였다. 온몸이 심장이라도 된 듯 미친 듯 뛰며 곧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이 제 존재를 뽐냈다. 당연히 얼굴은 곧 터져버릴 것 같이 빨개져 버렸다.
한 걸음 다가온 시훈이 내 손을 그러쥐었다. 긴장한 건지 뭔지 늘 따뜻하던 손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우습게도 맞잡은 내 손도 덜덜 떨리고 있었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그 새끼 때문에 힘들어하지 마. 이제부터 내 생각만 하면서 웃어. 내가 그렇게 만들어줄게.’
올려다본 시훈은 눈을 내리깐 채 바닥 어딘가를 뚫어질 듯 응시하고 있었다. 시훈은 내 손을 부서질 듯 쥐었다. 혹 도망이라도 갈까 봐 두려운지 바르작거려도 놓아주지 않았다.
‘언제까지고? 아니잖아.’
내 진심을 더 보이면 안 되었다. 결국 상처로 남을 말인 걸 알기에 뱉으면 안 되었다. 하지만 나는 알면서도 멈추지 못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시훈의 마음을 아프게 해서라도 나라는 사람을 온전히 인정받고 싶은 얄팍한 이기심이었던 것 같다.
‘너도 언젠가 나를 버리고 떠날 수 있잖아. 그때는 어떻게 해?’
‘…무슨.’
‘배신이라면 이제 지긋지긋해. 필요 없다고, 질렸다고 밀어내 버릴 거라면 시작하고 싶지 않아.’
‘배신이라니. 그럴 리가 없잖아. 내가 형한테 맞출게. 다 맞출게.’
‘거짓말.’
‘마음에 차지 않을 수 있겠지. 잘한다 해도 무언가 못마땅할 거고, 하지만 천천히 하나씩 할게.’
‘…….’
‘나 잘할 수 있어. 진짜야.’
시훈은 끝까지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다시 차갑게 식은 그의 손끝이 마음속이 얼마나 혼란스러운지 반증하고 있었다.
그 다짐이 7년 이 지난 지금까지 이어질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만큼 권시훈은 우직하고, 어쩌면 고집스럽게도 내 곁을 지켰다. 덕분에 나는 굳게 닫힌 마음을 천천히 열고 조금씩 시훈에게 다가갈 수 있었다.
그렇게, 권시훈은 나를 변화시킨 것뿐 아니라 나의 세상을 모두 뒤바꾸어 버렸다.
또다시, 내 연인이 떠오른다.
사무치게 보고 싶고, 가슴이 아려서 없어질 만큼 그리워졌다.
하지만, 그는 내 곁에 없다. 어쩔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나의 원망과 그리움은 차곡차곡 차오르고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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