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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쪽같은 내 남친-73화 (73/85)

73화

“…….”

민 원장은 내가 감상 겸 청승에 빠져 있는 내내 홀로 술잔을 비우며 있는 듯 없는 듯 자리를 지켰다.

원래 말수가 없는 편이라더니 거짓말은 아닌 모양이었다. 나 또한 상사를 즐겁게 해 줘야 한다는 쌍팔년도 직장인의 의무 따위는 잊은 지 오래라, 혹여 누군가가 무례하다, 오늘 일을 욕해도 못 들은 척하기로 했다.

느릿한 음악이 정적 사이를 파고들었다. 내 취향과는 거리가 먼 나라 재즈였다. 대체 뭐라는 건지 알 수도 없고, 집중해 듣고 있기엔 점점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 같아 얼음 잔을 입에 가져갔다.

또다시 시간이 흘렀다. 바텐더가 잔을 두어 번 바꿔주었고, 입술이 찬기를 머금어 살짝 부어올랐을 즈음, 마치 이곳에 없는 사람 같았던 민 원장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내게 말을 붙여왔다.

“박윤진 박사.”

“네?”

부름에 고개를 돌리자 민 원장은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좀 싫은 질문일지도 모르는데.”

“…?”

“요새 일하는 건 어떻습니까. 괜찮습니까?”

뭐라고요?

대체 종잡을 수 없는 대화 패턴에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돌아본 자세 그대로 눈만 깜박였다. 여태 김태준이니 뭐니 딴 이야기 실컷 하다가 갑자기 일 이야기를 한다고? 이게 정상적인 대화 전개라 할 수 있는 거야?

내가 말을 잃고 어리둥절해하자 민 원장은 나를 옆눈으로 흘긋 보고는 낮은 한숨과 함께 다시 입을 열었다.

“생각해 보세요. 우리 사이에 일 이야기 말고 달리 접점이랄 게 없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죠.”

“…옛 생각할 할 시간은 충분히 준 것 같은데. 혹시 아직도 감상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건가?”

“아뇨. 그건 아닌데… 갑자기 일 이야기를 하시니 놀라서요.”

“혹시 사생활 이야기가 재미있다면 더 해도 상관없고.”

“…아닙니다.”

재수 없는 것도, 냉정한 것도 아니었다. 민 원장과 나의 관계는 직장 상사와 부하직원으로밖에 설명할 수 없었으니 일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오히려 조금 전의 감정적이고 사적인 대화가 부자연스러운 게 맞았다.

그런데… 어쩐지 기분이 좀 그랬다. 언제는 무슨 말이든, 어떤 행동이든 다 들어 줄 것 같은 절친처럼 굴더니 이제 와 원장질을 하며 윗사람처럼 구는 게 조금 꼴같잖았다고나 할까.

“일은 뭐, 괜찮습니다. 전에 있던 곳보다는 업무강도도 낮은 편이고, 같이 일하는 동료들도 다 좋은 분들이라 즐겁게 일하고 있습니다.”

“연봉 협상 때나 듣는 멘트를 여기서 들으니 기분이 색다르네. 그게 다입니까?”

말하라고 할 때는 언제고 다 말하고 나니 시시하다고 비웃는 건 또 뭐냐.

“다른 게… 뭐 더 필요합니까?”

“오프레에서 나올법한 이야기가 있을 텐데. 예를 들자면 연구 환경에 대한 고충이라든가, 연구비가 부족하다든가 프로젝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같은 불평불만 같은 것.”

“…꼭 연구소 뒷담화를 전해달라는 말처럼 들리네요.”

“뒷담화라니. 참고하려는 겁니다. 노사 간 이간질하자는 게 아니라.”

안 될 말이지. 감언이설에 홀려 다 털어버렸다가 무슨 후폭풍을 맞으려고. 이래 봬도 사회에서 구를 만큼 굴러본 몸이라 ‘상사 앞에서 솔직하게 나불댔다가는 결국 독박 쓰는 건 본인’이라는 기본 소양 정도는 숙지하고 있단 말이다.

“…잘 모르겠습니다.”

그간의 경험을 교두보 삼아 누가 들어도 무리 없을 만한 대답을 내놓았다. 민 원장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가볍게 미소 지었다.

“잘 모르겠다니 그럼 내 쪽에서 하나 물어도 됩니까.”

“대체 뭘 물으시려고….”

“사실 내일 출근하면 물어보려 했는데 마침 우연찮게 기회가 됐으니… 괜찮죠?”

“말씀하시죠.”

민 원장은 내 대답을 듣고서도 한동안 할 말을 골랐다. 대체 얼마나 대단한 걸 질문하려 저리 뜸을 들이는 건지.

설마 이 야밤에 퇴사 통보는 아니겠지. 그게 아니면 인사이동? 안 되는데. 아직 갚지 못한 할부금이 많은데….

“별건 아니고.”

은행에 붙잡힌 수많은 대출금의 액수를 헤아리고 절망하려 할 때쯤 다행히 민 원장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현재 홍주석 박사가 K와 협업하고 있는 ‘YOUNG’ 프로젝트에 박윤진 박사가 참여하고 있다는데… 맞습니까?”

“네? 네에. 그렇습니다만.”

“그 프로젝트, 내가 꽤 싫어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고?”

“그것도 홍주석 박사에게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이상하네. 원장이라는 사람이 본인 책임 연구소에서 진행되고 있는 프로젝트에 대해 개인적인 감정을 드러내도 되는 거였나? 사적인 자리니 상관없다 하더라도 듣는 사람이 JI소속 연구원인데? 혹시 내가 뒤에 가서 엄한 말 전하면 어쩌려고?

“프로젝트 시작부터 내가 못박았는데…. 우리 연구소에서 홍 박사 팀 이외에는 다른 인력은 절대 차출 불가능하다고. 그런데 홍 박사가 나 몰래 박윤진 박사를 자문에 포함시켰더라고요?”

아, 젠장.

입술을 깨물고 속으로 홍주석에게 저주를 퍼부었다. 망할 놈. 게을러 빠진 건지 일머리가 없는 건지, 그냥 못된 놈인 건지…! 홍주석은 민 원장이 수시로 연구 과정을 들여다보고 검토한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는 게 분명했다. 멍청한 새끼. 위에서 확인하지 않더라도 본인이 먼저 보고를 해야 뒤탈이 없을 거 아냐.

봐, 결국 내가 독박 쓰게 생겼잖아!

“난 말입니다… 과학발전도 좋고 뭣도 다 좋은데 임상으로 장난치는 건 딱 질색이거든. 그런데 그 짓을 우리 연구소 식구가 하겠다고 나서는 겁니다.”

“네에… 그렇군요.”

“뭐, 본인 연구 방향과 그쪽 목적이 맞다고 밀어붙이는 바람에 막을 수 없었지만, 박윤진 박사가 그 연구에 들어가 있다는 것은 좀 의외여서요.”

“아, 그건….”

“분명 내가 모르고 있는 이유가 있을 것 같은데.”

이것도 보고 안 했구나. 이쯤 되면 홍주석은 이름표만 선임이지 사실은 주니어급도 안 되는 햇병아리가 분명했다.

“처음 실험에 참여하게 된 것은 제 자의였습니다. 프로젝트의 임상 실험자가 제 가족이라 걱정되어서 모니터링이라도 봐줘야겠다 싶었거든요.”

“가족?”

가족이라는 말에 민 원장의 한쪽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네. K측에서 개발 중인 약물이 포함된 음료를 어쩌다 복용하게 되어서… 현재 K연구소에서 격리 치료 중입니다.”

민 원장은 그간의 나의 행적을 더듬어 보는 듯 잠시 말이 없다가 곧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본인 과제도 내팽개치고 금주고 파견 모니터링에 너무 열심이기에 혹시 홍 박사에게 약점이라도 잡혔나 싶었는데 가족 일이라 신경 쓰여서였나 보군요.”

“아무래도 지척에서 일어나는 일인데 마냥 두고 볼 수 없어서요.”

“가족이라면… 동생인가? 프로필 보니 성이 다르던데?”

말해야 할까. 말까. 잠시 고민하다 여기서 거짓말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 솔직하게 대답했다.

“아… 애인입니다.”

“아, 애인.”

민 원장은 잠시 놀란 듯했지만 이내 평정을 되찾고 고개를 끄덕였다.

“애인이 그렇게 되어버려서 많이 속상하겠네요.”

“…….”

속상하겠다고? 내 속을 다 말로 하자면… 세상 어떠한 단어로도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립고, 아프고, 속이 문드러지는 것 같고, 화도 나고, 슬프기도 하고.

“빨리 좋아지길 바라야죠. 제가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은 최대한 돕는 게 애인으로서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윤진 씨 꽤 이성적이네요. 당장 K에 쫓아가서 뒤집어엎고 고소하겠다고 열 내도 아무도 뭐라 할 것 같지 않은데.”

“후우… 화내서 해결될 일이었으면 당장 그렇게 했겠죠.”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으면 말해요. 힘이 닿는 한은 도울 테니.”

진담인지 공수표일지 모를 민 원장의 호의에 그냥 웃어버렸다.

이래도 저래도, 결국 지금 권시훈이 내 옆에 없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을 테니.

* * *

윤진에게서는 항상 싱그러운 꽃향기가 났다. 그가 미소 지을 때면 막 아침 이슬을 머금고 피어나는 꽃봉오리 같았고, 울적함에 축 처진 날이면 달빛에 숨어버린 달맞이꽃 향이 났다.

평소와 다르게 실험에 차질이 생겨 예정보다 오랫동안 실험실에 붙잡혀 있어야 했다. 밤늦게 숙소에 돌아오자마자 윤진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받지 않았다. 하루 종일 전화를 기다리다 결국 화가 났나 싶어 초조해하다, 침대에 기댄 채로 깜박 졸아 버렸다.

눈을 떴을 때는 새벽 2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아직까지 연락이 없다고?”

손에 쥐고 있던 휴대폰은 발밑에 떨어져 있었다. 혹시나 싶어 급히 확인해 보니 아직 아무런 소식이 없다. 심지어 문자조차 없다.

시훈은 정신을 차리려 고개를 세차게 젓다가 뒤늦게 약 기운이 돌아 머리가 지끈거려 이마를 짚고 괴로운 신음을 내뱉었다.

아무리 술에 취했건 천지가 뒤집힐만한 일이 생기더라도 단 한 번도 연락이 끊긴 적 없던 윤진이었다. 오죽했으면 상상조차 하기 싫은 나쁜 일이 생겨 연락할 수 없는 상황은 아닐까 하는 걱정마저 들었다.

당장 자리를 박차고 윤진을 찾으러 가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권시훈은 연구소 밖으로 나갈 수 없고, 걱정된다는 이유로 막무가내로 무단이탈해 봤자 윤진이 기뻐하지 않을 게 뻔했다.

제발, 나쁜 일만은 아니길. 시훈은 크게 심호흡하고 휴대폰을 고쳐 잡으며 윤진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

다짐과는 다르게 자꾸만 불안한 기운이 엄습해 왔다.

사실, 윤진은 사리 분별 확실히 하는 30대 남성이었고, 시훈이 이렇게까지 불안해할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시훈은 윤진을 생각하면 자꾸 마음이 좋지 않았다.

rrrr- rrrr.

1분 남짓한 통화 대기음이었지만 1시간은 족히 지난 것 같이 시훈의 어깨를 짓눌렀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시훈은 후회할 수 있는 모든 상황에 대한 후회와, 자책을 하며 스스로를 원망했다.

“아, 좀 받아라. 진짜….”

이러다 답답함에 땅굴 파고 지하로 들어갈 수도 있겠다 싶었을 때쯤, 갑자기 통화대기음이 멈췄다.

시훈은 또 전화가 끊긴 건지, 누군가 전화를 받은 건지 확인할 정신도 없이 수화기를 향해 소리를 내질렀다.

“아! 박윤진! 너 뭔데 전화를 안 받아! 걱정했잖아! 어디야! 설마 길바닥에서 자고 있는 건 아니지? 진짜 미쳤어? 제정신이야? 답지 않은 짓을 해. 왜!!”

-…누구십니까?

수화기 저편의 목소리는 윤진의 것이 아니었다. 심드렁하고 세상만사 귀찮음이 묻어나는 낮은 음성.

어쨌거나 시훈은 처음 들어보는 목소리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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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린 장편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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