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미친 듯 날뛰던 심장이 차갑게 식는 것 같았다.
이 새끼는 대체 누구이고, 이토록 태연하게 박윤진의 전화를 함부로 받는 건지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그쪽이야말로 누구십니까?”
의외의 상황에 맞닥뜨리자 시훈은 자연스럽게 신경이 날카로워지며 목소리가 사납게 변했다.
-박윤진 씨한테 휴대폰 부탁받은 사람입니다.
하지만 남자는 시훈의 날 선 물음에도 심드렁하게 대답할 뿐이었다.
“뭐요? 뭐를 부탁받아요?”
-…이해를 못 하신 것 같으니 다시 말씀드리죠. 몇 시간 전에 박윤진 씨가 저에게 휴대폰을 맡아 달라 부탁했고, 아직 돌려주기 전이라 제가 대신 그쪽 전화를 받은 겁니다.
무심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뜻밖의 말을 쏟아 내었다.
박윤진이 지금 뭐를 어째? 틈이 많은 것 같아도 윤진은 시훈보다도 자신의 경계를 확실히 지키는 사람이었다.
윤진은 모두에게 친절하지만 사실, 그 친절은 타인과의 적절한 거리를 두기 위한 수단이었다. 누구도 아쉬워하지 않을 정도의 호감도를 유지하면서도 결국 누구에게도 곁을 주지 않았다. 수많은 윤진의 지인 중 그의 집에 드나들 수 있는 사람은 동거인이자 애인인 시훈을 제외하곤 단 한 명도 없다는 것을 봐도 알 수 있다.
그런 윤진이 누군가에게 다른 것도 아니고 휴대폰을 맡겨두었다고? 시훈은 쉬이 믿어지지 않았다.
7년이 다 되어가는 시간을 알아 오며, 시훈은 윤진의 휴대폰 속을 들여다본 기억이 없었다. 그것은 아마 윤진의 부모님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물론 보게 해달라 부탁하면 그러라며 흔쾌히 건네주었지만, 시훈은 윤진이 달가워하지 않는 행동을 굳이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지금 무슨 말씀 하시는 겁니까? 지금 나더러 당신 말을 믿으라고? 윤진이가 그렇게 쉽게 본인 물건을 남한테 맡기는 사람이 아닌데?”
-한국말을 잘 못 하는 겁니까. 아니면, 원래 말귀를 못 알아먹는 타입입니까? 같은 말 반복하게 할 거면 끊습니다.
“헛소리 말고 박윤진 바꿔. 박윤진 지금 어디 있어.”
-듣자 듣자 하니까… 다짜고짜 반말 지껄이는 게 슬슬 짜증 나려고 하네.
“두 번 말하게 해? 개새끼야! 박윤진 어디 있냐고!”
-여기 H호텔 바입니다.
“…바?”
-네. 어쩌다 합석하게 되어서 술을 좀 마셨는데, 제가 잠시 자리 비운 사이에 잠들어 버렸네요.
시훈은 그야말로 머리를 골프채로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을 느꼈다. 철벽 중의 철벽인 박윤진이 외간 남자와 낯선 곳에서 술에 취해 무방비로 자고 있다고? 아무리 이해해보려 해도 도저히 말이 되지 않았다.
-지금 깨워서 집에 바래다줄 겁니다. 그러니 누구신지 모르겠지만 윤진 씨 안부에 대해선 신경 끄시죠.
“신경을 끄라고? 미친. 대체 너 뭐 하는 새끼야. 뭐길래 네가 윤진이를 바래다 줘!”
-당신이야말로 누군데 자꾸 싸가지 없이 굴어. 예의 차려주는 것도 한계가 있어.
선우의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시훈을 할퀴고 지나갔다. 시훈은 소리를 내지르려다 자신이 너무 흥분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입술을 감쳐 물었다.
-자꾸 선 넘으려고 하네. 누가 그쪽 말하는 거 들으면 박윤진 씨 애인이라도 되는 줄 알겠습니다.
“애인이 아니라는 건 어떻게 확신하지?”
-하는 짓거리를 보면 알지.
“정말 애인이 맞다면 어쩌려고?”
-맞더라도 믿지 않겠습니다. 본인 애인이 어디서 뭘 하는지도 모를 정도로 무관심한 종자가 윤진 씨 애인이라고 생각하고 싶진 않네요.
“허….”
-어쨌거나 박윤진 씨 성인이고 정신 차리면 제 발로 들어갈 지능 정도는 있으니 흥분 그만하시고 이성적으로 차분히 생각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
남자는 계속해서 시훈의 존재를 부정하고 있었다.
설마 윤진이 권시훈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은 것일까? 아니, 절대 그럴 리 없다. 박윤진은 언제 어딜 가더라도 자신이 임자 있는 몸임은 꼭 밝혔다.
그런데, 저 남자는 어째서?
-할 말 떨어졌나 보네. 더 하실 말 없으시면 이만 끊습니다.
“야, 야! 끊지 마. 이 새끼야! 야!”
뭐라 더 말하기도 전에 허무하게 전화가 끊겼다.
“하….”
점멸하는 휴대폰 액정을 허무하게 바라보며 시훈은 헛웃음을 삼켰다.
어이없고, 화가 났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윤진이 저 이름 모를 미친놈한테 본인 물건을 맡기고 목소리조차 들려주지 않는 것도 화가 났지만, 그보다는 지금의 권시훈은 어떤 핑계를 대더라도 그저 박윤진을 괴롭히는 진상으로밖에 보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저격당해버려 기분이 더러워졌다.
“하… 진짜 박윤진. 뭐 하고 돌아다니는 거야.”
시훈은 언젠가 함께 여행을 갔을 때, 집에서 사용하는 본인 베개가 없다고, 굳이 시훈의 팔을 베고 자던 윤진을 떠올렸다. 팔이 저려서 새벽에 몰래 빼려고 했더니 대번에 깨서 가슴을 꼬집어 대는 바람에 시퍼렇게 멍들었었는데…
혹시 저 새끼가 박윤진의 외로움을 이용해 권시훈의 빈자리를 대신하지 않았을까.
그렇게 생각하니 피가 거꾸로 솟으며 심장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칠 것 같았다.
“젠장!!”
애꿎은 벽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무력감과 분노가 동시에 밀려 왔다.
한 번 물리적으로 멀어져 버린 윤진과의 거리는 그 간극을 좁히지 못하고, 계속 그 자리를 맴돌고만 있었다. 이 상황에서도 권시훈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박윤진을 마냥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 * *
복잡한 상태에서 술을 들이부었더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정신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등을 흔들며 이만 돌아가자는 민 원장의 채근이 없었더라면 돈깨나 줘야 하는 고급 바에서 열심히 침 흘리며 아침을 맞이했을 것이다.
“아까 감사했습니다. 제가 폐를 많이 끼쳤죠.”
기껏 용기를 내어 기억나지 않은 진상에 대해 사과했지만, 민 원장의 얼굴은 이미 회사에서의 차가운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나는 민 원장을 곁눈질로 살피며 부하직원으로서 저지르면 안 되었을 실수에 깊은 반성을 하고 있노라는 의미로 손끝을 만지작거렸다.
“괜찮습니다. 전 즐거웠어요.”
“즐거워 보이는 표정이 전혀 아닌 것 같은데….”
저 딱딱한 말투가 어지간히 신경 쓰이는 게 아니어서 나도 모르게 뾰족하게 대답하자 민 원장은 민망한 듯 큼큼 헛기침하더니 쥐어 짜내듯 힘겹게 대답했다.
“…최대한 노력한 겁니다.”
“풉….”
아, 이러면 안 되는데. 평소에 남 좋으라고 하는 입에 발린 소리 따위는 절대 하지 않는 그였는데, 민망해하는 모습을 1열 직관하게 되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버렸다.
“…박윤진 씨. 왜 웃습니까.”
“원장님께서 그런 표정 짓는 거 처음 보는 것 같아서요.”
“내가 웃는 게 뭐? 난 웃으면 안 됩니까?”
“아, 아닙니다. 그저 평소 제가 생각했던 원장님 이미지랑은 좀 많이 다르신 것 같아서요.”
“어떤 면이?”
“…인간다움?”
내 말에 민 원장은 걸음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았다.
“참… 박윤진 박사는 평소에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기에 인간다움이라는 말이 아무렇지도 않게 나오는 겁니까?”
“아, 제 말뜻은 그게 아니고요! 평소 연구소에서는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 아, 이게 아니라….”
“냉혈한?”
“아닙니다! 그, 약간 잠깐 뵈었을 때는 차갑고 무서워 보였는데…사석에서 이야기 나누어 보니, 어….”
나는 허둥지둥 대며 뱉은 말을 수습하기 바쁜데, 원장은 표정 없이 내려다보았다.
아, 왜 또 저 눈인 거야. 뚫어버릴 것 같은 냉랭한 눈빛.
“소문과는 조금 달라서, 어, 제가 그동안 오, 오해하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네, 오해하고 있었나 봅니다.”
당황해버려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겨우 변명하자 기다렸다는 듯 바로 되묻는다.
“좋은 쪽입니까?”
“네? 아… 그렇죠.”
“그러면 됐습니다.”
“…….”
원장은 당혹감에 빨갛게 물든 내 뺨을 내려다보더니 스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생각보다 박윤진 박사, 순진한 면이 있는 것 같네.”
“네?”
“아닙니다.”
뭐라는 거야. 저 인간이. 나도 나이 먹을 만큼 먹었고 알 것도 차고 넘치게 아는데 갑자기 애 취급이람.
입을 닫고 성큼성큼 로비로 걸음을 옮겼다. 사실 원장이 아니더라도 나를 애 취급하는 놈들이 한둘이 아니긴 했다만, 막상 또 당하고 나니 역시나 기분이 구깃구깃해졌다.
로비를 가로질러 호텔 입구로 나오자, 기다렸다는 듯 내 앞으로 택시가 와 섰다. 순간 이른 아침 식사라도 대접하고 보내드려야 하나 잠시 고민했지만, 정신 나간 술꾼 취급받을까 봐 관두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맨정신으로 직장 상사와 불편한 시간을 보내기에는 내 담은 너무도 작았다.
“그, 그럼 다음 중간 보고회 때 뵙겠습니다.”
“…….”
“어제오늘 정말 감사했습니다.”
또 뭐라 한마디 들을까 봐 얼른 허리 숙여 인사했다.
도망칠 기세로 막 돌아서려는 그때,
“…?”
택시에 오르려는 내 손목을 원장이 가볍게 쥐어 붙잡았다.
“잠깐. 박윤진 씨.”
“…네?”
택시에 발을 걸친 채, 탄 것도 내린 것도 아닌 애매한 자세로 원장을 돌아보았다. 마주 본 그의 얼굴은 여전히 굳어 있는 채였다.
내내 얼른 가버리라는 듯 심드렁하더니 갑자기 붙드는 건 무슨 경우일까.
의아해하는 나를 가만히 바라보던 원장은 주머니에서 내 휴대폰을 꺼내어 손바닥 위에 올려 주었다.
“이런 말 갑작스러운 건 아는데 제가 박윤진 씨에게 미안한 것도 있어서.”
“…네?”
“혹시 김태준한테 복수하고 싶은 마음 없습니까?”
“보, 복수요??”
“마음 있다면 내가 도울 수 있을 것 같은데.”
“네?”
잡힌 손목이 덴 듯 화끈거려 비틀어 빼려 했지만, 그는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
여태 민 원장을 만나 오면서 단 한 번도 이 사람과 사적으로 얽힐 일은 없겠다 확신했다. 그런데 기껏해야 같은 학교 출신이라는 접점 하나만 겨우 가진 사람이 복수를 말한다고? 갑자기? 내가 가진 김태준에 대한 원한이 어느 정도인지도 알지 못하면서?
“…….”
뭐라 대답해야 할지 도저히 떠오르지 않아 눈만 이리저리 굴려 대었다.
“박윤진 씨.”
한참이 지나도 내가 말이 없으니 민 원장은 짧게 한숨을 내쉬고는 입을 열었다.
“…뭔가 오해하고 있는 것 같은데 땅에 묻거나 사지를 찢는 그런 복수가 아니라 옛날 일을 아는 사람으로서 윤진 씨가 조금이라도 홀가분해졌으면 해서 하는 말입니다.”
“저기, 말씀은 고마운데 제가 왜 그런 호의를 받아야 하는지 이유를 모르겠는데….”
“말했잖아. 미안해서라고.”
“좀 갑작스러운데요. 엮이기 싫다 해서 엮일 수 없는 것도 아니고, 이미 지나간 과거를 가지고 복수네 뭐네 하는 것도 좀 말이 안 되는 거 같은데.”
“역시 좀 그렇죠?”
“네?”
“사실 제가 개인적으로 윤진 씨랑 잘 지내보고 싶어서 핑곗거리 좀 만들어 보았습니다. 그런데 영 아니었나 보네요.”
대체 제대로 대화를 나눈 지 하루도 채 안 된 사람에게 생기는 관심은 어떤 종류의 것일까. 일단 연애감정 쪽이 아닌 것은 확실한데, 이 계기로 친구라도 먹자는 걸까? 그러기엔 나이 차이가 좀 많이 나는데?
“내가 김태준이랑 아는 사이던, 윤진 씨가 그놈이랑 어떤 사이였던, 나에게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런 것 다 배제하고 그냥 박윤진의 생각이 궁금합니다. 나는.”
아, 안 돼. 핑곗거리를 사전 차단 해버리면 내가 할 말이 없잖아.
너무 머리가 좋아서 상황판단이 빠른 건지, 아니면 독심술이라도 하는 건지, 원장은 내 눈앞에 놓인 수많은 불안요소를 모두 쳐내버리고, 인간 ‘박윤진’에게 묻고 있었다.
권시훈. 네 애인이 이렇게 인기가 많단다. 지금 네가 연구소에 틀어박혀서 두문불출할 때가 아니야. 당장 튀어나와서 애인 단속해야지.
“아, 저는….”
내가 제대로 이해한 게 맞다면, 어제의 일로 민 원장은 나에게 약간 관심이 생긴 게 분명했다. 그리고 본인 피셜 – 돌려 말하는 데에 재주가 없다 하니 복수니 뭐니 노골적인 말이 나왔던 것일 테고.
그렇다면 나도 돌려 오래 생각하지 않고 돌려 말하지 않아도 되겠지.라는 결론에 다다랐다.
“이런 관심 솔직히 불편합니다. 그리고 저보다 불편해할 사람이 집에 있어서요. 최소한 예의는 지키고 싶습니다.”
“아. 애인. 어제 말했던.”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이니 원장의 입꼬리가 스윽 올라갔다. 여유로운 미소 뒤의 의중을 알 수 없어 미간을 좁혔다.
“김태준, 이 새끼 안 되겠네. 옛날에는 헛소문 내서 사람 곤란하게 만들더니, 이제는 애인 있는 사람 쫓아다니면서 추잡하게 군다고?”
“네?”
“아, 아닙니다.”
원장은 그제서야 내 손목을 놓아주었다.
“우리 초면이나 다름없는데 내가 너무 무례했네요. 다음에는 제대로 된 자리에서 천천히 이야기 나눕시다.”
그는 김태준에 대한 더 이상의 사족을 붙이는 대신 담백한 사과를 건넸다.
…이렇게 쉽게 사과해 버리면 도리어 내가 할 말이 없잖아. 쏘아붙이려던 게 무안해져 괜히 입술을 손바닥으로 문질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다음에 기회가… 생긴다면 그렇게 하시죠.”
“허락해줘서 고맙네. 피곤할 텐데 이만 들어가 쉬어요.”
“…그럼 저, 저는 가보겠습니다.”
나도 고맙다고 해야 할지, 괜찮다 해야 할지 마땅히 할 말을 찾지 못한 채, 민 원장에게 다시 한번 묵례하고 도망치듯 택시에 올랐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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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쪽같은 내 남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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