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어휴….”
자리에 앉으니 긴장이 풀리며 온몸이 달아올랐다.
“잠깐.”
현기증이 몰려와 이마를 손으로 짚었을 때였다. 하얗고 기다란 손가락이 택시 문을 붙잡았다. 문을 닫으려 손을 뻗었던 나는 당황해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다가온 민 원장이 허리를 숙이곤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윤진 씨. 갑작스러웠다면 다시 한번 미안합니다.”
“아, 괜찮습니다.”
“하지만 잘 지내고 싶다는 말은 진심이니 흘려듣지 않았으면 하네요.”
아니, 그런데 이 사람이 자꾸 왜 이러는 거야.
“원장님. 죄송하지만 오해할 만한 말은 삼가 주세요. 이러시면 더 부담스럽습니다.”
“…미안합니다.”
“휴. 사과를 벌써 몇 번이나 들었는지 모르겠네요.”
“제가 예쁘게 말하는 재주가 없는 편이라 여기저기 미안할 일을 많이 만들어서 사과는 빠릅니다.”
“…….”
“얼굴 안 좋아 보이는데, 약 먹고 푹 쉬어요. 아까부터 식은땀이 계속 나던데.”
“아… 감사합니다.”
“바래다주고 싶은데, 부담스럽겠죠?”
대답하지 않고 입을 다물고 원장을 바라보니, 알았다는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에 봅시다. 조심히 들어가요.”
택시 문을 대신 닫아주며 그는 씁쓸히 웃었다.
그리고 곧 택시는 그를 둔 채 멀어지기 시작했다.
“…뭐야. 갑자기. 당황스럽게.”
점점 작아지는 원장의 모습을 백미러로 흘깃 훔쳐보며 고개를 의자 등받이에 기댔다.
끝이 이상한 분위기로 흘러가긴 했지만 어쨌건 꽤 괜찮은 만남이었다.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났다고 하지만, 김태준이 나를 찔러대었던 말들과 소문들은 평생 꼬리표가 되어 따라다닐 것이고, 결코 그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없을 것이라 확신해 왔다. 하지만 민 원장의 김태준을 탓하는 말 한마디가 제법 위로로 다가와 한결 마음이 좋았다.
자꾸 떠오르려는 안 좋은 기억을 애써 갈무리하며 오랫동안 꺼져 있던 휴대폰을 켜보았다.
“아….”
규하로부터의 부재중 전화와 메시지.
규하
윤진아. 아니, 형.
미안해요. 그동안 내가 버릇없게 굴어서.
그저 난 형이 우리 아버지 때문에 억울하게 당하는 게 싫어서…지켜주려 했던 것 뿐인데...
선 넘었다면 미안해요.
그래도 나 너무 미워하지 말아요. 나 꽤 귀엽지 않나?
아니, 이게 아니지;;; 미안해요.
형. 자요?
전화 좀 받아요.
밤새도록 끊이지 않고 보내온 메시지. 쉴새 없이 떠오르는 말풍선이 김규하가 얼마나 간절한 마음으로 자판을 두드렸을지 절절히 전해져 가슴 한편이 저릿해졌다.
규하
밤새 생각해 봤는데 내가 해결할 수 있는 일은 내가 해결할 수 있는 일은 직접 해결하는 게 맞는 것 같아요.
이게 형에게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내 판단이 맞길 바랄게요.
오전 4시 34분을 마지막으로 메시지는 끊겨 있었다. 혹시나 싶어 전화를 걸어보았지만, 신호음만 길게 갈 뿐 받지 않았다.
심장이 빠르게 달음질치기 시작했다.
설마. 아이가 연락 없는 나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 오해하고 무모한 짓을 하려는 것일까 봐 두려움이 엄습했다.
* * *
빠르게 바뀌는 바깥 풍경을 응시하며 선우는 한숨을 내쉬었다.
스스로도 타이밍이 좋지 않고, 성급했다 느꼈지만 지금 말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느꼈다.
이런 말은 좀 촌스럽지만 돕고 싶었다. 결단을 내리자 행동하기 쉬웠다. 그는 유능한 과학자이기도 했지만, 사업가이기도 했다. 영민하고 계산이 빨랐다. 그래서 지금 느끼는 감정에 대해서도 솔직하게 인정하고, 앞으로 얻어야 할 것에 대해 생각했다.
선우는 불과 몇 시간 전, 윤진에게 전화를 걸어왔던 두 명의 남자들을 떠올렸다.
윤진의 애인이라 주장하던 이름 모를 남자와 통화를 마치고 윤진을 막 깨우려던 참이었다. 주머니에 넣어둔 윤진의 휴대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선우는 당연히 애인 사칭남의 전화일 것이라 생각했다.
“이보세요. 이야기는 아까 끝난 걸로 아는데 자꾸 전화하시면 곤란합니다. 이것도 일종의 스토킹이라는 것 모릅니까?”
이 김에 이름 모를 놈에게 따끔하게 한 마디 해 줘야겠다 마음먹고 전화를 받자마자 독설을 쏟아 내었다.
-박윤진.
그런데 의외의 인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김태준이었다. 선우의 허울뿐인 친구이자, 오랜 경쟁자. 김태준 전무.
그는 윤진과의 예상치 못한 만남 덕에 간밤에 신경을 좀 썼는지 매우 지친 목소리였다. 보나 마나 변명이라도 둘러대고 싶어 전화한 것이겠지. 죽어도 본인이 나쁜 놈 되는 건 원치 않는 놈이니까.
-박윤진. 왜 이렇게 늦게 받아. 어?
“…….”
-샵에서 그렇게 가버리면 내 입장이 뭐가 돼. 하영 씨가 오해하잖아. 이제 같이 일하게 될지도 모르는데 자꾸 삐딱하게 굴래?
“…….”
-대체 둘이 어떻게 아는 사이냐고, 그런데 왜 지금은 데면데면하냐고 하도 꼬치꼬치 캐묻길래 어떻게 둘러대었으니까 다음에는 말이랑 행동 조심해.
“…….”
-하영 씨가 널 꽤 좋게 생각하고 있던데, 앞으로 자주 볼 수 있는 사이이니 살갑게 대하도록 해. 너 때문에 나랑 하영 씨 사이에 잡음 생기는 건 원치 않으니까.
일부러 아무 말도 않고 조용히 듣고 있으니, 예상과는 다르게 본인의 사정만 들이대며 윤진을 윽박지른다.
어제 겪은 바로 파악한 윤진의 성격이라면 이야기 섞는 것조차 싫어 알겠다며 대충 둘러대 끊어버리려 했겠지만, 아쉽게도 싸가지를 밥 말아 먹은 민선우는 좋은 말도 곱게 하지 않는 특출한 재주가 있는 사람이었다.
“변명 언제 끝나냐. 김태준이 이렇게 말이 많은 타입이었나?”
-…누구야?
“뭐가 그리 불안해서 새벽부터 전화질이야.”
-...민선우?
“목소리 기억하네?”
-…네가 왜 윤진이 휴대폰을 가지고 있어.
“박윤진이 나한테 줬어. 맡아 달라고 하던데.”
수화기 저편의 김태준은 잠시 말을 잃었다.
아마 윤진과 선우 사이의 접점을 찾느라 사고회로를 최대한 가동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왜.
“네가 알아야 할 이유가 있나?”
-후… 박윤진 바꿔. 너랑 수다 떨자고 전화한 거 아니니까.
“무슨 일인데. 네가 전화를 바꾸라, 마라야?”
-민선우. 내가 묻고 싶은 건 많은데 지금 그럴 여유가 없으니 넘어가는 거다. 네가 알 필요 없는 일이니까 장난하지 말고 전화 바꾸라고.
민선우는 불쾌함이 몰려와 손바닥으로 이마를 짚으며 짜증 섞인 목소리로 김태준에게 일갈했다.
“야. 이 새끼야. 장난질은 네가 하고 있잖아.”
-민선우. 너답지 않게 왜 흥분하지? 그리고 네가 뭘 안다고 우리 사이에 끼어들어.
“나다운 게 뭔데. 너야말로 날 얼마나 안다고 함부로 떠들어.”
-뭐?
“그리고 사이? 두 사람 ‘사이’라고 부를만한 관계이기는 해? 내가 보니까 오히려 서로 엮이지 않는 편이 나을 것 같던데?”
-…박윤진 바꿔.
“그러니까 왜. 아, 혹시 아까처럼 치졸하게 협박하면서 박윤진 속 뒤집어 놓으려고?”
-쓸데없는 참견 말라고 했지.
“싫은데.”
-민선우!
계속해서 선우가 빈정대자 김태준은 발끈하며 소리쳤다. 하지만 선우는 동요하지 않았다.
“김태준. 너 아주 재미있는 짓거리를 하고 있더라? 그러잖아도 한 번 독대해야 하나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먼저 전화해 주니 고맙네?”
-뭐라는 거야. 돌려 말하지 말고 용건 있으면 빨리 말해.
“그래. 예쁘게 말하지 말라니 그냥 말할게.”
-…….
“미친, 상도덕도 없는 새끼야. 네가 뭔데 남의 연구소 인력 빼가려고 수작질이야.”
-…어?
“설마 모를 줄 알았어? 아니면 열 받아 보라고 일부러 건드리는 거야?”
-무슨 말이야. 알아듣게 말해.
“홍주석 박사 꼬셔서 박윤진 빼내려고 했지?”
선우의 물음에 김태준의 입이 꽉 다물렸다.
설마 이렇게 빨리 눈치채게 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듯했다.
선우는 비소를 터트렸다. 멍청한 새끼. 제 딴에는 기를 쓰고 치밀한 작전을 세웠다고 혼자 좋아했겠지. 숨긴다고 숨겨지는 것도 아닐 것을.
“경솔한 건 여전하네. 그토록 박윤진을 곁에 두고 싶었으면 대학교 때 그딴 식으로 굴었으면 안 됐지. 필요할 때만 불러서 이용하고 재미없어졌다고 내팽개쳤으면서 이제 와 헛짓거리하려 들어?”
-네가 뭘 안다고 떠들어? 박윤진은 그걸 원했어. 그렇게라도 내 옆에 있고 싶어 했다고. 걔가 좋아서 한 일인데 왜 나한테 책임을 묻는데.
“넌 그게 문제야. 학습능력이 없는 거.”
-미친. 뭐라고?
“세상 사람들이 다 너처럼 기억력이 딸리면 얼마나 행복할까. 아니다. 적어도 양심은 잊으면 안 되니 취소.”
민선우는 남의 일에 관심 두는 것은 영 질색이었다. 그래서 박윤진의 괴로움이 눈에 빤히 보이는데도 모른 척했다. 죄책감 따위는 없었다.
졸업 후, 학교와 멀어지고 나니 그냥 없던 일이라 생각하고 잊어버렸었다. 하지만 연구원과 원장의 자리에서 박윤진을 다시 만났을 때, 수줍게 웃는 박윤진의 말간 낯과 마주하자, 십수 년간 잊고 있었던 죄책감이 민선우를 덮쳤다.
어떻게든 잘해 주고 싶었다. 때문에 박윤진 박사를 원하는 수많은 연구소보다 훨씬 좋은 조건을 만들어 그를 본인의 곁에 두었고, 하고 싶은 연구를 마음껏 할 수 있도록 뒤에서 최선을 다해 도왔다. 앞으로도 그렇게 쭉 보이지 않는 곳에서 돕고 싶었다.
그렇게라도 속죄하고 싶었다. 박윤진이 민선우라는 인간을 기억하지 못해도, 적어도 자신의 침묵만큼은 속죄하고 싶었다. 그것이 민선우의 최소한의 양심이었다.
“네 아들은 잘 있냐? 요새 고등학생들 말 예민하다던데, 널 아버지라고는 하고?”
-…….
“걔가 너 때문에 자기 엄마 죽은 거는 알아?”
-야! 민선우! 갑자기 왜 그 이야기가 나오는 건데.
“갑자기 생각나서?”
-개소리 작작해! 그건 사고야! 내가 한 일이 아니라고!
수화기 너머로 김태준의 그르렁대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저 우스울 뿐이었다. 선우는 비웃음이 터져 나오는 걸 숨기지 않고 낮게 웃었다.
아들이 아니라 아이 엄마의 죽음에 관해 이야기하니 발끈한다. 다른 의미로 참 투명한 인간이다.
“그건 본인한테 직접 물어봐야 알지. 나는 여태 단 한 번도 가해자가 본인 탓이라고 하는 꼴은 본 적이 없어서.”
-함부로 입 털고 다니지 마. 일 잘못되었다가는 너라도 가만 안 둘 줄 알아.
“내 입 간수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넌 박윤진한테서 손 떼.”
-…뭐?
“잘 들어. 박윤진 박사가 내 밑에 있는 이상, 박윤진 박사의 거취는 내가 정해. 무슨 뜻인지 알겠어? 너 따위가 얄팍한 수로 끌어가려 해봤자 소용없다는 말이야.”
-야. 너….
“끊는다. 다시 전화하지 마.”
-민선우. 기다려. 아직 이야기 안 끝났잖아.
“아, 재혼 미리 축하한다. 청첩장 나오면 꼭 보내고.”
-야!!!!
그렇게 의미 없는 통화가 끝났다.
“이렇게 물러서 쓰레기 하나 처리 못 하고 있으니 애인이 가만 못 둬 안달이지.”
선우는 윤진에 대한 감상을 짧은 한마디로 정리한 후 다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윤진에게 휴대폰을 돌려주었을 때는 김태준에게서 전화가 왔다는 말을 굳이 꺼내지 않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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