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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쪽같은 내 남친-76화 (76/85)

76화

택시 안에서부터 시작된 미열은 집에 도착할 즈음 절정으로 치솟았다. 오죽하면 기사님께서 집이 아니라 병원으로 가야 하는 것 아니냐고 물어보실 정도였다.

가누어지지 않는 다리를 이끌고 겨우 집 안으로 들어섰다. 온몸에 힘이 없고 안구에서는 열감이 가시지 않았다. 마치 온몸이 불구덩이에 빠진 듯 피부에 닿는 옷자락마저 따갑고 아팠다.

집 안에 남아 있는 해열제를 모두 털어 넣었다. 시훈이 봤다면 약물 오남용이라며 기함을 토하며 난리를 쳤겠지만, 약 개수를 셀 수 있을 정도의 기운도 남아 있지 않았던지라 어쩔 수가 없었다.

기어가듯 침대로 향했다. 그리고 자리에 눕자마자 잠에 빠져들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이불을 덮지 못해서 그런지 으스스한 기운에 잠에서 깨어났다.

“…….”

잘 떠지지 않는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 올리며 몸을 일으켜 앉았다. 열감은 잦아들었지만, 얼른 이 아픔에서 해방되고 싶어 되는대로 약을 주워 먹었던 탓에 몸이 붕 뜬 듯 몽롱해 도로 몸을 누이고 팔로 눈을 가리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

무리하긴 했었지. 무엇보다 전날 체력소모가 심했다.

얌전히 기억 저편에 처박혀 있다가 불현듯 나를 괴롭히는 김태준,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반항심이 과해 아버지로부터 나를 지키겠다 호언장담했던 김규하, 지금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권시훈, 그리고 뜬금없이 나에 대해 알고 싶다는 민선우 덕에 실시간으로 기운이 뚝뚝 깎여 나가고 있었다.

“…아.”

눈을 뜬 지 한참이 지났는데도 침대에서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하지만 목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아 뭐라도 마셔야 할 것 같아 몸을 겨우 일으켜 바닥에 발을 디뎠다.

꼭 구름 위를 걷는 것 같은 멍한 느낌이 낯설어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무언가 이상하다 생각했지만 달리 해결할 방도가 없었기에 손을 뻗어 문고리를 잡고 문을 열었다.

끼익-

“…시훈아?”

문을 여니 어른의 몸이 된 시훈이 문 옆의 벽에 기대 눈을 감고 있었다. 자는 건지, 앓는 건지 호흡은 일정한데 미간이 잔뜩 구겨진 채였다.

왜 이곳에 있는 거지? 격리 중 아니었나? 치료는 잘 끝난 거야? 부작용은? 수많은 궁금증이 머릿속에 떠올랐지만 일단 추운 바닥에 앉아 눈을 감고 있는 시훈이 걱정되어 그의 앞에 주저앉아 얼굴을 감싸고 어디 상한 곳은 없는지 살피기 시작했다.

“시훈아. 일어나 봐.”

“…자기야.”

내 부름에 반쯤 눈을 뜬 시훈이 나를 발견하고 배시시 미소 지었다.

“어떻게 된 거야. 너 밤새 여기 있었어? 왔으면 왔다고 말을 해야지! 자려면 편하게 누워서 자야 할 거 아냐. 아무리 여름이라도 벽은 차갑다고.”

“너무 곤히 자고 있길래 들어가기가 좀 그래서.”

시훈은 손을 뻗어 내 젖은 머리칼을 쓸어 올려 주었다. 밤새 흘린 땀과 눈물범벅이 된 퉁퉁 부은 얼굴을 보여 주기 싫어 슬쩍 고개를 돌렸지만, 진득하고 따뜻한 시선은 나를 집요하게 따라왔다.

“그만 좀 봐. 지금 너무 못생겼어.”

도저히 부끄러움을 참을 수 없어 몸을 비틀어 빠져나오려 했다. 하지만 내 손목을 잡아채 품에 가둬오는 시훈이 더 빨랐다.

“자기는 어떻게 해도 예뻐.”

거짓말. 땀에 절어서 엉망일 게 뻔한데. 제 눈에는 예쁘게 보인다며 안심시킨다.

“거짓말.”

걱정되어 미운 소리를 툭 내뱉었지만, 막상 내 연인의 얼굴을 보고 나니 잠에서 깬 이후로 계속 지끈대던 머리가 서서히 맑아지기 시작했다.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시훈의 목덜미에서 은은히 배어 나오는 바닷바람을 느끼며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리고 그때 깨달았다. 따뜻한 체온, 포근한 감촉, 모든 것이 현실 같았지만, 사실은 내 그리움이 만들어 낸 꿈이었다는 것을.

그러나 깨고 싶지 않았다. 다시 현실로 돌아가면 또다시 기약 없는 기다림만이 남아 있었기에 지금은 모른 척, 환상 속의 시훈에게 집중하고 싶었다.

“이제 정말 돌아온 거야?”

“응. 이제 돌아왔어.”

“올 때 연락하지 그랬어. 그럼 데리러 갔을 텐데.”

“놀래켜주려고 그랬지.”

“참….”

미련하기로 따지면 권시훈만 한 사람이 있을까. 서프라이즈랍시고 그 먼길을 홀로 돌아오는 것보다 나는 네가 무사히 내 곁으로 돌아오는 것이 훨씬 기쁘단 말이야.

괜히 가슴이 답답해져 미간을 좁히자 시훈은 다시 내 등을 토닥이며 허리를 숙여 나를 더욱 꽉 끌어안았다 그리곤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마치 내 전부를 폐부에 담을 것처럼.

“시훈아. 그깟 잠 깨면 어떻고, 덜 놀라면 어때. 너 아프면 내가 얼마나 속상한데.”

“거기까지는 생각 못 했네. 미안.”

나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시훈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 내가 선 넘을까 봐. 문 열기가 그렇더라.”

“무슨 말이야?”

“꿈에서나 볼 수 있던 애인이 침대에서 무방비로 자고 있는데, 그 옆에서 잠이 오겠어?”

시훈의 입술에서 한 단어, 한 단어가 새어 나올 때마다 쇄골에 닿는 숨결에 어깨가 움찔거렸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이렇게 문 앞에서 지키는 것 말고는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더라고.”

“…다른 방 가서 자면 됐잖아.”

“조금이라도 가까이 있고 싶어서.”

시훈의 어깨를 손으로 밀어내며 눈을 마주 바라보았다. 그러자 마주친 눈꼬리가 부드럽게 휘었다.

아, 이 다정한 남자를 정말 어떻게 해야 좋을까.

감춰두었던 욕정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너무도 오랫동안 품지 못했던 연인이었고 마주한 눈빛은 너무도 뜨거웠다. 그래서 손을 뻗어 시훈의 목덜미를 끌어안으며 몸을 기울였다.

“…?”

놀란 시훈이 막을 새도 없이 입술을 맞대었다.

갑작스레 내가 매달려오자 시훈은 한 손으로는 내 허리를 끌어안고 다른 손으로 바닥을 짚었다. 두 사람의 체중에 팔에 실리자 부들부들 팔이 떨리는 게 보였지만 나는 모른 척 키스에 열중했다.

“하아, 윤진아. 너 갑자기 왜 이래.”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는지 잔뜩 상기된 얼굴을 한 시훈이 나를 살짝 밀어내었다. 몸을 살짝 들어 시훈을 내려다보니 그는 반쯤 드러누워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끌어안은 팔을 풀지 않은 채로 입술을 혀를 내어 핥아 내었다.

“윤진이 너 몸도 좋지 않으면서. 너야말로 찬 기운 맞으면 더 아파. 그만하자.”

시훈은 그만 멈춰야 한다는 이성의 외침에 굴복했는지 꾹꾹 누른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제발… 윤진아.”

“싫어. 놓으면 너 가버릴 거잖아. 또 나 버리고 사라질 거잖아.”

“가긴 내가 어딜 가. 이제 아무 데도 안 갈 거야.”

“거짓말. 눈 뜨면 없어질 거면서.”

“자기야. 윤진아. 꿈속이건 환상 속이건 난 언제나 네가 가장 소중해. 어디에서도 아프지 않았으면 해. 그래서 그만하자는 거야.”

아, 이렇게까지 모진 말은 하고 싶지 않았는데, 꿈속의 권시훈마저 나를 밀어내려는 느낌이 들자 더 이상 속마음을 숨길 수 없었다.

“싫어.”

“윤진아… 내 말 정말 안 들어줄 거야?”

대답하지 않았다. 내가 너를 얼마나 너를 그리워했는데, 이깟 열병 정도는 거뜬히 넘겨 버릴 수 있다. 어차피 깨어나면 또다시 아플 거, 꿈속에서라도 마음껏 너를 느끼고 싶었다.

“윤진아. 나 이러다 진짜 너 어떻게 할지도 몰라.”

마지막으로 시훈은 내게 애원했다.

사실, 나 또한 이 고집이 아직 약 기운이 가시지 않아서인지, 아니면 내 연인을 향한 욕정인지 도무지 판단이 서지 않았지만, 지금 그만두면 반드시 후회할 것이라는 건 확실했다.

“윤진아….”

시훈은 내 이름을 몇 번이고 불렀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그냥,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하아….”

“시훈아. 제발.”

“…….”

“나 좀 안아줘.”

턱과 입술이 볼품없이 떨리는 것을 숨기려 입술을 꾹 닫고선 시훈을 내려다보았다. 시훈 또한 천천히 나를 올려다보았다.

“너, 후회하지 마.”

그리고 깊은 밤바다에 빨려가듯, 새까만 눈동자가 나를 잡아먹을 것처럼 달려들었다.

무언가 결심한 듯 시훈의 왼팔이 나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강하게 몸을 끌어당겨 입술을 부딪쳐왔다. 나는 고개를 비틀어 그를 온몸으로 받아들였다.

시훈은 나를 끌어안으며 움직임을 재촉했다. 그러자 심장에서 뻗어 나온 피가 순식간에 머리끝까지 치고 빠져나갔다.

몸에 힘이 풀리며 시훈에게 몸을 맡겼다. 나의 체중이 실리자 시훈의 등이 바닥에 닿으며 우리 두 사람은 완전히 포개진 모양이 되었다.

“아….”

우리는 이마를 맞댄 채로 호흡을 갈무리하며 서로의 눈을 바라보았다.

별이 박힌 듯 반짝이는 눈동자에는 오로지 서로의 모습만이 온전히 담겨 있었다.

시훈은 내 턱을 감싸며 엄지손가락으로 내 아랫입술을 쓸어내리며 복잡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시훈아.”

“응….”

잔뜩 갈라진 음성으로 겨우 목소리를 내어 대답한다. 울컥 목울대에 무언가 낀 것처럼 답답해졌다. 나의 눈동자에 슬픔이 그렁그렁 차올랐다. 어쩐지 한마디라도 더 했다가는 눈물을 쏟을 것 같았다.

“내가 너를 슬프게 해도… 옆에 계속 옆에 있어 줄 거지?”

내 물음에 시훈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넌 잘못한 거 없어. 없을 거야. 만약 잘못을 한다면 그건 모두 내 죄일 거야.”

“아니야. 앞으로의 일을 모르는 거야.”

“단정 짓지 마.”

“너야말로.”

“난 윤진이 네가 하는 일이면 다 좋아. 다 괜찮아. 나는 무조건 네 편이야. 그러니까 의심하지 마.”

“…고마워.”

대답에 만족한 듯, 시훈은 배시시 웃으며 나의 가슴으로 무너지듯 쓰러졌다. 지쳐 잠이 든 건지 가쁜 호흡이 점점 잦아들더니, 이내 쌕쌕하는 작은 숨소리가 났다.

고개를 젖히고 천장을 바라보았다. 어둑한 천장과 벽 위로 우리 두 사람의 그림자가 겹쳐 드리워져 있었다.

가슴 한쪽이 답답하게 막혀왔다. 나는 시훈의 야위어버린 등을 끌어안으며 느리게 토닥였다. 열여덟 소년이 아닌, 완연한 어른의 양감을 가진 등. 역시나, 너는 내가 눈을 뜨면 내 곁에서 사라져 있겠구나.

시훈을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어렴풋이, 아니 확실히 이 꿈에서 깨어나면 많이 울게 될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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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쪽같은 내 남친

한가린 장편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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