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며칠째 두통이 가시질 않았다.
김태준의 무례함과 김규하의 서글펐던 외침, 그리고 권시훈의 슬픔. 그냥 다 버겁고 지쳤다. 아무리 몸부림쳐도 바뀌지 않는 현실에 갇혀 있으니 무력해지고 스스로가 쓰레기처럼 느껴졌다.
매일 같이 꿈에 시훈이 나왔다. 꿈에서 우리는 서로를 안고 또 안으며 목이 쉬어버릴 때까지 울었다. 깨어나면 없을 걸 알아서 더 그랬다. 어느 날은 너무 괴로워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도 했었다. 그러나 이마저도 없다면 정말 영영 권시훈을 잃어버릴 것 같아 모질게 떨치지 못했다.
새장은 넓었지만, 문이 없었다.
“…….”
나는 호텔 로비 중앙에 우뚝 솟은 조형물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예술에 문외한인지라 대체 무엇을 표현하고자 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높은 첨탑 모형은 내 눈에는 흉물에 가까웠다.
세미나 참석을 위해 오늘 오전 본원에 들렀다가 옥상에서 우연히 민 원장을 만났다. 얼굴을 마주하자 지난번 술주정이 떠올라 껄끄럽고 불편해져 대충 인사하고 도망가려 했는데 내 등 뒤에 대고 갑자기 식사 제의를 해왔다.
당연히 거절하려 했다. 그런데,
‘박 박사 오늘 한가한 거 이미 알고 있으니 뺄 생각 하지 마세요.’
도망가지 못하게 쐐기를 박아버리는 바람에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영 내키지 않는 약속이었으니 나가야 할 시간이 다가올수록 몸이 무거웠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내뺄만한 핑곗거리가 생각나지 않았다.
“…….”
월요일 저녁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로비는 오고 가는 사람들로 분주했다. 나를 지나치는 사람들은 대부분 표정이 좋았다. 업무차 방문한 사람도 있겠지만, 투숙객이 훨씬 많아 보였다. 서울에 여행할 데가 어디 있다고 월요일부터 사람이 이렇게 많지. 모두 나만 빼고 즐거운가 보다.
괜히 시계를 보았다. 8시가 조금 넘어 있었다. 민 원장에게 전화를 걸어볼까 하다 일하는 중이려니 싶어 관두었다. 액정이 꺼진 휴대폰 화면에는 멀뚱한 표정의 박윤진이 있었다.
“아, 왜 이리 급하게 굴어. 저녁이라도 먹고 가.”
“생각 없어.”
“그럼 올라가서 맥주 한잔할까?”
“미쳤네. 미성년자한테 술을 권하고 싶어?”
“야… 너 오늘따라 되게 재수 없게 말한다.”
“응. 나 원래 재수 없어. 그러니까 먼저 갈게. 혼자 올라갈 수 있지?”
“야아아! 너 진짜 이럴래?!”
“귀찮으니까 좀 떨어져!”
휴대폰에서 눈을 떼고 멀리 어딘가를 멍하니 응시하며 시간을 죽이고 있을 때였다. 젊은 남녀가 투닥거리며 내 앞을 지나쳐갔다.
“가지 마아! 가지 말고 나랑 놀아달라니까!”
“아, 싫다고.”
남자의 단답에 여자는 꽤 짜증이 난 듯했다. 사랑싸움이겠지. 싶어 관심을 거두고 시선을 떨구는데, 그들이 지나간 길 뒤로 익숙한 향이 따라왔다.
순간, 정신이 들어 고개를 치켜들었다.
“…규하야?”
“…?”
내 부름에 나를 지나쳐가던 남자는 걸음을 멈추고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짙은 눈매와 각진 하관, 꿰뚫어 보는 듯한 날카로운 눈빛. 역시, 김규하가 맞았다. 규하는 오늘 무슨 대단한 일이 있었는지 그는 단정한 슈트 차림이었다. 몸 선이 드러나는 블랙 슈트는 벌어진 어깨와 길게 뻗은 다리가 유독 돋보이게 했다.
“어, 윤진아. 여기까지 어, 어쩐 일이야??”
“너야말로. 왜 이 시간에 이런 곳에… 그리고 그 차림은 뭐야?”
“아, 이거.”
어색한지 규하는 뒷목을 긁적였다. 나도 쭈뼛거리며 슬쩍 시선을 발끝으로 떨어뜨렸다. 옷이 날개라더니… 늘 교복 아니면 제 몸보다 품이 큰 편안한 옷만 걸치던 규하였는데, 이렇게 제대로 갖춰 입으니 매일 보는 얼굴인데도 낯섦이 가시지 않았다.
“일이 좀 있어서.”
“일?”
“…집안일.”
“아아. 그래.”
더 자세히 묻고 싶었지만, 당사자가 이 상황을 썩 내켜 하지 않는 것 같아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앗! 윤진 씨. 또 보내요? 이쯤 되면 우리 무슨 인연 같은 거 아닌가??”
그때,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이 반갑게 아는 척을 했다.
김태준의 약혼녀. 이하영이었다.
“네, 네에. 안녕하세요.”
그 반색에 당황한 건 오히려 내 쪽이었다.
“여기까지 어쩐 일이에요? 시간도 꽤 늦었는데?”
“…어. 잠깐 볼일이 있어서.”
“무슨 볼일? 이 시간까지 해야 하는 일이면 엄청 중요한 건가 보다!”
“아뇨. 꼭 그렇지는 않은데.”
“아아! 알겠다. 밤에 하는 일이라면 역시….”
하영은 눈을 가늘게 뜨고선 음흉함을 한껏 담아 입을 열었다.
“아줌마 좀 조용히 해! 밖에서 못 하는 말이 없어!”
열려 했는데, 당황한 규하가 다급히 그녀의 말을 끊고 앞을 막아서는 바람에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치이. 넌 내가 하는 것마다 다 마음에 안 들지?”
“이제 알았어?”
하영은 규하의 핀잔이 못마땅한지 한쪽 눈썹을 찡그렸다. 어쩐지 뺨에 불편한 시선이 느껴졌지만, 일부러 모른 척했다.
“그런데… 하영 씨는 규하랑 둘이 나온 건가요? 김태준… 전무님은 어디 가시고.”
“아, 태준 씨가 간만에 가족끼리 식사하자고 해서요. 요즘 프로젝트 때문에 바빠서 통 얼굴 볼 시간이 없었는데 오늘은 잠깐 시간이 난 모양이더라고요.”
“아… 네. 가족.”
가족이라는 단어에 규하는 대번에 눈썹을 구겼다.
“이상하게 엮지 마. 가족은 무슨. 아버지랑 아줌마나 가족이지. 나랑 아줌마가 왜 가족이야. 남이지.”
“진짜 너 윤진 씨 앞에서까지 삐딱하게 나올래?”
하영은 이를 악물고 규하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규하는 그러거나 말거나 태연하게 내 쪽을 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윤진아. 뭐라 하든 신경 쓰지 마. 이 여자가 원래 오버가 좀 심해.”
“김규하. 너 장차 새엄마 될 사람한테 버릇없이 굴지 마. 그리고 윤진이가 뭐야. 너보다 한참 나이 많은 형한테!”
하영은 가족이 아니라는 규하의 한 마디 발끈했는지 로비가 떠나가라 소리쳤다. 규하 또한 적잖이 화가 난 듯, 아픈 말로 하영을 타박하기 시작했다.
“내가 윤진이라 부르건 형이라 부르건 내가 알아서 할 거니까 신경 꺼.”
“뭐?”
“그리고 아줌마야말로 갑자기 엄마인 척 가식 떠는 거 짜증 나.”
“쪼끄만 게 기어오르네. 아버지한테 혼나봐야 정신 차리겠어.”
“일러. 나중에 손해 보는 게 누군지 두고 보면 알겠네.”
“이게. 진짜….”
하영은 지지 않으려 으르렁대었지만, 결국 본인이 이길 수 없다고 판단했는지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내저었다.
“규하야. 그만해. 보는 눈도 많은데….”
두 사람 모두를 말리는 게 맞았지만, 잘 알지 못하는 하영을 나무라고 싶지 않아 일부러 규하에게 싫은 소리를 했다.
“…그래. 윤진이가 그만하라면 그만해야지. 미안해.”
“역시. 윤진 씨는 내 편일 줄 알았어!”
딱딱하게 굳었던 분위기는 하영의 너스레로 순식간에 느슨하게 풀어졌다.
기다렸다는 듯 악수를 청하는 하영의 손을 어설프게 맞잡았다. 가늘고 기다란 손가락은 당장 부러질 것처럼 연약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규하는 주머니에 손을 꽂으며 헛웃음을 터트렸다.
이어서 그저 그런 근황 이야기나 호구조사가 이어졌다. 어디까지나 선을 넘지 않는 예의상의 것들.
특히 주가 된 것은 나와 규하의 만남과 학교생활이었다.
“윤진 씨. 우리 앞으로 친하게 지내요. 이미 규하 덕분에 내적 친밀감은 최고조이긴 하지만, 윤진 씨도 저 편하게 생각하면 좋겠어요.”
“제 욕을 얼마나 했기에 내적 친밀감이 생길 정도인지….”
“어? 아뇨, 아뇨. 욕이 아니라 칭찬!”
“…아. 다행이네요.”
“규하가 박윤진이라는 아이랑 친하다고 하기에 처음에는 동명이인인 줄 알았어요. 내가 아는 박윤진 씨는 규하랑 친구 할만한 나이가 아닌데 싶어서… 나중에 태준 씨에게 사정 듣고 얼마나 놀랐는데요!”
“아. 김 전무님이 말씀해 주셨구나.”
극비 프로젝트라더니. 극비의 기준이 꽤 주관적인걸. 허탈함에 씁쓸하게 웃었지만, 하영은 눈치 없이 제 할 말을 이어 나갔다.
“태준 씨가 얼마나 다정한데요. 회사에서 있었던 일도 숨기지 않고 말해 주고, 만났던 사람들도 모두 확인시켜줘요. 이게 믿음을 쌓는 방법이라면서. 너무 멋지지 않나요?”
“아… 네. 좋으시겠네요.”
“규하도 제 아버지를 닮았는지 사람한테 관심도 많고, 저렇게 뚱해 보여도 좀 주책이더라고요. 윤진 씨 이야기만 나오면 헤벌쭉 입을 찢으면서 윤진 씨가 엄청 성격 좋고, 착하고. 또 예쁘….”
“아 진짜! 아줌마! 조용히 못 해??”
신난 하영이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말까지 꺼내고 말자, 규하는 귀까지 새빨개져서는 다급히 하영의 팔을 붙잡았다.
솔직하지 못하긴. 하영이 말하지 않았다면 평생 몰랐을 속내라 좀 신경 쓰이고 부담스럽기는 하지만 굳이 티 내지 않고 웃어버렸다.
“하여간. 쓸데없는 소리 하는 데는 선수지. 그렇게 아버지가 좋으면 빨리 둘이 살림 차리고 살아. 제발 그 살림에 날 끼워 넣진 말고.”
“어머? 아직 미성년자 아들을 어디다 보내니? 다 클 때까지 엄마가 잘 데리고 있어야지.”
“나랑 나이 차이 얼마나 난다고 유세야.”
“미성년자와 성인은 엄연히 다르거든?”
“하….”
아마, 김규하는 저와 몇 살 차이 나지 않는 젊은 여자가 곧 제 어머니가 된다는 것도 싫고, 그 여자가 나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도 내키지 않아 괜히 짜증 내고 툴툴대는 것일 테다.
규하의 짜증을 끝으로 세 사람은 잠시 입을 닫았다. 의도한 건 아니었는데 한 번 분위기가 가라앉아버리고 나니, 셋 중 가장 눈치 없는 캐릭터로 보이는 하영도 이리저리 눈을 굴릴 뿐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 소심한 나는 말할 필요도 없고.
“윤진 씨.”
모른 척하고 도망가버릴까 고민하던 찰나였다. 어느 순간 내 뒤로 옅은 담배 향이 다가와 있었다.
“아, 원장님.”
목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민 원장이 내 곁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급하게 내려왔는지, 그의 창백한 얼굴이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목 끝까지 채운 셔츠 단추와 단단히 묶인 타이가 얼마나 불편한 자리에 다녀왔는지 짐작 가게 했다.
“내가 좀 늦었죠. 미안합니다. 그런데….”
민 원장의 시선이 규하와 하영에게로 향하다 이내 나에게로 되돌아왔다.
“다 구면인 분들이네요.”
“어? 그러세요?”
“이분은 김태준이랑 결혼하실 분이고, 저 꼬맹이는 김태준 아들 아닙니까?”
“꼬, 꼬맹이….”
“예비 모자지간끼리 데이트 나온 건가. 보기 좋네요.”
분명히 사실만을 말했는데 하영과 규하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러거나 말거나 민 원장은 나를 스윽 내려다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전 오늘 윤진 씨와 만나기로 되어 있던 게 아닙니까? 이분들이랑 약속한 기억은 없는데.”
“우연히 만났어요. 두 분은 따로 선약이 있으시다고.”
“…그렇군요.”
짧은 대답 후 민 원장은 하영과 규하에게 짧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러면 저희는 먼저 가보겠습니다. 두 분 즐거운 시간 보내십시오.”
“어어! 원장님!”
막 자리를 뜨려는데 하영이 민 원장을 다급히 붙잡았다.
“혹시 두 분만 가시는 건가요?”
“네. 그렇습니다만.”
“그럼 실례가 안 된다면 저희가 동행해도 될까요?”
하영의 제안 같은 부탁을 들은 민 원장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나 또한 놀라움보다는 불쾌함이 먼저 올라와 하영을 보는 눈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하지만 민 원장은 화를 내는 대신 차분히 되물었다.
“굳이 저희가 그 제안에 따라야 하는 이유라도 있습니까.”
“그게… 그냥 별다른 의도는 아니고, 저희 그이가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친구분 뵈면 정말 반가워할 것 같아서요….”
“…김태준과 제가 그렇게 서로를 반가워하는 사이는 아닙니다만.”
“에이. 그래도 태준 씨는 원장님 이야기 많이 하던걸요.”
“…허.”
민 원장은 코웃음을 치더니 옆자리를 지키고 있던 나를 흘긋 내려다보았다. 나는 시선에 흠칫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무언가 동의를 구하는 눈빛이었다.
보아하니, 민선우는 김태준과 이 기회에 어떤 이야기를 나누는 게 낫다고 판단했지만, 나와의 껄끄러운 관계 또한 알고 있으니 양해를 구하려는 모양이었다.
“이렇게까지 부탁하시는데 모른 척하기도 그렇네요. 저희가 폐가 되지 않는다면 잠깐 함께하시죠.”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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