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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쪽같은 내 남친-78화 (78/85)

78화

김태준은 끔찍하게 싫었지만, 이곳에 선 채로 이야기를 질질 끌기 싫어, 내가 먼저 합석을 제안해버렸다.

“유, 윤진아.”

갑작스러웠는지 규하는 얼뜬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원장님께서도 그렇고, 김 전무님도 마무리 못 한 이야기가 있는 것 같으니 기회 있을 때 빨리 해치우는 게 낫지.”

“……”

“그리고… 우리도 마땅히 할 일 없기도 하고….”

나는 열심히 말을 쏟아 내다 가만히 내려다보는 규하의 눈빛이 너무 뜨거워 점점 말끝을 흐렸다.

아, 이건 아닌가. 이 어색함을 깨보려 충동적으로 꺼낸 말이 실수였을까. 하지만 어떻게 해. 이미 물은 엎질러진 후인걸.

“그럼 하영 씨와 자제분께 폐가 안 된다면 신세 좀 져도 될까요.”

내 무안함이 극에 달하기 전, 민 원장이 두 사람에게 정중하게 제의했다. 김규하는 민선우와 나, 이하영을 번갈아 바라보다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무슨 힘이 있나요. 어른들 하라는 대로 해야지.”

“원래 이런 자리에서는 아이의 의견이 가장 중요한 법이니까.”

규하가 수락하자 민 원장은 무미건조한 미소를 지으며 그대로 몸을 돌려 호텔 지하로 향했다. 규하는 씁쓸한 얼굴로 민 원장의 뒷모습을 보다가 느릿하게 걸음을 옮겼다. 나도 그들의 뒤를 따르려 몸을 돌렸다. 그때, 하영이 내 곁으로 다가오더니 내게 발을 맞춰 걸으며 작게 속삭였다.

“데이트 방해해서 미안해요. 태준 씨가 민 원장님이랑 꼭 할 말이 있다고 했던 것 같아서 실례 무릅쓰고 끼어들어 버렸네요.”

“무슨 소리입니까! 데, 데이트라뇨!”

“어머? 아니에요? 이 시간에 단둘이 만나는 게 데이트 아니고 뭐람?”

좀 당황스러운 건 사실이다. 할 말 있어서 불렀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김태준을 보러 가자니. 하지만 한편으로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민 원장은 아직 어려웠고, 단둘이 있기에는 불편했으니까.

“직장 상사에요. 상사. 그 이상은 절대 아닙니다.”

“그러면 더 말이 안 되지. 어느 상사가 저녁에 부하직원 술을 사준다고 호텔까지 데리고 와요?”

그것도 그러네. 뭔가 반박할 수 없어 쓰게 웃어버리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 * *

테이블 위로 보기만 해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술이 세팅되었다. 하영은 마주 앉은 나에게 입 모양으로 ‘이거 진짜 비싸요.’라고 말했다. 그 표정이 너무 진지해서 나도 모르게 푸흡 웃어버리고 말았다.

미리 자리에 앉아 있던 김태준은 싸가지 없게도 우리가 다가오는 것을 발견하고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괘씸해서 그냥 돌아갈까 하다가 민 원장의 면과 어른들 사이에 껴서 이도 저도 못 할 규하가 신경 쓰여 억지로 자리에 앉았다. 민 원장도 나와 비슷한 생각이었는지 영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잔이 오가고, 잠시 가벼운 대화가 오갔다. 대부분 김태준이 민 원장에게 질문했고 민 원장은 김규하에게 질문했다. 김규하는 긴장한 건지, 기분이 더러운 건지 시종일관 딱딱한 표정을 하고선 짧게 대답했다.

“규하 학생은 요 몇 년 새에 일이 많네. 갑자기 아버지가 생기고, 이젠 어머니까지 생기게 되었으니.”

“제가 싫다고 해도 어쩔 수 없잖아요. 어른들 일인데.”

“말한들 소용이 없을 것 같아서?”

“할 말도 없고요.”

곁눈으로 맞은편에 앉은 규하를 살폈다. 냉해 보이는 눈동자에는 감정이라고 말할만한 그 어떤 것도 보이지 않았다.

낯설었다. 알고 지내는 동안 늘 농담하고 장난치고 입씨름이나 하기 바쁜 사이였는데, 오늘 말끔하게 차려입은 모습도 어색했고, 무엇보다 저 가라앉은 눈빛이 그를 열여덟 김규하가 아닌 한참이나 큰 어른처럼 느껴지게 했다.

“민선우. 초대는 내 약혼녀가 했는데 넌 내 아들한테만 관심 있네? 이거 주객이 좀 전도된 거 아닌가?”

술병이 반쯤 비워졌을 때 즈음, 김태준의 입이 열렸다. 불만 가득한 탁한 목소리에 민 원장의 고개가 스윽 돌아갔다.

“입 닫고 술만 퍼마신 건 네 쪽이야.”

“그래서? 내가 쭉 입 닫고 있었다면 내 아들 일상 탐구나 하다 일어나려고 했어?”

“그것도 나쁘지 않지.”

“미친….”

민선우가 거드름을 피우자 잔을 쥔 김태준의 손에 빠득 힘이 들어갔다. 그의 옆에 앉은 하영은 혹여 잔이 부서질까 두려웠는지, 옆에 앉은 규하 쪽으로 엉덩이를 바짝 붙였다. 그러자 규하는 질색하며 의자 끝으로 몸을 옮겼다.

나는 이 상황을 좀처럼 납득하기 어려웠다. 민 원장이 김태준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느낌은 진작 받았지만, 이 정도였다고?

분명 김태준과 민선우는 대학 동기로 시작해 여태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고 했는데, 주고받는 말이 죄 가시투성이여서 내막을 모르는 사람이 듣는다면 오랜 원수의 대화라고 오해하기 딱 좋을 법했다.

“됐고, 본론이나 말하지. 나를 만나고 싶다 했다면서. 왜 불렀어? 나랑 다정하게 수다나 떨자고 부른 건 아닐 거 아냐.”

“왜 이렇게 급해? 하나씩 천천히 물어.”

“너랑 마주 보고 있기 싫어서. 혹시 ‘YOUNG’ 프로젝트 때문인가?”

“…정확히 말하면 ‘YOUNG’ 프로젝트 연구인력 지원 건이지.”

“그 이야기는 저번 통화로 마무리한 거 아니었나.”

“네가 일방적으로 통보한 거잖아. 나는 동의한 적도 없고, 내 의견 말한 적도 없어.”

“의견이라… 그래. 그 잘난 의견 뭔지 들어나 봅시다. 뭔데.”

내내 까칠하던 민 원장이 관심을 보이는 듯하자 김태준은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홍주석 박사가 계속 그쪽으로 추가인력 요청하고 있는데 네가 결재 안 해 준다면서.”

“그렇지.”

“그만큼 깠으면 좀 져줘도 되는 거 아냐? 너희 연구소에 사람 많이 남잖아.”

“조사 많이 했나 보다?”

“가만히 있어도 들리는 걸 어떡하라고.”

김태준의 도발에 민 원장의 미간이 좁아졌다.

“너희들끼리 알아서 해. 다시 말하지만 나는 ‘YOUNG’ 프로젝트에 우리 연구원들이 더 이상 차출되는 건 원치 않는다. 홍주석 박사 빼 간 걸로 만족해.”

“서운하네. 이제 막바지라 한창 스퍼트 올려야 할 때여서 JI에서 조금만 더 도와주면 정말 고마울 것 같은데.”

“네 감사 따위는 받고 싶지 않아.”

“하아, 민 원장. 원래 이렇게 빡빡한 타입이었어?”

“이제 알았나?”

이제 알았냐 비아냥거리며 한쪽 입꼬리를 올리는 민 원장을 노려보던 김태준은 어금니를 악물었다.

“…반대로 너희 쪽 연구원들이 우리 프로젝트에 들어오고 싶어 할 수 있다는 생각 해본 적 없어? 만약 그렇다면 네가 연구원들 앞길 막는 꼴 아냐?”

“아무리 큰 프로젝트고 우리 쪽 인력이 어느 정도 들어가 있더라도 이건 다른 문제야. 정 너희 프로젝트에 끼고 싶다면 JI 그만두고 K쪽으로 가는 게 맞지. 어설프게 두 군데에 발 걸치고 있으면 본인에게도 마이너스고, 양쪽 연구소에도 손해야.”

“당장 내년 과제에 우리 자본 들어가면 그런 한가한 소리는 하지 못할 텐데?”

“사기업 지원 없어도 여태 잘 굴러갔어. 걱정하지 마.”

‘YOUNG’ 프로젝트의 인력이 부족하다는 이야기는 나 또한 홍주석을 통해서 들은 바가 있었다.

때문에 더욱 이해 가지 않았다. 극비로 진행된다고 하더라도 실질적으로 K제약의 메인 프로젝트이니 예산과 인력 또한 부족함 없이 편성되었을 텐데 이제 와서 인력이 부족하다 말하는 것은 쉽게 납득하기 힘든 부분이었다.

“김태준.”

그때, 민 원장이 조용히 김태준을 불렀다. 짜증 섞인 손짓으로 앞머리를 쓸어올리던 김태준은 그의 부름에 사납게 눈을 들었다.

“네가 자꾸 인력 차출 어쩌고 헛소리 지껄이면서 박윤진 박사 탐내는 거 보기 안 좋아.”

“…뭐?”

“처음부터 네 목표는 박윤진이었잖아. 홍주석이 아니라.”

민선우의 입에서 내 이름이 나오니 명치끝이 턱 막힌 기분이 들었지만, 애써 표정을 가다듬었다.

어찌해야 할지 몰라 민선우 쪽으로 조심스럽게 눈을 돌려 보았다. 하지만 곧 시선을 내리깔고 말았다. 날카롭게 변하는 눈매와 진중하게 말하는 낮은 목소리가 낯설어 어쩐지 똑바로 그를 볼 수 없었다.

대놓고 쳐다보다 눈이라도 마주치면 그대로 굳어 버릴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확실한 거 맞아? 잘 알지도 못하면서 입만 나불거리지 말고 신중히 생각하고 말해.”

“너만 듣는 귀 있는 거 아냐. 그리고 조금만 머리 굴려 보면 금방 알아챌 수 있는 사실이고.”

당황한 듯 얼굴을 붉혔던 김태준은 두어 번 헛기침을 내뱉더니 금세 평정을 되찾고 민 원장을 노려보았다.

“아깝네. 이렇게 민 원장이 박윤진 박사 싸고돌 줄 알았으면 프로젝트 시작하기 전에 확 빼 왔어야 했는데.”

김태준이 거드름을 부리자 이번에는 민선우의 눈이 가늘게 뜨였다. 반면, 나는 김태준의 말에 놀라 술잔을 떨어뜨릴 뻔했다.

뭐? 누가 누굴 빼 와? K제약이 김태준 끄나풀인 걸 뻔히 알고 있는데 그 사지를 내 발로 걸어 들어간다고?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개소리하네. 잡는다고 잡힌다는 확신은 자만 아닌가.”

“돈이면 안 되는 게 없으니까.”

“미친놈.”

저 새끼가 또 뭐라는 건지. 당사자 앞에 두고 빼 오네, 마네 할 때도 참았는데, 이젠 나를 돈만 주면 줏대도 양심도 뭣도 없는 사람으로 취급한다.

그래. 김태준은 원래 이런 새끼였지. 세상에 오로지 저 혼자 인간이고 나머지는 개돼지만 못한 취급 하며 적당히 가지고 놀다 버리고, 또 새로운 걸 찾고. 그렇게 아주 오래전의 박윤진을 망가뜨리고, 그전에는 김규하와 그의 어머니를 농락했고, 이제 와 또다시 나를 면전에 앉혀두고 굴욕을 준다. 이렇게 해서 네가 얻는 게 무엇이길래 나에게 이러는 건지 도통 모르겠다. 이제는 알고 싶지도 않다.

“아, 저. 잠시 자리 좀….”

결국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본의 아니게 주인공이 되어버린 상황에 민망함과 무안함이 몰려왔고, 화가 치밀어 올랐다.

“윤진 씨. 그냥 같이 일어납시다. 더 이상 할 말도 없어요.”

“아닙니다. 잠깐이면 돼요. 이야기 마무리 지으셔야죠. 금방 다시 오겠습니다.”

“윤진 씨….”

“저, 정말 괜찮아요. 괜찮습니다.”

괜찮다고 연거푸 말하곤 일부러 화장실로 도망쳤다.

이대로 자리를 뜨는 건 김태준한테 지는 꼴이다. 물론 이기고 지고는 아무 의미도 없지만, 적어도 민 원장이 나로 인해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물러나는 것은 원치 않았다.

“하아.”

화장실에 들어서자마자 누가 들어올세라 얼른 문을 닫았다.

세면대로 다가가 차가운 물을 끝까지 틀어 손을 닦았다. 얼굴이라도 벅벅 씻어버리면 좋을 텐데 옷이 엉망이 될까 봐 억지로 참았다.

‘일진 한 번 더럽네.’

절대 다시 만나고 싶지 않았던, 김태준, 전혀 궁금하지 않았던 나의 스카웃 비화. 기껏 약속을 지키려고 나온 자리에서는 직장 상사와 꼴 보기 싫은 새끼가 으르렁대고 있다.

두통이 가시지 않아 주머니를 뒤져 약통 안의 약을 꺼내어 한 번에 삼켜버렸다. 뭐가 되었건 제정신으로 오늘 하루가 지나가기를 바랐다.

“…….”

벽을 짚고 겨우겨우 걸음을 옮겼다. 술기운인지 약 기운인지 온몸의 힘이 쭉 빠져나가 다리가 후들거렸다.

짚은 벽이 쑤욱 뚫리며 짚은 팔이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순간, 중심을 잃은 나는 그대로 휘청 기울었다.

“어, 어.”

그런데 누군가가 내 팔을 강하게 붙잡아 부축했다. 몸이 완전히 반대로 넘어갈 만큼 강한 힘이었다.

“윤진아! 괜찮아?”

김규하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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