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하아….”
가슴이 조여드는 것만 같아 허리를 숙인 채 옷자락을 부여잡고 밭은 숨을 몰아쉬었다. 어찌나 심장이 빨리 뛰는지 시선 끝에 걸린 내 신발 앞코가 흐릿하게 번지기 시작했다.
“아, 미안… 잠깐 어지러워서.”
나는 가까스로 정신을 다잡고 규하의 부축을 받아 바로 섰다.
“형.”
내가 뱉은 더운 공기에 땀이 맺힐 때 즈음, 발 위로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보니 규하가 굳은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이가 몰고 온 공기에서는 끈적끈적한 여름밤 냄새가 났다.
“하… 미안. 많이 놀랐지?”
“표정이 너무 안 좋아 보여서 따라와 봤는데… 괜찮아?”
“아, 괜찮아. 고마워.”
“정말 괜찮은 거 맞아? 얼굴빛이 영 아닌데?”
“… 나 원래 낯빛 안 좋은 편이야.”
“그걸 지금 말이라고….”
개소리라는 건 내가 가장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슬쩍 규하의 어깨를 밀어내며 무안한 얼굴을 숨겼다.
“그런데 넌 왜 왔어?”
“열 받아서.”
“…뭐?”
“아저씨들이 형 가지고 함부로 말하는 거 듣기 싫어서 한마디 했더니 난리를 치는 거야. 그래서 잠깐 피신 왔지.”
“대체 무슨 말을 어떻게 했길래.”
“늙은이들끼리 추태 부리지 말고 체통 좀 지키시라고.”
“너 진짜… 어디 딴 데 가서 절대 그러지 말아라.”
“내가… 참아보려고 했거든? 진짜 참으려고 했어. 그런데 도저히 그냥 앉아 있을 수가 없더라.”
올려다본 규하의 눈동자는 까맣게 가라앉아 있었고 억눌린 듯 꽉 막힌 목소리에는 미처 숨기지 못한 분노가 서려 있었다.
잘했다고, 더 지르지 그랬냐며 편들어 주고 싶었다. 그런데 아닌 건 아닌 거다. 내 새끼 어디 가서 버릇없다는 소리 듣지 않게 하고 싶진 않았으니까.
“규하야. 아무리 그래도 말이 너무 심했잖아. 다들 얼마나 놀랐겠어. 나중에 태… 아니, 아버지 얼굴을 어떻게 보려고 그래.”
“그런 것까지 생각했으면 그런 말도 하지 않았고, 형한테 달려오지도 않았어.”
“너도 참 대책 없다.”
“윤진아.”
“…….”
“방금 말했잖아. 수습할 생각이 있었다면 저지르지도 않았을 거라고.”
나에게 내는 짜증이 아님이 분명한데도 왜인지 목덜미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뭐라 더 말해야 할지 몰라 입술을 안으로 말아 물었다. 규하는 그런 내 모습을 흘긋 내려다보더니 머리칼을 쓸어올리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아. 모르겠다. 후회는 안 되는데 형이 곤란해질까 봐 걱정되긴 하고, 그렇다고 굽히고 들어가긴 싫고.”
“걱정될 게 뭐 있어. 규하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잖아.”
“이게 아무 일이 아니야? 박윤진이 물건도 아니고 바로 앞에 두고 넘기네, 마네 하는 개소리 듣고 있는 게 아무 일이 아니라고?”
“그게….”
“말 나온 김에 물어보자. 여태 저 아저씨들한테 이딴 취급 받으면서 일했던 거야?”
“별거 아니라니까? 그냥… 일하다 보면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 나올 수 있고, 사람 상품처럼 대하는 것도 비일비재야. 난 전혀 신경 안 쓰니까 너도 더 이상 마음 쓰지 마.”
“형.”
김규하가 짧게, 나를 불렀다. 그 목소리가 너무도 고압적이라 나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혹시 내가 어려서, 아무것도 모를 테니까 대충 얼버무리려고 하는 거야?”
“무슨… 아니야. 난 그저 현실을 말한 것뿐이라고.”
“아, 현실… 현실 그것참 지랄 맞네.”
규하가 왜 이렇게까지 화가 났는지 이유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이를 대체 어떻게 이해시켜야 좋을지, 뭐라 말해야 이 아이의 화를 가라앉힐 수 있을지는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어른들의 일이니까 넌 몰라도 된다고? 너도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될 거라고? 그런 무책임한 대답이 규하에게 정답이 될 리 없었다.
“됐어. 알았으니까 표정 좀 풀어. 잘 모르겠지만 생각하다 보면 답이 나오겠지.”
“화내지 말고….”
“형. 화도 내지 말라고 하면 나 속 터져 죽어.”
“…….”
“참을 만하니까 마음 쓰지 않아도 돼. 두면 나아지겠지.”
참을 만하다라. 이 아이의 분노의 한도는 어디까지일까. 분명 소리를 질러도 모자랄 텐데, 눈앞의 내가 마음 쓰여 애써 아무렇지 않다 둘러대는 모습이 안쓰러워 보였다.
“그러면 난 먼저 들어가 볼게. 마음 가라앉히고 와.”
“형. 잠깐만.”
함께 있어봤자 도움 되지 않을 것 같아 먼저 자리로 돌아가려 하자 규하가 나를 붙잡았다. 나는 의아한 눈으로 규하를 돌아보았다.
“한 5분만 있다가 같이 가.”
“…왜?”
이유를 물으니 영 곤란한 상황인 듯 눈동자를 위로 하며 시선을 피한다.
“지금 가봤자 좋을 것 없을 것 같아.”
“왜? 무슨 일 있어?”
“내가 질러버려서 그런 것도 있는데, 지금 두 아저씨 눈에 불꽃 튀고 난리가 났어. 분명 일 이야기인데 거의 싸우려고 하더라. 좀 수그러들 때까지만 여기 있자.”
“아….”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아 고개를 끄덕이자 규하는 못마땅한 듯 입을 일자로 굳히곤 나를 바라보았다.
“방금은 화내서 미안해. 정색하려고 한 건 아닌데 나도 모르게….”
“…그럴 수도 있지 뭐.”
“이해하려야 이해할 수가 없다. 싸울 거면 아예 만나질 말든가 왜 비싼 술 마시면서 지랄 쇼들이야?”
“너… 어른들한테 지랄 쇼가 뭐니.”
“지랄 말고 표현할 수 있는 말이 없는걸. 그럼 염병이라고 해야 하나.”
“됐다….”
내가 널 붙잡고 올바른 언어생활에 대해 설교하기에는 나 또한 입에 걸레 비슷한 걸 자주 무는지라 뭐라 말할 자격이 없었다.
차라리 같은 또래인 척할 때가 나았다. 고까운 일이 생기면 지랄 염병 꼴값 어쩌고 하면서 같이 욕하면 그만이었으니까. 하지만 김규하가 내 본래 나이며 직업이며… 아무튼 이것저것 알고 있다고 고백한 지금은 양심상 말과 행동을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어른한테 지랄 쇼는 좀… 아니다! 박윤진! 꼰대 근성 그만!
“혹시 지금 형도 나이 먹었다고 늙은이들 편드는 거야?”
“내가 나이 너보다 많은 건 기억하고 있구나?”
“웅!”
알면 뭐하니. 가끔 호칭만 ‘형’이라고 바꿔 부르는 게 다지. 형 대우 따위는 조금도 하지 않으면서.
좀 짜증 나서 규하를 흘겨보았다. 방금까진 아주 속이 뒤틀려서 쓰리기까지 하더니 이젠 내 앞에서 생글생글 웃으며 얼굴 공격을 일삼고 있는 이 고딩 놈의 콧잔등에 딱밤을 한 대 먹여 버리고 싶다.
“내 덕에 기분 좀 나아졌지?”
“너를 확 쥐어박고 싶은 게 기분이 나아진 거라면 맞는 거 같다.”
“우웅. 도움이 되었다니 기뻐.”
본인 욕하는 줄 뻔히 알면서도 샐쭉 웃어버린다. 그 태연함에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참… 권시훈도 그렇고 얘도 그렇고 뻔뻔함 대회 같은 게 있다면 꼭 한번 내보내고 싶다. 분명 3위권 안에는 들어서 뭐라도 하나 타올 텐데.
“됐고, 그만 나가자. 두 아저씨는 그렇다 치더라도 하영 씨가 곤란하겠어.”
이제 정말 나가야만 할 때이다. 졸지에 고래 싸움에 끼어버린 새우가 되어버린 하영 씨는 나와 규하를 목 빠지게 기다리다 지쳐 우리가 변기에 빠져 죽었을 거라 생각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런데… 규하의 표정은 영 좋지 않았다.
나름 김규하의 미래의 행복한 가정을 배려한 건데 또 뭐가 잘못되었나 싶어 입술을 안으로 말아 물었다.
“형이 그 아줌마 걱정을 왜 하는데?”
“엉? 걱정까지는 아닌데…?”
“이상하네.”
이상하다고 말하는 규하를 올려다보니 눈 안에 의심이 아주 그득그득 차 있었다. 뭔가 찝찝한 느낌인걸? 나는 스멀스멀 올라오는 불안함을 애써 억누르며 되물었다.
“또 뭐가….”
“혹시 세 사람, 아니 네 사람 사각 관계 뭐 그런 거야?”
“사각? 어떻게 해야 사각이 되는 거지?”
“형이랑 아버지랑 아줌마랑 형이랑 같이 온 아저씨.”
“…뭐? 말도 안 되는 소리. 아니야. 그런 거!”
“아니야? 그럼 아버지랑 아저씨만 형 짝사랑하는 거고 아줌마는 아버지 좋아하는 거야?”
“얘가 미쳤나! 아니라니까!”
나는 너무 황당해 빽 소리 질렀다. 하지만 규하는 그 큰 눈을 실처럼 가늘게 뜨고는 나를 흘겨보았다.
얘는 머릿속에 대체 뭐가 들어차 있길래 생각 구조가 다 그쪽으로 가는 거지? 영화를 너무 많이 봐서 그러나? 아니라니까 왜 자꾸 이래!! 나한테는 권시훈뿐이라고!
“그런데 아버지고 그 아저씨고 박윤진 이름만 나왔다 하면 하나같이 저렇게 열을 낸다고?”
“그거야 다 자기들한테 이득 되게 하려 그렇겠지. 선임연구원 한 명 끌어오는 게 얼마나 어려운데.”
“형은 눈치 못 챌 수도 있겠지만 제삼자 눈에는 절대 그렇게 보이지 않거든.”
“그건 네 생각이고….”
“아, 몰라. 어쨌거나 아저씨들이 어떻게든 서로 박윤진 데려가려고 열 내는 거 좀 재수 없어.”
“재수 없을 것까지야.”
“나는 그런 핑계로라도 박윤진 갖겠다고 말해 볼 수조차 없잖아. 짜증 나게.”
갑작스럽게 훅 들어오니 그만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급발진도 어느 정도여야 받아쳐 주지. 교통사고 급으로 들이받으면 피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그리고 너희가 뭔데 날 가지네, 마네 지랄들이야. 난 권시훈 건데.
“…….”
말할 수 없는 진심을 속으로 삼키며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입을 닫자 뭐라 더 말하려던 규하 또한 덩달아 입을 닫고선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렇게 정적이 찾아왔다.
어쩌지. 돌아가기에는 밖의 분위기가 영 아니고, 여기에 규하랑 단둘이 있기에는 조금, 아니 아주 많이 무안했다. 차라리 방금처럼 농담이나 하고 낄낄대는 분위기였다면 가볍게 넘어갈 수 있을 텐데, 이 분위기로는 괜히 건드렸다가는 웃으며 넘어가기는커녕 서로 불편해지는 상황만 만들어질지도 몰랐다.
“자리 오래 비웠다. 이제 그만 돌아가자.”
“어? 어… 그래. 그러자.”
다행히 규하가 먼저 말을 꺼내 주어 어색한 분위기를 타파할 수 있었다.
“형.”
막 문을 열려던 찰나, 규하가 나를 불러 세웠다.
“응?”
“있잖아.”
“?”
“혹시 내가 도와준다고 하면 거절할 거야?”
“…어?”
“내가….”
뭐라 말하려다 말끝을 흐리는 규하를 올려다보았다. 표정은 없었지만 다문 입술 끝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내가 형들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게 도와줄게. 그럴 수 있어.”
“그게 무슨 소리야. 돌아갈 수 있게 도와줘?”
“응.”
“뭘? 어떻게?”
“…….”
“아, 규하야. 대답 좀 해 봐.”
영문을 몰라 다시 한번 규하를 불러 보았으나 묵묵부답이었다.
침묵을 불편해하는 편이 아니라도 단둘이, 그것도 밀폐된 공간에서 서로를 마주한 채로 맞이한 침묵은 영 불편했다.
“너 정말 대답 안 할 거야?”
“…….”
“김규하!”
“당장은… 묻지 말아줘. 나도 잘 모르겠으니까.”
“야. 너 진짜….”
“들어가자. 아줌마가 기다린다고 걱정했잖아.”
“잠깐. 이야기는 끝내고 가야지!”
“먼저 들어간다.”
내 말은 더 듣지도 않고 규하는 그대로 나를 지나쳐 자리로 돌아갔다.
“…뭐야.”
분명 꽤 중요한 말을 들은 것 같은데, 얼렁뚱땅 넘어가 버린 기분이었다. 나는 잠시 규하의 뒷모습을 황망히 바라보다 고개를 가로저으며 뒤를 따랐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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