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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쪽같은 내 남친-80화 (80/85)

80화

자리로 돌아갔을 때는 이미 한차례 폭풍이 지나가 있었다.

민 원장은 화를 참지 못하고 먼저 자리를 뜬 건지 보이지 않았고, 하영의 자리였던 김태준의 옆 또한 비어 있었다.

여기서 선택해야 했다. 나도 모른 척 집으로 돌아갈 것인가. 아니면 자리로 가 앉을 것인가. 전자를 선택한다면 당장 마음은 편하겠다만 혹시 민 원장이 돌아올 경우의 후폭풍을 감당해야 할 것이고, 후자를 선택한다면 김태준의 개소리를 바로 앞에서 들어야만 할 것이다. 어느 쪽이든 그다지 유쾌하지 않은 일이었다.

“형. 불편하면 그냥 가도 되는데.”

내 속에 들어갔다 나오기라도 한 건지 규하는 걱정스러운 눈을 하고선 내게 넌지시 말했다.

“나까지 가버리면 너랑 김태준이랑 독대해야 하는데 괜찮겠어?”

“설마 아버지가 나한테 뭐라 하려고. 혼내려 해도 사람들 다 있는 데서 언성 높이겠어?”

“그래도….”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규하의 염려를 뒤로 미뤄두었다. 이 뒤의 장면이 김태준에게 쥐잡듯 추궁당하는 김규하가 될 것이라는 걸 뻔히 아는데 널 혼자 두고 가는 건 형으로서도 친구로서도 안 될 말이지. 네가 몰라서 그렇지. 네 아버지는 제 목적을 위해서라면 처음 본 꼬맹이의 사탕도 뺏어 먹을 놈이란다.

“잠깐만 있다 일어날 거야.”

“괜찮겠어?”

“주먹다짐하러 가는 것도 아닌데 뭐. 각오 다지고 하고 말 것도 없다.”

“아버지는 주먹질보다 말로 두들겨 패는 편이니까.”

괜히 아는척했다 싶어 무안해진 나는 어깨를 가볍게 으쓱해 보였다.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뿐이지 규하도 제 아버지의 성정을 제법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 모양이다.

규하는 나를 말없이 내려다보다 터벅터벅 앞서나가 자리로 돌아갔다.

“왔네? 하도 안 오길래 둘이 손잡고 도망이라도 간 줄 알았는데.”

테이블 위의 빈 잔을 손가락으로 빙글빙글 돌리고 있던 김태준은 나와 규하를 발견하고는 여지없이 비아냥거렸다.

“누굴 천지 모르는 애새끼로 아나. 도망갈만한 짓을 안 했는데 도망을 왜 가.”

“아. 아니었나.”

“…네 아들 앞에서 욕먹고 싶지 않으면 입 다물고 술이나 마셔.”

저 뻔뻔한 낯짝을 맞닥뜨리고 있자니 욕이 절로 튀어나왔지만, 바로 옆에서 나를 빤히 보고 있는 규하가 마음에 걸려 앞머리를 거칠게 쓸어 올리는 것으로 화풀이를 대신했다.

마지못해 김태준의 맞은편에 자리 잡고 앉았다. 그리고 제 아버지의 옆자리로 갈 것이라 생각했는데 규하는 너무 당연하게 내 옆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너 왜 여기 앉아?”

“원래 친한 사람 옆에 앉는 게 국룰 아니야?”

“가족이 있으면 가족이랑 같이 앉아야지.”

“윤진아. 나 저기 사이다 좀 줘. 목마르다.”

말려보려 옆을 돌아보았는데 태연하게 사이다를 벌컥벌컥 들이켜기에 더 뭐라 말하는 걸 포기했다. 맞은편의 김태준의 낯이 구겨지는 걸 보는 것도 퍽 나쁘지 않기도 했고.

“그런데 민 원장님이랑 하영 씨는 어디 가고 전무님 혼자 계시는지?”

“민선우는 연구소에서 급한 연락 와서 잠시 자리 비웠고, 하영이는 피곤하다고 해서 먼저 보냈다.”

“…이 밤중에 약혼녀를 혼자 보냈다고?”

“두 다리 있으면 알아서 가는 거지. 뭐 문제 될 게 있나?”

“역시. 사람 쉽게 변하는 거 아니라더니.”

“멀리 가는 것도 아니고 바로 위 객실로 올라가는 건데. 굳이 내가 수고할 필요는 없잖아.”

더 말하기도 지쳐 눈앞의 냉수를 단번에 들이켰다. 식도부터 명치에 찬 기운이 돌며 속이 바르르 떨려 주먹을 꽉 쥐고 인상을 썼다.

하여간 저 새끼의 이기심은 사그라들기는커녕 해가 갈수록 정도를 더 하는 것 같다.

“윤진이, 너.”

쓰린 속이 가라앉길 기다리고 있는데 김태준이 불쑥 말을 걸었다.

“왜.”

“대체 홍주석 박사 제안 거절한 이유가 뭐야.”

“제안?”

“그새 잊어버렸어?”

“기억할 가치가 없으니까 기억 못 했겠지.”

“참나.”

김태준은 한껏 날 선 내 말투에 당황했는지 고개를 젖히며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다 고개를 휘휘 젓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 프로젝트에 정식으로 합류하자는 제안 말이야.”

“아, 그 반인륜적인 것도 모자라 하나 있는 피실험자를 공 굴리듯 굴려 먹는다는 프로젝트?”

“…책임자 앞에 두고 말이 심하네.”

“너야말로 피실험자 보호자 앞에 두고 그딴 소리 하는 게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 해 본 적 없니? 내가 합류하면? 그러면 당장 치료제 개발이 완료되고 시훈이 내보내 줄 거야? 아니잖아. 골수까지 쪽쪽 뽑아먹고 만신창이 된 다음에 내버릴 거잖아. 그게 치졸하고 더러운 김태준의 방식 아니야?”

말하다 보니 점점 화가 솟구쳐 올라, 속에 담아둔 말을 쏟아 내고 말았다.

“…….”

그의 아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다 듣고 있다는 생각은 말을 끝마치고야 떠올랐다.

아, 내가 말을 너무 심하게 했나. 아무리 그래도 아버지인데. 혹시나 상처 입었을까 싶어 다급히 규하를 돌아보았다. 아이는 표정을 굳힌 채 입을 닫고 있었다.

“박윤진. 너 권시훈 씨 때문에 이렇게 열 내는 건 알겠는데 나도 나름 직업의식이라는 게 있는 사람이야. 윤리적이나 법적으로 문제 될 만한 짓은 하지 않아.”

“…….”

“홍주석 박사에게 들어서 알고 있지? 신약 성분배합 문제 때문에 연구가 속도를 못 내고 있다고. 이 부분에서 막혀버리면 치료제 개발도 무기한 연기될 수밖에 없어.”

“그래서?”

“그러니까 박윤진 네가 우리 연구소 소속으로 들어와서 소재 쪽 잡아.”

“뭐?”

“같이 일 좀 하자고.”

그냥 하는 말은 아닌 것 같은데 나로서는 초면인 이야기였다.

“홍주석이랑 말이 다른데? 소속으로 들어오라니, 설마 TF가 아니라 아예 K로 이직을 하라는 말인가?”

“…홍 박사가 중간에 뭘 빼먹고 전달한 모양이네. 난 분명 박윤진 박사 우리 쪽으로 끌어와 달라고 부탁했는데.”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생소하기 그지없는 황당무계한 이야기여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들은 기억이 없는 걸 보니 홍주석이 말하는 중간에 잊어버리고 전달하지 못했거나, 나한테 맞아 죽을까 겁나서 일부러 말하지 않았나 보다.

단순히 협업 정도가 아니라 아예 소속을 옮기라고? 하다못해 학원에서 반을 옮기고 싶어도 절차라는 게 있는데, 김태준 저 새끼는 대체 얼마나 제 생각만 하고 살기에 이리도 모든 것을 쉽게 이야기하는 걸까.

“민 원장님이랑 합의된 내용이야?”

“민선우가 무슨 상관이야. 네가 가겠다고 하면 가는 거지. 너 그 정도 힘은 있잖아.”

“힘이 있고 말고가 중요한 게 아니라 절차라는 있잖아.”

“망할. 다들 언제부터 절차를 따져댔다고 원칙주의자 코스프레야.”

“어떻게 생각하건 네 자유지만 적어도 나는 이직할 마음 추호도 없어. 소재 개발 분야 박사가 나 하나뿐이야? 국내에도 이미 인력 차고 넘치고, K 정도의 자본력 있는 회사면 해외 인재들도 충분히 끌어올 수 있는데 왜 나여야만 하는데.”

“너는 절박할 거 아냐.”

“뭐라고?”

“해마다 의무적으로 하는 ‘일’로 연구하는 다른 연구원들과는 다르게 너한테는 권시훈이 걸려 있잖아. 아끼는 사람을 위해 연구에 매진한다면 성과 좋을 건 당연지사 아니겠어? 그렇게 되면 우리 연구소에게도 좋고, 너한테도 좋고 결과적으로 나한테도 이득이지.”

“이거 완전히 미친놈 아냐.”

터질 것 같은 화를 꾸역꾸역 참아 눌렀다. 사람을 우습게 알아도 정도가 있지, 블록 끼워 맞추듯 제 마음대로 사람을 이리저리 옮기려 하는 걸로 모자라 대놓고 제 욕망을 드러내다니.

달아오른 내 얼굴을 발견한 김태준의 눈에 여유로운 웃음기가 띄워졌다. 그 웃음에 더욱 화가 치밀어 올라 주먹을 터질 듯 쥐고 어금니를 악물었다. 손바닥 사이로 손톱이 파고드는 게 느껴졌지만, 고통 따위 느껴지지 않았다.

“윤진아. 욕하지 말고 이성적으로 생각해. 연구에 속도 붙어서 치료제 개발이 빨라지면 권시훈 씨에게도 좋을 거 아냐.”

“…만약 내가 거절하면?”

“거절? 거절하려고?”

“그래. 거절하면 어쩔 거야. 설마 치료 중단하기라도 하겠다는 건가?”

내 물음에 입꼬리를 주욱 찢으며 웃는다.

“그럴 수는 없지. 우리도 어쨌건 기간 내에 성과는 내야 하니까. 대신 깔끔하게 끝나지는 않겠지.”

깔끔하게 끝나지 않는 연구…? 그 의미를 한참 생각하다 좋지 않은 생각이 떠올라 입술을 깨물었다.

“자고로 다음 연구를 염두에 두고 있다면 위에서 좋아할 만한 거리를 많이 만들어 놓아야 하잖아. 그러니까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미친놈아! 네가 지금 벌이고 있는 일이 시료 가지고 하는 실험 놀이인 줄 알아? 사람을 데려다 놓았으면 치료를 해야지. 가둬놓고 실험용 쥐처럼 쓸 참이야?”

“설마 내가 그렇게까지 하려고. 단지 치료제 개발은 가장 뒷순위로 밀려날 수도 있다. 이거지.”

이죽거리는 저 입을 한 대 때리면 좀 나으려나. 이 성과에 미친 개또라이 새끼는 제 성과를 위해서 권시훈을 볼모로 잡아두고 어떻게든 나를 끌어들일 계획인 것이다.

입을 열었다가, 또 심한 말이 나올까 봐 입술을 깨물고 말을 참았다. 옆자리의 규하가 자꾸만 신경 쓰였다. 아무리 다 커서 만난 아버지이고 정이 없다고 한들 피가 섞인 사이인데, 제삼자가 면전에서 제 가족을 욕하는 것을 듣고 있는 것은 썩 기분 좋은 일이 아닐 것이 분명했다.

“…아버지.”

어쩌지. 어쩌지를 반복하며 혼란에 빠져 있을 때였다. 여태 침묵을 지치고 있던 규하가 조용히 입을 열어 제 아버지에게 말했다.

“그만하세요.”

“뭐라고?”

“그만하시라고요. 언제까지 뻔한 거짓말로 사람 기만하실 작정이세요? 이쯤 하면 됐잖아요.”

규하의 말에 김태준은 제 아들을 노려보았다. 당장 얼굴을 뚫어버릴 것 같이 매서운 눈빛에도 규하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김규하. 네가 뭘 안다고 떠들어. 쓸데없는 소리 할 거면 입 닥치고 조용히 있어. 어른들 이야기에 끼어드는 거 아냐.”

“어른들 일이기도 하지만 제 친구들 일이기도 해요!”

규하는 와락 소리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나는 깜짝 놀라 숨을 흡, 참으며 규하를 올려다보았다. 아이는 가슴을 들썩이며 화를 가라앉히려 애쓰고 있었다. 김태준은 당황한 채 제 아들을 바라보았다.

“아버지. 생각보다 아버지 주변에는 듣는 귀가 많아요. 그중의 한 명이 나고.”

“뭐?”

“이제 아버지가 함부로 하게 두지 않을 거예요.”

말을 마친 규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김규하. 앉아.”

“…….”

“버릇없이 굴지 말랬지.”

“아버지가 이런 분이라면 전 그냥 버릇없는 아들이 되고 말겠습니다.”

“뭐?”

“버리려면 버리세요. 아버지에게 버려지는 것 정도야 이제 익숙해서 괜찮으니까 얼마든지 하셔도 됩니다.”

“야! 김규하. 이 새끼야!”

제 아버지의 불호령을 깔끔하게 무시한 규하는 너무 놀라 앉은 채로 어쩌지도 못하고 그대로 굳어 버린 나를 내려다보더니 살짝 웃어 보였다.

“윤진아. 미안. 나 먼저 가볼게.”

“어? 너, 너 어디 가려고.”

“여기 오래 있지 마. 나쁜 기운 옮겠다.”

“규하야. 잠깐. 갑자기 왜 이러는지는 알려주고 가야지.”

“들어가면 꼭 전화해. 기다릴 테니까.”

그리고 그 길로 규하는 김태준과 나를 두고 빠른 걸음으로 바를 나섰다.

나는 대답할 새도 없이 규하가 사라진 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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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쪽같은 내 남친

한가린 장편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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