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시훈은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아 연구소 지하에 있는 도서관으로 향했다. 명칭만 도서관이지 엄밀히 말하자면 그간 시행되었던 프로젝트에 관련된 기초 자료라든가 연구 결과를 모아놓은 일종의 자료실 같은 곳이었다.
본래는 출입이 엄격히 제한된 곳이었지만 형석의 배려로-아마 봐도 알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비교적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었다.
윤진을 안심시키기 위해 괜찮다고 둘러대었지만, 사실 전혀 괜찮지 않았다. 치료랍시고 약물을 주입하면 금방 정신이 몽롱해지고, 의식이 멀어지다 종국에는 잠이 들어버리기 일쑤였다. 그러다 깨어나면 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다거나, 훌쩍 나이 들어 버린 모습으로 바뀌어 있기도 했다.
윤진이 말한 부작용이라는 단어가 계속 마음에 걸려 좀처럼 잊히지 않았다. 분명 문제가 있다. 내가 알지 못하는 다른 무언가가 있는 게 틀림없어. 시훈은 주먹을 꽈악 쥐며 걸음을 재촉했다.
나선형 계단을 한참 내려가니 작은 문이 보였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데스크에 당직 연구원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저녁 시간이라 드나드는 사람도 없는데 역시나 보안에 신경 쓰는 티가 났다.
“엥. 시훈 씨. 여기 어쩐 일이십니까? 뭐 보러 왔어요?”
당직 연구원은 시훈에게 인사하면서도 영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바쁘십니까?”
“아뇨. 바쁠 거야 없죠. 보시다시피.”
연구원의 말대로 도서관은 한산하다 못해 스산하기까지 했다. 시훈은 서고 안쪽을 스윽 둘러보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좀 알아보고 싶은 게 있어서.”
“네? 시훈 씨가…요?”
“여기 하루 이틀 온 것도 아닌데 너무 새삼스러워하는 거 아닌가….”
“왔다 갔다거리기만 했지. 진짜로 뭘 보겠다고 한 건 처음이잖아요.”
“…….”
너무 정곡을 찌르는 말이라 시훈은 움찔하며 어색하게 웃었다.
애초에 300페이지가 넘어가는 숫자 많은 책 따위에는 일체 관심 없던 시훈이 굳이 지하실까지 내려오게 된 것도 그나마 이 연구소에서 한가한 편인 도서관 당직 연구원들과 노닥거리기 위함이었지 딱히 뭘 보고자 한 건 아니었으니까.
“어쨌거나 놀랍네요. 그래… 뭐가 필요해서 오셨습니까?”
데스크 뒤쪽 서고에는 연월일이 적힌 서류철과 연구원의 이름이 적힌 파일들이 빽빽이 꽂혀 있었다. 너무 멀리 있어 정확히 글자가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간의 연구성과를 정리해 놓은 것은 분명해 보였다.
“일단 뭐 하나 물어볼게요.”
“엥? 네. 말씀하세요.”
“혹시… 과거에 저 말고 이 프로젝트 임상에 참여했던 사람이 있었습니까?”
“네? 아, 아뇨. 제가 알기로는 실제 임상은 권시훈 씨가 처음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군요. 그렇다면 혹시 임상 시작부터 지금까지 연구일지나 보고서가 있다면 열람할 수 있을까요?”
“시훈 씨 본인 걸요?”
“곤란한가요?”
“아뇨. 꼭 그런 건 아닙니다만 무슨 일 때문에….”
“저도 제 몸의 변화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 있어야죠. 그동안 너무 무관심했던 것 같아서.”
“뭐, 시훈 씨가 그런 면이 좀 있긴 했었죠.”
연구원은 수긍했지만, 또 의외의 부탁이기도 해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그러나 본인 자료를 본인이 열람할 수 없다는 지침은 없었기 때문에 별말 없이 자료를 찾아 내밀었다.
꽤 두꺼운 파일철을 건네받은 시훈은 표지에 적힌 [권시훈]이라는 이름을 확인 후 빠르게 페이지를 훑었다.
가장 앞면에는 간단한 신상과 입소 전 건강 상태와, 약물 부작용, 알레르기에 관한 정보가 기재되어 있었다. 뒷장을 넘기자 비로소 임상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내용이 기록된 페이지가 등장했다.
입소일자 : xxxx년 7월 xx일
입소사유 : Y-02 투약 부작용으로 인한 의식불명 증상 발현.
조치내용 : xxxx년 xx월 xx일 Y-03 30ml 1차 투약
조치결과 :
투약 후 3시간 경과 : 성분 발현 3% 진행. 의식 회복
투약 후 24시간 경과 : 성분 발현 30% 진행. 의식불명
투약 후 48시간 경과 : 성분 발현 70% 진행. 의식불명 상태 지속
추후조치:
피실험자의 이유 불분명한 의식불명 상태가 지속됨에 따라 격리 치료 필요
실험일자 : xxxx년 xx월 xx일 ~ xx일
실험목표 : Y-04의 성분 확인 및 효과 검증
실험내용 : Y-04 20ml 투약 후 48시간 동안 반응 관찰
실험결과 :
투약 후 24시간 경과 : 급격히 신체 나이가 저하되는 현상 발생 (18세 -> 10세)
투약 후 48시간 경과 : 신체 나이 10세로 발현 중지 후 신체검사실시 -> 이상 없음
추후조치 : Y-05 투약 후 경과 관찰
특이사항 : 신체 및 정신적인 손상 가능성 있으니 면밀한 관찰 필요
실험일자 : xxxx년 xx월 xx일 ~ xx일
실험목표 : Y-05의 성분 확인 및 효과 검증
실험내용 : Y-05 30ml 투약 후 48시간 동안 반응 관찰
실험결과 :
투약 후 24시간 경과 : 신체나이 변화 없음(10세 유지)
투약 후 48시간 경과 : 신체 나이 18세로 발현 중지 후 신체검사실시 -> 이상 없음
추후조치 : Y-06 투약 후 경과 관찰
특이사항 : 실험 일자가 예정보다 당겨져 정상적인 결과 도출에 어려움을 겪음. 정해진 투약일시를 지키지 않을 경우, 피실험자의 데미지가 크니 주의 요망
“쌤. 가장 최근에 제가 Y-06까지 투약했었나요?”
“네. 맞아요. 06까지. 그 보고서는 아직 안 올라와서 일지에는 없어요. ”
“여기에 보면 05 실험 일자가 갑자기 변경된 걸로 적혀 있는데, 이날 무슨 일이 있었나요?”
“아, 그날요? 그날….”
시훈의 물음에 연구원은 잠시 기억을 더듬는 듯 고개를 위로 빼고 생각에 잠겼다.
대답을 기다리는 동안 시훈은 손에 땀이 차는 것 같아 손바닥을 바지춤에 문질렀다. 그저 실험이 당겨진 이유를 묻는 것뿐인데 왜인지 마음이 초조하고 불안해졌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났을까. 연구원은 무언가 떠오른 듯 경쾌하게 손을 마주치며 입을 열었다.
“아! 기억났다! 그 실험이요. 원래 일정은 삼일 뒤였어요. 생각보다 04가 너무 세서 체외 배출이 늦어지는 바람에 성분 다 빼고 다음 약 들어가려고요. 그런데 갑자기 위에서 실험날짜 당겨야 한다고 지시가 내려왔지 뭡니까.”
“위라면… K제약에서요?”
“네. 당연히 오 박사님이랑 홍 박사님은 위험하다고 반대했는데 이게… 전무님이 직접 나서서 프로젝트를 엎네, 마네 하니까 어쩔 수가 없더라고요. 피실험자의 건강 상태가 이렇게 좋은데 하지 못할 이유가 있냐면서.”
“…….”
“솔직히 이전 실험은 시훈 씨의 운을 믿어보자는 심정이었어요. 오죽하면 오 박사님은 믿지도 않는 신한테 기도했을 정도였다니까요. 제발 잘못되지만 않게 해달라고.”
“…그렇군요.”
“이제 와서 이야기하는 거지만 정말, 살아서 다행입니다.”
처음 이야기를 나누었을 때부터 느꼈지만 이 사람은 경각심이 없는 건지 입이 종잇장처럼 가벼운 건지, 위험하다느니 잘못된다느니 하는 아슬아슬한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한다. 그것도 당사자 앞에서.
어쨌건 목숨을 건 위험한 실험이었음에도 당사자에게는 일언반구 없었다는 말이지.
앞에 있는 연구원에게 더 자세한 이야기를 물어볼까 하다가 관두었다. 선임연구원도 아닐 텐데 본인의 가벼운 입을 놀린 죄로 불이익을 받게 할 수는 없지.
갑자기 망망대해에 던져진 듯 막막한 기분이었다. 주기적으로 행해진 신체검사. 무엇을 위한 검사인지도 모른 채, 의문을 가지지 않고 있었는데 이 또한 무리한 실험을 위한 초석을 다지기 위함이었다니.
K제약은 무엇 때문에 이토록 무모한 실험을 강행해야만 했을까. 빠른 치료를 약속하며 볕도 제대로 들지 않는 연구실에 가둬 두고선, 뒤로는 무슨 꿍꿍이를 꾸미고 있는 것일까.
시훈은 목덜미에 손을 얹으며 숨을 들이 삼켰다. 맥박이 조금씩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꼭 다 나은 모습으로 윤진을 보고 싶었는데 이대로라면 기약 없이 실험 쥐 역할을 해야만 할 것이다.
이대로는 안 된다. 꺼림칙한 점을 발견한 이상, 이곳에 더 있을 수는 없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윤진에게로 돌아가야만 했다.
하지만 어떻게….
“저… 시훈 씨.”
시훈이 심각하게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였다.
내내 말이 없던 연구원이 갑자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시훈 쪽으로 바짝 다가왔다.
“네?”
생각에 잠겨있던 시훈이 퍼뜩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며 시선을 돌리자 그는 작은 목소리로 시훈에게 물었다.
“혹시 이런 거 물어도 될지 모르겠는데….”
“네?”
“이거 오 박사님께 이르면 안 됩니다?”
“뭘 물어보려고 이리 뜸을 들이는 겁니까. 말씀해 보세요.”
“예전부터 정말 궁금했었는데 위에서 피실험자랑 연구원이랑 되도록 말 섞지 말라고 해서 참느라 죽는 줄 알았습니다.”
“기밀 누설 때문에요?”
“그것도 그렇고… 괜히 소문 만든다고.”
“갇혀 있는데 소문 만들게 뭐 있습니까. 궁금한 거 있으면 물어보세요.”
시훈이 심드렁하게 허락하자 연구원은 얼굴을 밝히며 얼른 질문을 던졌다.
“혹시 며칠 전에 연구소 오셨던 박윤진 박사님 말입니다. 시훈 씨랑 어떤 특별한 사이이고… 그렇습니까?”
“예?”
여기서 윤진의 이야기가 나올 줄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지라 시훈은 입을 떡 벌리고 연구원을 마주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그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멋쩍게 웃었다.
“어, 들으려고 한 건 아닌데…정말 지나가다가 우연히! 오 박사님하고 박 박사님이 이야기하는 걸 들어버려서.”
“…그런데요?”
“저는 처음에 그냥 연구 이야기인 줄 알았거든요… 박 박사님께서 오 박사님 멱살을 틀어쥐고선 내 애인 권시훈 잘못되면 네 모근까지 싹 다 태워서 평생 머리에 동상 걸리게 해 주겠다는 둥, 치료제 데이터 넘기지 않으면 연구소를 불태워 버리겠다는 둥… 여튼 그런 살벌한 협박을 하시길래 보통 관계는 아니겠구나. 싶더라고요.”
“풉….”
웃으면 안 되는데 눈을 번뜩이며 오형석 박사의 멱살을 잡고 짤짤대는 제 연일을 생각하니 그만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박윤진은 가녀리고 연약해 보이는 외모와 달리 힘이 좋은 편이었다. 분명 단풍같이 작은 손아귀라고 우습게 봤다가 큰코다쳤을 테지.
“엇! 혹시 실례되었다면 죄송합니다! 저는 그저 순수하게 궁금한 마음에 여쭌 겁니다.”
“아닙니다. 쌤이 생각하는 그런 사이 맞으니 편하게 말씀하셔도 됩니다.”
“오오오!! 역시.”
시훈이 웃으며 대답하자 그는 마치 좋아하는 연예인을 만난 소녀팬처럼 얼굴을 붉히며 반색했다.
“두 분 정말 잘 어울리세요! 다들 두 분 같이 계신 거 보고 얼마나 난리였는지 몰라요. 두 분이 사귄다. 아니다로 갑론을박하느라 하루가 다 갔지 뭡니까.”
“…쌤만 저희를 본 게 아닌가 보네요.”
“아무래도 박윤진 박사님은 저희 업계에서는 아이돌이나 다름없으니까요. 얼굴 뵙는 것만으로도 황송할 정도라 알게 모르게 연구소 사람들 한 번씩 다녀갔을걸요?”
“아이돌이라니. 본인이 들으면 놀라 까무러치겠는데.”
“비주얼이 연구소에서 썩기는 너무 아깝잖습니까. 전 박사님 나이 듣고 못 믿어서 인트라넷까지 뒤졌다니까요?”
“윤진이가 많이 예쁘긴 하죠.”
“…헛헛헛. 어쨌거나! 저희들은 응원합니다. 예쁜 사랑 하십쇼.”
…참나.
시훈은 연구원의 주접에 기가 차 실소를 터트리고 말았다.
항상 무겁게 가라앉아 있는 연구소 안에서도 이렇게 어이없는 걸로 웃기도 하는구나 싶어 흥미롭기도 하고 어이없기도 했다.
그래도 잘 어울린다니 기분이 나쁘지는 않네. 주책바가지인 시훈은 비죽비죽 올라가는 입꼬리를 주체하지 못하고 실실 웃다, 순간적으로 몰려오는 민망함에 괜히 헛기침을 했다.
이게 문제다. 한참 심각하다가도 금방 기분이 풀어져 버리는 이 변덕.
“감사합니다. 다음에 윤진이 만나게 되면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엇? 지금 가시게요?”
“네. 해야 할 일이 있어서요.”
“아, 알겠습니다. 필요한 거 있으면 언제든 말씀하십시오.”
어설픈 거수경례를 붙이는 연구원에게 꾸벅 인사하고 시훈은 몸을 돌려 계단을 올랐다.
기분이 좋은 건 좋은 거고, 권시훈은 돌아가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하나씩 해결해야 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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