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쪽같은 내 남친-82화 (82/85)

82화

권시훈이 오형석과 마주 앉았을 때, 오형석은 누군가에게 한바탕 시달리고 난 뒤인 듯 행색이 초췌하기 그지없었다.

“에… 시훈 씨가 부를 줄 알았습니다.”

“네?”

“며칠 전…그게 언제였습니까. 기억도 안 나네. 여튼 박윤진 박사 왔다 갔던 날. 뭐라도 하나 때려 부술 것 같은 얼굴로 나오길래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니까 목 꺾이고 싶지 않으면 닥치라더니 갑자기 있는 대로 욕을 하지 뭡니까.”

“아… 많이 열 받았나 보네요.”

“보통 열 받는다고 애먼 사람 목을 꺾는다는 말은 하지 않는데요.”

“…….”

“그다음부터 무슨 스토커처럼 낮이고 밤이고 전화해서는 시훈 씨 원래대로 돌려놓으라며 들들 볶아 대는데… 잠을 못 자서 아주 죽겠습니다.”

“윤진이가… 뭐 하나에 꽂히면 좀 집착하는 편이긴 해요.”

“그, 애인분 앞에서 이런 말 좀 그렇지만… 성격이 참… 맞추기 힘들겠어요.”

“딱히 맞춘다고 스트레스받은 적은 없어서. 전 윤진이가 집착할 때 귀엽던데.”

“어휴. 생각만 해도 소름 돋네. 얼굴만큼 성격도 좋을 줄 알았는데 뭔 말만 하면 성질에 하는 말마다 꼰대 같아서 이젠 눈만 마주쳐도 불안하다니까요.”

“옹알이하는 고양이 같아서 귀엽던데.”

“…진심 천생연분이네. 꼭 두 분 결혼까지 가길 바랍니다.”

오형석은 세상이 끝난 것처럼 푹 한숨을 내쉬었다.

시훈은 그간 ‘오형석은 게으르고 모든 것을 대충하려 한다.’는 윤진의 푸념만 듣다 오형석의 입에서 나오는 윤진의 뒷담화를 들으니 어쩐지 무안해졌다.

하기야 세심하고 작은 것까지 몇 번이고 생각하는 박윤진과 적당히 하하호호 유도리 있게 넘어가는 오형석은 근본부터 다르니 서로가 서로에게 스트레스이긴 할 테다.

“에휴. 여기 없는 사람 욕 그만하고 본론이나 이야기합시다. 시훈 씨. 할 말이 뭡니까?”

“아… 다름이 아니라 부탁 좀 드리려고.”

“네? 부탁요? 하… 이거 또 불안하게 하네.”

“벌써부터 밑장 빼려 하지 마시고 일단 들어나 보시죠.”

“그래요. 이제 와 뭐 가릴 게 있다고. 말씀해 보세요.”

“저 내보내 주십시오.”

“…네??”

“집 비운 지도 너무 오래되었고 윤진이도 걱정되어서…. 아, 임상에서 빠지겠다는 말은 아닙니다.”

오형석은 황당한 눈으로 시훈을 바라보았다. 하긴 연구소에 들어온 이래 여태 군말 한마디 없이 하라는 대로 해 왔던 말 잘 듣는 실험체였던 권시훈이 난데없이 반항(?)을 하려하니 놀랄 만도 했다.

“남은 연구에 필요한 실험이 있다면 스케줄 전부 조정해서라도 연구소로 오겠습니다. 제 편의 좀 봐주세요. 부탁합니다.”

“저기 시훈 씨. 갑자기 이게 무슨 말입니까? 나가고 싶다고요? 오전까지만 해도 그런 말 없었잖아요.”

“언제까지 갇혀 있을 수는 없잖습니까. 격리 치료 들어가면 치료 기간을 줄일 수 있다 해서 불편 감수하고 수락했습니다. 그런데 치료는 좀처럼 진척이 없고, 이제는 확실히 나을 수 있다는 기약도 없는데 제가 굳이 이곳에서 기다려야 하는 이유가 있나요?”

“아이고. 시훈 씨까지 왜 이러세요. 가장 중요한 분이 삐딱선 타시면 이 연구 망합니다. 망해요. 그러잖아도 프로젝트 안팎으로 말 많아서 머리 터질 것 같은데.”

“연구가 망하기 전에 저와 박윤진의 관계가 망가질 것 같은데요.”

실로 오랜만에 만난 박윤진은 참 많이 달라져 있었다. 온 우주가 권시훈이었던 박윤진이 다른 이의 이름을 이야기하며 난감한 기색을 내비쳤다. 시훈은 그 모습이 낯설어 김규하의 이름을 듣자마자 마음속에 품어왔던 서운함을 뱉어버리고 말았다.

윤진을 그렇게 보내놓고 몸도, 마음도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기분이었다. 침대에 누워 잠이라도 들 수 있으면 차라리 나을 텐데, 가라앉아버린 기분 탓에 쉽게 잠도 오지 않았다. 심란하고 복잡할 때는 길게 생각하느니 차라리 잠이 들어 고민거리와 자신을 차단시키는 편인지라 불면의 밤이 참으로 길고도 길었다.

답답하고 괴로워서 밤새 전화를 걸었다. 받지 않을 걸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불안한 마음이 달래지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돌아온 건 낯선 남자의 일갈과 모욕뿐. 시훈은 홀로 덩그러니 남은 차가운 방 안에서 수많은 자책과 후회를 하며 아침을 맞았다.

그때 확신했다. 이렇게 떨어져 있다가는 마음까지 멀어져 버려 다시는 가까워질 수 없을 거라고. 그렇기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권시훈은 이 감옥을 탈출해야만 했다.

“무리라는 거 압니다. 절차에 어긋나는 것도 알고요. 하지만 여기서 우리끼리 나가네, 마네 언쟁하다, 제가 연구에서 빠져버리면 다른 누구보다 오형석 박사님이 제일 손해 보는 격 아닙니까?”

“아! 제발요. 시훈 씨! 우리 그간 함께한 정이 있는데 이러지 맙시다.”

시훈의 협박이 제대로 먹혔는지 오형석은 온몸을 파르르 떨며 질색했다. 피해 어쩌고는 그냥 찔러본 거였는데… 하기야 선임연구원인가 뭔가라고 했으니 프로젝트가 난항을 겪으면 가장 어깨가 무거운 사람 중 한 명이 오형석이긴 할 테다.

시훈은 뒷머리를 마구 털어대며 연신 한숨을 쉬어대는 오형석 앞에 조용히 앉아 대답을 기다렸다. 쉽게 입을 열지 못하고 에휴 에휴 탄식만 뱉는 모양을 보아하니 딱히 긍정적인 대답은 나오지 않을 것 같았지만 그래도 만약이라는 게 있으니까….

“그, 시훈 씨 사정 잘 알겠는데요. 당장은 힘듭니다.”

“왜죠?”

“그게요. 근래 치료제 개발이 진전이 없어요. 그래서 실험할 거리가 너무 많습니다.”

“네? 지난번에는 거의 개발이 끝났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그, 그건 제 착오였습니다.”

“착오요?”

“큼큼. 시훈 씨 얼마 전에 초등학생에서 다시 고등학생의 몸으로 돌아오지 않았습니까. 이렇게 신체 변화가 예측할 수 없이 널뛰는데 지금 밖에 나가는 것은 너무 위험합니다… 네?”

“위험이라는 게 혹시 제가 위험하다는 뜻입니까, 아니면 프로젝트 기밀 유출에 대한 위험입니까?”

시훈이 묻자, 오형석은 당황하다 못해 사색이 되어버렸다.

“무, 무슨! 시훈 씨. 저희는 언제나 피실험자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합니다. 아무리 필요하다 하더라도 신변에 위협이 생길만한 일은 하지 않아요.”

“…….”

“어쨌거나 조기 퇴소는 안 됩니다. 이 문제는 다른 어떤 연구원에게 물어도 똑같을 테니 그냥 포기하세요.”

적어도 고려해 보겠다는 대답 정도는 들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는데, 딱 잘라 거절당할 것이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하지만 한번 결심한 이상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었다. 모든 일- 하다못해 식당에서 컴플레인을 걸 때도 책임자를 불러야 일 처리가 빠른 게 정석이니까.

“박사님 소관으로도 불가능하다면 프로젝트 총책임자에게 물어도 됩니까?”

“에? 뭐요?? 누구한테 뭐를 해요?”

당연히– 직급은 높은 편이지만 일개 직원 중 한 명일 뿐인 오형석 박사는 입을 떡 벌렸다.

“그쪽 책임자가… 누구였더라. 김태준 전무 맞죠? 그분께 바로 말씀드리면 더 확실한 대답 들을 수 있을 것 같은데.”

“그거야 그런데 굳이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가 있…나요? 전무님은 프로젝트 세부 사항을 관리할 만큼의 시간이 없기도 하고, 일일이 검토하는 걸 좋아하지 않으셔서.”

“본인 소관 프로젝트인데 검토하는 걸 귀찮아한다고요? 그게 말이 됩니까?”

“아이고… 여하튼 안 됩니다. 안 돼요! 아셨죠?”

“말이 안 통하네. 됐습니다. 이 문제는 제가 알아서 할 테니 박사님께서는 신경 끄세요.”

사실 시훈은 그 전무님이라는 사람의 연락처도 몰랐고, 연락할 마음은 더더욱 없었다. 그런데 오형석은 권시훈이 이미 김 전무와 독대라도 한 것처럼 호들갑을 떨어대었다.

“자리에 없으니 하는 말인데 김 전무님 성격이 얼마나 더러운지 아십니까. 본인 마음에 안 들면 될 때까지 밀어붙어야 하고, 회식 자리에서도 약간이라도 거슬리는 워딩 나오면 따로 불려가서 눈물 쏙 빠지게 혼난다고 악평이 자자해요.”

“방금 전까지만 해도 충신처럼 굴더니 갑자기 뒷담화를….”

“아오!! 답답해서 그럽니다. 답답해서! 내가 왜 이 자리까지 올라와 놓고 기업 임원한테 절절매겠어요? 이게 다 이유가 있다니까.”

“…….”

아무래도 저 남자는 박사보다는 약장수가 훨씬 적성에 맞을 것 같다고 시훈은 생각했다. 일전에 골수까지 이과 인간인 윤진이 오형석에 대해 언급할 때 ‘정신없는 찌르레기’라고 표현한 적이 있는데 그 별명이 이다지도 잘 어울릴 줄이야.

그 뒤로 이어지는 ‘김태준 전무의 악행 일대기’는 참으로 파란만장했다.

김태준 전무는 대학교도 겨우 졸업한 주제에 선임연구원들 앞에서 아는 척하며 과제 방향을 수시로 바꿔대는 취미가 있었다. 그 놀음에 맞춰주다 결국 기간 내에 논문 제출을 하지 못한 일이 허다했고, 보여 주기식 연구과제 설정으로 연구원들을 곤란하게 만드는 일 또한 비일비재했다.

심지어 몇 년 전에는 외부에 알려지지 않은 본인 아들을 찾는답시고 비공식적으로 유전자 검사를 맡기고선 밑도 끝도 없이 아이의 소재를 찾아내라며 연구원들을 들들 볶아대었다.

동종업계가 아닌 권시훈으로서는 완벽히 이해하기 힘든-제대로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이야기들이었지만 연말쯤의 윤진도 늘 비슷한 불평을 늘어놓았던 게 떠올라 그냥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고충이 많으셨겠네요.”

“그렇죠? 그 사람한테 잘못 걸리면 여러모로 재미없다니까요? 그러니까 시훈 씨. 힘든 건 충분히 알겠는데 조금만, 진짜 조금만 더 기다려 주세요. 어떻게든 제가 빠른 시일 내에 마무리되도록 힘 써보겠습니다.”

“그건 좀 어려울 것 같은데.”

“시훈 씨!”

시훈의 대답에 괜히 입 아프게 떠벌린 꼴이 된 오형석은 울화가 터졌는지 빽 소리쳤다.

“그쪽이 내 사정 봐주지 않는데, 내가 봐줄 필요가 있나? 공평하게 서로 봐주지 말고 각자 입장대로 움직입시다.”

“제가 방금 뭐라고 했습니까! 김태준 전무한테 가 봤자 대답은 같을 거라니까요? 그 사람 이 프로젝트에 사활 걸었어요. 당장 임상 인원 모자란다고 난리 치는 판국에 유일한 실험자가 이탈한다고 하면 가만히 있겠습니까? 우리 다 좋은 꼴 보기 힘들 거라고요.”

“못 가게 하면 도망이라도 가야지.”

“아이고… 세상에.”

오형석은 권시훈의 집요함에 질려버려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지만 시훈은 아랑곳하지 않고 고개를 더욱 빳빳하게 들었다. 마음 약한 윤진이었다면 참아보겠노라 말했겠지만, 고집 센 권시훈은 저 시끄러운 과학자가 질색하더라도 본인이 정한 대로 해야만 했다.

“권시훈 씨. 저는 분명 무단이탈은 허가해 드릴 수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다음은 알아서 판단하세요.”

“알겠습니다.”

“…아, 시훈 씨. 정말 이러실 겁니까?”

당연한 걸 몇 번이나 또 묻는 건지. 시훈은 슬슬 화가 나려고 해 어금니를 꽉 물었다. 한마디만 더하면 시원하게 욕이라도 한 번 날려주려고.

[게이트 열립니다.]

막 입을 열려는 찰나였다. 연구원들은 모두 돌아갔을 시간인데 누군가가 출입증을 사용해 문을 열고 있었다.

권시훈과 오형석의 눈이 저절로 문 쪽을 향했다.

그리고 그 앞에는 두 사람이 아주 잘 아는 사람이 서 있었다.

“김규하?”

(다음 편에서 계속)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82)============================================================

금쪽같은 내 남친

한가린 장편 소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