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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쪽같은 내 남친-83화 (83/85)

83화

[게이트 닫힙니다.]

다소 딱딱한 목소리의 안내 음성과 함께 열린 문이 치이익 공기 빠지는 소리를 내며 닫혀버렸다. 그 소리에 퍼뜩 놀란 큰 덩치는 제 몸을 엉거주춤하게 웅크리며 몇 걸음 더 안으로 들어왔다.

시훈은 당황해 눈을 끔벅였다. 학교에서나 보던 놈을 전혀 의외의 곳에서 만나게 되니 쉽사리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곳은 마음먹으면 누구나 언제든 들어올 수 있는 즐거운 견학 장소가 아니다. 몇 단계의 보안을 거쳐야 하는 철저한 비밀 구역이었다. 그런데 이곳에 얼뜬 표정의 새파란 고딩이 들어올 줄이야. 그것도 정장 차림으로.

시훈은 오형석을 보았다가, 김규하를 보았다가 다시 한번 이곳이 김규하가 있어도 되는 곳인가를 가늠해 보았다.

결론은 ‘딱히 미성년자가 있어도 위험하진 않지만, 미성년자는 쉽게 들어올 수 없는 곳’이었다.

“저기….”

두 어른이 우물쭈물하고 있는 사이, 김규하가 다시 입을 열었다. 여전히 문 앞에 서 움직이지 않은 채였다.

“나 들어가도 되나?”

“어? 뭐?”

“잉. 뭐야. 서운하게.”

“아, 또 왜.”

금세 소금에 절인 배추처럼 축 처지는 김규하의 어깨를 보고 미안해진 시훈은 괜히 목소리를 높였다.

아니, 누가 뭐랬어? 이유도 없이 들어오자마자 징징거리면 내 입장이 좀 곤란해지잖아. 누가 보면 내가 널 괴롭히는 것 같고!

“들어왔는데 아는 척도 안 하고, 반가워하지도 않고… 그냥 멀뚱히 쳐다보고만 있으면 민망하잖아.”

“…뭐?”

“인사라도 해 주지….”

하늘이시여. 지금 쟤가 뭐라는 거야. 지금 시커먼 열여덟이 제 친구가 아는 척 안 해 주었다고 삐진 거야?

“문 열고 들어왔으면 먼저 인사해야 하는 건 네 쪽 아니야?”

“그래서 ‘저기’라고 했잖아.”

“넌 ‘저기’가 인사냐??”

“어쨌든 돌아봤잖아!”

“하, 나 어이가 없어서.”

지긋지긋한 새끼. 저놈의 억지는 어디서 배워온 것일까. 이제 좀 적응된 것 같았는데 착각이었다. 여전히 김규하는 알 수 없는 놈이다.

“그런데 너 어떻게 들어왔어? 여기 보안 구역이라 함부로 들어올 수 없을 텐데.”

“어? 너 여기 있다고 해서 온 건데?”

“…애당초 내가 이곳에 있다는 걸 알고 있는 사람이 몇 명 되지 않는데?”

수상함이 점점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 시훈의 눈이 점점 가늘어졌다. 시선을 느낀 규하는 뭔가 찔리는 게 있는지 슬쩍 눈을 피했다.

“이제 보니 이상하네. 네가 연구소에 드나들 만한 신분이 아닌데 방금은 꼭 현관문 열고 들어오는 것처럼 자연스러웠단 말이야.”

“그게… 시훈아.”

“너 과학, 탐구 이런 쪽에 관심 있었어? 그래서 견학 신청 뭐 그런 거 했나? 아니지. 관심 있다고 그냥 들어올 수 있을 리가 없는데?”

못 물을 걸 물은 것 같진 않은데 쟤가 갑자기 왜 저러지.

평소의 김규하라면 핑계를 대려 해도 몇 가지를 댈 수 있고, 거짓으로 둘러대도 이미 수십 가지를 지어내고도 남았는데, 오늘따라 왜인지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뭔가 뒤가 구린 게 있는 게 틀림없어. 시훈은 한 번 더 재촉해 볼 요량으로 입을 뗐다.

“이게 누구야? 규하야아~ 오랜만이다! 못 본 사이에 더 멋있어졌는걸?”

...하려 했는데 갑자기 여태 잊고 있었던 오형석이 냅다 시훈의 뒤에서 튀어나오더니 김규하의 손을 붙들고 미친 듯이 흔들어대기 시작했다.

“…네? 어제도 만났잖아요.”

“아이고! 어제 봤는데도 반갑다. 덥지? 얼른 이리 와서 앉아!”

“…?”

오형석은 뭐라 더 말하려던 규하의 뒷말을 가차 없이 잘라버리곤 손을 잡아끌었다. 얼결에 오형석에게 끌려오게 된 규하는 세상 엉거주춤한 자세로 의자에 자리 잡았다.

“여기까지 오기 힘들었을 텐데, 올 때 형한테 전화하지 그랬어.”

“어. 그게요….”

규하는 오형석의 눈을 애써 피하며 침대에 걸터앉아 있는 시훈을 돌아보았다.

“저 시훈이 보러 왔어요.”

“시훈 씨? 아, 아니. 시훈이?”

“네.”

“학교에서 보면 되지. 왜 굳이 여기까지….”

“학교에 안 오니까 여기까지 왔죠.”

“그래? 아, 그건 그렇네.”

당연한 걸 뭘 묻냐는 듯 규하가 눈을 흘기자 오형석은 머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시훈은 미간을 찌푸렸다. 두 사람은 단순한 선생과 학생 사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친밀했다. 그리고 형? 시훈이 아는 한 규하에게 오형석은 ‘보건 선생님’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박사님이라면 모를까….

아.

머릿속 기억을 더듬다 보니 윤진과의 대화가 떠올랐다. 규하가 두 사람의 신상은 물론 ‘YOUNG’ 프로젝트에 연관되어 있다는 것까지 알고 있다고. 그렇다면 이곳 연구원들에 대한 정보 또한 어느 정도는 가지고 있을 테니 오형석과 격의 없이 구는 것도 일리 있었다.

“그래서 말인데 박사님. 죄송하지만 자리 좀 비켜주시겠어요?”

“어? 지금?”

“네.”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는 규하 덕에 참던 울화가 터져버렸는지 오형석은 제 가슴을 퍽퍽 두드리며 역정을 내었다.

“오늘따라 다들 왜 이래? 들어줄 수 있는 부탁을 해야 들어주지. 안 되는 걸 해달라고 조르면 어쩌라는 거야.”

“허튼짓 안 할게요. 그냥 잠깐 이야기만 할 거예요.”

“그냥 잠깐 이야기하는 것도 안 되는 건 알고 있지? 까딱 잘못해서 전무님 아시면 어쩌려고?”

“제가 잘 말씀드릴게요. 걱정하지 마시고 나가 계세요.”

“잘 말씀드린다고 아무 일 없이 넘어갈 분이 아닌 건 너도 알잖니.”

“박사님… 제발. 잠깐이면 되니까.”

규하는 허락해 주지 않으면 당장 바짓가랑이라도 붙잡고 늘어질 듯 울망거리는 눈을 하고선 오형석을 간절하게 바라보았다.

“…이거 얼마 전에 누구한테도 들었던 말 같은데.”

“박사니임….”

“알았어. 알았으니까 그렇게 보지 마. 무섭다.”

오형석은 곤란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보다, 규하의 애교에 결국 백기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시훈 씨랑 접촉하는 거 걸려 봤자 좋을 거 없다는 거 너도 알지?”

“알아요.

“요새 전무님 예고도 없이 연구소 오는 일이 많아서 우리도 항상 경계 태세란 말이야. 할 말 있으면 빨리하고 나와.”

“걱정하지 마시라니까.”

“어휴… 네 입에서 걱정하지 말라는 말이 더 걱정스럽다.”

그 말을 끝으로 오형석은 터덜터덜 게이트로 걸음을 옮겼다.

[게이트 닫힙니다.]

문이 닫히고 방 안에는 시훈과 규하, 단둘만 남았다.

“야.”

“어. 으응.”

“볼일이 뭔데.”

“어?”

시훈의 물음에 규하는 화들짝 놀랐다.

“됐고. 이리 와서 앉아. 앉아서 이야기해. 올려다보느라 목 빠지겠다.”

“어, 어엉….”

시훈이 손짓하자 규하는 엉거주춤 그의 앞으로 가 앉았다.

시훈은 혼나기 직전의 꼬맹이처럼 잔뜩 움츠러든 규하를 가만히 보다가 테이블에 놓인 콜라를 건네었다.

“어쨌거나… 네가 여기까지 나랑 수다나 떨자고 온 건 아닐 테고, 정확히 용건이 뭐야?”

“…말해도 되려나.”

“말하려고 온 건데 입 닫고 있다 콜라만 축내고 갈 순 없잖아.”

시훈의 말에 규하는 씁쓸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손에 든 캔을 꼬옥 쥐었다.

* * *

김규하가 이 연구소를 본가보다 더 자주 들락거린다는 사실은 김규하의 앞으로 콜라 캔이 3캔 정도 비워졌을 때쯤 알 수 있었다.

“진짜 알 수가 없네. 대체 뭣 때문에 집 놔두고 여길 왔다 갔다 거리는 건데?”

“집은 영 정이 안 가서.”

“뭐? 왜 정이 안 가.”

“별거 아냐. 여기 있으면 적어도 나에게 관심 가져주는 사람이 있으니까. 도구 된 것 같은 기분이 좀 덜하더라고.”

“아무리 생각해도 반대여야 말이 되는 것 같은데….”

시훈은 도저히 수상함을 떨칠 수 없어 규하를 노려보았지만, 그는 말없이 마지막 캔 안에 남은 콜라를 목구멍으로 털어 넣을 뿐,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꽤 오랜 시간 동안 붙어 있었지만,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특히 가정사 따위는 공유할 일이 전혀 없었으니 모르는 것이 당연했다.

“너 사실 K제약의 숨겨진 자식, 뭐 이런 거냐? 평생 어머니와 단둘이 가난하게 살다 이제야 아버지가 찾아와서 갑자기 재벌가의 유일한 후계자가 되는 그런 느낌?”

“…….”

“뭐야. 진짜야?”

“너… 몰랐어?”

“내가 신이냐? 본인이 말을 안 하는데 어떻게 알아.”

시훈의 퉁명스러운 대답에 규하는 왜인지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큰 눈동자가 갈 곳을 잃고 땅바닥을 보았다가 벽을 보았다가 천장을 보며 정신 사납게 굴러대었다.

왜 저래. 시훈은 눈썹을 구기고 규하를 노려보았다.

“윤진이가 말 안 했구나….”

한참 곰곰이 생각하던 규하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뭘 말 안 해. 혹시 너희 둘이 나 모르게 비밀 이야기했어?”

“아, 아니야. 비밀이랄 건 없는데 말 아껴준 윤진이한테 좀 감동 받아서.”

“감동 같은 소리 하네. 듣는 사람 알아듣게 말해. 혼자 영화 찍지 말고.”

“우리 아버지 이름이 김태준이야. K제약 전무 김태준.”

김규하는 짧은 심호흡과 함께 토해 내듯 말했다.

“…뭐?”

“너 괴롭히고 있는 그 아저씨가 우리 아버지라고.”

김태준? 윤진의 대학 선배이자 현재 ‘YOUNG’ 프로젝트의 총책임을 맡고 있다는 그 남자? 성질 고약하고, 본인밖에 몰라서 사람들을 개처럼 부린다는 그 파렴치한? 그 자식이 김규하의 아버지라고?

“그게 다야?”

“응?”

규하는 시훈의 물음에 도리어 놀라 되물었다. 시훈은 여전히 표정을 구긴 채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난 또 뭐라고. 윤진이가 너랑 네 아버지 정체 숨겨줘서 감동 받았어?”

“으응.”

“새삼스럽게. 네가 누구 아들이니, 아버지가 누구이니 이런 문제는 프라이버시인데 윤진이가 함부로 말하고 다닐 리가 없잖아.”

“…….”

“그리고 네 아버지가 김태준인 게 뭐? 내가 이렇게 된 건 그 아저씨 잘못이지 네 잘못이 아니잖아.”

“…….”

“설마 이 상황에서 나 재벌집 아들이다! 돈 개많다! 라고 자랑하려는 건 아니지?”

규하는 목에서 울렁울렁 무언가가 올라와 마른침을 삼켰다. 딴에는 매우 심각한 고민이었는데 시훈은 별거 아니라는 듯 넘어가 버렸다. 오히려 아버지와 너는 엄연히 다른 사람이니 네가 사과할 필요 없다 말한다.

“그… 시훈아. 보통 가족이 주변 사람에게 잘못을 저지르면 가족들이 대신 사과하지 않아?”

“그런데?”

“나도 너한테 아버지 대신 사과하고 싶어서… 그래서 온 건데.”

“네가 뭘 얼마나 알아서 대신 사과하고 싶다는 말을 해.”

“아버지가 관계자들이랑 이야기하는 거 들어서 어느 정도는 알고 있어. 너희 정체도 아버지 덕에 알았는걸.”

“이야. 김규하. 그렇게 안 봤는데 도둑고양이 기질이 있네.”

“빈정거릴래? 사과받고 싶지 않아?”

“필요 없다니까?”

계속 거절만 당하자 규하는 입을 부루퉁하게 내밀고는 시훈을 흘겨보았다.

시훈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얘는 대체 어디서 뭘 보고 온 건지 뜬금없이 찾아와서 필요 없다는 사과를 하는 건지 모르겠다. 혹시 아버지의 업을 대신 짊어지는 효자라도 되고 싶은 건가.

“그럼 도움은?”

이번엔 구조 요원 흉내라도 내려는 건가?

“뭐?”

“너 도움 필요한 거 아니었어?”

“도움이야 필요한데 네가 어떻게 날 도와. 방법이라도 있어?”

“나 하나만 물어보자.”

“아니, 내 질문에 대답부터 해.”

“너도 이것만 대답해.”

“김규하. 말장난 적당히 해라.”

“권시훈 너. 윤진이랑 그냥 친구 아니지.”

“…뭐?”

시훈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김규하가 평소에도 논리정연하게 말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이번에는 경우가 심했다.

가족에 저지른 잘못에 대한 사죄? 제 인생에 끼어든 가족? 그러다 갑자기 권시훈과 박윤진의 관계를 묻는다고?

“왜? 친구라면 좋아한다고 고백이라도 하려고? 친구 아니라면 가로채놓고 국화 들고 와서 애도라도 표하게?”

“…진짜 질투 밑도 끝도 없다.”

“알아듣게 말해야 밑도 끝도 없는 짓을 안 하지!”

“나 윤진이한테 고백했어.”

“…뭐?”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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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쪽같은 내 남친

한가린 장편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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