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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쪽같은 내 남친-84화 (84/85)

84화

그러잖아도 심란한데 굳이 몰라도 되는 정보를 알려 주니 시훈은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다.

너는 왜 여기까지 기어들어 와서 알고 싶지도 않은 이야기를 늘어놓아 사람 속 뒤집어 놓는 건데. 라고 소리 지르려다가 한참이나 어린아이에게 화내기 뭣해 일단 한번 참아보려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리고 온 김에 너한테도 고백하려고.”

…뭐?

“...진짜 이 새끼가 뭐라는 거야?”

“좋아해. 시훈아.”

“네가 드디어 미쳤구나….”

“미친 거 아니야. 내가 말주변이 없어서 그래.”

“야. 네가 방금 그랬지. 나랑 윤진이랑 그냥 친구 아니라고. 그래 맞아. 나 윤진이 애인이야. 그런데… 뭐? 야! 너 같으면 다른 새끼가 네 애인에게 고백했다고 낯빛 하나 안 바뀌고 양심 고백하더니 갑자기 너도 좋아한다고 하면 아, 그렇구나, 하겠어?”

하지만 역시 화를 참는 것과 당사자의 나이는 별개의 문제였다.

“아, 뭔 소리야. 그 고백이 그 고백이 아니라니까?”

“고백도 종류가 있다는 건 처음 알았다.”

규하는 시훈의 지랄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지만 시훈은 좀처럼 꾸깃한 기분이 가시지 않는지 허리에 손을 짚고 크게 심호흡했다.

잘못 봐도 한참 잘 못 봤다. 누가 권시훈이 사람 잘 본다고 추켜세워줬는지, 이제 보니 순 엉터리가 따로 없었다.

여태 권시훈의 머릿속의 김규하라는 놈은 겨울잠 자는 게으른 곰탱이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매사 느리고, 게으르고, 사람에게 전혀 관심 없는 놈. 하지만 인제 보니 사냥감을 물어뜯을 기회만 노리고 있던 호랑이였다. 그러지 않고서야 문지기가 사라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틈새시장을 파고들었겠냐는 말이다.

“너 내가 혹시 윤진이한테 미련 가지고 질척일 것 같아서 째려보는 거야?”

몰라서 묻냐라는 눈으로 째려보니 규하는 뒷목을 꾹꾹 누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너희 결혼한다며. 오래 만났다며. 그 사이에 내가 염치없게 어떻게 끼어드냐. 나 그 정도 양심은 있어.”

“양심이 있기는 했었구나?”

“그리고 처음부터 어떻게 해 볼 마음도 없었어.”

“이거 웃기는 새끼네. 어떻게 할 생각이 없었으면서 고백은 왜 한 건데?”

“내 마음이 이러니 좀 알아 달라는 뜻이었지.”

“미친놈….”

“그리고 약간의 책임감도 있었고.”

“책임감? 그건 또 뭔 소리야.”

시훈이 되물었지만, 규하는 대답하기 곤란한지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아, 답답해. 김규하. 넌 질문에 답 안 하는 병이라도 걸렸냐? 왜 대답 안 해? 그렇게 계속 입 닫고 있을 거면 꺼져.”

괜히 질문했다가 되레 답답해진 시훈은 인상을 팍 쓰고 제 앞의 열여덟을 노려보았고 시선을 의식한 열여덟은 삐질 흐르는 식은땀을 닦아 내었다. 어쩐지 이 이상 대답을 끌었다가는 방 주인에게 엉덩이를 걷어차여 쫓겨날 것이라는 직감이 들었다.

“…….”

규하는 누가 뒤통수를 갈기고 가도 눈치채지 못할 것 같은 무방비한 얼굴을 한 채 생각에 잠겼다.

시훈은 평소 김규하가 생각이라는 것을 하는 걸 본 기억이 없어 지금 모습이 조금 낯설고 소름 돋았지만, 일단 잘생긴 얼굴을 감상하며 잠자코 기다려보기로 했다.

인정하기 싫지만, 규하는 참 잘난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그사이에 자랐는지 처음 만났을 때보다 더 성숙한 느낌이 났다. 학교에서는 마냥 애같이 보이기만 했는데, 열여덟의 중반이 지나가니 점점 젖살이 빠지며 얼굴 윤곽이 또렷해지고 있었다. 그러니 날카로운 눈매가 훨씬 도드라져 보였다.

“시훈아.”

시훈의 시선이 규하의 눈매에서 콧날, 입술쯤까지 내려왔을 때,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시훈은 별것도 아닌데 괜히 몰래 훔쳐보다 걸린 사람처럼 흠칫 놀라 얼른 시선을 거두었다.

순간, 이유 없이 다음 말은 들으면 안 될 것 같은 불안감이 엄습했다.

됐으니까 말하기 싫으면 다음에 듣겠다 하려 했는데,

“…….”

그런데 그 한마디 후, 또다시 말이 없다. 대체 뭘 물어보려고 이리도 한참이나 뜸을 들이는 걸까.

“야. 할 말이 있으면 빨리빨리 해. 사람 기다리게 하지 말고.”

참다못한 재촉 뒤에 튀어나온 대답은 너무도 의외의 것이었다.

“내가 너 책임질게.”

“어?”

“나가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뻔히 알면서 널 여기 두는 건 아닌 것 같아.”

“알아? 뭘?”

“너 지금 외부와 연락 차단당하고 갇혀서 잘 알지도 못하는 약으로 실험당하고 있잖아.”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몰랐다면 내가 왜 여기까지 찾아왔겠어.”

“…….”

오형석의 고발과 규하의 말을 되뇌던 시훈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김규하는, 아니 김태준과 박윤진은 과거부터 지금까지 깊은 악연으로 엮인 사이이다. 그리고 그의 아들이라는 김규하는 이 연구소에 권시훈이 격리되어 있고, 벗어나려 한다는 것도 모두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으윽!”

고개를 들었던 규하는 갑작스레 달려든 무지막지한 시훈의 힘에 벽으로 밀려 등을 세게 부딪히고 말았다.

“권시훈. 너 갑자기 뭐 하는 거야. 놀랐잖아!”

당황한 규하가 있는 힘을 다해 밀어내려 했지만, 시훈이 온 힘을 다해 어깨를 붙잡고 있었기에 쉽게 빠져나올 수 없었다.

“너 대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야.”

“알고 있다니. 뭘?”

“이 실험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있냐고.”

머릿속 혈관이 펑 하고 터질 것 같다. 분노인지 흥분인지 모를 것이 끓어올랐다.

김규하가 박윤진과 권시훈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이미 윤진에게 들었던 사실이었지만, 실험의 목적이나 내막까지 알고 있을 것이라고는 정말이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때문에 당사자의 입에서 직접 진실을 듣고 나니 배신감이 치밀어 올랐다.

김규하를 처음 만났던 순간, 시시껄렁한 농담을 하며 시간을 죽이며 웃던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혹시 김규하는 일부러 우리에게 접근했던 것일까. 정황상 그렇게 추측할 수밖에 없었다.

너 대체 무엇을 얻으려고 했던 거야. 친구라는 그럴싸한 허물을 씌워놓고 뒤로는 우리를 비웃으며 조롱했었니? 적어도 나는 너한테 진심이었는데, 네가 어떻게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쳐. 왜.

“그래. 모두 알고 있었어. 처음부터, 다.”

규하는 목이매 갈라지는 목소리를 가다듬다 괴로운 듯 긴 숨을 뱉어냈다. 화를 억지로 참고 있던 시훈은 매섭게 규하를 노려보았다.

“끝까지 모른 척하려고 했어. 어차피 이 프로젝트가 끝나면 너희는 원래 자리로 돌아갈 거니까. 결국 내게는 없는 사람이 될 테니까 그냥 조용히 있으려 했어. 그런데 사람 일이라는 게 쉽지가 않더라. 욕심 생기면 안 되는데 욕심이 생기더라.”

“더 욕심부릴 게 있어? 모른 척 위선 떨었던 네 행동이 처음부터 욕심이었는데.”

“하, 그렇지. 위선 맞지.”

말을 마친 김규하는 고개를 떨어뜨리며 눈을 감고 낮게 탄식을 내뱉었다.

“시훈아. 그동안 모른 척해서 미안해. 하지만 난 진심으로 너흴 돕고 싶어.”

“나더러 지금 그 말을 믿으라고?”

“제발, 제발 믿어줘. 내가 이용당하는 건 참을 수 있지만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 괴롭히는 건 더 이상 보기 힘들단 말이야.”

“그래. 백번 양보해서 돕는다 쳐. 그런데 대체 무슨 수로? 넌 너희 아버지처럼 힘이 있는 것도 아니고, 뭣도 아니잖아.”

“그것까지는 알려 줄 수 없어. 하지만 믿어도 좋아. 아니, 믿어줘. 나 그 정도는 할 수 있어.”

간절히 애원하는 목소리에 축축한 물기가 묻어 있었다. 하지만 시훈의 눈빛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너 지금 너희 아버지를 배신하겠다고 말하는 거야? 말이 돼? 학교에서 조금 어울렸던 놈들 돕겠다고 가족과 등지겠다고?”

“그 사람 내 가족 아니야. 자식새끼 십 수년간 내팽개쳐 놓고 이제 와 필요해지니 아버지 행세하는 놈을 어떻게 가족이라고 해. 넌 그럴 수 있어?”

“…뭐?”

“오버한다고 해도 상관없어. 욕을 하고, 때려도 좋은데 그렇게 차가운 눈으로 보지 말아줘. 나… 너희들에게만큼은 미움받고 싶지 않아.”

“야… 김규하.”

“개 쪽팔리는데 나 여태까지 친구라고 부를만한 사람이 없었어. 다가오는 새끼들은 다 나를 이용하려 혈안이 된 놈들이었다고. 그래서 누군가와 어울리는 게 힘들고 불편해. 그게 가족이라고 다를 것 같아?”

“…….”

“웃기지 않냐? 처음 친구라고 부르고 싶다고 생각한 놈들이 나랑 절대 친구가 될 수 없는 놈들이라는 게.”

제 사정이 우스운 듯, 규하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모른 척 붙잡아 두고 웃어넘기면 그만이겠지. 학교에 남아 있는 동안은 친구라는 탈을 쓰고 그냥저냥 지내겠지. 하지만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

“…….”

“너희가 나를 배신자라고 손가락질하며 등 돌려도 돕고 싶었어. 아버지라는 사람 때문에 너랑 윤진이가 힘들어했으니까 너를 윤진이에게 돌아갈 수 있게 도와주고 싶었어.”

시훈은 심장이 저 어딘가로 쿵 떨어지는 것 같아 가슴을 부여잡았다. 제 화를 이기지 못하고 아이를 너무 몰아세운 것 같아 죄책감이 몰려왔기 때문이다.

간절하게 제 외로움을 고백하는 몹시도 아파 보였다. 그 웃음 끝에 꼭 눈물이 매달린 것 같아 시훈은 차마 더 이상 규하에게 모진 말을 할 수 없었다.

마음이 아팠다. 그저 한없이 가벼운 천지 모르는 애새끼라고 여겼는데 사실 김규하는 그 누구보다 쉽게 상처받고 외로움을 많이 타는 소년이었다.

“김규하.”

맞닿은 두 사람의 발을 내려다보다 시훈은 입술을 감쳐 물었다.

그저 미움받고 싶지 않다고 고백하는 이 아이를 더 이상 너를 몰아세워봤자 아무런 의미가 없다.

화가 났던 건 사실이지만 이 또한 너의 아픔으로 덮고 미뤄두는 게 나을 것 같다.

물 흐르듯 넘겨 버리기. 이것은 제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하는 열여덟에게 해 줄 수 있는 시훈의 최대한의 배려였다.

“김규하. 고개 들어봐.”

한결 누그러진 것 같은 부름에 김규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네가 왜 숨기고 있었는지는 물어보지 않을게. 궁금하지도 않고. 하지만 그 말이 용서하겠다는 뜻은 아니야.”

“…….”

권시훈이 자력으로 이곳에서 나갈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고, 그를 도울 수 있는 사람은 어쩌면 김규하가 유일했다. 그렇다면 서로 이를 드러내고 경계할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시훈이 규하를 잡아야 하는 타이밍이었다.

“너 믿어볼게. 대신 꼭 내보내 줘.”

“시훈아….”

“망하면 뒤지는 줄 알아. 알았어? 미안하다고 했지? 그럼 행동으로 보여줘. 그게 네가 나한테 속죄하는 거라 생각해.”

당장 툭 치면 눈물이 나올 것 같은 얼굴이었지만, 규하는 울먹임을 꾹 참으며 시훈을 마주 바라보았다.

“아, 알았어….”

“아! 그만! 애인 군대 보내는 것도 아니고 구질구질하게 질질 짜지 마. 징그럽다.”

“미안해에.”

미안하다며 말꼬리를 늘리는 모습이 또 한없이 어린아이 같아 한숨이 절로 나왔다.

“…미안하다 할 시간에 얼른 가서 방법이나 생각해. 입씨름할 시간도 아깝다.”

네 잘못이 아니야. 너는 그저 태어났을 뿐이고, 시간이 지나며 자랐을 뿐인데, 나쁜 어른들이 너를 아프게 만든 거야.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마음과는 달리 끝까지 예쁜 말은 나오지 않았다.

규하도 딱히 친절함을 바라진 않았던지 훌쩍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웅. 알았어.”

“으휴.”

어휴. 미쳤지 권시훈. 대체 너는 어쩌자고 이 꼬맹이를 몰아세웠니. 시훈은 속으로 되뇌며 후회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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