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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쪽같은 내 남친-85화 (85/85)

85화

눈시울이 새빨개진 규하를 겨우 달래 돌려보낸 뒤, 시훈은 홀로 방에 남아 생각에 잠겼다.

‘시훈아. 내가 진짜 잘할게.’

‘알았으니까 좀 가라…’

‘그렇게 매정하게 말하지 말구…’

‘아! 씨바… 후, 알았어어! 그만 징징거리고오 가세요. 응?’

‘…전화해도 되지?’

‘해! 실컷 해! 그러니까 징그럽게 달라붙지 말고 꺼져! 좀. 그리고 나 너랑 띠동갑이거든?? 너너 거리지 마!’

‘아. 그렇게 되나? 그럼 아저씨라고 해야 해? 아니면 삼촌?’

‘하아… 모르겠다. 그냥 너 꼴리는 대로 해라.’

‘삼촌. 앞으로도 나랑 친구 해 줄 거지?’

‘넌 정말 대단한 친화력을 가지고 있구나. 삼촌도 친구라고 부를 수 있다니.’

‘아저씨라고 하면 좀 멀게 느껴지잖아. 차라리 삼촌이 친근감 있는걸.’

‘형이라는 선택지는 아예 없는 거야?’

‘아, 그게 있었지! 그럼 시훈이 형! 계속 내 친구 하는 거다? 웅?’

규하는 끝에 끝까지 시훈을 붙들고 늘어졌다. 친구 간의 의리, 그간의 정, 급기야는 어떻게 알았는지 본인이 시진… 아니, 시훈의 오랜 팬이고, 가장 존경하는 멘토이자 위인(?)이라며 열심히 비행기를 태워놓았다.

‘…윤진이한테 물어보고.’

결국 아이의 땡깡에 마음이 약해진 시훈은 규하의 부탁을 들어주게 되었다. 물론 영혼의 주인인 윤진의 허락이 있어야 한다는 전제하에.

‘윤진이는 나 보기 싫다구 했어… 불편하대.’

‘그럼 안 되는데….’

‘자기가 잘 말해 주면 안 될까? 김규하 생각보다 괜찮은 애라고. 나 막 차였다고 질척이고 그런 타입 아니야. 금사빠라서 좋아했던 것도 금방 잊어버린다고.’

‘규하야. 윤진이가 제일 싫어하는 게 변덕이야.’

‘그럼 어떻게 해… 나 자기랑 윤진이 없음 진짜 외톨이란 말야.’

‘아오!! 울지 좀 마! 다 큰애가 왜 이렇게 눈물이 많아! 뚝!’

시훈은 본인이 되도 않는 애교를 남발하고 생떼 쓰는 것에는 관대하면서 다른 사람이 저같이 구는 것은 유독 못 견뎌 했다. 때문에 규하가 울망울망 눈물을 뚝뚝 떨굴 것 같은 얼굴이 되자, 질색을 하며 아이의 어깨를 잡고 짤짤 흔들어대었다.

승기를 잡은 규하는 시훈에게 학교를 그만두더라도 모른 척하지 않기로 몇 번이고 다짐을 받고서야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돌아갔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시훈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확실하다. 김규하는 박윤진보다 권시훈이 무르다는 것을 알고 더 집요하게 구는 게 틀림없었다.

‘개 쪽팔리는데 나 여태까지 친구라고 부를만한 사람이 없었어. 누군가와 어울리는 게 힘들고 불편해서.’

‘웃기지 않냐? 처음 친구라고 부르고 싶은 사람이 생겼는데 나랑 절대 친구가 될 수 없는 사람들이라는 게.’

한차례 해프닝이 지나가고 나니 머릿속에 규하의 아픈 말이 계속해서 반복 재생되었다.

친구가 없다고? 납득하기 힘든 말이었다. 김규하는 전교생 중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아이였다. 가는 곳마다 주목받아 인파에 둘러싸이는 통에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정도여서 윤진이 매우 성가셔했었다. 그런데 오늘 마주한 규하의 눈동자에는 짙은 외로움이 철철 넘쳐 흐르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군중 속의 고독일까. 늘 사람에게 관대한 편인 시훈으로서는 규하의 아픔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었다.

…곁에 두어도 괜찮겠지. 무모하게도 괘씸하게도 제 연인에게 고백했던 아이였지만, 시훈은 규하를 용서하고 싶었다. 동정인지 알량한 측은지심인지 여하튼 김규하는 권시훈에게도 꽤 중요한 인연이 된 모양이었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김규하의 잘난 얼굴 또한 한몫했을 것이다.

그런데 김태준과 김규하가 진짜 아버지와 아들 사이라니. 아무리 생각해도 믿기 힘들었다. 연구소에서 잠깐 본 게 다지만 언뜻 보기에도 김태준과 김규하는 전혀 닮은 구석이 없었다.

일단 김규하는 지구 밖의 외계인이 보더라도 한눈에 반할만한 잘난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길고 커다란 삼백안으로 어딘가를 응시하면 그 자체로 사연이 되고 서사가 되는 놀라운 능력도 그의 매력을 한층 더하는 데에 한몫했다.

반면, 김태준은 키는 김규하만큼 컸지만 어쩐지 가까이 다가가고 싶지 않은 인상이었다. 동물로 치면 뱀에 가까운, 죽 찢어진 눈과 이죽이는 얇은 입술이 보는 사람을 주눅들 게 만들었다.

어떻게 김태준 같은 유전자에서 김규하 같은 아이가 나왔는지,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어머니의 유전자 몰빵이 틀림없다. 시훈은 새삼 규하의 어머니가 궁금해졌다.

“…….”

시계 초침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적막. 시훈은 먹통이 된 지 오래인 휴대폰을 한번 들어보았다가 저만치 던져버렸다. 전원도 들어오지 않는데 손에 들고 있어봤자 짐만 될 뿐이었다.

처음에는 단순한 전파장애처럼 보이기에 관계자에게 해결을 부탁하면 되는 일이라 여겼다. 하지만 점점 통화할 때 신호가 끊기는 일이 많아졌고, 잠시라도 들여다보고 있지 않으면 이유 없이 전원이 나가버리기 일쑤였다. 고장 날 만한 짓은 하지 않았는데… 이제 와보니 혹시 이것도 김태준의 농간인 것 같다.

“음모론이 이래서 무서워. 한 번 휩싸이니 별게 다 수상하네.”

애써 부정해 보려 혼잣말해 보아도 불안함은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역시나 이 불안함을 떨치는 방법은 연구소를 벗어나는 것뿐이다.

그런데…이제부터 어쩌지. 어떻게 해야 여기를 빠져나갈 수 있지.

하도 매달리고 징징거리길래 알겠다 대답하고 보내버렸지만 사실 시훈은 규하의 말을 완전히 믿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규하는 김태준의 아들이라는 특이점이 있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지극히 평범한 고등학생일 뿐이고, 이 프로젝트와는 접점이 전혀 없었기에 도와봤자 출입증 빌려주는 것 정도가 다일 것이다.

일단, 오형석을 다시 만나봐야겠다. 휴대폰도 제 기능을 못 하는 이 상황에 수시로 불러서 괴롭힐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니 최대한 부려 먹어야지. 쥐잡듯 추궁해서 귀찮게 만들고, 약점이라도 잡히면 그 빌미로 어떻게 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아….”

이런저런 고민을 하고 있으니 관자놀이가 욱신거려 손바닥으로 눈 옆을 짚고선 꾹꾹 눌렀다.

“뭐지. 갑자기.”

금방 괜찮아질 거라 여기고 넘겼는데 쉬이 통증이 가시지 않아 무릎에 고개를 파묻고 머리를 감싸 쥐었다. 신경을 많이 쓴 탓일까. 그런 것 치곤 이 통증은 꽤나 최근에 겪은 종류의 것이었다.

의식하고 나니 순식간에 오한이 덮쳐왔다. 시훈은 눈을 질끈 감고 이를 악물었다.

* * *

눈을 뜨니 천장이 유난히 높았다. 깜박 정신을 잃은 것 같은데 대체 어떻게 침대에 누워 있게 되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몇 시간이나 잔 걸까. 창문이 없는 방이라 낮 밤을 구분할 수 없어 정신이 좀처럼 돌아오지 않았다.

“어? 깨어났어요?”

의식 너머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시훈을 불렀다. 목소리가 난 방향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흐릿하게 사람의 실루엣이 보였다.

“…박사님.”

“어! 나 알아보겠어요? 눈은 잘 보여요? 시야는 괜찮고?”

그게 그 말 아닌가라고 반박하려 했는데 목구멍이 까끌거려 시훈은 대답 대신 마른기침을 콜록 내뱉었다.

“케켁… 켁. 아우우. 갑갑해.”

“아이고. 목 아픈가 보네. 일어나서 물 좀 마셔요. 일어날 수 있겠어?”

“네, 네. 감사합니다.”

시훈은 겨우겨우 마른침을 삼키며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 목소리가 좀… 달랐다. 그저 목이 잠겼다고 하기에는 목소리가 지나치게 가늘었다.

시훈은 잠시 상황판단이 제대로 되지 않아 느릿하게 눈을 깜박였다. 평소와 다른 목소리, 묘하게 가벼워진 것 같은 몸, 혹시나 싶어 주먹을 쥐었다가 펴보니 손바닥에 닿는 손끝과 손톱이 말캉했다.

“젠장.”

저도 모르게 거친 욕설이 튀어나왔다. 마지막 희망을 거는 심정으로 누운 채로 시선을 내려보았다.

담요같이 커다랗고 긴 바지에 파묻힌 짤똥한 다리와 꼬물대는 발가락, 팔목을 다 덮어버린 반소매 티셔츠, 그 사이로 튀어나온 작은 손가락.

“아오오오오!!”

짜증과 화가 폭발해 버린 시훈은 사지를 버둥거리며 고함을 내질렀다.

“아니! 왜! 하필 지금! 애새끼가 되버린 거야앗!”

“아이고. 깜짝이야! 시훈 씨. 놀랐잖아요!”

“지금 그쪽이 놀란 게 중요해여?? 아니, 왜 또 이 꼴인 건데. 왜엑!!”

권시훈은 이 와중에 깜찍한 소리나 내고 있는 본인의 짧은 혀를 뽑아버리고 싶었다.

하필 이럴 때! 당장 오형석을 때려눕히고 뛰쳐나가도 모자랄 판에 아이가 되어버리다니. 이 망할 약은 정말 나를 평생 붙잡아 두려는 걸까.

“아아아악! 짜증 나!”

“으악!! 옷! 옷 다 벗겨집니다!”

대자로 뻗어 있던 시훈이 별안간 벌떡 몸을 일으키자 위태롭게 어깨 끝에 걸쳐져 있던 신체나이 18세 권시훈의 티셔츠가 꼬마 권시훈의 어깨를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옆을 지키고 있던 오형석은 기겁하며 시훈의 옷자락을 붙들어 올렸다. 정작 당사자는 씩씩거리느라 제 옷이 벗겨졌는지 불타 없어졌는지도 신경 쓰는 것 같지 않았지만.

“저기, 시훈 씨. 지, 진정하세요.”

“지금 진정하게 생겼씁니까? 그쪽 같으면 진정하겠어요? 네?”

“물론 진정 못 하겠죠. 네. 그렇겠지만 한두 번 있던 일도 아니고 일단 안정을 찾아야 제가 뭐라도 설명을 할 거….”

“속 편히 말할 시간에 당신들이 한 번 겪어 봐! 눈 뜨면 애가 됐다가 어른이 되었다가 반복하는 게 얼마나 거지 같은 경험인지!”

성숙한 어른인 권시훈은 맹세코 이렇게까지 화낼 생각이 없었다. 그렇지만 방금 전까지 꽤나 심각하게 앞으로의 계획을 세우고 있었는데, 그야말로 눈 깜짝할 새에 무방비 그 자체 상태로 돌아가게 되자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내고 말았다.

오형석은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렸다. 숱한 경험상, 막 변화를 마쳤을 때의 권시훈을 건드리는 것은 목 씻고 날 잡아 잡수라고 드러눕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어느 정도 화가 누그러질 때까지 망부석이 되었다 세뇌하며 자리를 지키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폭주하는 시훈을 그냥 두고 보고만 있기는 조금 곤란했다.

“저기… 시훈 씨. 미안한데 지금 여기에 나만 있는 게 아니라… 손님이 와 계세요. 그러니까 이성을 좀 차려봐요. 네?”

“누구요? 여기가 무슨 사랑방이야? 사람을 불러들이지 말고 사람을 만나게 날 내보내 달라고!”

“제발… 시훈 씨… 말조심 좀….”

시훈의 고함 소리와 오형석의 한숨 소리가 점점 커져 가고 있었던 때였다.

“…성질은 그쯤 부리고 우리 이야기 좀 하죠. 권시훈 씨.”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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