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입안이 버석버석하게 말라 타는 듯한 갈증을 느끼며 나는 생각했다.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임재희입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알파예요. 그리고 쓰레기입니다. 재활용도 안 되오니 타는 쓰레기통에 넣어 주세요.
눈을 뜨자마자 자기소개가 가능한 것으로 보아 한 가지가 확실해졌다. 러트가 끝이 난 모양이었다.
몸을 휩쓸던 간질간질한 열기는 자취를 감추었고 이성적인 사고를 마비시키던 욕망도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그런고로 내 앞에 펼쳐진 것은 냉혹한 현실이었다.
처음 와 보는 모텔에 정사의 흔적이 가득하다 못해 회생불능이 되어 버린 것만 같은 더러운 시트,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쓰레기가 하나…….
“안 돼…….”
절망적이다.
쓰레기는 절망했다. 쓰레기 주제에 절망을 하다니 참으로 팔자 좋은 쓰레기였다. 제길, 제기랄……. 착하고 올바르게 살아가던 내게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을까. 내 안의 정의가 무참히 짓밟히고야 말았다. 그것도 바로 나 자신의 손에 의해서.
나는… 나는 내게는 절대로 이런 일은 있을 리가 없으리라 생각했었다. 어릴 때부터 내 주변의 철부지 알파 새끼들이 오메가와의 우연한 만남을 로망으로 여기는 게 그토록 한심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알파와 오메가가 서로에게 이끌리는 것이 본능이라고 하지만, 본능에 따라 행동하면 그게 사람 새낀가? 인간이 위대한 것은 본능을 이겨내고 이성과 합리를 바탕으로 사유하고 행동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하물며 사랑이라는 영역에서는 더욱. 그깟 페로몬 나부랭이에 하반신이 꼴리는 게 사랑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물론 나 역시 피 끓는 청춘이었으니 에로스적인 사랑을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섹스를 하기 위해 사랑을 하는 건 아니었다. 사랑을 하니까 섹스를 하고 싶은 거지.
그러므로 본능적으로 섹스를 갈구하게 만드는 오메가와의 만남은 단 한 번도 내게 로망이 된 적이 없었다.
내게는 이여운이 로망이었고 사랑이었다.
베타인 이여운에게 애정을 느꼈고 페로몬 따위에 휘둘리지 않는 그 감정만이 고귀하다고 할 정도로 순수한 사랑이라 확신했다. 그 어떤 외부요인에도 흔들릴 리 없는 완벽한 사랑이라고…….
아니, 지금도 이여운만이 나에게는 유일무이하다. 사랑해서 안고 싶은 사람은 이여운 단 하나.
“…안 돼…….”
그런데 내 몸은 더러워졌어.
억울한 감도 있었다. 내가 억제제를 안 먹는 것도 아닌데 갑자기 러트가 그토록 강하게 올 거라고 누가 알았을까. 그 와중에 히트 사이클이 온 오메가와 우연한 조우? 장난해??
페로몬과 페로몬이 만나 폭발을 일으키니 감히 저항할 수가 없었다. 내가 본능을 개무시하고 이성만을 과신하고 있었음을 인정해야 했다.
……하지만 내가 괴로운 것은…….
…정말로 내가 저항할 수 없었던 게 맞나 싶기 때문이었다.
나는 몸을 움직일 수 없었던 게 아니었다.
키도 190에 가깝고 건장하다. 반면 내게 매달려 왔던 오메가는 175cm 정도나 될까 싶은 데다가 이여운보다 더 마른 듯 가녀린 체구였다. 내가 거칠게 쳐올릴 때마다 그의 아랫배 가죽이 불룩불룩 튀어나올 정도, 아니 미친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그래, 진짜 사고라고 치자.
본능을 이겨내지 못해서 저지른 사고라고……. 하지만 이걸 마냥 사고라고 할 수 없는 것은… 사고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콘돔도 없이 체내 사정을 해 버렸다. 아주 시원하게 싸갈겼어.
오메가가 멋대로 날 깔고 앉아 벌어진 일이니 여기까지도 어쩔 수 없다고 쳐도……. 두 몸뚱이에 발정이 끝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내 좆대가리가 나를 설득했다.
야, 한 번이나 두 번이나 마찬가지 아니냐.
…그래서 또 했다.
두 번째엔 아예 그 늘씬한 몸을 부둥켜안고 하다가 성에 차지 않아서 침대에서 내려와 들고 박았다. 한참을 내려주지 않자 오메가가 무섭다는 듯이 칭얼거려서 다시 침대에 내려놓고 옆으로 눕혀 놓은 채 한쪽 허벅지를 끌어안고 박았다. 바르작거리는 걸 짓누른 채 하고 싶어서 침대에 엎어 놓고 또 마음껏 박았다. 몸서리치며 우는 오메가의 안에 또 사정을 해 버리고, 다시 그 입에 좆을 물렸다. 탈진한 듯이 눈도 제대로 못 뜨기에 똑바로 물라며 거시기로 뺨을 몇 번 찰싹찰싹…….
“으아아아아 미친놈아……!!”
나는 홀로 절규했다. 내가 미친놈이다. 세상에 나 같은 미친놈이 있을까! 그 작고 예쁜 얼굴에 내 성기를 문지르고 입술에 물려 놓은 건 물론 보기가 좋았지만- 아니, 지금 또 무슨 생각을 하냐고!
“흐어어어……. 여운아… 여운아 미안해…….”
억장이 무너지고 눈물이 나려 한다.
내가 지금 울지 않는 것은 내가 울 자격이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젠장, 내 양심, 이토록 고고한데 도대체 왜 어제는 제대로 소리를 내지 못했을까. 아니, 지금 당장 이 오메가를 두고 나가라고 내 양심이고 이성이고 비상벨을 울리며 난리를 치긴 했다. 그 모든 게 알파의 성욕 앞에 무의미한 비명으로 끝나서 그렇지…….
나는 죄인이다. 내가 존나 죄인이다. 여운이를 어떤 얼굴로 봐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나란 쓰레기, 어디 가서 그냥 콱 뒈져 버리라지.
죽고 싶다……. 지금 나는 암담함에 침몰하기 일보 직전.
하지만 이미 일어난 일은 돌이킬 수도 없었고 이대로 어디 옥상에 가서 투신을 해 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내가 바람을 피워도 태양은 떠오르고 시간은 흘러가며 일상은 시작되기 마련이었다. 오늘도 내게는 출석을 찍어야 할 강의가 한가득 쌓여 있었다. 특히 오늘은 전공필수 과목이 1교시부터 저녁까지 가득 차 있는 거지 같은 날이었다.
“하…….”
가까스로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한 걸음을 딛고 선 나는 고개를 돌려 옆자리를 바라보았다. 이것을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어제 어마어마한 추돌 사고를 일으킨 빌어먹을 오메가는 사라진 뒤였다. 남아 있는 것은 정사의 흔적과 밤새 쏟아냈던 페로몬의 잔향뿐.
그리고 누런 지폐 한 장이 덩그러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것을 들어서 앞면과 뒷면을 훑어본 것은 어디 연락처라도 써 있는 건 아닐까 기대해서가 아니다. 절대로 아니다. 이게 대체 무슨 의미인가 싶어서 봤을 뿐.
아마도 이것은 화대…… 아니, 나 같은 어리고 잘생기고 절륜한 알파의 화대가 고작 5만원이라고 할 수는 없으니 멀쩡한 알파를 덮친 파렴치한 오메가가 남기고 간 최소한의 양심이라 해야 할 것이다. 내가 누구 때문에 모텔에 왔는데 모텔비는 그쪽이 내 줘야 할 거 아닌가.
하. 백 번 양보해서 사고는 같이 쳤는데 5만원 한 장 던져 놓고 사라져? 이따위 5만원 줘도 안 받는다…!
라고 하고 싶지만……. 용돈 타서 쓰는 대학생 나부랭이에게 5만원은 작은 돈이 아니었다. 돈이라도 있어야 여운이에게 속죄를……. 아니, 아무리 그래도 이 돈으로 여운이 맛난 거 사주는 건 파렴치하다 못해 사람이길 포기한 짓인 것 같다.
하지만 돈에는 죄가 없으니 어쩔 수 없이 그 돈은 내 지갑 속으로 들어갔다. 쓰레기는 나지 돈은 쓰레기가 아니니까.
돈을 챙기고 난 뒤 나는 욕실로 향했다. 더욱 절망적인 것은 러트를 성공적으로 치러낸 내 몸은 개운하기 그지없으며 활력이 넘친다는 점이었다. 양심도 없는 몸뚱이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물론 알파의 며칠씩 지속되는 러트가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었지만 정신이 조금 돌아온 지금, 억제제를 왕창 털어 넣으면 문제 될 게 없는 상태였다.
페로몬 리무버로 머리를 감고 몸을 벅벅 문질러 닦는 와중에도 입에서 튀어나오는 것은 한숨뿐이었다.
“쓰레기는 씻어도 쓰레기…….”
자조적으로 중얼거리며 나는 샤워기 아래 머리를 처박았다.
***
첫 번째 강의에 지각을 했다.
연인을 두고 부정을 저지른 쓰레기는 이제 강의에도 지각을 하는 쓰레기가 되었다. 이쯤 되면 정말 종량제 봉투 속에 들어가야 하는 거 아닐까.
“임재, 오늘 왜 늦었냐?”
남의 이름을 앞에 두 글자만 부르는 망할 놈은 동기인 박의찬이란 놈이었다. 녀석은 알파였고 알파 중에서도 나서기를 좋아하는 놈이라 남들 다 하기 싫어하는 과대 노릇을 2년 연속으로 독점하고 있는 감투 마니아였다.
“늦잠 잤어.”
물론 구라였다. 나는 비록 대학생이었지만 늘 일정한 시간에 일어남으로써 대학생의 본분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아침형 인간이었다. 밤에 아무리 늦게 자도 아침에 원래 일어날 시간에 꼬박꼬박 눈이 뜨이곤 했고 오늘 아침에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집이 아니라 모텔에서 눈을 뜬 바람에 바로 집에 들러야 했다. 억제제도 챙겨야 했고, 이틀 연속 같은 옷을 입고 학교에 갔다간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를 테니까.
“그래서 그런가? 뭔가 때깔이 좋은데.”
몇 시간 자지도 못했는데 무슨 때깔 타령인가. 그런데 그때 다른 놈이 하나 불쑥 대화에 끼어들었다.
“이거 뺀질뺀질 광이 나는 것이, 딱 훌륭한 밤을 보내고 온 알파의 면상인데?”
이것도 성희롱이라고 해야 하지 않나 고민하게 만드는 발언을 내뱉은 것은 또 다른 알파놈이었다. 나는 굳이 알파끼리만 몰려다니는 걸 좋아하지는 않았는데 알파 중에서는 알파는 우월하므로 알파끼리만 어울려야 한다는 구시대적인 가치관을 가진 놈들이 종종 있었고 지금 대화에 끼어든 건 바로 그런 놈이었다. 알파라는 에고가 어찌나 강하신지 재수 없기 짝이 없어 친하게 지내고 싶지 않은데 불행하게도 놈은 나에게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왜?
“베타랑 해서는 안 나올 광채인데, 이거.”
“거기까지만 해라.”
알파인 내가 베타와 오랫동안 교제하고 있기 때문에.
오메가 후리기를 인생 업적으로 여기는 쓰레기의 기준에서 나는 그리 알파답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니지, 쓰레기는 나다. 여운아 미안해…….
“그런 의미로 봐. 나 오늘 얼굴에서 좀 빛이 나지 않냐?”
“응, 안 나.”
“하, 부럽냐? 부러우면 솔직히 말해라. 내가 얼마나 대단한 러트를 보내고 왔는지 딱 말해 줄 테니까.”
“더러워.”
“위선자세요?”
크헉……. 평소라면 타격감이 1도 없었을 것이나 나는 쓰레기 알파 새끼의 한마디에 격침당하고야 말았다. 그렇다……. 더럽긴 내가 더럽다. 내가 위선자다. 세상 사람들은 나에게 위선자라 낙인을 찍고 돌을 던지시오…….
응? 그런데…….
“러트? 너 러트 왔었냐?”
“어. 이번 주에 몸이 좀 안 좋더니 바로 러트 오던데.”
“헐. 나 지금 좀 컨디션 나쁜데, 설마?”
너두? 야 나두.
어느새 나와 과대 주변에 삼삼오오로 모여 있던 알파 놈들이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었다. 이것들이 지금 단체로 발정기가 왔다는 건가. 물론 아닌 놈도 있긴 했지만 나까지 네다섯 명이 러트 기간이 겹쳐 버렸다.
“이거 그건가? 알파들이 모여 있으면 영향을 받아서 하나가 러트를 맞이하면 다른 알파들도 러트가 시작된다는?”
“그거 그냥 개소리 아니냐.”
“전에 이 내용으로 논문 썼다는 선배도 있던데?”
“논문은 아니고 리포트에 제언으로 썼다더라. 술자리에서 선배들한테 들었어.”
우리 학번의 독재자로 불러 달라며 까부는 감투 마니아는 확실히 발도 넓어서 선배들과 술자리도 잦았고 이런저런 소문을 물어 오곤 했다. 이번에 녀석이 말한 제언이란 즉,
“무리 생활을 하는 동물들 중 발정기가 동시에 오는 개체들처럼 알파들도 서로의 페로몬에 영향을 받아서 러트가 올 수도 있으니 알파들만을 한 공간에서 합숙시켜 보자는 거지.”
여태까지는 그런 연구가 없었느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확실하게 밝혀지지는 않은 부분이었다. 아무리 알파가 끼리끼리 놀았다지만 애당초 알파가 차지하는 비율은 전체 인구의 5% 정도였다. 그렇게 소수에 불과한 알파를 몇 명이나 모아 놓고 실험을 해야 신뢰성이 생길까?
그리고 동시에 러트가 오는 것을 지켜보기 위해서는 얼마나 오랫동안 그들을 한 공간에 가둬놓아야 할까. 이것을 자연 상태로 관찰하기 위해서는 일단 억제제를 끊게 해야 할 텐데 여기서 문제가 하나 생긴다. 억제제 없이 알파들을 서로의 페로몬에 노출시킨 밀폐된 공간에 모아두면 100% 싸움이 난다.
특히 성욕이 듬뿍 담긴 페로몬이라도 누구 하나 분출하는 날에는 사생결단이 날 수도 있다. 이건 여성형과 남성형을 떠난 차원의 이야기였다. 만약 지금 이 자리에서 어떤 알파놈이 날 상대로 성적인 의도가 담긴 페로몬을 분출한다? 이건 참을 수 없다. 결투다. 그놈과 나는 한 지구에서 같은 공기를 마시며 살아갈 수가 없다.
그런 알파놈들을 모아놓고 러트를 관찰한다? 발정기는 성호르몬 농도가 올라가면 오게 되는 건데, 호르몬 농도가 높아지면 페로몬 분비도 활발해지잖아? 한 놈만 남을 때까지 서로 죽여라 이런 걸 원하는 거야?
“그거… 실험해 보자고 주장하는데 의외로 베타나 오메가들이 동조를 해서… 의대까지 왔으니 너희가 의학 발전을 위해 좀 희생해 보라는 식으로 몰고 갔었다나.”
“…씨발, 알파의 인권을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미친 거 아니냐? 오메가들한테 그런 실험 하라고 하면 역적 취급하면서 거꾸로 매달 거면서.”
“발정기 오메가의 페로몬이 다른 오메가의 발정을 유발하지 않는다는 연구는 이미 선행되었다네. 왜 없을 거라고 생각하나, 친구.”
“…….”
누군가의 말마따나 사실 오메가를 대상으로 한 연구는 이미 인류의 의학, 과학 발전에 따라 수없이 진행되었다. 특히나 전세계가 휘말려든 대전쟁 때라던가. 오메가들의 불행한 역사를 생각해 보면 뭐, 알파들 몇 명 정도 밀실에 몰아넣고 관찰하는 건 큰일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제길, 알파의 인권 따위…….
알파우월주의와 의대생이라는 환장의 콜라보로 자의식이 한껏 비대해진 알파들이 부들부들대고 있던 중 쉬는 시간이 끝나 버렸다. 젠장, 나의 소중한 휴식 시간이 너희 냄새 나는 알파 놈들에게 희생되어 버렸어. 덕분에 수업 시간에 핸드폰을 하는 나쁜 학생이 되어야 하잖아.
핸드폰을 확인해 보니 아니나 다를까 여운이에게서 메시지가 와 있었다.
「어, 약 먹었더니 좀 나은 것 같아.」
「넌 좀 괜찮아?」
우리 여운이……. 여운아 미안해…….
나는 일단 눈물을 한가득 찍어 보냈다.
이걸 또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이여운이 몸져누운 것을 다행이라 여겨야 한다는 점에서 또 좀 자살하고 싶어지긴 하는데, 그래도 다행은 다행이었다.
나는 전날 버스를 타고 가며 이여운에게 메시지를 보냈고 그 이후로 불우한 사고에 휘말려 오늘 아침까지 연락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차멀미를 하는 여운이는 내게 바로 답장을 주지 못했고 집에 도착해서 씻고 난 뒤에야 나에게 답장을 했지만… 그때 나는 웬 파렴치한 오메가와 얽혀 사고를 당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오늘 아침에서야 전날 밤 여운이가 보냈던 메시지를 확인한 것이다. 잘 들어왔어. 들어갔어? 자? 어디야? 무슨 일 있어? 나 졸린데. 먼저 자야 할 것 같아. 보면 연락 줘. 이런 메시지가 어제 밤에 한가득 와 있더라. 아침에 확인하고 나는 정말이지 미안해서 가볍게 죽고 싶어졌었다.
그리고 고민하다가 거짓말을 했다.
몸살 기운이 있어서 집에 들어가자마자 잠들어서 연락을 못 했다, 미안하다.
엄청나게 고민을 하다가 겨우 보낸 메시지였다. 그대로 어제 일어난 사고에 대해서 사실을 고할까 싶기도 했지만……. 이기적이지만 나는 이여운과 헤어지고 싶지가 않았다.
사실을 얘기하면 녀석은 상처를 받을 것이고 용서를 해 주거나 헤어지거나 두 가지 선택지 중에 하나를 골라야 했다. 전자라면 다행이지만 나를 차 버린다면……. 녀석이 없는 나 자신을 나는 상상조차 할 수가 없었다.
딱 한 번 일어난 사고였으며 다시는 이런 일 없을 것이다. 나는 다짐했고 각오했으며 맹세했다.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 헤어질 수 없었다. 그러므로 괜히 진실을 꺼내서 녀석을 상처 입히느니 영원히 비밀로 하고 더 잘해 주자고 결심했다.
그리하여 거짓말로 점철된 메시지에 여운이는 시간이 한참 지나서 답장을 했다. ‘나도 몸살 났어. 오늘 학교도 못 가고 지금 일어남.’
신이시여…!! 무신론자였지만 어느 신께서 도와주셨는지 알려주면 나는 교회건 절이건 성당이건 다닐 준비가 되었다. 전날 컨디션 안 좋아 보이더니 너도 몸살이었냐, 네가 나한테 옮긴 거 아니냐는 말로 여운이는 내 거짓말을 믿어 주었다. 여운이가 아픈 것은 몹시 마음이 아프지만 나로서는 만세 만세 만만세였다.
물론 다행이라는 마음만큼이나 죄책감이 컸다. 바람… 아니 사고를 당한 것도 그렇거니와 지금 녀석이 몸살이 난 데에 내 지분이 크다는 것이 명확했기 때문이다. 러트 때문에 내가 너무 자제를 하지 못하고 녀석을 몰아붙였다. 녀석도 좋다고 받아주기는 했지만 베타의 몸에는 아무래도 무리였으리라.
집에서 혼자 끙끙 앓고 있을 여운이를 생각하면 울고 싶은 기분이었다. 내가 지금 강의를 듣고 있을 때가 아니라 녀석의 집에 가서 수발을 들어 줘야 마땅하지 않은가. 여운이는 심지어 편부 슬하에서 자란 데다가 그 아버지는 여운이를 늘 외롭게 방치했으니 말이다.
「강의 째고 갈까? 죽이라도 사 갈게.」
「죽 있어. 뭔 강의를 째냐. 괜찮아. 많이 나아졌어.」
「그럼 끝나고 갈까?」
「아냐. 어차피 조모임 때문에 학교 감.」
「그냥 쉬면 안 돼? 아픈데 꼭 가야 하나.」
「많이 나았어. 괜찮아. 지금 좀 고생하는 게 낫지 이거 미뤄지면 다시 못 모이거나 PPT에서 내 이름 빠질 듯.」
그런 시시콜콜한 메시지를 주고받느라 수업이 귀에 잘 들어오지도 않았다. 하지만 괜찮다. 예과 때 성적은 유급만 면할 정도면 되니까.
몸은 강의실에 있었지만 마음은 이미 여운이의 곁이었다. 내가 여기서 강의를 듣고 있는 것도 미안할 따름이다.
죽어라, 임재희. 넌 살아갈 가치가 없어. 가서 이여운 발닦개가 되어도 모자라. 내가 지은 죄가 있어서 더 좌불안석에 마음이 답답했다. 여운이를 얼른 보고 싶으면서도 녀석을 어떤 얼굴로 봐야 할지 감도 오질 않았다.
물론 그것을 겉으로 티를 내지는 않는다. 남의 지고지순한 사랑에 배알 꼴려하는 저 못난 알파놈들이 눈에 불을 켜고 우리 커플의 파경을 바라고 있는 것 같으니.
입맛도 별로 없어서 점심을 어떻게 먹었나 모르겠다.
그래도 시간은 흘러 어느덧 마지막 강의 시간이었다.
“-그래서 오늘은 지난 시간에 예고한 대로, 이형질의학과 신임 교수님을 모시고 특강을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신이 어제 나를 고난에 빠뜨리더니 오늘은 날 정말로 도와주려는 모양인지 마지막 강의는 심지어 특강이었다. 대학생에게 특강이란 무엇인가. 시험에 나올 일 없으니 출석만 하고 볼일 보러 가라는 자체휴강 타임 아닌가. 물론 전공과목이라 좀 쫄리긴 한데, 한 번쯤은 빠져도 상관없지 않을까. 잠시 고민하던 중이었다.
“와우, 오메가네.”
강의실의 알파들 그리고 몇 안 되는 오메가들이 소리를 낮춰 수군거린다. 만약 자체 휴강을 실행에 옮길 것이었다면 새로운 교수가 연단에 오르고 잠시 소란이 인 지금이 가장 적당한 타이밍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자리에 못이라도 박힌 듯이 움직일 수가 없었다. 내 시선은 오직 연단에 오르는 흰 가운 차림의 남자에게 박혀 있었다. 날씬한 체구에 아름다운 얼굴. ‘교수’가 되기에는 지나치게 젊어 보이는 데다가 몇몇 알파놈들이 수군거리는 대로 딱 봐도 오메가였다.
코끝을 사로잡는 달콤한 향기는 내 착각이었을까.
“안녕하세요.”
마이크 위로 보이는 희고 깔끔한 얼굴이 낯이 익었다.
“이형질의학과 이청영입니다.”
연단에 선 건, 지난 밤 내가 거시기로 뺨을 찰싹찰싹했던 바로 그 남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