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알파의 사정-5화 (5/25)

5.

이형질의학과는 인구의 10%인 알파와 오메가를 연구하는 학과였다. 그러나 페로몬을 분비하는 샘이 있다는 것과 여자 알파, 남자 오메가의 생식기관 구조가 일반적인 베타 남녀의 것과 다르다는 점을 제외하면 사실 알파와 오메가의 신체는 베타의 신체와 다를 게 없었다. 그러므로 웬만한 질병은 각 과에서 연구와 치료가 이루어지곤 했다.

페로몬 억제제의 경우 가정의학과나 일반 내과, 소아과에서도 처방이 가능한 약물이었다. 억제제를 복용해도 발정기의 조절에 어려움을 겪거나 특이증상을 지닌 알파와 오메가를 대상으로 운영되는 진료과였으나, 소수인 이형질 중 억제제 부작용이나 발정기 조절 장애를 겪는 것은 또 다시 소수. 환자 자체가 절대적으로 극소수다 보니 대학병원에서도 독립된 하나의 진료과로 운영되기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럼에도 이형질의학과는 과거 내과에서 분리된 이래로 무리 없이 과를 유지하며 소수이나마 전문의를 배출하고 있었다. 그것이 가능한 것은 물론 돈 때문이었다.

일단 이형질의 반을 차지하는 알파들은 대부분 부유했다. 사회가 알파들의 공격적인 본성에 거부감을 갖고 그들을 배척하려는 움직임이 시작되었을 때, 그들은 알파 페로몬 억제제의 개발과 부작용 감소를 위한 연구에 막대한 자본을 쏟아부었다. 또한 그들의 반려인 오메가를 위한 연구에도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현대에 접어들어 부와 명예를 얻은 일부 오메가들도 이형질의학과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었다.

물론 그게 아니라 하더라도 1차적으로 제약회사라는 스폰서가 이형질의학과를 든든하게 떠받치고 있었다. 페로몬 억제제는 인구의 10%가 처방받아 먹는 약이었다. 이게 돈이 안 될 리가 없다. 억제제의 처방은 의사 자격증이 있으면 대부분 할 수 있었지만 억제제의 개발과 개량은 이형질의학과와 제약회사의 협업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이형질만을 연구하는 독립된 임상과가 반드시 필요한 실정이었다.

덕분에 이형질의학과는 환자를 많이 보지 않아도 과를 유지할 수 있었고 다양한 연구 결과를 내놓고 있었다.

이청영 교수는 그런 이형질의학과에 새로 부임한 교수님이었다.

병원 규모가 커서 수없이 많은 교수님과 스태프들이 있고 이형질의학과는 평소에 관심조차 없어서 이런 젊은 교수가 왔다는 것을 나는 몰랐다.

본능을 이기지 못하고 발정 난 오메가와 원나잇을 했는데요, 그게 앞으로 몇몇 강의에서 얼굴을 봐야 할지도 모르는 교수님이었습니다.

이게… 이게 말이 돼??

아니, 이형질의학과에서 알파오메가 연구의 선두를 달리고 계신 분이 대체 왜 버스에서 히트 사이클이 와서 애먼 알파 인생을 꼬아 놓는단 말인가!

강의는 당연히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혹시라도 연단에 선 교수님이 내 얼굴을 알아볼까 봐 PPT가 영사된 스크린조차 쳐다보지도 못하고 고개를 처박고 있었다.

그 와중에 머릿속에는 또 다른 영상이 선명하게 재생되고 있었다.

마른 등줄기, 내 손자국으로 벌겋게 물든 옆구리, 금방이라도 과즙이 듬뿍 배어 나올 듯이 예쁜 엉덩이와 그 부드러운 살덩이를 벌리며 파고드는 내-

으아아아악…!

어떤 노력에도 굴하지 않고 떠오르는 지난 밤의 기억에 나는 소리 없이 비명을 내질렀다. 망했다. 큰일 났다.

힘들다고 울먹이던 얼굴이 망막에 맺힌 듯이 선명했다. 애처롭게 매달려 오는 남자에게 숨이 막히도록 입을 맞추고 혀를 빨던 것도 떠올랐다. 몹시 달았다.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힘들다며 흐느끼면서도 좋아 죽던 오메가의 다리를 벌리며 또 양껏 박아 댔던 황홀했던, 아니 파렴치한 기억이 아무리 애를 써도 지워지지가 않았다.

결국 특강이 끝날 때까지 나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강의가 끝이 나 학생들이 박수를 쳤고 이청영 교수가 내려갔다. 기존의 교수가 올라와 마무리 멘트를 하고 이청영 교수와 함께 강의실을 빠져나갈 때까지 나는 숨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와, 오메가 교수님이라니. 얼굴만 보다가 강의 끝난 듯.”

“킁킁, 어디서 이렇게 좋은 냄새가?”

강의실을 나가던 몇몇 베타와 오메가 동기들이 내 주변에 모인 알파들에게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는 게 느껴졌지만 저 알파인 게 자랑인 알파놈들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같은 도매금으로 넘어가는 거 딱 질색이었지만 다리가 후들거려서 나는 당장 자리를 박차고 나갈 수가 없었다.

“미친놈. 저 교수님 앞에서도 그따위 소리 할 수 있겠냐?”

…그 교수님을 깔아뭉개며 박고 또 박아 댔던 내 주둥이가 할 소리가 아니긴 한데. 저 하늘 같은 교수님을 그가 오메가라는 이유로 만만하게 보는 저 고졸 새끼들은 도저히 못 참겠다.

“내 말이. 딱 봐도 젊어 보이는데 저 나이에 교수가 됐으면 보통 사람이겠냐?”

그나마 과대 박의찬은 나와 동조하는 입장이었다. 아무래도 선배들이나 교수들과 친해서인지 녀석은 이청영 교수에 대해 들은 게 많은 것 같았다.

“몇 살이래?”

“확실하지는 않은데 30대 초반? 얼굴만 보면 더 젊을 것 같긴 한데.”

교수… 조교수로 정식 임용이 된 걸까? 아니면 병원 소속 임상 조교수? 설마 다 건너뛰고 부교수는 아니겠지. 나도 그의 나이가 궁금하던 차였다. 얼굴만 봐서는 20대 중후반 정도일 거라 짐작했었다. 그 날씬한 몸이나 탄력 있게 올라붙은 엉덩이는 도무지 나이를 짐작하기 어렵…… 아니, 그만, 그만! 살색 회상 멈춰!

“난 먼저 간다.”

“어? 오늘 술 한잔하지? 할 얘기 있는데.”

“바빠.”

다른 놈들은 이청영 교수에 대해 계속 떠들 심산인 듯했지만 나는 관심을 갖지 않겠노라 마음을 먹었다. 사고가 있었지만 그건 말 그대로 사고였다.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넘어가야 한다. 그의 사정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내가 이청영 교수 입장이라고 해 보자. 갑자기 발정기가 와서 생면부지의 알파와 신나게 떡을 쳤는데 그게 학생이래요. 나 같으면 교수 임용이고 나발이고 바로 그만둔다.

나? 솔직히 지금 당장 휴학하고 싶다. 아니, 자퇴하고 싶다. 내가 설마 의대 그만둔다고 큰일이야 나겠어? 지금이라도 다시 수능 준비를 해?

물론 그랬다간 어머니한테 맞아 죽을 테지만.

아무튼 강의실을 빠져나온 나는 의과대학 건물에서 뛰쳐나와 상경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여운이가 빈 강의실에서 조모임을 하고 있다고 했다.

내가 쉴 곳은 여운이의 품뿐이야…….

그러나 그를 향해 가는 내 마음이나 걸음은 몹시 무거웠다.

그렇지 않아도 부정을 저지른 게 들킬까 봐 두렵고 너무도 미안한데 그 상대가 누군지 알아 버린 지금 상황은 최악이었다. 상대가 교수님인 것도 암담하고 말이다. 이걸 어디 상담할 수도 없다는 사실이 나를 더 힘들게 만들었다.

여운이가 너무 보고 싶다. 그런데 보기가 무섭다.

어느새 걸음이 느려져서 처음과는 달리 터덜터덜 걸었음에도 상경대 건물이 눈앞에 보이기 시작했다. 건물 앞 벤치가 비어 있어 자리를 잡고 앉았다. 메시지를 보내니 아직 회의가 덜 끝났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4월의 봄날. 해가 길어져 여섯 시 무렵에도 아직 날이 밝았다.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은 훈훈한 온기를 듬뿍 안고 있었다. 캠퍼스 군데군데 심어진 벚꽃에서 떨어진 꽃잎이 흩날려 봄날의 정취가 완연했다.

평화롭고 아름다운 계절. 고풍스러운 외관을 자랑하는 상경대 건물 앞 벤치에 앉은 내 마음은 그러나 심란하기 짝이 없었다. 중간고사가 얼마 남지 않은 시기라 지금 바짝 놀아 줘야 하는데 대체 이 좋은 날 나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가.

하아, 미치겠네 정말…….

벤치에 앉아 허리를 굽힌 채 손에 얼굴을 묻고 있자니 나오는 것은 오직 한숨뿐. 멘탈이 미국에 가 버렸다. 회복이 되질 않는다. 하지만 여운이 앞에서는 제대로 표정 관리를 해야 할 텐데.

그렇게 얼마나 기다렸을까.

“아, 저기 제 친구 있어요.”

건물 입구 쪽이 소란스럽다 싶더니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와서 고개를 들었다. 일련의 사람들이 뭉쳐 있었는데 그중 한 사람에게서 후광이 번쩍거렸다. 그 얼굴을 보니 갑자기 눈물이 날 것 같다. 막상 24시간도 안 되어 보는 건데 너무 오랜만에 보는 기분이었다.

“재희야!”

방싯 웃으며 다가오는 얼굴이 찬란 그 자체다.

“여운-”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그를 끌어안으려 했으나 여운이가 내 가슴을 밀어내는 게 빨랐다. 흠칫 굳어져서 여운이 녀석의 주변을 보니 같이 조모임을 한 듯한 사람들이 보였다. 알파 오메가 사이에 동성 커플이 흔하다지만 베타들끼리는 동성연애가 금기였던 세월이 길었던 탓일까. 여운이는 특히 아는 사람들 앞에서 스킨십을 하는 것을 싫어해서 나는 얌전히 팔을 내릴 수밖엔 없었다.

“오래 기다렸어?”

“아냐. 오래 안 기다렸어. 몸은 괜찮아?”

“응, 멀쩡해.”

정말로 괜찮아진 것인지 여운이는 밝고 들떠 보였다. 조별 과제에 스트레스를 받아 메시지로는 걱정과 욕이 한가득하더니 막상 모여서 진행을 해 보니 썩 괜찮은 모양이었다.

괜찮은 사람이라도 만난 것일까? 같은 조 사람들 대부분은 그대로 자연스럽게 각자 갈 길을 가는 듯했는데 한 명이 남아 있었다.

“아, 여기 제 친구 임재희예요. 이쪽은 두 학번 위 정부원 선배.”

“어… 안녕하세요.”

얼떨결에 소개까지 받아 버렸다.

188cm인 나보다 조금 작지만 그래도 180cm는 넘는 듯 키가 큰 남자였다. 낯선 사람을 향해 감각이 저절로 곤두섰지만 거슬리는 것은 없었다. 그 말인즉 베타라는 의미였다.

“반가워. 이번에 복학한 정부원이야. 여운이 친구 중에 이렇게 잘생긴 사람이 있었네? 의학과라고?”

“네, 형. 제대하고 바로 복학하셨나 봐요.”

“아, 티 많이 나?”

그는 쑥스러운 듯이 웃으며 애매한 길이로 자란 머리를 쓸어넘겼다. 으, 군바리 냄새가 여기까지 난다. 이건 물론 농담이다. 서글서글한 얼굴로 웃어 보인 정부원은 꽤나 성격이 좋아 보였다.

“형, 그럼 저녁 같이 드실래요? 재희야 괜찮지?”

여운이의 제안에 나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난데없이 웬 복학생 아저씨가 데이트에 끼어드는 것은 물론 바람직한 일이 아니었다. 평소라면 솔직히 좀 삐쳤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멘탈이 한계인 지금, 자칫 잘못하면 여운이에게 이상한 반응을 보일 수 있었다. 제 발 저려서 어색한 태도를 보이는 건 하수, 그렇다고 유달리 잘해 주는 것 역시 하수다. 물론 내가 바람의 고수는 절대로 아닌 초범이긴 한데, 심리학적으로 그렇다. 내가 의대 다녀서 잘 안다. 그럴 것 같다.

차라리 제3자가 끼어 있으면? 어색한 태도는 낯가림으로 퉁칠 수 있고 조심스러워하는 것으로 비쳐질 수 있다. 지금 사실 여운이와 눈만 마주쳐도 죄책감에 대가리를 박고 싶어지는데 다른 사람이 있으면 시선과 대화가 분산될 것이다.

그러니 지금 정부원 이 사람, 내게는 은인이나 다름없었다.

“아, 괜찮겠어? 내가 너희 방해하는 거 아니야?”

“형 아까부터 배고프다면서요.”

“그래요, 같이 가세요, 형.”

“하하, 미안한데. 그럼 내가 맛있는 거 사 줄게. 너희 파랑새집 가 봤어?”

“거기 좀 멀지 않아요? 아, 형 차 있지!”

이거 정말 베스트다. 심지어 차가 있는 형님이야? 파랑새집은 여운이가 좋아하는 퓨전 레스토랑이었다. 학교에서 멀지는 않은데 대중교통으로 가기가 나빠서 가려면 택시를 타야 하는 곳이라 뚜벅이 커플인 우리가 자주 가지는 못했던 곳이기도 했다.

완벽하다. 여운이가 좋아하는 레스토랑에서 밥을 먹으면 여운이 기분이 얼마나 좋아지겠는가. 밥값은 정부원이 내겠다고 했지만 내가 멋지게 결제를 하면 애인 잘 뒀다며 여운이 면도 서고 얼마나 좋아. 차를 태워 주셨으니 내가 산다고 하면 명분도 충분하다. 거기 좀 비싸긴 한데 내게는 오늘 아침 생긴 따끈따끈한 5만원이…… 제기랄. 그딴 거 없어도 내가 밥값 못 낼 거지 상태는 아니다. 아빠한테 무릎 한번 꿇지, 뭐.

“그럼 가자.”

“네!”

우리 여운이 벌써 신났다. 좋아하는 얼굴을 보니 몸도 정말 괜찮아진 모양이었다.

정부원을 따라 우리는 차로 향했다. 그리고 그 사이 이여운이 기습적으로 내 손을 꽉 잡았다 놓았다. 녀석을 바라보자 방긋 웃어 보이는 얼굴이 사랑스럽기 그지없었다. 이게 무슨 비밀연애를 하는 것도 아니고, 이렇게 귀엽게 굴기 있음?

나 역시 정부원이 우리 쪽을 보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는 여운이의 손을 꼭 잡았다 놓았다. 여운이는 다시 해맑게 웃었다.

여느 때와 다르지 않은 우리다운 모습이었다. 시답지 않은 장난에도 즐거워 킥킥댄다. 손잡기 따위의 대단치 않은 짓을 엄청나게 비밀스러운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남몰래 해 놓고 설레하는 것이다.

그런데 마음이 무겁다.

몹시 무거워서 자연스러운 미소를 짓기가 힘들다. 비밀 스킨십과 비교할 수 없이 엄청나게 비밀스러운 짓을 저질러 놓고선 들키지 않았음에 안도하는 한편 양심이 비명을 질러 대고 있었다.

정부원은 우리 둘 다 뒷자리에 앉으라며 배려를 해 주었고 조금 얌체 같긴 했지만 둘 다 뒷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은근슬쩍 손가락으로 서로의 손이나 허벅지를 찌르는 장난질을 반복하며 눈웃음을 주고받았다.

부디 내게서 어떤 죄의식도 티가 나질 않길 바라며, 나는 필사적으로 이여운의 장난에 맞장구를 쳐 주었다. 이렇게 속이고 또 속여서라도 우리 관계를 유지하고 싶었다.

나는… 쓰레기다. 쓰레기 아닌 척하는 쓰레기.

부디 이 밀폐된 차 안에 차오르는 쓰레기 냄새를 아무도 모르기를 바랐다.

***

대학생의 삶은 사실 그리 쉽지 않았다. 고등학교 때까지만 열심히 공부해라, 대학에 들어가면 망나니처럼 놀아도 된다? 그건 인생 포기한 놈들의 이야기다. 취업의 문턱이 터무니없이 높아진 지금 두근두근 캠퍼스 라이프의 실상은 스펙 쌓기의 늪이었고 학점 역시 스펙의 중요한 한 부분일지니.

벚꽃놀이? 응, 1학기 중간고사.

단풍놀이? 응, 2학기 중간고사.

그런 고로 4월 중순에 접어들자 본격 시험 준비로 바빠지고야 말았다.

사실 예과 2학년인 나에게는 조금 여유가 있었다. 의대의 특성상 수강해야 하는 전공과목이 많기는 했지만 솔직히 예과 성적은 유급만 면하는 정도로 충분했다. 2년 동안 몇 학점쯤 교양과목을 이수해야 했는데 의예과 학생들이 교양과목에서 바닥을 깔아 주는 것은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숭고한 희생이었다. 향후 전문의 지원이나 취업 등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 예과 성적을 위해 타과생에게서 A학점을 빼앗는 것은 잔인하다 못해 비도덕적인 짓 아니겠는가.

그리고 어차피 내년부터 전공필수 과목도 엄청나게 늘어나고 수업시수도 많으며 중간고사와 기말고사로 부족해서 매주 시험을 미친 듯이 봐야 하는 의대생에게 예과 2년은 성적 걱정 없이 마음껏 놀아야 하는 기간이었다.

하지만 상경대를 다니는 이여운에게는 해당사항 없는 소리.

이여운은 엄청나게 바빠졌다. 대체로 대학교 교수라는 인종은 고작 고졸에 불과한 대학생 나부랭이에게 자비가 없었다. 말도 안 되는 분량에서 시험 출제를 예고하는 것도 모자라 시험 직전까지 과제를 제출하도록 일정을 짜 버렸다. 학생들이 자기 강의 하나만 듣는 줄 아는 행태였는데, 대다수의 교수들이 같은 일정으로 시험과 과제를 몰아친다는 게 대학생의 비극이었다.

개인 과제, 조별 과제, 발표, 시험공부, 여기에 학회 활동까지. 2학년 때부터 취업 준비를 해야 한다며 몇몇 학회에 가입했던 이여운은 삼중고, 사중고에 시달리고 있었다.

연락도 뜸해져서 밤에 잠깐 통화를 하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였다. 언감생심 데이트는 바랄 수도 없어서 점심시간만 겨우 맞춰서 학교 구내식당에서 학식을 먹고 헤어졌다. 카페나 도서관에서 함께 공부를 하는 로망은… 과거 1학년 중간고사 때 시도했다가 바로 접었다. 자리 잡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다.

그래서 각각 녀석은 상경대 건물 열람실에서, 나는 의대 건물 열람실에서 공부를 하곤 했다.

시험 기간은 힘들다. 자주 만나지 못하는 것은 괴롭기 짝이 없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솔직히 예외였다. 시험 기간을 두고 이따위 소리를 하고 싶지 않지만 나로서는 몹시 다행이었다.

죄책감과 양심통이 무뎌지기에 충분한 시간을 확보할 수 있었으므로.

이럴 때 할 수 있는 말인지 모르겠지만… 시간이 약이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그것은 명언 중의 명언이었다.

미안한 마음은 여전했지만 죄책감의 크기만큼 애정이 부피를 키웠다.

나는 가끔 늦은 밤에도 공부를 하느라 학교를 떠나지 못하고 있는 여운이를 위해 간식과 카페인 음료를 상경대 건물까지 가져다주곤 했다. 여운이는 지친 와중에도 감동한 기색이었다. 나를 챙겨 주지 못해 미안해하기에 그럴 필요 없다고 하곤 녀석을 꼭 안아 주기도 했다. 담백하기만 한 포옹에 녀석이 더 미안해하는 느낌이었지만. 진짜로, 정말로 미안해할 필요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더더욱 애틋해졌다.

어쨌거나 2학년 1학기 중간고사는 그렇게 지나갔다.

그리고 나는

이청영 교수와 다시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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