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사건의 발단은 다음과 같았다.
우리 학교 의대는 예과 1학년을 대상으로 의대 소속의 기초 혹은 임상 교수 한 명과 학생 5-6명을 매치시켜 조를 짜 준다. 보통은 일주일에 하루 전공과목이 몰빵된 지옥 같은 날 점심시간에 자비 없이 이 시간이 들어가 있는데, 의식 있는 교수님들은 보통 개강 첫 주에 점심 한 번 먹고 이후에는 학생들을 소집하지 않았다. 가끔 모일 일이라면 교수님이 심심할 때 술이나 먹는 정도?
하지만 몇몇 악명 높은 교수놈… 아니 교수님들은 김밥을 던져 주고 논문 읽고 발제 따위를 시키곤 했다. 구구절절하게 설명한 것은 내가 운이 없는 케이스였기 때문이다.
꼬장꼬장하기로 소문난 병리학 교수님이 내 담임교수였다. 대학에 와서도 담임이 있다는 것도 놀라운데 내가 최악의 뽑기를 했다는 사실을 알고 기절할 뻔했다.
과대 박의찬과는 이때 강제로 친해졌었다. 녀석도 나와 같이 운수 없는 처지였던 것이었다. 덕분에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의학용어도 제대로 못 읽는 고졸 나부랭이들은 매주 영어로 쓰인 의학 논문을 읽느라 피를 토해야 했다.
아무튼 그렇게 1년간 개고생을 한 뒤 나는 두 번 다시 병리학 교수님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 스승의 그림자를 밟기는커녕 감히 그림자조차 보고 싶지 않은 참된 제자였으므로.
그런데 우리 감투 마니아는 역시 남다른 놈이었다. 모든 교수님과 라포*를 쌓던 녀석은 병리학 교수님과도 친하게 지냈다. 그리고 중간고사의 마지막 전공시험이 끝난 그 날 나에게 말했다.
‘병리학 교수님이 밥 한번 먹자고 하시더라.’
물론 나는 거부하고 싶었지만 이미 약속 장소와 시간이 다 정해져 있었다. 예과 2학년 학생의 스케줄을 모조리 파악한 교수님의 간악한 흉계였다. 빠져나갈 구석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정해진 시간에 약속 장소로 향했다.
그런데 교수님들이 애용한다는 고오급 한정식집 룸에 들어갔을 때 방은 비어 있었다. 박의찬에게 왜 안 오냐고 메시지를 보냈는데…….
「미안합니다.」
이해할 수 없는 답장이 왔다.
「나는 안 가…… 데헷.」
…씨발. 무지성으로 욕설이 쏟아졌다. 이건 대체 뭐 하는 새끼지. 나는 당연히 박의찬도 같이 가는 줄 알았다고. 데헷? 데헤엣?? 이 썩을놈에게 욕 한마디 안 박고는 못 참겠다. 그런데 막 메시지를 쓰고 있던 차에.
창호지를 바른 전통 방식의 미닫이문이 드르륵 열리고 교수님이 모습을 드러냈다.
메시지를 쓰다 만 핸드폰을 급히 내려놓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아무것도 마시고 있지 않았음에도 제대로 사레가 들려 버리고 말았다.
“크헉! 쿨럭, 쿨럭!”
병리학 교수의 뒤에… ‘그 남자’가 따라 들어오고 있었으므로.
“어, 재희 학생. 괜찮아?”
“커흑, 예, 옙. 죄송합니다, 갑자기, 사레가.”
기침을 수습하며 나는 입가를 훔쳤다. 사실은 입이 아니라 눈을 비비고 싶었다. 이거 현실이야? 지금 저 늙다리 교수를 뒤따라 룸으로 들어서다 말고 멈칫한 남자, 저 사람 진짜냐고. 누가 CG라고 해주세요.
“아이고, 잘 지냈어? 앉아요, 앉아. 앉아서 인사들 나누자고.”
병리학 교수, 김철웅 교수는 허허롭게 웃는 얼굴로 자리에 앉았다. 저 꼬장꼬장한 인간이 저렇게 인자하게 웃는 얼굴을 처음 봤다. 그때 나는 직감했다. 뭔가 좆됐다는 것을.
주춤거리며 들어와서 김철웅 교수의 옆자리에 앉는 남자는 분명 그 남자였다. 그 오메가, 이청영.
지진이라도 난 듯이 흔들리는 동공을 보고 절망감이 밀려들었다. 저 인간도 내가 누군지 아는 것이다.
김철웅 교수가 종업원을 불러 음식을 주문하는 동안 나는 물을 마셨고 이청영 교수도 고개를 비낀 채 물을 마셨다. 그 짧은 순간이 멘탈을 회복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었다.
“자, 자. 소개를 먼저 할까? 전에 특강 들었지? 이쪽은 이청영 교수라네. 이번에 이형질의학과 임상 조교수로 부임했고 다음 학기에 정식으로 조교수로 채용될 예정이야. 이 교수, 이쪽은 예과 2학년 임재희 학생. 아주 명석한 학생일세.”
“…반가워요. 이청영입니다.”
“임재희입니다.”
신음이 뒤섞여 흐느끼듯 내뱉던 목소리와 지금의 목소리는 사뭇 상이했다. 오히려 조금 허스키하고 차가운 음색이었다.
인상도 침대 위에서의 모습과는 제법 차이가 있었다. 눈물까지 매단 채 입술을 깨물던 홍조 띤 얼굴과는 달리 그는 우윳빛이라고 할 정도로 피부가 희었고 눈매가 조금 날카로웠다. 조각상처럼 단정하고 아름다운 얼굴은 이지적인 분위기를 풍겼지만 이렇다 할 표정을 짓지 않고 있기 때문인지 냉소적인 느낌이기도 했다.
“이 교수도 본교 졸업생이야. 나한테는 제자기도 하고 재희 학생에게는 선배인 셈이지.”
“저야 졸업한 지가 언제인데요.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데 선배라고 하기엔.”
“에이, 이 사람아. 그래도 동문이 어디 가나? 그리고 이제는 엄연히 교수 아닌가. 재희 학생한테 말 편히 해. 그래도 되지?”
쿨럭… 인사를 받았을 때 내가 먼저 말씀 편하게 하십시오라고 했어야 했나 보다.
“예, 교수님. 말씀 편하게 해 주세요.”
“음, 그래요. 차차 그렇게 할게.”
…차차 그렇게 하신다는 것치고는 이미 반말이 나오시는 것 같은데요.
하지만 까마득한 고학번 선배님이자 하늘 같은 교수님께 태클을 걸 용기가 나란 쫄보 알파에겐 당연히 없었다. 반말을 하든 존댓말을 하든 상관없고 말이다.
“하하, 내 애제자 둘을 모아 놓고 보니 참 흐뭇하구만.”
저기요 교수님. 제가 발제를 할 때마다 저라는 존재를 영혼까지 갈기갈기 찢어 넝마를 만드셨던 분께서 저더러 애제자라니요. 명퇴할 때가 다가오니 이 양반이 치매가 오셨나.
이쯤 되니 정말로 내가 왜 이 자리에 앉아서 이청영 교수를 개인적으로 소개받고 있는지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알파 오메가 소개팅을 주선하는 것도 아닐 테고 대체 왜??
하지만 내가 끼어들 틈이 없이 두 교수의 소소한 신변잡기-주로 병리학 교수님의 자기자랑-가 이어진 탓에 나는 닥치고 밥을 처먹기만 했다. 음식은 아주 맛이 좋았다. 목이 막혀서 제대로 넘어가질 않아서 그렇지.
힐끔힐끔 내 대각선 맞은편에 앉은 이청영 교수를 보니 그도 밥이 잘 넘어가지 않는지 밥알을 세듯이 깨작대고 있었다.
흠, 저 사람은 좀 잘 먹어야 하지 않나. 복부 피하지방이 거의 없다시피 해서 박을 때마다 뱃가죽이 통통- 안 돼, 기억 회로 멈춰!!
가시방석에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는지 콧구멍으로 넘어가는지 모를 시간이 영겁처럼 흐른 뒤. 김철웅 교수가 밥 한 공기를 다 비운 것을 보고 나는 눈치껏 수저를 내려놓고 물로 입가심을 했다. 이청영 교수는 영 입맛이 없는지 이미 식사를 마친 뒤였다. 절반도 안 먹은 밥공기가 다소 보기 불편했다.
“음, 재희 학생. 의찬이한테 얘기는 들었지?”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냥 식사 자리라고만 들었습니다.”
“그랬어? 하긴 내가 그 녀석한테 제대로 설명하지 않았던 것 같군.”
박의찬이 김 교수한테 잘 보이긴 한 모양이다. 저 꼬장꼬장한 인간이 실드를 쳐 주는 걸 보면 말이다. 그리고 슬슬 어떤 불안감이 밀물처럼 밀려들기 시작했다.
“자네 학부 연구생 해 보는 건 어떤가?”
“…학부 연구생이요?”
“올 한 해만 고생해 주게. 여기 이 교수가 일이 너무 바빠서 말이야, 하하.”
이게 무슨 개 풀 뜯어먹는 소리란 말인가.
학부 연구생? 대학원 진학 전 미리 찍먹해 보는 랩실 노예 그거? 기초의학 교수님들이나 모집하던데 그 시기도 이미 지나지 않았나? 아니, 애당초 이청영 교수는 임상의학 교수면서? 병원 교수님들은 만능 노예 수련의로 연구고 나발이고 전부 해결하고 있는 거 아니었어??
내 머리는 이해를 거부했다.
나같이 명석한 두뇌를 지닌 알파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현 사태에도 아랑곳 않고 김철웅 교수가 말을 이었다.
“내년에 이형질의학과 수련의 뽑기 전까지만 하면 되는 일일세. 결과가 빨리 나온다면 9월까지만으로도 충분하다고 했지?”
“네.”
“그래도 연구생 장학금은 2학기까지 다 나올 걸세. 나중에 수련의 지원할 때 어마어마한 플러스 요인이 될 거고.”
“교수님, 저는… 이형질의학과 전공은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인턴이 되어야 전공도 고려해 볼 수 있는 거 아닌가?”
일단 인턴부터 되어 보시지? 뼈 아픈 소리가 내 명치를 꿰뚫고 지나갔다.
이 나라의 5대 병원 중 하나가 우리 의과대학의 교육협력병원인 선오병원인 만큼 인턴으로 들어가는 것부터가 힘든 일이긴 했다. 본과 학점과 국가고시 점수를 모두 높게 받아야 했고 면접과 기타 활동 점수도 반영되므로 학부 시절 병원 교수님의 연구생이 된다는 건 김 교수의 말대로 엄청난 이득이긴 했다.
다만 문제는…
문제는…….
그 병원 교수님이…….
“교수님. 너무 갑작스러워서 학생이 고민할 시간이 필요한가 보네요. 조만간 제가 따로 연락해서 자세한 얘기 전달하도록 하겠습니다.”
“응? 이게 뭐 고민씩이나 할 일이야? 무조건 해야지. 우리 이 교수는 학부 시절 물불 안 가리지 않았나? 이 교수한테 눈도장 찍었던 교수들이 한둘이었어? 그 결과를 지금 딱 봐. 얼마나 위풍당당하게 자교 교수로 금의환향했느냐 이 말이야.”
“저 때와 지금은 또 상황이 다르니까요. 학생들 생각도 다를 거고. 여기까지 도와주신 것만으로도 정말 감사합니다, 교수님. 연구생으로 들어오면 해야 할 일도 제대로 설명해 줘야 할 테니 다음에 제가 사무실로 한번 부르겠습니다.”
“흠……. 그래요, 이 교수 생각이 그렇다면야. 근데 이러다가 차일피일 미뤄지면 이 교수가 너무 힘들어질 거라고. 내 생각에 이보다 적임자도 없을 것 같은데…….”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교수님. 실례지만 제가 곧 진료 시작이라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아,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됐나? 그럼 일어나야지. 에잉, 온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진료시간을 그렇게 떠넘겨. 내가 조 교수한테 한마디 해 줄까?”
“아닙니다. 당연히 제가 해야 할 일인데요. 이만 일어나시죠.”
이청영 교수는 저 꼬장꼬장한 노인네를 스무스하게 물리쳤고 마침내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김철웅 교수가 친한 척 아끼는 척을 하는 것치곤 이청영 교수의 응대는 그저 적당한 느낌이었다. 적당히 부드럽고 적당히 냉정하달까.
식당에서 나온 우리는 그대로 헤어졌다.
…라는 결말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자네는 학교로 가지?”
진료가 있다는 이 교수는 병원으로 향했고 김 교수의 행선지는 학교였다. 나? 나는 그대로 버스 타고 집에 가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여기서 과연 저는 집에 가겠다고 말을 할 정도로 내가 강인한가?
대답은 아니오였다. 김 교수 저 사람, 누가 봐도 할 말 있어 보이는 얼굴이잖아.
“…예, 교수님. 학교로 갑니다.”
내 입은 울며 겨자 먹기로 저따위 소리를 할 수밖엔 없었다. 얻어먹은 점심이 얹히는 기분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 교수와 헤어져 학교로 가던 도중 김 교수가 내게 말했다.
“내 사무실로 가서 대화 좀 더 하고 가지.”
아까 그냥 집으로 가겠다고 까 버리는 게 역시 정답이었을 것 같은데. 다시 말하지만 이 시대를 살아가는 참된 알파, 유교보이는 노인공경에 거스를 수가 없어 버려……. 도살장으로 제발로 걸어가는 기분으로 나는 그의 뒤를 따를 수밖엔 없었다.
S대는 한 손에 꼽히는 명문 사립대였고 졸업생 중 대단한 인물이 많은 만큼 학교는 많은 지원을 받고 있었다. 덕분에 대다수 학부의 건물이 신축이거나 리모델링을 했기에 학교 전경은 꽤나 볼만하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물론 썩은 건물은 있기 마련이었는데 대표적인 건물이 바로 의학과 건물이었다.
부속 병원이 5대 병원 중 하나로 꼽힐 정도로 권위가 있고 유명하고 규모가 큰데 의학과 건물은 왜 다 썩어 가냐고? 왜냐하면 선오병원은 엄밀히 말해 부속 병원이 아니라 교육협력병원이기 때문이었다. 부속 병원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지방 소재의 병원이었고 규모가 그리 크지도 않았다.
솔직히 교육협력병원이 선오병원인 것은 감지덕지해야 할 일이었다. 본과 때부터 모든 교육과 임상 실습이 선오병원에서 이뤄지는 만큼, 병원 부지 내에 본과생을 위한 건물이 따로 있었다. 그 시설이 그 어떤 대학 건물보다 호화로운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러니 학교에 남아 있는 것은 예과 1, 2학년과 기초의학 교수님 정도? 여기에 국가고시를 준비하기 위해 2학기에만 출몰하는 본과 4학년이 전부였다. 고작 이것밖엔 안 되는 인원이 건물 하나를 통으로 사용하는 것도 특별대우라면 특별대우긴 했지만 의학관 건물이 낡은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몇 년 전에 대대적으로 리모델링을 해서 내부 시설은 깔끔하다는 것. 이것은 김철웅 교수가 의과대 학장을 지내던 당시의 업적이었다. 덕분에 예과생들이 쾌적한 공간에서 공부하게 되었으니 가히 의예과의 아버지라고 할 만했다. 사실 담당하는 학생들에게 매번 논문 발제를 시키는 것도 보통 열정으로는 하지 못할 일이긴 하다. 누구보다 의학과를 사랑하고 학생들을 위해 애를 쓰는 분인 건 확실했다. 다만 그게 너무… 가혹해서… 문제…….
“항주에서 온 서호 용정차라네. 한 잔 들게나.”
그리고 나는 그 대단한 교수님께서 손수 우려낸 찻물을 대접받고 있었다. 황송해서 가볍게 죽어 버릴 것 같다. 승천해서 빨리 본과생이 되고 싶다.
아니 제기랄, 병원에는 이청영 교수가 있잖아?
“흠, 그래, 재희 학생.”
김철웅 교수는 차 한 모금 마시라고 하더니 차를 절반 정도 마신 뒤에야 말을 꺼냈다. 벌써 미치겠다. 나는 지금 왜 이곳에 와 있는가.
결론은 정해져 있다. 연구생은 못 한다.
이유도 명확하다. 이청영 교수랑 섹스했다.
그런데 제길, 문제는 이 명확한 이유를 내 입이 찢어져도 발설할 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내가 연구생 거절을 이 교수가 아닌 김 교수 앞에서 해야 하는 것도 이상해! 잘못되었다고!
“학부 연구생을 못 할 이유라도 있나?”
예. 있습니다.
근데 말을 할 수가 없어요.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일이라서요. 그, 제가 개인적으로 이번 학기에 세워 놓은 계획도 있는데 연구생을 할 여력이…….”
“청영이, 이 교수는 그렇게 무리한 걸 학부생에게 요구할 사람이 아닐세. 다만 그 친구가 너무 급히 오느라 자리가 애매해서 그래. 방 뺄 사람이 아직 방을 안 빼서 이 교수 사무실이 본교 의학과 건물로 정해졌어. 이게 말이 되나? 진료도 보고 강의도 해야 하는 사람이 어떻게 여기까지 오냐고.”
뭐……. 나는 여기서 뭔가 대단히 복잡한 어른들의 사정이 얽혀 있음을 직감했다. 궁금하긴 한데 굳이 알고 싶지는 않았다. 내가 이런 걸 알아서 뭘 하겠어? 감히 고졸 나부랭이가 전문의와 박사를 모두 마친 하늘 같은 교수님께 동정심을 품기라도 하겠냐고.
“지금 이형질의학과 수련의는 전부 조 교수가 꽉 잡고 있어. 여기서 이 교수가 수련의들을 좀 쓰려고 했다간 그 연약한 친구들 반으로 찢어져 탈주할 거야. 인턴도 아니고 레지던트를 추노하러 가야 하는 다른 레지던트들이 불쌍하지도 않나?”
아니, 저는 일개 고졸이라니까요? 대학 졸업하고 의사 면허까지 따신 분들을 제가 감히 어떻게 불쌍히 여기냐고요.
“이 교수가 책임지는 연구도 아니라 마무리만 하면 될 일이야. 대충 실험 한 번 더 돌리고 결과 자료 넘기면 끝나는 셈이지. 거기까지만 해 주게.”
“…저, 교수님. 외람된 말씀이지만… 그냥 정식으로 학부 연구생을 모집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이렇게 내정되는 형식으로 가면 다른 학생들 사이에서 잡음이 생길 것 같은데요.”
“연구생 모집은 교수 재량인데 잡음이 생길 건 또 뭔가? 그리고 의찬이가 이미 조사를 한 걸로 알고 있는데?”
무슨 조사? 나는 고개를 갸웃했고 설명이 이어졌다.
“아무래도 알파들이 똘똘한 건 사실이지 않나? 연구생은 알파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박의찬 학생한테 학생들 지원을 받아서 괜찮은 후보를 올리라고 했지.”
…뭐라?
“자네가 적임자라고 하던데?”
……박의찬 이… 이 개같은 새끼가……!
나는 그제야 박의찬이 ‘미안하다’고 메시지를 보낸 이유를 알게 되었다.
놈은 나를 이 악마에게 먹잇감으로 내던져 버렸던 것이다.
* 라포(Rapport) : 주로 두 사람 사이의 상호신뢰관계를 나타내는 심리학 용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