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알파의 사정-7화 (7/25)

7.

그러나 내가 아무리 분노로 부들부들 떨고 있다 해도 겉으로는 표시를 낼 수가 없었다. 그러기에는 김철웅 교수가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나를 바라보고 있어서 말이지.

나는 겨우 찻잔을 다시 들어 입을 축이며 생각을 정리했다.

“교수님. 그… 제가 감히 하극상을 꿈꾸는 망종은 아니지만 그, 제가 알파라서 이청영 교수님께서 좀 불편하시지는 않을까요.”

“흠? 과대 말로는 그렇기 때문에 더욱 재희 학생이 적임자라고 하던데?”

…빌어… 먹을……. 이런 날이 올 줄은 몰랐다. 다른 알파들과 달리 지극히 상식적인 마인드로 세상을 살았을 뿐인데 이게 불이익으로 돌아온다고? 아니, 물론 프리패스로 학부 연구생을 하는 건 이득이긴 하지만 상황이 특수하지 않은가.

김철웅 교수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세상이 아직도 이렇게 오메가에게 편견을 가지고 있지. 물론 나도 거기서 자유롭지가 않아. 갑자기 연구생으로 써먹기엔 알파가 좋다는 생각이 들거든.”

저기요. 아무리 학부 연구생이라지만 대학원생도 아닌데 써먹는다는 표현은 너무 노골적인데요.

“하지만 이 교수는 학부 시절부터 난 놈이었어. 불과 10여 년 전이지만 그때는 지금보다 더 오메가 학생 수가 적을 때였네. 보는 시선이 그리 곱지도 않았는데 아무도 무시를 못 했지. 학부 성적도 그렇거니와 국시 전국 1등을 누가 무시하겠나.”

…미친. 그 사람은 괴물인가. 공공장소에서 히트가 와 버린 칠렐레팔렐레한 사람의 업적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그 젊은 나이에 페로몬 연구 쪽에서는 따라올 사람이 없을 정도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오메가라는 이유로 평가절하당하고 있단 말이지.”

“…….”

“오메가나 베타를 연구생으로 들여도 되겠지. 하지만 말일세. 이 교수한테는 알파도 손쉽게 부린다는 증명이 필요해. 이 나이에 교수님으로 모셔올 정도인데도 여전히 증명을 해야 한단 말일세.”

…그가 오메가이기 때문에.

생각해보면 입맛이 쓴 이야기였다. 지금 교수님들 중 오메가 교수님은 한 손에 꼽을 정도였다. 특히나 병원에서 진료를 보는 교수님은 내가 알기로 없었다.

“자네가 정말로 할 수가 없다면 어쩔 수 없지. 강요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예, 저는 정말로 못 해요. 하지만 차마 그걸 입 밖으로 낼 수는 없었다.

“대신 다른 적임자를 찾아 보게. 웬만하면 알파로 구해서 이 교수에게 연락하게나.”

……다른 알파라. 그가 ‘오메가’인 것에 흥미를 드러내지 않을 만한 놈이 있던가. 교수님의 권위가 있으니 그를 우습게 보고 하극상을 벌이지 않을 정도의 정신머리는 대부분 박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를 흘긋거릴 것이다. 그에게서 혹시라도 야릇한 페로몬이 흘러나오지는 않을지 개새끼처럼 킁킁대며 온갖 촉각을 곤두세우겠지. 그리고 그것은 몹시도 불쾌한 짓거리였다.

“뭐, 앞으로 내 강의에서도 학점을 기대해 볼 법할 테지만 자네가 하기 힘든 상황이라니 안타깝구만.”

예…? 뭐, 뭐라고요. 유급을 신나게 때리는 것으로 유명한 분의 입에서 나온 한마디에 내 눈은 동공지진을 일으켰다. 김철웅 교수는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려 비릿하게 웃었다.

“일단 이 교수한테 연구생으로 해야 하는 일이 어떤 건지 들어 보긴 하게나. 그게 예의 아니겠어?”

그렇게 말하며 김철웅 교수는 나에게 이청영 교수의 전화번호를 적어 주었다.

어쩐지 하늘이 노랗게 뜨는 기분이었다.

의학관 바깥으로 나오자마자 나는 박의찬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받자마자 개쌍욕을 퍼부었다.

녀석은 석고대죄를 하겠다며 빌고 만나서 또 빌겠다며 술을 마시자고 했다. 나는 개같이 열받았기 때문에 그 요청을 수락했다. 오냐, 오늘 네놈은 병풍 뒤에서 술잔을 받게 될 것이다.

박의찬과의 전화를 끊고 나서는 바로 여운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교수님 잘 만났어?

“응… 근데 여운아, 오늘 못 만날 것 같아.”

-헐?

아, 반응이 좋지 않았다. 원래도 바로 데이트를 하려다가 교수님과 식사 자리를 피하지 못해 데이트를 미룬 상황이었다. 녀석은 점심은 대충 알아서 먹겠다고 하고 나를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다.

그간 시험 때문에 제대로 만나지도 못했다. 중간중간 꽤나 쌓여 버렸다는 소리를 하던 녀석이었다. 오늘의 데이트를 얼마나 기대했겠는가?

물론 내가 부정을 저질렀다는 죄책감 때문에 녀석과 섹스를 하는 게 뭐랄까, 조금 무섭기는 했다. 내 몸… 더럽혀졌어……. 그런데 이런 더러운 몸뚱이로 여운이를 안는 게 너무나 죄스럽게 느껴졌다. 이청영 교수와의 사고 이후 시일이 한참 지났으니 뭔가 다른 느낌이 날 리는 없었지만 녀석과 노골적인 스킨십을 했다간 내가 어색하고 이상한 반응을 할 것만 같았다. 그러다 다른 사람과 잤던 걸 들킬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내 아랫도리를 힘없게 만들었다.

사실 시험 기간에도 하려고만 했다면 어떻게든 시간을 내서 한 번은 했을 테지만, 그런 불안과 두려움 때문에 나는 감히 여운이에게 손을 댈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도 입으로는 여운이 네 컨디션을 위해서라는 말 따위를 해 댔지. 죽어라, 임재희. 역시 너는 쓰레기야.

-아, 뭐야……. 교수님이 안 놔줘? 무슨 일인데?

“…어어. 병리학 교수님 때문에 내가 작년에 고생을 좀 했잖아.”

-어.

“그분이 또 나한테 일을 하나 맡기려고 하는데… 잘못하면 그걸 진짜로 하게 될 것 같아서, 대타를 좀 구해야 하거든. 그래서 일단 과대랑 만나기로 했어.”

-미친, 작년에 그 논문 발제 같은 거 또 하래?

연인인 이여운은 내가 일주일에 한 번이던 논문 발제 시간에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알고 있었다. 데이트에도 지장이 생길 때가 있어서 녀석도 짜증을 많이 냈었다. 그런데 시험 다 끝난 지금, 또 병리학 교수가 우리의 데이트에 등판했으니 열받는 게 당연할 것이다.

“아니. 논문 발제도 아니고… 학부 연구생 하래.”

-…미친 거 아니냐? 이번 학기?

“다음 학기까지.”

-하지 마, 그거.

“나도 안 하고 싶어.”

-내년에 너 본과 올라가면 어차피 바빠지잖아. 마음껏 데이트 할 수 있는 건 올해뿐인데 연구생을 왜 해? 그거 하면 방학 때도 학교 가야 할걸? 하지 마.

“응응. 안 할 거야. 꼭 거절할게.”

-하……. 알았어. 그럼 오늘 아예 못 봐?

“어, 술 마실 것 같은데……. 언제 끝날지 모르겠어.”

-알겠다, 그럼. 나 그냥 집에 들어갈게.

“미안해. 혹시 끝나면 너희 동네로 갈까?”

-시간 봐서. 연락해.

“응. 진짜 미안해.”

시험 끝나자마자 이게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여운이는 오늘을 엄청나게 기대하고 있었을 텐데 다 망했다. 주말에는 여운이가 집에 일이 있어서 만나지 못하는 날이라 나도 속이 상했다. 다음 주 주말에 함께 여행을 가면 좋을 것 같아서 오늘 만나서 여행 일정을 세우려고 했는데.

이게 다 나를 추천했다는 박의찬 새끼의 잘못이다. 오늘 이 새끼를 족치고 녀석이 산다는 술을 향 앞에 세 번 휘휘 돌리고 녀석의 영정 사진 앞에 바칠 것이다.

아직 술을 마시기엔 해가 높이 떠 있는 대낮이었지만 나는 녀석을 만나러 술집으로 향했다. 이 새끼는 시간도 있는 놈이 점심에 나 혼자 교수들을 만나러 가게 했다는 점에서 괘씸죄가 추가였다. 모가지를 똑 따 버려도 정당방위다.

하지만 물론 당연히 박의찬을 죽이지는 못했다. 살인은 중범죄니까. 박의찬은 내 앞에서 거의 석고대죄를 하듯이 빌었다.

“미안하다. 응? 근데 진짜 너만 한 사람이 없더라고. 미안해.”

정말로 미안한 것인지 먼저 도착한 녀석이 테이블 위에 세팅해 둔 것은 양주였다. 어쩐지 비싼 가게로 부른다 했더니 녀석 나름대로는 미안함의 표시인 모양이었다. 최소한의 양심은 있는 새끼.

“하, 대체 어떻게 된 일인데? 김 교수님은 네가 알파들한테 한 번씩 물어보고 날 추천했다는 식으로 말하던데. 나는 금시초문이거든?”

“그 왜, 이청영 교수님 특강 들었던 날 있잖냐.”

그건 중간고사 전의 일이었다. 두 번 다신 만날 일 없을 것 같던 오메가를 만났는데 그게 우리 학교 교수님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어 내가 패닉에 빠졌었던 날 말이다. 그때 철렁했던 기억이 아직도 뇌리에 선명했다.

“그날 알파들 다 모아 놓고 물어봤거든. 근데 너는 바쁘다며 가 버렸잖아.”

뭐…….

“하겠다는 놈이 없더라고.”

“그렇다고 그 자리에 없던 나한테 한 마디 설명도 없이 떠넘긴다고? 내가 그렇게 만만하냐?”

“야, 야. 만만한 건 아니지. 좀 진정해라. 씨발놈, 페로몬 한번 살벌하네.”

흥분한 탓에 몸에서 훅 페로몬이 흘러나오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페로몬은 의사소통에 사용되는 화학물질이다. 상대의 성적인 흥분을 유발하는 성페로몬만 아니라 감정에 따라 분출되는 페로몬은 천차만별. 분노한 내가 발산하는 페로몬은 상대를 압박하는 종류였고 박의찬의 얼굴은 형편없이 일그러졌다. 아마 녀석은 내 감정에 맞서는 페로몬의 분출을 애써 참고 있을 것이다. 이걸 못 참고 폭발시키면 싸움 난다.

상대의 페로몬에 반발하고 저항하고 싶은 것은 알파의 본능. 마음 같아서는 녀석을 곤죽이 되도록 두들겨 패고 무릎 꿇리고 싶었지만 나는 애써 참아 내며 숨을 골랐다. 알파건 알파 할애비건 이 문명사회에서는 선빵 날린 놈이 불리하니까.

“너도 알잖아. 너만 한 사람이 없다는 거.”

“그러니까 내가 왜.”

“물론 하겠다는 놈도 있기야 하지. 오메가가 발정 나서 섹스를 하면 합의잖아? 따위의 말을 하는 놈이라 그렇지.”

“…….”

“전에 그 레포트 제언 기억나냐? 알파들만 모아 놓고 페로몬이 서로의 러트에 영향을 미치는지 연구하자는 제언. 그 리포트 쓰고 실제로 실험을 성사시킬 뻔했던 게 학부 시절 이청영 교수래.”

뭐…….

“그런 오메가 교수님이랑 알파 연구생? 너 사고 나는 거 보고 싶냐? 나는 내 동기 중에 불미스러운 일 일어나는 꼴 보기 싫거든.”

“미친놈아, 네가 추천한 놈이 사고 쳤다고 얽힐까 봐 무서운 거겠지.”

“물론 그런 이유도 없진 않지.”

“김 교수한테 받아 처먹은 것도 없지 않지?”

“그러는 너한테는 별말씀 없으셨냐? 시험지에 똥을 싸도 유급은 안 때리실걸?”

“그렇게 좋은 기회면 네놈이 하라고. 너, 네가 하라고!”

“나도 그렇게 하고 싶지만 친구, 난 이미 다른 연구실 노예라네.”

“…….”

저 새끼는 신분제 사회에서 태어났으면 노예장이 되어 만백성을 노예로 만들었을 새끼다. 동기사랑 나라사랑 아주 잘 알겠고요. 평소 자신을 독재자라고 불러 달라더니 나라는 희생양을 만드는 솜씨가 아주 훌륭했다.

“그리고 내 생각에 너한테도 도움이 될 것 같아. 이력이나 학점 같은 거랑은 별개로 말야.”

“뭔 소리냐.”

“…솔직히 너, 오메가 기피증 같은 거 있는 거 같거든.”

이건 또 무슨 개소리야.

내가 미간을 찡그리자 녀석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동기나 선후배 오메가한테 아무 관심도 없는 건 뭐, 애인 있으니까 그렇다 치겠는데. 그것도 다른 놈들은 이상하게 여기긴 하지만. 아무튼 그건 그렇다 쳐. 근데 너 이청영 교수님 특강 때는 아예 고개도 안 들더라?”

아니, 그건……. 그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단 말이다.

그리고 교수 상대로 사고를 칠까 봐 다른 놈들은 안 된다고? 개새끼야, 나는 이미 사고를 친 놈이라고! 이미 저질렀다고!

하지만 내 안의 절규는 물론 놈에게 들릴 리가 없었다. 들려서도 안 되는 소리였지만.

“주변에 오메가는 있냐?”

“아버지가 오메가인데 없겠냐?”

“부모님 말고. 부모 성페로몬은 못 맡잖아.”

“아니 오메가가 뭐 숨어서 사는 것도 아닌데 다른 오메가를 한 번도 못 만났겠어? 어차피 억제제 먹어서 베타나 다름없는데 오메가를 뭘 기피하고 말고 하냐고.”

내 자랑이지만 중학교 때, 고등학교 때 베타는 물론 오메가한테도 고백을 받아 봤다. 내 스타일이 아니라 거절했을 뿐.

“…뭐, 억제제를 먹어도 알파는 알파고 오메가는 오메가… 라는 것도 오메가랑 가까이 있어 봐야 알게 되는 일이지. 언젠가는 그걸 깨달아야 하는데 네가 애인 두고 다른 오메가랑 붙어 있을 리는 없으니 차라리 이번 기회가 나아 보인다고.”

아니 그러니까… 이미 붙어먹은 오메가라고…….

“그럼 왜 특강 때 교수님 얼굴을 쳐다보지도 못했냐?”

이미 붙어먹은 오메가라서…….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어서 나는 되는 대로 변명을 주워섬겼다.

“그냥 머리가 좀 아팠어. 애인 때문에 생각할 것도 좀 있었고.”

“그래? 하긴 뭐 처음 본 교수님이랑 무슨 일이 있었을 리도 없을 테고…….”

이건 떠보는 소리인가?

나는 여느 때보다 표정 관리에 힘쓰며 한숨을 내쉬었다. 알고 싶지 않았지만 오메가는 알 만큼 알아버리게 되었다. 내가 가진 알파로서의 본능에 저항하지 못한다는 거지 같은 현실도 아주 잘 배웠다고.

“흠, 뭐 나로서는 너한테 여러모로 좋은 기회라고 생각을 했던 건데 네가 정히 못하겠다면 별수 없겠지. 나도 일단 다른 놈들한테 더 물어볼게.”

빌어먹을, 다른 놈들이 감히 교수라 해도 뒤 따먹을 생각만 가득하다는 소리를 지껄여 놓고선 이제 와서 저따위 소리를 하는 건 내 연약한 양심을 공격하기 위함이렷다.

“아니면 그냥 오메가나 베타를 연구생으로 뽑으시라고 해야지. 내가 김철웅 교수님께 말씀드릴게. 설마 너한테 독박 쓰게 하겠냐?”

제길……. 뭔지 모를 착잡한 기분으로 입맛이 쓰다. 솔직히 교수가 이청영이 아니었다면 얼씨구나 했을 기회라는 걸 떠올리면 더욱. 그가 오메가라 고작 연구생 하나 뽑는데 이렇게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 같아 더더욱. 혹여라도 다른 알파놈이 연구생이 되어 그의 뒤를 노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더더더욱.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 양반이랑 다시 얽히는 짓을 할 수는-

“이청영 교수님한테는 네가 말씀드려.”

나는 이 교수님 연락처도 몰라서.

그렇게 덧붙이며 생긋 웃는 박의찬 새끼의 죽빵을 한 대만 날리면 내가 소원이 없겠다. 하지만 이 법치국가에서 폭행은 범죄였다. 특히나 언론에서 알파의 폭력성 운운하는 기사가 심심치 않게 나오는 마당에 주먹을 쓸 수야 있겠는가.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건 글라스를 채우고 있는 호박색 액체를 벌컥벌컥 들이켜는 것이었다.

“야, 천천히 마셔라, 천천히.”

“너도 마셔, 개새끼야.”

어디 한 번 통장에 빵꾸 한번 나 봐라. 너의 지갑을 파탄 내는 게 나의 복수다. 일시불 결제를 못 할 만큼 마시고 또 마셔서 할부 결제로 다달이 고통받게 만들어 주지. 너는 오늘 사람, 아니 알파 잘못 건드렸다.

“더치페이…….”

내가 한 병을 다 비우고 다음 것을 더 비싼 양주로 시키자 녀석이 그렇게 중얼거렸지만 내가 눈을 한 번 부라리니 격침당해 쭈그러졌다. 그 뒤에는 될 대로 돼라의 마음이 되었는지 녀석도 정신줄을 놓고 술잔을 꺾었다.

어차피 내일은 토요일. 수업은 당연히 없고 여운이와의 데이트도 없는 토요일이다.

「나 부원이 형이랑 저녁 먹기로 했어. 월요일에 보자.」

중간에 여운이에게서는 그렇게 연락이 왔다. 불행 중 다행으로 그때 이미 나는 꽐라가 되어 도저히 여운이를 만나러 갈 수가 없는 상태였다.

술 마셨더니 여운이 보고 싶다……. 하아, 나도 사실은 꽤나 쌓였다. 그 빌어먹을 오메가와의 섹스가 마지막 섹스였다고. 술이 오르니 성욕도 엉덩이에 뿔 난 망아지처럼 날뛴다. 하지만 눈앞에서 대작을 하고 있는 상대는 성욕의 시옷도 소멸하게 만드는 밥맛없는 알파 새끼뿐.

“흐어어엉, 여운이 보고 싶다고오…!”

“미친놈아 네 애인 보러 가라고! 나도 우리 예쁜이 보러 갈 거라고!”

대낮부터 마시기 시작했지만 우리가 술집에서 나왔을 때는 이미 한밤중이었다. 갈지자로 걷는 주정뱅이놈의 엉덩이를 걷어차 떠나보내고 나 역시 집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버스. 버스 타고 가야지. 학교에서 집까지 가는 버스. 언젠가 내가 발정 난 오메가를 만나 버린 바로 그 버스…….

“흐어어어엉, 여운아아아아!”

-뭐야, 이 새끼. 너 취했어? 뭘 얼마나 마신 거야? 일이 잘 안 풀렸어? 임재희! 어디냐고!

“여운아, 보고 싶어어어…….”

나도 모르게 여운이에게 전화를 걸었는지 나는 버스를 타는 대신 전화기를 붙든 채 비틀거리며 길거리를 걷고 있었다. 핸드폰 너머에서 여운이 목소리가 들려온다. 무어라 화를 내고 있었다.

미안해. 술을 이렇게 많이 마셔서.

미안해. 술 취한 채 전화해서.

미안해. 다른 남자랑 섹스해서.

“여운아, 사랑해…….”

-아, 뭐야. 취한 채로 사랑 타령하지 말라고. 진정성이 없으니까. 어디야? 데리러 갈까?

“집이야……. 사랑해…….”

데리러 오면 좋겠다. 보고 싶다. 진정성이 없다니? 나 지금 너무너무 진심이라고.

하지만 너무 미안해서 무섭고 두렵다. 불안하다. 죄책감에 미쳐 버리겠다는 것 역시 진심 중의 진심.

-진짜로 집이야? 들어간 거 맞아?

“응, 집이야……. 씻고 잘게…….

그래서 겁쟁이 거짓말쟁이는 오늘도 겁에 질려 거짓말을 해 버린다. 큰 거짓말을 한번 하고 나니 두 번째는 더 쉽다. 하지만 취했으니까 한 번만 더 봐줘.

“여운이 사랑해…….”

-하, 미친……. 알았어. 나도 사랑해. 얼른 자.

“응, 사랑해…….”

전화를 끊고도 한참 걸어가다가 나는 택시에 올랐다. 까무룩 잠이 들었다가 기사가 깨워서 일어나서 돈을 내고 내렸다. 비틀비틀 걸어가서 아파트 엘리베이터에 탔다.

술에 취해서일까. 답답해서 울고 싶었다. 눈물 날 것 같다. 섹스하고 싶다. 아니, 미친, 마지막 말은 취소.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내내 술기운에 터져버린 감정의 홍수에 제정신이 아니었다. 동시에 잠이 쏟아졌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현관문 앞에서 잠든 채로 발견되어 엄마한테 등짝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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