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잘하는 짓이다.”
서릿발 같은 시선에 나는 고개를 푹 수그렸다. 숟가락을 바삐 놀려 콩나물국을 흡입했다. 크어억. 건더기 하나 안 먹었는데 속이 울렁거린다.
“대학생 됐다고 아주 막 나간다? 술병이 벼슬이야? 감히 네 아빠한테 술병 수발을 시켜?”
거 콩나물국 하나 끓여 주신 거 가지고 구박이 너무하시네. 나 어릴 때 엄마 때문에 일주일 내내 아침으로 콩나물국만 먹던 기억이 이렇게나 또렷한데.
“애인이랑 불타는 밤을 보내고 올 것처럼 굴더니 꽐라가 돼서 집 앞에서 처자고, 어이구, 누구 새끼인지 참 잘났다, 잘났어.”
“그만해요. 애 체하겠어.”
“저놈 속은 이미 엉망일걸? 아주 죽겠지?”
“역시 경험이 많아서 그런가 잘 아네?”
“……아니, 나야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그럴 수도 있고…….”
역시 아빠가 짱이야. 어딜 가장이랍시고 권위를 내세우시나? 아빠한테 찍소리도 못하면서. 엄마는 조용히 국만 떠 먹었다. 마치 속 타는 사람처럼 말이다.
“재희야, 속 많이 안 좋아? 국물 더 줄까?”
“응, 조금만…….”
“네가 떠다 먹어, 이 자식아. 넌 손이 없어?”
“우욱, 토할 것 같아…….”
“어이구, 자랑이다.”
“애가 속이 많이 안 좋다잖아요. 당신이 떠다 줄 거 아니면 그만해요.”
그 말에 한숨을 푹 내쉬고 엄마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앞에서 국그릇을 휙 빼앗아가더니 국물을 넘치도록 퍼다가 내 앞에 탁 소리가 나도록 내려놓았다. 나를 노려보는 시선에 움찔했는데, 국그릇을 거칠게 내려놨다고 아빠가 째려보자 엄마는 스윽 고개를 돌렸다.
저 양반 성격에 그래도 당신 남편을 위한답시고 많이 참고 있는 중이리라. 내 엄마는 스스로 평하길 ‘오메가 반려자를 아끼고 존중하는 알파’였으니까.
우리 부모님은 알파와 오메가 커플이었다. 엄마가 알파, 아빠가 오메가. 형질 앞에 성별은 무의미한 것이라. 알파인 엄마가 가장으로서 경제적인 부분을 책임졌고 아빠가 나와 동생을 낳고 길렀다. 엄마는 오메가 딸을 간절히 원하셨지만 어림없지. 동생은 엄마를 똑 닮은 알파 여자애였다.
“송희는?”
“학원 갔지.”
토요일에도 학원이라니, 역시 수험생은 불쌍하다. 대학생은 이렇게 술 먹고 술병도 날 수 있는데.
“음, 아들.”
국만 겨우 마시고 애써 정신줄을 붙잡고 있는 나를 보며 아빠가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엄마가 옆에서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것으로 보아 두 분이 뭔가 나에게 하실 말씀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 말씀이란
“…차였니?”
“아니거든요?”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어. 차이다니. 꿈에라도 나올까 두렵다. 부정 탄다고요.
“그럼 뭐 힘든 일 있었어? 어제는 왜 그렇게 술을 많이 마셨어?”
어허, 술병은 대학생의 미덕이거늘 내가 술이 센 덕에 좀처럼 그런 일이 없었다 보니 부모님께 걱정을 끼친 모양이었다.
“아녜요. 그냥 동기놈 털어먹을 생각으로 좀 많이 마셨어요.”
“왜? 그 친구가 너한테 뭐 잘못했어?”
“응, 제가 아주 크게 당했어요.”
나는 간단히 어제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양심도 없는 동기 알파놈에게 배신당해 팔자에도 없는 학부 연구생을 강요당하고 있다는 비사였다.
“그게 왜 하기가 싫은데?”
이야기를 다 듣고 난 뒤 아빠가 물었다. 역시나 내가 진실을 토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
“그냥…….”
“음, 아빠 생각엔 해 보면 굉장히 좋을 것 같은데.”
“엄마 보기에도 그래. 그리고 김철웅 교수님이 따로 전화도 하셨더라.”
“예……?”
아니 그 이름이 지금 왜 엄마 입에서 나와? 엄마가 내 대학 교수를 어떻게 알고?? 언제부터 치과 의사가 의대 교수랑 알고 지냈지? 엄마도 S대를 나오긴 했지만 치대를 다닌 데다 김 교수랑 나이 차이가 열 살 정도 나는데?
“엄마 대학 선배가 김철웅 교수 와이프야.”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누가 뒤통수를 냄비로 후려갈긴 기분이었다. 그 정도로 머리가 띵해졌다. 하도 당황스러워서 콩나물국이 내리눌러 준 술기운이 다시 확 오르는 기분이었다.
어떻게 인연이 이렇게 이어져? 기가 막혔다. 우주의 의지가 나를 이청영 교수의 학부 연구생으로 만들기 위해 작용하고 있나? 두렵다. 아주 끔찍하게 무섭다.
“개인적으로 네가 꼭 좀 맡았으면 좋겠다고 어제 연락하셨더라. 그분이 그럴 분이 아닌데 어지간히 우리 아들이 마음에 드셨나 봐.”
보기 드물게 엄마에게서 우리 아들이라는 단어가 나와서 더욱 소름이 끼쳤다.
“…친해요? 김 교수님이랑 언제부터 연락하고 지냈는데요?”
“엄마가 몇 년 전에 치대에 강의 나가기도 했었잖아. 그때 겸사겸사 얼굴 보고 그랬지.”
“엄마가 치대에서 강의도 했었어요?”
“넌 에미가 뭘 했는지도 몰라? 어떻게 그렇게 부모한테 관심이 없어?”
와 씨. 소름 돋는다. 내가 작년에 김철웅 교수 때문에 그렇게 힘들다고 했을 때는 말 한마디 않던 사람이 뭐? 관심? 애들 커 갈 땐 소 닭 보듯 하다가 늘그막에 관심 타령하는 못난 중년이 여기 있다. 내 엄마지만 추해.
“내가 듣기엔 대단히 좋은 기회던데 넌 왜 하기가 싫다는 거니? 놀 시간이 부족해서 그래? 그거 하기 싫어서 어제 그렇게 술을 퍼먹은 거야?”
와, 진짜 듣기 싫다. 어떻게 저렇게 질문형인데 전부 잔소리로 들릴 수가 있을까.
나는 그냥 입을 꾹 다물어 버렸다. 여기다 대고 내가 이청영 교수랑 잤다고 말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엄마는 그렇다 쳐도 아빠는 쓰러질 것이었다. 그리고 아빠를 놀라게 했다고 엄마가 내 괜히 나한테 또 화를 내겠지. 그냥 자기가 열 받은 거면서.
“여보, 재희도 계획이 있으니까 저렇게 하기 힘들다 하겠지. 우리 애가 어디 아무 생각 없이 저러겠어요?”
흑흑, 역시 내 편은 아빠뿐이야. 돈만 벌어 오면 다인 줄 알지, 엄마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당신은 가만히 있어요. 이게 지금 오냐오냐할 일이야? 당신이 늘 그렇게 오냐오냐하니까-”
엄마가 톡 쏘아붙였다. 당신은 도대체 자식교육을 어떻게 한 거야? 까지 덧붙였으면 완벽했으련만 엄마는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
그리고 시작된 무거운 침묵.
말을 꺼내지나 말지, 성질을 못 이기고 아빠 탓을 시전한 엄마 때문에 아빠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어져 버렸다. 이제 와서 엄마가 아빠 눈치를 보고 있었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분위기였다.
탁. 아빠는 숟가락을 테이블에 내려놓더니 일어나서 안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순식간에 공기가 얼어붙어 식은땀이 나면서 모골이 송연해졌다.
“……하아.”
엄마는 머리가 아프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 입으로 재앙을 불러왔으면서 내 탓이라는 듯 나를 노려본다.
반발심이 확 치밀어 올랐다.
차라리 사랑꾼인 척을 하질 말든가. 아빠를 위하는 척 대신 국 떠오고 나한테 잔소리를 하면 다인가? 엄마의 저 가부장적이고 권위적인 성격 때문에 아빠도 나도 힘들었던 일들이 많았다. 내가 어릴 때보다는 많이 나아졌다지만 알파랍시고 드러내는 저 고압적인 면모가 나는 치가 떨리게 싫었다. 사랑꾼인 척, 져 주는 척 나름대로 노력을 한다지만 결국 인간은 안 변하는 모양이었다. 알파는 역시 최악이다.
“먹고 들어가라.”
엄마 역시 수저를 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빠를 뒤따라 안방으로 들어가는데 다행히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갑자기 어린 날의 기억이 떠오른다. 엄마가 또 아빠를 속상하게 만들어서 아빠가 문을 잠그고 방에 틀어박히자 내 집에서 내가 안방에 못 들어가는 게 말이 되느냐고, 어디서 문을 잠그냐고 버럭버럭 화를 내며 의자로 문을 부수던 엄마의 모습이……. 그렇다고 아빠나 우리 남매를 폭행한 적은 없었지만 문을 때려 부수고 위압적으로 소리를 지르던 모습은 충분히 폭력적이었다.
그때 그냥 갈라섰어야 했는데 아빠는 엄마를 용서했다. 어린 자식들을 두고 이혼을 할 수는 없었던 것인지, 엄마를 사랑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머리가 아프다. 속도 울렁울렁 아주 죽겠다. 하지만 누군가는 뒷정리를 해야 했다. 그래도 많이 변하려 노력하는 엄마가 주말이면 설거지를 도맡아 했지만 두 분이 모두 안방에 들어가 버린 이상 나 아니면 할 사람이 없었다.
술병 난 것도 괴로운데 그 상태로 상을 치우고 설거지를 한 뒤에야 나는 방으로 들어가서 침대에 누웠다.
잠을 충분히 잤기 때문에 잠은 오지 않았고 두통과 울렁거림은 가라앉았다가 심해지기를 반복했다. 핸드폰으로 영화를 틀어 놓고 멍하니 시선을 고정하고 있기를 얼마간.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엄마가 방으로 들어왔다.
“좀 괜찮아?”
“죽겠어요. 아빠는?”
“…음, 뭐 괜찮지. 아빠랑 드라이브 좀 하고 오마.”
그래도 엄마가 아빠 속을 더 뒤집지 않고 잘 봉합한 모양이다. 과거 아빠가 속상해하면 속을 두 번, 세 번 더 뒤집어 돌이키기 힘든 지경까지 가 놓고선 손이 발이 되게 빌어 겨우 이혼을 면하던 경험이 몇 번이나 있었던 양반인데, 드디어 뭘 깨닫긴 하셨는지.
그런데 이 양반, 왜 안 나가고 계시나.
“너는.”
“네?”
“그 베타 친구랑은 아직 만난다고?”
“네. 잘 지내요.”
“참나, 오메가도 아니고 베타를 만날 거면 여자를 만나든가. 난 도통 이해가 안 가는구나.”
엄마한테 이해받을 거라는 기대는 애당초 한 적도 없었다. 엄마는 지극히 알파다운 알파였고 아빠를 만나기 전까지 알파답게 난봉꾼이었던 것 같으니까.
“이왕 알파로 태어난 김에 오메가도 좀 만나 보고 말야, 연애도 다양하게 해 봐야 좋은 사람을 고를 수 있는 법이야.”
“엄마처럼요?”
“그래. 덕분에 너희 아빠 같은 오메가랑 결혼했잖아?”
아, 정말 싫다. 심지어 난봉꾼이었던 과거를 자랑스럽게 여기기까지 하는 것 같잖아. 역시 알파는 재수가 없어.
“오메가는 아름다운 존재야. 네 아빠를 봐라. 어딜 봐서 내일모레 오십으로 보이니? 내 친구들 중에 베타랑 결혼한 친구들은 다 나를 부러워해.”
듣기 싫은 소리였지만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아빠는 엄마보다 네 살 연하로 올해 마흔여섯. 오메가들은 외모의 노화가 베타보다 느리게 진행되었기에 40은커녕 30대로 보였다. 알파 역시 노화가 느렸지만 주름도 제법 생기고 흰머리도 많은 엄마와 함께 있으면 누가 봐도 나이가 10살은 차이나 보였다. 그것이 또 엄마에겐 엄청난 자랑거리였다.
“어쨌거나 나는 네가 좀 현명하게 살았으면 좋겠구나. 사람은 태어난 대로 살아야 하는 법이야.”
“저 알아서 할게요.”
“진지하게 만나고 있는 거면 한번 데리고 와. 네 아빠가 궁금해하니까.”
어우, 이런 말 진짜 하면 안 되겠지만 꼰대도 저런 꼰대가 없다. 내가 좋아 죽는다는 베타가 어떤 사람인지 자기가 궁금한 걸 왜 아빠 핑계를 대는지도 어이가 없었다.
이런 사람이니 여운이를 만나게 해 줄 수가 있나. 물론 여운이가 우리 부모님한테 인사를 드리고 싶다고 한다면 상관없었다. 나 역시 여운이 아버지에게 인사를 드리는 게 꺼려지지 않고.
하지만 나와는 달리 여운이는 내 부모님을 만나는 것을 부담스럽게 여겼다. 우리 만남이 진지하지 않다는 건 아니지만 아직 둘 다 나이가 어리니까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서로의 집에 왕래하지 않는다고 해서 녀석이 자기 집 주소를 2년째 알려 주지 않는 것은 조금 섭섭하긴 하지만. 아, 그래도 아파트 단지까지는 안다.
“그리고 학부 연구생은 웬만하면 꼭 했으면 좋겠구나.”
엄마의 잔소리는 끝날 기색이 없이 또 다른 주제로 이어졌다. 숙취가 더 심해지는 기분이었다. 은근한 강요에 더 짜증이 났다. 알파들이 진짜 존나 싫다, 제길.
“김 교수님이 직접 연락까지 하셔서 엄마도 입장이 곤란해. 너한테도 득이 되는 일인데 부모 면을 세워 줄 겸 해 보면 어떻겠니?”
아, 싫어요. 싫다고요! 못 한다고!
이건 알파 아니라 어떤 자식이라도 반발심이 울컥 치밀 상황 아닌가? 그냥 확 말해 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오메가 안 만난다고 걱정하시는데 이미 만나 봤거든요? 떡도 쳐 봤거든요? 근데 그게 이청영 교수거든요? 그래서 학부 연구생 못 하거든요??
“그것도 저 알아서 할게요.”
내 불퉁한 대꾸에 엄마의 눈썹이 꿈틀했다.
영장류는 계급사회를 형성하고 인간 역시 여기서 자유롭지 않았다. 그런데 알파는 베타보다 더 동물적인 성향이 강하게 남아 있다. 즉, 이 집안의 가장인 알파라면 공격적인 페로몬을 분출하는 정도로 단숨에 나를 제압하고 복종을 강요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실제로 사춘기 때 엄마한테 몇 번쯤 당해 봤다. 그럴 때면 아빠가 안절부절 난리도 아니었던 기억이 선했다.
“후우…….”
엄마는 그러나 거기서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리고 무의식중에 잔뜩 긴장해 있던 나에게 한마디를 툭 던졌다.
“하면 차 사 줄게.”
……망할…….
알파고 나발이고 호주머니를 열어 주시는 가장에게 존경심이 치솟는다.
그런데 나, 할 수가 없잖아?
세상이 나를 버린 기분이었다.
***
월요일 아침이 밝았다.
주말 동안 컨디션을 회복한 나는 평소 일어나던 시간에 일어나 시간표에 맞춰 등교를 했고 토할 것 같은 기분으로 이청영 교수에게 문자를 보냈다. 안녕하세요, 임재희입니다. 교수님 오늘 잠깐 뵐 수 있을까요?
답장은 금방 왔다. 공강 시간이 언제인지?
차라리 시간이 없어서 못 만난다고 자연스럽게 나를 피해 주길 바랐건만. 어쩔 수 없이 공강시간을 고해 바치자 그때 사무실로 찾아오라는 답을 받았다.
그 시간이 결코 오질 않기를 바랐지만 인간 하나가 절망하고 있어도 지구는 자전하고 공전하는 법이었고 시간은 흐르기 마련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 나가기라도 할 것처럼 거세게 뛰었다. 식은땀이 등줄기를 적셨고 긴장감에 토할 것만 같았다. 만나기 싫다. 정말 너무너무 싫다. 그와 다시 만나는 것만으로도 여운이를 향한 죄책감이 이만 배는 무거워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학생이 어떻게 교수님을 바람맞힐 수 있겠는가. 바람은 피워도… 아, 아니, 뭐가 됐든 바람은 안 된다.
결국 나는 교수님께 가는 수밖엔 없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거절을 할 생각이었다. 차가 있으면 여운이와 더 즐겁게 데이트를 할 수 있겠지만 눈물을 머금고 포기했다. 차를 포기하는 것으로 하기 싫다는 의사를 강력히 밝히면 엄마아빠도 더는 강요하지 못할 테니까.
똑똑. 노크를 하자 들어오라는 소리가 들렸다.
다리가 다 후들거리는 기분. 하지만 억지로 힘을 주어 보무도 당당하게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아직은 짐이 없어 빈 책장과 휑한 책상만 덩그러니 놓인 살풍경한 사무실 안, 교수님이 앉아 있었다.
“…안녕하세요.”
아무렇지 않은 척 인사를 하고 싶었는데 목소리가 갈라져서 나갔다. 심장이 떨려서 미칠 지경이었다.
“앉아.”
차차 반말을 하겠다는 분께서는 그날 바로 반말을 시전하시더니 문자에서도, 면전에서도 역시나 반말이었다. 당연한 일이었지만 어쩐지 나는 흠칫했다. 전혀 흠칫할 일이 아닌데 어째서인지.
나는 일단 그의 책상 앞에 준비된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쿵, 쿵, 쿵. 내 심장 박동소리가 이청영 교수에게도 들릴 것만 같았다.
“…….”
“…….”
잠시 침묵이 흘렀다. 사방에 내리깔린 적막에 짓눌려 숨도 못 쉬겠다. 손끝 발끝에 피가 통하지 않아 저릿하기까지 했다.
나는 이청영 교수가 먼저 입을 열기를 바랐지만 무슨 생각인지 그는 고개도 제대로 들지 못하는 나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나는 그를 볼 수조차 없는데 말이다. 얼굴을 보면… 저절로 그 입에 내 성기를 물리고 그 뺨에 성기를 문질러 대던 게 떠오르는데 어떡해. 안경을 쓴 얼굴을 본 순간 내 상상력이 미쳐 날뛰는데 어떡하냐고.
나는 필사적으로 머릿속 살색 망상들을 밀어내며 입을 열었다.
“저, 교수님. 저는 학부 연구생 못 할 것 같습니다.”
“대타는 구해 왔고?”
“…아뇨. 근데 알파 말고 베타나 오메가 중에서 고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알파 새끼들은 글러먹었어요. 하겠다는 놈은 쓰레기고 그보다는 나은 놈들은 안 하겠대요. 를 순화해서 나는 가까스로 떠들었다.
“알파를 연구생으로 두면, 음, 교수님께서 불편하시지 않을까요. 특히 저는.”
“나는 상관없는데?”
……네?
나는 내 청력을 의심했다. 저 오메가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한 것인가 싶어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가느다란 은테 안경을 벗은 오메가의 얼굴을 정면으로 보아 버리는 것 따위, 심장에 이로울 리가 없으니까.
“나는 상관없다고. 임재희 학생이 연구생을 해도.”
그게 무슨 의미인지 내 머리로는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내 입이 멋대로 떠들었다.
“저, 애인 있습니다.”
이청영 교수의 한쪽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하. 그가 코웃음 쳤다. 어처구니가 없는 소리를 들었다는 듯이.
그리고 그가 말했다.
“나는 애도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