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알파의 사정-9화 (9/25)

9.

……네?

나는 애도 있어.

나 분명 그런 말을 들은 것 같은데.

“임.”

나는 애도 있어. 저 오메가가 분명 그렇게 말을 했다.

“임, 임.”

그날 나는 콘돔을 썼던가?

“임, 임, 임, 임.”

물론 아니다. 그의 안에 고스란히 사정했다.

세 번, 네 번쯤.

“임신하셨어요??”

어쩌면 그 이상.

발정기를 맞이한 내 본능이 멋대로 나를 조종하며 속삭였었다. 저 오메가의 안에 씨를 뿌리라고.

그래서 내가 그렇게 했다. 힘들다며 애원하는 오메가의 안에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임, 임신-”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거야?”

짜증이 가득 섞인 목소리에 나는 입을 움찔했다. 여전히 패닉이었다. 너무 놀라서 심장이 아플 정도로 박동하고 있었다. 머리가 웅웅 울리는 와중에 그래도 한 가지 추론을 해 볼 수는 있었다.

임신… 아, 아닌가?

“그날… 저, 제가.”

“30대 중반 남성 오메가의 임신 가능성에 관한 논문 싹 다 조사 한번 해 볼래? 리포트 쓰고 싶어?”

…아니, 그건 좀.

누가 교수님 아니랄까 봐 그냥 아니라고 하면 될 일이지 리포트라니. 호환마마보다 무섭다고요.

그러나 분명 그의 신경질적인 반응은 내 정신을 돌아오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임신은 아닌가 보다. 그것만으로도 숨 쉬는 게 조금 편해졌다. 여전히 심장은 두근두근하고 머리는 잘 굴러가지 않았지만.

하긴, 남성 오메가의 임신 가능성은 여성 오메가의 임신 가능성보다 낮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동성 간에는 특히 조금 더 어렵다고 들은 것 같기도 했고, 알파의 노팅이 그나마 확률을 높인다는 얘기를 성교육 시간에 들은 기억이 났다.

나야 페로몬을 방출하지 못하는 베타하고만 관계를 가져 봐서 노팅이 뭔지도 모르지만……. 러트였다고는 하나 이청영 교수와 사고가 난 날에도 뭔가 다른 건 없었던 것은 확실했다.

“……하아…….”

아아, 다행히 임신은 아닌가 보다……. 긴장이 탁 풀리며 몸에 힘이 빠져나갔다. 순간 눈앞이 깜깜해졌었는데 다행이었다.

임재희 미친놈아, 사고를 쳐놓고 다행은 무슨 다행이냐. 이런 요행에 기뻐하다니, 나가 죽어 버려.

자기혐오라는 정상 사이클로 사고회로가 돌아온 것을 확인하자 마음이 조금 더 편해졌다. 동시에 어떤 탈력감에 골이 다 띵해 왔다.

이청영 교수는 여기서 완벽하게 나의 불안을 종식시켜 주었다.

“혹시 몰라서 테스터 해봤는데 아니야. 정말 만에 하나라도 진짜로 임신했으면 널 아예 안 봤겠지.”

“…임신이면… 제가, 책임을 져야.”

“지랄을 한다.”

아니 왜죠.

물론 아이가 생겼을 때 낳을지 말지는 전적으로 오메가의 의견에 따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만약 오메가가 낳기로 결정했다면 알파로서 당연히 책임을 져야 하지 않겠는가. 내가 알파 아니라 베타 남자라도 누군가를 임신시켰으면 책임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이렇게 생각하는 내가 이상해? 고개를 갸웃하던 도중.

무언가 내가 잠시 잊고 있었던 것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애도 있어.’

저 오메가에게 애가 있다신다. 내 아이를 임신한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다른 애가 있다는 건데.

애는 혼자 만드는 게 아니지 않은가.

그 와중에 내 아이를 임신했다 해도 내가 책임지는 건 거부한다는 저 태도.

그렇다면… 지금 그의 말이 의미하는 건……?

“교수님…….”

믿지 못할 추론에 내 목소리는 덜덜 떨려서 나왔다. 아까 잠시나마 찾아왔던 안도감이 싹 증발해 버렸다. 다시 눈앞이 아찔해졌다.

“결… 결혼하셨어요?”

설마, 설마 나 지금 그냥 바람도 아니고 불륜을 저지른 거야? 나는 연인을 배신한 셈이지만 교수님은 지금 법적 반려자를 두고 부정을 저지른 거냐고.

간통, 그날의 일이 간통이었나보다. 내가 지금 남의 가정을 파탄내고 있나 보다. 아빠, 나 어떡해. 나 진짜 큰일 났어.

패닉에 빠져서 덜덜 떠는 나를, 그러나 이청영 교수는 세상 한심한 놈 보듯이 바라보았다.

“애만 낳았다.”

“어, 어… 그, 남편분, 아니 아내분은.”

“없다고. 미혼부 처음 봐?”

말문이 턱 막혔다. 하루에 몇 번이나 롤러코스터를 타는지 모르겠다.

아이는 물론 혼자 기를 수도 있긴 하다. 새삼스러운 깨달음에 나는 다시 안도했지만 지금 느끼는 감정이 안도감인지 아닌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대체… 이 사람은 뭘까.

오메가의 몸으로 의대 입학, 교수에게 각인이 될 정도로 6년 내내 우수한 성적을 내고 국시는 수석. 수련의의 처우가 지금보다 훨씬 열악했던 시대에 인턴과 레지던트를 거쳐 전문의 수료. 이후에도 뭔가 대단한 삶을 살았으니 다음 학기 조교수로 내정되어 학기 중간에 임상조교수로 병원에 들어올 수 있었을 것이다.

미친듯이 빡세게 살지 않았으면 이룰 수 없는 행보를 밟아 왔으면서 짝도 없이 애를 낳아 혼자 키웠다고? 저 사람 몸이 두 개라도 되는 걸까? 허마이니한테 타임터너라도 빌리셨던 건가요??

무언가 압도당하는 기분이었다.

과연 이런 사람이니 김철웅 교수처럼 깐깐한 사람도 호의를 가지고 적극적으로 협력을 해 주는 것이겠지. 정말 대단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나는 알파 우월주의에 빠져 타인에게 되도 않는 경쟁심과 질투를 품는 소인배가 아니었다. 오메가라 해도, 아니 오메가이기 때문에 더욱 대단한 업적에 존경심마저 들었다.

…성격은 조금 나쁜 것 같긴 하지만.

어쨌거나 그제야 몸에 피가 돌기 시작했다. 창백하게 질려 나갔던 뺨에도 혈색이 돌아왔는지 뜨끈뜨끈해졌고 얼음처럼 차갑게 굳었던 손발에도 온기가 돌았다. 마치 온탕에 들어가기라도 한 것처럼 그제야 맥이 탁 풀렸다.

내 아이를 임신한 게 아니라고 한다.

바람일지언정 간통은 아니라고 한다.

그럼 됐다.

이 정도 롤러코스터를 타고 났더니 이제 다른 건…

아무래도 좋…….

“아.”

그런데 긴장이 너무 과하게 풀린 모양이었다.

혈액순환이 활발해지며 온기가 돌다 못해 눈물샘도 열려 버렸나 보다.

코가 찡해지나 싶더니 후두둑, 눈에서 물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허.”

“죄, 죄송합, 죄송합, 니다.”

아니, 아니. 미쳤나 봐! 울긴 왜 울어!

그러나 한번 열린 수도꼭지는 내 의지대로 잠글 수가 없었다. 손등으로 비빌수록 눈물이 퐁퐁퐁 솟아올랐다.

아니, 젠장, 나 알파라고. 언제 울었는지 기억도 잘 나지 않을 정도로 우는 일이 없는 알파라고. 대체 어느 알파가 긴장 좀 풀렸다고 이렇게 울겠냐고!

“휴지로 닦아, 휴지로.”

이청영 교수가 내 쪽으로 휴지곽을 밀어 주었다. 나는 휴지를 뽑아 얼굴을 문질렀다. 질질 짜다 못해 맑고 끈적한 콧물도 조금 나와 버렸다. 제길, 이게 지금 무슨 추태란 말인가. 고개를 푹 수그렸지만 울음 때문에 어깨가 들썩거리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진정하기 위해 애를 쓰며 훌쩍대는 나를 두고 이청영 교수가 몸을 일으켰다. 책상 옆 창문을 열어젖힌 그는 창을 향해 몸을 돌렸다.

달칵, 치이이익. 라이터 켜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윽고 매캐한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다.

“후우-”

담배…도 피우는구나.

이청영 교수는 창밖을 향해 담배 연기를 내뱉었지만 조금씩 냄새가 들어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나를 외면한 채 담배를 태우는 그의 옆모습을 보며 나는 차츰 울음을 가라앉혔다.

울었던 게 너무 쪽팔렸지만 변명을 해 보자면 오늘 일단 너무 긴장을 해 있었다. 이청영 교수한테 연락하는 것부터 용기가 필요했고 이 방에 들어오기 전에는 긴장감에 죽을 것 같았었다. 줄 없이 번지 점프를 해야 하는 기분이었다고.

그런데 들어와서는 내가 피임도 없이 관계를 가졌으면서 임신에 대한 걱정을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내 안이함에 기겁했고 그가 내 아이를 임신했을까 봐 또 너무 놀랐었다. 그게 아니라 잠깐 안도했지만 이번엔 혹시 내가 남의 가정을 파탄낸 불륜남이 된 줄 알고 또 기함했고…….

21살의 내가 감당하기엔 너무 엄청난 일들이 순식간에 지나가서 멘탈이 남아나질 않는 시간이었다. 그래서 눈물이 나 버렸던 모양이다.

제길, 그래도 쪽팔려……. 물론 이청영 교수님은 나보다 연상에 경험도 많고 존경할 만한 대단한 분이지만, 그래도 부끄러운 건 부끄러운 거다. 나이가 어려도 나도 자존심이라는 게 있지 않은가.

“콜록, 콜록.”

이청영 교수는 작게 기침을 하며 담배를 손가락으로 털어 불똥을 떨어 냈다. 담배는 반 정도 태웠을 뿐인데 더는 연기를 피워올리지 못하는 꽁초가 되었다. 그는 그것을 휴지에 싸서 쓰레기통에 버렸다.

“…담배 피우시네요.”

“어, 아주 가끔. 노답일 때.”

“…….”

제가 그렇게 노답인가요…….

내가 비록 오늘 터무니없는 추측을 날리고 말도 제대로 못 하고 더듬어 댔으며 끝내 질질 짜기까지 했다지만. 음, 노답이 맞긴 하네.

하지만 역시 쪽팔린 만큼 자존심도 상하는 법. 자아 존중감이 훅 깎여 나가는 것과 동시에 뭔가 울컥하는 마음도 들었다. 씨, 다시 눈물이 날 것 같다.

“…교수님. 정말로 저 안 불편하시겠어요?”

“불편해.”

“…….”

단호한 대답에 눈물이 쏙 들어갔다.

중요한 건 그러나 내 눈물 따위가 아니었다. 그도 내가 불편하단다. 그러면 나 연구생 안 해도 되는 거지?

“하지만 아무도 너랑 내가 불편한 사이인 걸 모르니 별수 있나. 차라리 연구생 몇 개월 했더니 자연스럽게 불편한 사이가 되었더라 하는 게 낫지.”

…과연 이것이 박사 학위 소지자인가. 학부 연구생 안 해도 되나 싶어서 들떴던 나는 또 다른 의미로 충격을 먹었다. 교수님은… 역시 천재인가?

교수와 학생이 얽힐 일이 없기야 하지만, 반대로 얽힐 일이 그다지 없기 때문에 어지간하지 않으면 불편한 관계까지 될 일이 없었다. 그런데 나와 이청영 교수가 불편한 관계라는 게 남들 눈에도 보이게 되면? 이걸 뭐라고 변명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데 학부 연구생을 하면? 노예와 농장주가 사이좋게 하하호호 하지 못한 경우가 훨씬 많은 게 당연하잖아? 큰 그림이란 이런 거구나 하며 무릎을 탁 칠 밖에.

“그리고 너만 김 교수님한테 압박받는 게 아니야.”

이청영 교수는 짜증을 숨기지 않고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김철웅 교수는 반드시 알파를 연구생으로 쓰기를 바라고 있었다. 내 엄마한테 전화까지 걸어서 강요를 할 만큼.

그러니 만약 내가 연구생 자리를 절대로 못 한다고 탈주를 해 봐야 결국 이 교수는 다른 알파놈을 연구생으로 삼아야 한다는 의미이리라.

나는 잠시 이청영 교수를 바라보았다.

밝은 햇살 아래 본 그는 역시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여전히 그를 보면 함께 보냈던 밤의 기억을 지울 수는 없었다. 은테 안경을 쓰고 무표정한 얼굴을 한 지금의 모습이 낯설 정도로 그 밤이 강렬했다.

하지만 나 역시 그의 앞에서 멍청이 같은 모습을 보이며 눈물 콧물 다 흘린 탓일까.

긴장감 때문에 심장을 토해 버릴 것만 같은 기분으로 이 사무실에 처음 발을 들이던 때와는 달리 단시간에 그의 얼굴을 보는 게 그리 힘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와 내가 공유하고 있는 이 공기가 조금 편한 듯하기도 했다.

“어떻게 할래?”

만약 내가 정말로 거절한다면 그는 강요에 못 이겨 다른 알파를 연구생으로 구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그놈은 병원 지원할 때 가산점을 받게 될 거고, 병리학 교수님한테 학점도 잘 받을 거고, 나는 아무것도 못 받고 차도 날리게 되겠지.

하지만 나는 이게 독이 든 성배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우선 저 교수님, 오메가와 지내는 게 가능하긴 할까. 물론 무슨 일이 터지길 바라는 것은 절대 아니다. 결단코 아니다.

나는 물론 선을 지킬 것이었으며 그쪽으로는 하등의 관심도 없었다. 하지만 저 오메가가 이전에 버스에서 그랬던 것처럼 갑자기 페로몬을 뿜어낼 수도 있지 않겠는가? 만약 그런 일이 생기면 전과 같이 사고가 나 버릴까 두렵다.

또 정말 그럴 일이야 없을 테고, 교수님한테 지나치게 무례한 상상이지만, 정말, 정말로 만에 하나라도…… 그가 나를… 좋아하게 되기라도 하면…….

그런 내 고민이 얼굴에 드러나기라도 한 건지 이청영 교수가 바늘 하나 들어갈 것 같지 않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노파심에 하는 소리지만 쓸데없는 걱정은 하지 마라.”

“예…?”

“나는 특히나 질질 짜는 알파한테 트라우마가 있어. 내 흑역사, 학생, 울보. 그걸 다 합친 게 너야.”

……이거는 그러니까 나랑 어떤 부적절한 관계로 얽힐 일은 다시는 없으리라는 말씀이렷다.

그 말에 어쩐지 심사가 조금 꼬이는 기분이 드는 건 어째서인지. 그러나 그가 나를 마음에 안 들어한다면 그걸로 다행이었다. 나도 당신이 마음에 안 든다. 내 인생이 누구 때문에 꼬였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럼…….”

하지만 그가 그 정도로 확신을 한다니, 그럼 나도 이제 더는 명분이 없는 것 같다. 그와의 관계가 불편하고 우는 모습을 보인 것은 충분히 수치스러운 일이었지만 이제 정말 별수가 없지 않은가.

“할게요, 교수님.”

“그래.”

이청영 교수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도 내가 반갑지는 않을 테니까.

“연구실 보여 줄 테니 다 울었으면 이제 일어나지?”

눈물은 아까부터 그쳤거든요?

이 사람 내 생각보다 성격이 더 나쁜 것 같아. 연구생 한 게 벌써부터 조금 후회가 되기 시작하는데.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옷걸이에 걸려 있던 흰 가운을 입었다. 나는 그를 따라 일어나 사무실을 나섰다.

한 걸음 뒤에서 따라가고 있노라니… 이청영 교수는 키가 여운이와 비슷한 것 같았다. 슬림한 몸매 덕분에 멀리서 봤을 때는 더 키가 커 보이는데 붙어 서니 내 키와 직접적으로 비교가 되어서인지 더 작게 느껴지는 것 같기도 했다.

역시나 이 사람 좀 더 잘 먹었으면 좋겠다. 옷 위로 마른 어깨와 날개뼈가 도드라져서 자꾸 눈에 띄니까.

그나저나 교수 사무실도 병원이 아닌 의학대 건물에 있다 했더니 연구실 역시 의학대 건물에 있는 것을 사용하는 모양이었다. 그는 나를 데리고 연구실로 들어가 열쇠로 문을 열었다.

“들어와.”

그를 따라 들어간 연구실 안은 상당히 깔끔했다. 온도와 습도가 일정하게 유지되고 있었고 공기 순환 장치가 돌아가고 있었으며 조명이 밝아 전체적으로 쾌적하게 느껴졌다. 과거 리모델링 때 타과에서 반발하자 김철웅 교수가 건물 일부를 연구동으로 제공하는 것으로 타협을 했다던가. 덕분에 의학관에는 연구실 여러 개가 잘 갖춰져 있었다.

“받아.”

휙, 공중을 날아오는 것을 반사적으로 잡아챘다. 그것은 열쇠였다. 내가 의아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자 그가 나를 연구실에 딸린 작은 방으로 데려갔다. 그리고 그곳에는…….

“내일부터 아침에 케이지 갈고 얘들 밥 줘라.”

칸칸이 차 있는 투명한 플라스틱 케이지, 그 안에서 작은 생명체들이 분주히 찍찍거리고 있었다.

이걸 관리…? 케이스가 한두 개가 아니고 그 안에 못해도 쥐가 네다섯 마리는 들어 있는 것 같은데요…?? 얘들 키워서 무슨 실험을 하시려고요?

문득 나는 그가 어떤 연구를 진행하고 있는지도 듣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저기, 교수님. 그러고 보니 저 어떤 연구인지도 듣지 못했는데요…….”

“메일로 자료 보내줄 테니까 숙지하고 와.”

“…….”

차마 내일 아침까지 숙지하라는 소리냐고 묻지 못했다. 하지만 내일 아침까지 해야 할 일임에 틀림없으리라…….

하늘이 노랗게 뜬다.

‘내년에 너 본과 올라가면 어차피 바빠지잖아. 마음껏 데이트 할 수 있는 건 올해뿐인데 연구생을 왜 해? 그거 하면 방학 때도 학교 가야 할걸? 하지 마.’

핸드폰 너머 분개해서 읊조리던 여운이의 목소리가 다시금 재생되었다. 하지 말랬는데 결국 하게 되어 버렸다. 마음껏 데이트, 어쩌면 물 건너간 것 같아. 어떡해, 여운아…….

그리고 내가 학부 연구생을 기어코 맡게 되었다는 비보를 여운이한테 어떻게 전달해야 하나.

노랗게 뜬 하늘이 어딘가 한구석부터 와장창 무너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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