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아니… 아무리 그래도 우리가 불륜 관계인 건데 갑자기 나한테 애인 얘기를 이렇게 갑자기 툭 꺼낸다고?
미소를 애써 숨기려던 노력은 단번에 필요치 않게 되었다. 얼굴 근육이 단번에 딱딱하게 굳어졌으니까.
…애인. 이여운.
“…자주 하는데요…….”
이렇게 대답하는 것조차 죄스럽게 느껴졌다. 이여운에게도, 또 눈앞의 이청영 교수에게도. 어느 쪽에든 무례한 짓이라는 자각은 있었다. 내게 그 정도 양심은 있었다.
“자주 하는데 오늘 네 번이나 했다고? 늘 그렇게 해? 네 애인, 살아는 있냐?”
할 때마다 서너 번씩 하면 애인이 버틸 수 있느냔 질문이었다. 나는 변명처럼 더듬더듬 주워섬겼다.
“그게, 음, 애인이 베타라서. 음. 자주 하기는 하는데, 그게.”
“심지어 애인이 베타야?”
너같이 발정 난 놈이 베타 애인을 상대로 만족을 하냐는 듯한 시선에 얼굴이 타는 듯이 달아올랐다. 아까 느꼈던 저열한 자부심이 온데간데없이 증발했다. 그냥 내가 쓰레기처럼 느껴졌다. 쓰레기가 맞기도 하고.
나는 이여운을 사랑한다. 안고 싶은 사람은 그뿐이었고 그와의 관계에서도 만족하고 있었다. 며칠 전만 해도 이여운으로 인해 흥분했고 그와 뜨거운 시간을 보내지 않았던가.
하지만 또다시 이여운을 배신했다. 이번엔 오해고 뭐고 아무것도 아니었다. 100퍼센트 내 자의로 행한 배신. 게다가 이여운을 상대로는 상상도 하지 않았던 짓들도 했었다. 그냥 한 마리 짐승으로 화했던 섹스는 솔직히 빌어먹게 즐거웠다.
…그렇게 나는 쓰레기 중의 쓰레기, 참쓰레기로 진화해 버렸다.
새삼스럽게 내가 저지른 죄악을 깨닫자 이 세상에서 그냥 사라져 버리고 싶은 기분이 든다.
이청영 교수가 애인 얘기를 꺼내기 전까지 나는 당연히 가져야 했을 죄책감마저도 의식의 저편 먼 곳에 내팽개쳐 두고 외면하고 있었다. 내 저급한 언동에 이청영 교수에게 미안한 마음을 느꼈을지언정 이여운은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이마저도 내 자괴감에 무게를 더했다.
“…애인이랑… 헤어져야겠죠.”
넋두리처럼 중얼거렸다.
하지만 내 혼잣말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다. 이여운과 헤어진다고? 아직도 이렇게나 사랑하는 녀석에게 이별의 말을 꺼내는 나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발밑이 아득히 꺼지는 기분이었다. 다시는 이여운을 보지 않고 산다? 지금도 이렇게 사랑하는데, 그게 가능한 일인가?
헤어지고 싶지 않은 것은 내 진심 중의 진심.
그러나 이미 몇 번이나 그를 배신해 버린 나에게 그를 계속 사랑할 자격이 있나.
결국 이여운과 헤어지는 게 마땅…….
“네 연애문제는 너 알아서 할 일이고.”
예……?
“네가 헤어진다고 내가 사귀어 줄 것도 아닌데 내가 뭐라고 하겠냐.”
이청영 교수의 차가운 말에 말문이 막혔다. 갑자기 모든 사고가 정지되며 봇물 터진 듯이 범람하던 감정의 소용돌이가 잠잠해졌다.
아니, 저기요. 제가 그쪽이랑 사귀고 싶어서 애인이랑 헤어지겠다는 게 아니거든요? 저도 그쪽한테 사귀어 달라고 한 적 없거든요?
“그럼 교수님, 저랑 왜 잤는데요.”
얼이 빠진 내 입에서 멍청한 질문이 튀어나갔고,
“넌 그럼 환승하려고 나랑 잤냐?”
교수님의 입에서는 가차 없는 반문이 튀어나와 내 입을 틀어막았다.
“…….”
“…….”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이청영 교수는 목이 타는지 물병을 잡았다. 그가 물을 마시는 동안 나는 어쩐지 융단폭격을 당한 꼴이 되어 버린 머릿속 상념들을 수습해 보았다.
헤어지긴 싫지만 헤어지는 게 도의적으로 맞다. 이여운과 이별하든 말든 이청영 교수가 내 새 애인이 될 일은 없을 것이다. 나도 딱히 그와 연애를 하고 싶은 건 아니라고.
아니, 지금 내가 이여운한테 죄책감을 느끼기도 바빠야 하는데 이런 건 왜 따지고 있는 거야?
그 와중에 문득 이 사람의 상황에 대한 궁금증이 피어오르는 건 인간적으로 당연한 것 아닐까. 나야 애인이 있는데 이러고 있다 치고, 애인 있는 남자와 몇 번이나 살을 섞은 당신은?
“…교수님은 만나는 사람 없으신가요?”
“그건 네 알 바가 아닌데?”
으윽. 아프다. 저 사람 한마디는 너무 아파!
“너랑 내 관계는 그런 거다.”
하지만 냉정하면서도 현실적인 이야기였다.
내가 애인과 헤어져도 그가 책임질 건 아무것도 없다. 설령 그에게 다른 애인이 있다 해도, 나 역시 관여할 것 없는. 그의 표현대로 그저 배설과도 같은 섹스를 꼴려서 몇 번 한 사이일 뿐.
모르겠다. 머릿속이 시끄러웠다. 그런데 무엇 하나 제대로 된 생각이 돌아가질 않는다. 이성과 감정이 모두 복잡하기 짝이 없는데 한편으로는 급정지를 한 듯이 이어지지 못했다.
무언가 못내 찜찜한 와중에 한 가지는 명확해졌다.
“동의하지?”
몇 번 섹스를 했다 해도 그저 거기까지인 관계.
“…예.”
“그럼 가 봐라. 나 좀 쉬게.”
“네. 월요일에 연구실에서 뵙겠습니다.”
“그래.”
나는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가운을 벗고 옷을 입었다.
가방을 챙겨 들고 미련 없이 호텔방을 나섰다. 체력이 바닥이 나서 나도 얼른 누워서 쉬고 싶었다. 그렇다고 이청영 교수와 나란히 눕는 모습을 상상할 수는 없지만.
방문을 닫고 조용한 복도에 홀로 선 순간 나는 토끼를 쫓아가다가 끝이 없는 구덩이로 떨어진 앨리스를 떠올렸다. 카펫이 깔린 복도가 내게는 앨리스가 낙하하던 통로처럼 느껴졌다. 이상한 나라로 떨어진 그녀와 달리 내게는 이 복도야말로 현실로 돌아가는 길이었음에도.
나는 도리어 길을 잃어버린 기분이었다.
***
꿈을 꾸었다.
나는 토끼를 뒤쫓아 달리고 있었다. 하얗고 예쁘게 생긴 토끼라 홀린 듯이 뽀얀 궁둥이를 쫓아 달렸다. 몽실몽실 동그란 꼬리가 몹시 탐이 났다. 토끼는 안경을 쓰고 있었는데 회중시계는 들고 있지 않았다. 대신 흰 가운을 입고 있었다.
귀엽고 예쁘게 생긴 것으로도 모자라 내 앞에서 달리고 있는 토끼에게서는 달콤한 향기가 풍겼다. 토끼가 지나간 자리에 잔향이 남아 나는 더욱 안달이 났다.
갖고 싶다. 품에 꽉 끌어안고 저 보송보송해 보이는 꼬리를 쓰다듬고 싶다. 토실토실한 엉덩이를 토닥토닥 매만지고 보드라운 몸에 입 맞추고 싶었다. 너무 오랫동안 달려서 기관지가 찢어질 듯이 아팠지만 토끼를 잡고 싶어 멈출 수가 없었다. 타는 듯이 목이 말랐다. 그럴수록 더욱 저 달콤한 향기를 폐부 가득 채우면 갈증이 멎을 것 같았다.
마침내 나는 토끼를 따라잡았다. 손만 뻗으면 저 하얀 엉덩이를 잡을 수 있으리라. 그래서 손을 뻗었고 마침내 탐스러운 알궁둥이가 손에 잡힐 듯이……
응?
알궁둥이?
“헉……!”
그 순간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마라톤을 뛴 사람처럼 숨을 헐떡이며. 정말로 달리기를 하기라도 한 듯이 심장이 거세게 박동하고 있었다.
얼굴로 열이 확 올랐다. 아니, 미친. 이게 대체 무슨 꿈이야.
어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떠올린 탓이었을까?
분명 토끼를 쫓아 달리고 있었는데 왜 갑자기 그 토끼가 사람이 되었단 말인가. 그리고 가운 입고 있었는데 왜, 왜 알몸이었냐고.
그리고 내가 엉덩이를 움켜쥔 순간 나를 돌아본 그 얼굴은 분명…….
“으아아아…!”
절규가 저절로 터져 나왔다. 가족들이 전부 있는 집이라는 걸 자각하고 금방 입을 다물었지만 대신 나는 이불을 걷어찼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속옷 안이 질척하지 않다는 점이었다. 다행이다. 너무 다행이다. 나는 절망 속에 피어난 한 줄기 희망을 보았다.
미친… 그따위 꿈을 꾸고 몽정을 했다면 진심으로 옥상으로 올라가서 투신했을 것 같다. 너무나 다행히도 몽정은커녕 조조 발기도 없었다. 울고 싶을 정도로 안도했다. 너무 다행이었다.
“후…….”
그제야 나는 시끄럽게 울고 있는 알람을 껐다.
늦잠을 자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대체 황금 같은 일요일에 대체 왜 알람까지 맞추고 이렇게 일찍 일어났느냐 묻는다면…….
이여운과의 약속 때문이었다.
놀이공원을 가자는 약속. 나는 어제 그것을 취소하지 못했고 계획대로 데이트를 하기로 했다.
어제 호텔을 나왔을 때는 오후의 태양이 서쪽을 향해 가고 있던 시간이었다. 점심도 거른 채 몇 시간을 이청영 교수와 그러고 있었다는 자괴감을 느끼기도 잠깐, 내 연락을 기다리고 있던 여운이에게 급히 연락을 해야 했다.
역시나 내 입에서 나왔던 것은 변명과 거짓말들이었다. 학교에 갔더니 교수님이 계시더라. 나올 필요 없는데 나왔다며 칭찬을 듣긴 했는데 도리어 붙잡혀서 이번 실험에 필요한 것들을 강제로 배워야 했다. 점심을 사 주셔서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늦게 식사를 하고 지금 헤어졌다… 뭐 그런 변명들.
이여운은 약간 언짢아했지만 일요일에는 학교에 가지 않아도 된다는 내 말을 캐치하고 놀이공원에 가자고 했다. 죄인은 감히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도 너무 좋다고 기대된다고 맞장구를 쳤다. 그 결과가 이른 기상…….
심지어 몸 상태가 최악이었다. 침대에서 일어나려는데 눈앞이 핑 돌아서 쓰러질 뻔했다. 다리에 맥아리가 없어 후들후들 떨릴 지경이었다. 기운이 딸려서 그냥 계속 자고 싶을 뿐.
어찌어찌 자리에서 일어나 욕실로 들어가서 본 내 몰골은 형편없었다. 며칠 밤샘을 하기라도 한 듯이 눈 밑이 검고 볼이 푹 팬 듯이 퀭하다. 누가 보면 미라인 줄 알겠다고. 정력이 죄 빨린 몰골 아닌가.
…물론 정력이 쪽 빨린 게 사실이긴 하지.
세상에나. 이게 이렇게 힘들 일인가. 네 번의 섹스에 저열하기 짝이 없는 고양감을 느꼈던 나를 비웃기라도 하는 듯이 오늘은 그냥 죽을 듯이 힘들었다.
러트 때는 네다섯 번을 해도 다음날 컨디션이 그렇게 개운하고 좋을 수가 없었는데 지금의 나는 병든 병아리처럼 골골대는 신세였다. 아무리 내가 젊고 아무리 내가 알파여도 연속 네 번은 무리였나 보다.
할 때는 좋았는데 어쩐지 세 번째 사정을 할 때 심장이 좀 아프더라고. 네 번째 때는 심장이 찌릿대다 못해 숨이 좀 넘어가는 느낌이기도 했고.
어제도 내내 지친 상태긴 했다지만 자고 일어나면 나아질 줄 알았는데 그냥 망했다는 걸 잘 알겠다. 아침에 발기가 없었던 이유도 아주 잘 알겠다.
나 진짜 어떡하냐……. 이런 몸으로 이여운과 데이트를 한다고?
샤워를 하며 잠을 깨우는 와중에도 그저 절망감만 한가득했다. 더 이상 이여운을 기만할 수는 없는 노릇. 그러므로 헤어져야 했다. 도의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이별밖엔 없었다.
하지만 나는 진짜 헤어지기 싫단 말이다……. 내 의지로 부정을 저지른 주제에 이렇게 징징대는 게 전혀 쿨하고 섹시하지 않다는 건 알지만 나는… 진짜로 이여운을 사랑한다고.
백 번 독하게 마음먹고 헤어진다 쳐. 그럼 그만 만나자는 말을 언제 해야 하는 것일까.
오늘? 놀이공원에 가자고 아침부터 만났는데 헤어지자고 말을 해? 데이트에 들떴을 게 분명할 텐데?
최악. 나는 정말이지 최악의 쓰레기다. 그냥 나가 뒈져야 하는 것 같다.
아빠, 엄마 죄송해요. 예쁘게 낳아서 열심히 키워 주셨는데 아들은 자라서 쓰레기가 되었어요. 생각을 해 보니 엄마한테는 별로 안 죄송한 것 같네요.
별 쓸데없는 상념까지 머릿속을 어지럽혔으나 나는 결국 생각을 정리하고 마음을 굳혔다.
사죄할 수도 없는 잘못을 저질렀으니 헤어지는 수밖엔 없었다. 더는 이여운을 속이고 싶지 않았으나 사실을 고할 수도 없었으므로
시기를 고민하는 것도 의미가 없는 짓이었다. 데이트 전이라서 얘기할 수가 없다? 그러면 좋게좋게 데이트를 한 뒤에는 꺼내는 게 가능한 소재인가? 아니면 내일? 모레면 말할 수 있어?
여운이와 내 사이는 순풍에 나아가는 돛단배처럼 순조로웠다. 안정적이다 못해 며칠 데이트를 못 하더라도 서로를 향한 애정이 늘 넘치는 연인이었다.
최근 들어 사이가 나빠지거나 싸운 것도 아니었으니 이별을 입에 담는 것은 때와 장소에 상관없이 느닷없을 뿐이다. 차라리 어제 그냥 전화로 바로 얼굴을 보자고 해서 이별을 고했어야 했다.
물론 나는 그러는 대신 오늘의 데이트 약속을 잡아 버렸지만 말이다. 결국 이런 식으로 회피를 하다간 영원히 말하지 못하리라는 게 뻔했다.
그러므로 그냥 오늘 바로 얼굴을 보자마자 얘기를 하자.
헤어지자.
이제 더는 너를 사랑… 하지 않으니.
아니, 이런 핑계는 절대 입에 담을 수가 없다. 나는 이여운을 사랑한다.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 헤어진다 따위의 소리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찢어질 듯이 아프단 말이다.
죽을 듯이 우울한 와중에 나는 늘 하던 대로 깔끔하게 머리를 매만지고 단정한 옷을 챙겨 입었다.
5월의 아침은 무척이나 상쾌했다. 꽃과 풀 냄새 가득한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왔다. 푸른 하늘을 밝힌 태양에서 쏟아지는 볕이 밝고 따사로웠다.
봄날, 야외에서 데이트를 하기에는 최적의 날씨. 버스를 타고 약속 장소로 가는 심장을 울렁거리게 만들기엔 충분했다. 여운이에게 헤어지자는 말을 할 생각에 이토록 긴장되고 두려운데 날이 이렇게 좋아도 되는 건가 싶었다.
얼마간 버스를 타고 가다가 약속 장소에서 내렸다. 조금만 걸으면 바로 놀이공원이라 이미 사람들이 북적북적했다. 버스를 타고 오는 동안 여운이는 도착했다는 메시지를 보냈었다. 그리고 나는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이여운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나를 현혹하는 그 어떤 향취가 없어도, 오메가처럼 아름다운 외모를 지니지 않아도 수많은 인파 사이에서도 오직 이여운만이 내 눈에 들어온다.
노란빛이 감도는 갈색으로 염색한 머리카락 아래 핸드폰을 보고 있는 얼굴이 보인다. 그의 구김살 없는 성격이 고스란히 반영된 잘생긴 낯이 봄날의 햇살에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흰 셔츠에 품이 넉넉한 청남방을 입은 태가 퍽 보기 좋았다. 메고 있는 작은 배낭도 잘 어울렸다. 블랙진 아래 신고 있는 운동화는 우리가 같이 운동을 할 계획을 세우며 함께 구매했던 커플 운동화였다.
커플 운동화. 그것을 보는 순간 심장이 찌르르 울리며 후회가 물밀듯이 밀려들었다. 햇살 때문일까. 눈가가 시큰하며 눈물이 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와 동시에 심장 한구석이 무너져 내린다. 혹은 어떤 것이 가득 차올라 가슴이 뻐근해졌다.
“재희야!”
내가 부르기도 전에 핸드폰을 보던 녀석이 고개를 들자마자 나를 발견했다. 나는 그제야 내가 버스에서 내린 뒤 망부석처럼 우두커니 서서 이여운을 바라보기만 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나라는 배신자를 보며 아무것도 모르는 이여운은 방긋 웃었다.
내 쪽으로 다가오는 녀석을 향해 내 다리 역시 움직인다. 점차 가까워 오는 얼굴이 선명하게 보일수록 내 가슴 속 심장이 두근두근 힘차게 박동했다.
“여운아.”
“뭐냐, 너 얼굴 왜 이렇게 피곤해 보여?”
“어? 아… 잠을 좀, 설쳐서.”
“뭐야. 놀이공원 갈 생각에서 설레서 못 잤어? 애야?”
그렇게 말하는 녀석이야말로 잔뜩 설렌다는 기색이 가득했다. 얼굴에서 웃음기가 떠날 줄을 몰랐다.
하지만 나는 말을 해야 했다.
얘기 좀 하자고. 중요하게 할 말이 있다고.
“빨리 입장하자. 아침은 먹었어? 나 혹시 몰라서 김밥 좀 싸 오긴 했는데.”
“…김밥?”
“어. 난생 처음 싸 봤지만 좀 맛있음. 먹어 볼래?”
김밥. 심장이 아파 온다. 일찌감치 일어나서 김밥을 싸 온 이여운은 대체 얼마나 오늘의 데이트를 기대했던 것일까. 그것이 나를 위한 것임은 너무나 당연했다. 제 노력과 솜씨를 칭찬받고 싶어하는 얼굴이 사랑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러니 더욱 말을 해야 했다.
“여운아.”
“응?”
“사랑해.”
…음. 이런 가사가 옛날에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뜬금없는 내 고백에 이여운은 웃었다. 어처구니가 없으면서도 못내 기쁘고 즐겁다는 듯이. 녀석은 팔을 벌려 나를 끌어안았다.
“나도.”
품 안에 전해 오는 따뜻한 온기를 끌어안으며, 여전히 달콤하게 풍겨오는 녀석의 체취를 맡으며 나는 생각했다. 이렇게 좋은데. 녀석도 나를 이렇게나 좋아하는데.
……굳이 이여운이랑 헤어질 필요는 없지 않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