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알파의 사정-24화 (24/25)

24.

물을 마시고 있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아니었으면 뿜었을 것이었다. 표정관리가 잘 되지 않았다.

“뭔 소리야?”

“갑자기 웬 한우?”

아니, 사랑해서 사 주고 싶은 거라니까… 라고 하기엔 평소와 다른 이상한 행동이었나?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스턴에 걸린 것처럼 머릿속이 굳어졌다.

“아니… 좋은 거 먹이고 싶으니까…….”

“잘못한 것도 없는데? 갑자기 행동이 변하면 바람을 의심하라던데 너 아주 수상해.”

이여운은 의미심장한 소리를 하며 피식 웃었다.

그로서는 아무 생각 없이 한 말이었으리라. 별 시답지 않은 것으로 농담을 하던 우리 사이에 못 할 소리도 아니었다.

“아 무슨 개소리야.”

그러나 나는 농담을 농담으로 받을 수가 없었다.

“내가 비싼 밥 사면서 이런 소리 들어야 해?”

개정색을 하며 급발진을 해 버렸다. 도둑이 제 발 저린 딱 그 꼴이었다.

“어…?”

이여운은 당황했다. 삽시간에 얼어붙은 분위기가 피부를 날카롭게 찔렀다.

“야, 농담이지. 뭘 그렇게 정색을 하냐?”

“아니… 뭐 그런 농담을 해.”

릴랙스. 릴랙스. 마인드 컨트롤을 시도했지만 쉽지 않았다. 방귀 뀐 사람이 왜 성을 내는지 이제야 알겠다. 사람이 너무 당황하니까 화를 내게 된다고.

“난 너랑 맛있는 거 먹고 싶어서 온 건데. 내가 바빠서 우리 데이트 못 했잖아.”

애써 말투를 누그러뜨리며 말했다. 갑자기 정곡을 찔린 탓에 심장이 두근두근했다. 설마 내가 뭔가 꼬리를 잡힌 건가 싶어서 식은땀이 날 지경이었다.

“바쁘면 그럴 수도 있지. 내가 그 정도도 이해 못 할 것 같아?”

이런 제길. 내가 정색을 한 탓에 이여운도 기분이 나빠 보였다. 말투에 날이 섰고 나는 급속도로 쭈그러들었다.

“아니, 그건 아닌데. 그냥 내 마음이 좀 그랬어. 어제도 못 만났으니까…….”

“…그래, 뭐.”

더는 뭐라 하지 않았지만 딱 봐도 이여운은 기분이 상해 버렸다. 아니… 내가 그렇게 비상식적인 반응을 한 거야? 물론 제 발 저려서 나온 반응이긴 했지만, 농담으로라도 바람을 의심하는 건 연인 간에 선 넘는 거 아닌가.

진짜로 바람을 피우고 있는 시점에서 내 쪽에서 의심받았다고 빡쳐하는 건 진짜 개새끼가 맞긴 한데.

딱딱해진 분위기에 입맛이 싹 가셨다. 문제는 이여운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기껏 비싼 밥을 사는데 녀석이 깨작대고 있으면 나는 정말로 속상할 것이다.

잠시 녀석도 나도 말없이 허공만 노려보고 있을 때, 고기가 나왔다. 내가 손을 뻗기도 전에 녀석이 먼저 집게를 잡아 고기를 불판에 올렸다. 아직 불판이 달궈지기도 전인데…! 또 욱할 뻔했다. 대체 누가 소고기를 저렇게 굽냐고!

“내가 구울게.”

“됐어.”

……빌어먹을…….

어색하기 짝이 없는 침묵 속에 녀석이 애꿎은 고기를 망치고 있으니 내 속이 더더욱 타들어 갔다. 저대로 두면 내 속처럼 고기도 시커멓게 타 버릴 것이다.

아까 바람 피우냐고 농담을 했을 때 그냥 나도 적당히 눙치고 넘어갔어야 했는데 나는 왜 그런 대처를 하지 못했을까. 후회해 봐야 엎질러진 물이었지만 괴롭기 짝이 없었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는 정공법이 답이리라.

“정색해서 미안해.”

나는 바로 이여운에게 사과했다.

“어제 시험 떨어진 것 때문에 사실 아직도 좀 우울하긴 했거든. 근데 너 보니까 좀 기운이 나서 맛있는 거 같이 먹고 싶었어. 나 때문에 그간 데이트 못 해서 미안하기도 했고.”

이렇게 사과를 하게 될 거였으면 아까 급발진을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제기랄.

하지만 각 잡힌 사과의 효과는 확실했다. 이여운의 얼굴이 조금 풀리기 시작한 것이다.

변명으로 댄 ‘어제 운전면허 시험 떨어져서 우울했다’도 완벽한 명분이었다. 어제 시험 합격했으면 어쩔 뻔했어. 떨어져서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응시료가 피눈물 나게 아까웠는데 이제 보니 아주 싼 값이었네, 응.

“내가 잘못했어. 다신 안 그럴게.”

“어, 알면 잘해. 죽빵 날릴 뻔.”

“그러니까 제발 집게 좀 주세요.”

“…….”

“너 고기 진짜 못 구워.”

“미친놈아.”

이여운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웃었다. 기분이 확실히 풀린 것 같았다. 나는 얼른 녀석에게서 집게를 양도받았다. 한우 소갈비가 이렇게 소중한 것이다.

내가 신중히 고기가 익어 가는 정도와 양념이 타지는 않을지를 살피는 동안 이여운이 입을 뗐다.

“나도 너 진짜로 의심해서 한 말은 아니야. 농담인 거 알지?”

“응. 근데 엄청 재미없는 농담이었어. 앞으로 그런 소리는 하지 마.”

“알았어.”

이것은 이여운 나름대로의 사과였다. 나는 빙긋이 웃으며 능숙한 손놀림으로 고기를 잘랐다. 한결 분위기가 부드러워져서 이제야 좀 숨통이 트였다.

“근데 너 정색하니까 더 수상함.”

“아, 그만하라고.”

마지막 농담으로 앙금도 완전히 사라졌다. 이여운은 키득거리며 웃었고 역시나 웃는 얼굴이 보기 좋았다.

그래, 다 내가 잘못했다.

녀석을 속이고 배신했으니 더 잘해 주겠노라, 몇 배로 갚겠노라 다짐한 게 엊그제인데 오늘 내가 감히 네게 화를 냈다. 내가 그래서는 안 되는 거였는데…….

그러니 정말로 진짜로 내 외도 사실을 들키지 말아야 한다.

…결론이 좀 이상한 것 같긴 하지만 일단 그런 걸로 치자.

“자, 먹어 봐.”

노릇노릇 맛깔스럽게 구워진 고기를 녀석의 접시에 올려 주었다. 그리고 나도 집게를 놓고 한 점을 먹었다. 짭짤하고 달착지근한 양념 맛이 혀를 즐겁게 했고 입 안 가득 퍼지는 육즙의 풍미가 환상적이었다. 역시 비싼 값을 하는 맛이다.

“맛있다.”

“응, 이 집 괜찮네. 팍팍 먹어. 많이 먹어.”

고기를 먹고 있으려니 냉면이 나왔고 양념 갈비 1인분을 더 주문했다. 역시 냉면은 고기에 싸 먹어야 제맛 아닌가.

“무리하는 거 아니야?”

“응. 우리 앞으로는 학식만 먹어야 할 듯.”

“따로 먹고 만나.”

“히도이…!”

“아, 오타쿠 냄새. 쪽팔려서 같이 못 다니겠네.”

“그럼 집에 두고 너만 혼자 볼래?”

“음, 여기 냉면 굿.”

“여기서 무시를 한다고?”

“김치도 맛있네, 이 집은.”

이거다, 이거. 놀려 먹고 이겨 먹으려 들지만 피차 기분 상하지 않고 낄낄거릴 수 있는 대화. 우리 관계가 원래의 궤도로 돌아왔음에 나는 다시 한번 안도했다.

우리는 그 뒤로 계속 시시껄렁한 농담과 일상적인 대화를 이어 갔다.

“어제는 가족들이 많이 놀리지 않았어?”

“아. 생각보다는 안 놀리더라고. 동생이 다행히 독서실에서 늦게 와가지고.”

“그럼 운전 연습하고 저녁 먹으러 부모님이랑 셋이서 간 거야?”

쿨럭……. 순간 나는 사레에 들릴 뻔했다.

맞다, 그런 설정이었지. 운전 연습을 위해 부모님과 차를 타고 멀리로 나갔다가 식사를 하고 돌아왔다는.

실상은 이청영 교수와 신나게 몸을 섞고 내가 늦게 들어갔다. 시험에서 떨어진 내가 많이 속상해서 방황을 하다가 들어왔다고 생각을 하셨는지 아빠는 물론 엄마도 나를 갈구지 않았다. 요즘 필수 연수 시간이 줄어들어서 떨어지는 사람이 많더라 하며 위로해 주기까지 하더라. 그때 이미 내 hp는 풀이었는데 말이다. 문제는 스태미나였…… 흠흠.

“어어, 셋이.”

“뭐 먹었어? 맛있는 거 먹었어?”

“아니 그냥 패밀리 레스토랑 갔었어. 엄마가 어디서 외식상품권을 받았다고 해가지고.”

내 입에서는 거짓말이 술술 쏟아졌다. 오늘 여운이를 만나기 직전까지 나름대로 필사적으로 변명거리를 생각해 둔 덕분이었다.

“그래? 뭐 먹었어? 거기 이번 시즌 메뉴 맛있던데.”

“나는 그냥 늘 먹던 파스타랑 스테이크……. 아니, 넌 언제 갔었는데 이번 시즌 메뉴를 먹었어?”

“아, 나? 나야 뭐. 동기들이랑 갔지.”

“지난주에?”

“어어. 수요일이었나? 내가 말 안 했나?”

“동기들이랑 밥 먹는다고 하긴 했던 것 같아. 스테이크 먹으러 간 줄은 몰랐지. 이번 시즌 메뉴 어땠는데?”

“다른 건 다 아는 그 맛이었는데 랍스터가 생각보다 괜찮더라고? 엄청 달착지근하고 쫄깃쫄깃하더라.”

“오, 돈 좀 썼겠는데.”

“얻어먹는 자리니까 갔지. 나한테 그럴 돈 있었으면 너랑 먹지.”

앗, 이건 좀 감동인데…? 내가 감격한 눈으로 보자 이여운이 피식 웃었다. 아, 정말 너무 멋져. 아앗, 그리고 양심이 아파 와…….

아니 그런데 누구를 꼬시려는 것도 아니고, 그냥 동기한테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밥을 샀다고? 역시 우리 학교에 돈 많은 놈들이 많긴 한가 보다.

“누가 쐈는데?”

“어? 아아. 정수가.”

“오정수? 그 친구 뭐 좋은 일 있었나?”

“그 새끼 곧 생일이라 미리 생파 했어.”

“그 친구 매번 생일 선물 거하게 요구하는 걔지? 이번엔 뭐 사 줬어?”

“미친놈이 시계 이 지랄 해서 아직 안 샀어.”

“정신 나갔네. 다이소에서 벽시계나 하나 사다 줘.”

“굿.”

이여운은 냉면 그릇을 들더니 내 그릇에 건배하듯 챙 부딪치고 국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그리고 대포 한 잔 빨고 거나하게 취한 아재처럼 탕 소리가 나도록 냉면 그릇을 내려놓았다.

“어우, 시원하다.”

“맛있게 먹으니까 너무 좋다. 고기 더 먹을래?”

“배불러.”

“나 이 정도는 감당할 수 있어. 동기가 랍스타를 사줬다고 하니 갑자기 위기의식이 느껴지잖아.”

“뭐래. 배부르다고. 이제 뭐 할래?”

하아, 이렇게 내 진심을 몰라주다니. 절대 미안한 짓을 해서 돈으로 해결 보려는 게 아니라고. 이게 다 사랑이라니까? 그리고 또 재력은 엄청난 매력 포인트잖아? 또 국산차긴 하지만 곧 오너 드라이버도 될 몸이라고.

물론 다 부모님이 해 준 거긴 하지만.

“전에 정부원 형 차도 외제차였지?”

“나야 모르지.”

“그 형 금수저인가?”

“모른다니까. 그 형은 뜬금없이 왜?”

“아니. 새삼 사람들 돈 참 많다 싶어서.”

“너도 아쉬운 거 모르고 쓰잖아. 지금 좀 재수가 없으려 하는데.”

그렇게 말하면 할 말은 없고요……. 하지만 용돈 아쉬운 줄 모르는 건 이여운도 마찬가지 아닌가.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은 듯이 말은 하지만 원하는 건 다 해 주는 것처럼 말을 할 때도 있었으니까.

“근데 진짜 뭐 하지.”

“여기 근처에 아인슈페너 맛집 있는데 한 잔 마시러 가자.”

“아, 거기 사람 개많던데. 주말이라 앉을 자리도 없을 듯.”

“음, 그럼 테이크아웃하지 뭐.”

“콜. 근처에서 룸 잡고 쉬자.”

아니, 날씨도 좋은데 굳이……? 숙소 예약 앱을 켜는 여운이를 보며 문득 나는 또다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어제 나 세 번이나 했다. 네 번을 하고 났을 때처럼 죽을 듯이 피곤한 것은 아니었지만 하고 싶어서 불끈불끈한 상태도 당연히 아니었다. 물론 이여운은 늘 멋지고 예쁘고 사랑스럽고 잘생기고 난리도 아니었지만 오늘 내 컨디션이 조금, 그렇지 않은가.

“어, 괜찮은 데 있다. 예약할게.”

“어? 어어.”

하지만 무어라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그럴 거였으면 차라리 오늘 내가 데이트 코스를 완벽하게 짜 왔어야 했다. 어디 들어가서 쉴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신나고 재미있는 코스를 미리 준비해 놓지 않은 내 실책이었다.

빌어먹을……. 하지만 나는 알파였다. 알파라면 자고로 절륜함이 종특 아니겠는가. 사랑해 마지않는 상대와 접촉하면 당연히 흥분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나가자.”

“어어.”

나는 계산서를 들고 카운터에서 계산을 했다. 우리의 2주년 기념일 때나 보았던 액수의 금액이 나왔다. 그러리라 예상은 하고 있었으므로 결제를 하려니 허허로운 웃음이 나왔다. 그래 인생 뭐 있나…….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데 맛있는 거 먹고 살아야지…….

그 뒤로 우리는 햇살이 뜨겁게 내리쬐는 거리를 걸어 카페로 향했다. 크림을 듬뿍 넣은 달달한 아인슈페너를 한 잔씩 샀다. 그 이후로는 바로 숙소행이었다.

체크인을 하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방으로 올라갔다. 음……. 근데 역시 나 정말 쓰레기 같다. 내가 나 자신을 견딜 수가 없어서 합리화를 하고 있다지만 새삼스럽게 다시 자기혐오가 머리를 들었다.

어제는 나를 위로해 준다던 이여운의 연락을 씹고 이청영 교수를 선택했던 내가, 오늘은 이여운을 안는다. 발정난 개새끼도 아닌데 이 엉덩이 저 엉덩이에 헥헥대는 내 꼴이 대체 무어란 말인가.

여운이에게 미안하다. 그러니 더욱 들켜서는 안 된다. 들키지 않으려면 녀석과 섹스를 해야 한다. 나는 물론 녀석을 사랑하고 그러니 녀석을 안고 싶지만, 오늘은 감히 사랑 때문에 하는 섹스라고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역시 여운이가 원한다면 해야겠지.

녀석이 만족할 만큼 즐거움을 주기 위해 노력해야 하리라. 미안한 만큼 더욱 성심성의껏.

“먼저 씻어.”

룸에 들어서자 여운이가 말했다. 역시나 녀석은 의욕이 충만한 모양이었다. 그래, 우리는 늘 그런 커플이지 않았던가. 그러니 나도 힘을 내야 한다…!

“같이 씻지.”

내 입이 멋대로 그런 소리를 잘도 내뱉었다. 아쉽다는 듯이. 내뱉고도 깜짝 놀랐는데 이여운은 피식 웃으며 먼저 씻으라고 내 등을 떠밀어 주었다. 아니, 물론 같이 씻는 거 좋지. 너무 좋지. 정말로 아쉬웠으니 내 무의식이 시켜서 입이 뇌를 거치지 않고 그렇게 떠들었겠지.

어쨌거나 나는 샤워를 했다. 아침에 씻었지만 혹시라도 몸에 다른 흔적이 남아 있지는 않을까 확인하며 꼼꼼히 씻었다. 절대로 시간을 끌고 싶어서 뭉그적댄 게 아니라고 해 두고 싶다.

아무튼 아침에 공들여 매만졌던 머리까지 굳이 다시 감고 물기를 열심히 털어 낸 뒤 가운을 입고 욕실에서 나왔다.

그리고 잠시 멈칫했다.

이여운이 침대에서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일단 녀석의 옆에 있던 리모컨을 들어 TV를 껐다. 그리고 방 안의 조명을 낮춘 뒤 최대한 조용히 침대 위로 올라갔다.

“…여운아.”

소곤소곤 작게 속삭이며 녀석을 조심스럽게 끌어안았다.

“으응…….”

그러자 웅얼거리는 소리를 내며 그가 내 품에 안겨들었다. 입이라도 맞춰 올까 봐 나도 모르게 조금 긴장했는데, 여운이는 그대로 더 자고 싶은 모양이었다.

“어디 아픈 건 아니지? 그냥 잘래?”

“응…….”

대답을 하는 건지 잠꼬대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확실한 것은 내 샤워가 헛수고가 되었다는 것. 물론 이런 헛수고가 지금의 나에게는 몹시 반가웠다. 솔직히 꽤나 안도를 해 버렸다.

그렇게 녀석을 끌어안고 있기를 얼마간. 품에 안겨 있는 게 답답했는지 여운이가 몸을 뒤척였다. 내가 녀석을 안은 팔을 풀자 녀석이 반대쪽으로 굴러갔다. 떨어진 두 몸이 각자 천장을 향했다.

여운이를 안고 있는 건 물론 기분 좋은 일이지만 사실 자세가 편하다고는 말을 할 수가 없지 않은가. 나를 끌어안은 이여운에게도 마찬가지일 테고.

나는 TV를 다시 켠 뒤 소리를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줄여 OTT 서비스를 이용했다. 전에 보다가 말았던 미드를 켜놓고 핸드폰을 집었다.

그리고 무언가 생각나는 게 있어서 이청영 교수와 주고받았던 메시지를 다시 읽어 보았다. 어디 호텔 몇 호실로 오라는 메시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온 것은 ‘콘돔 사와’였으니. 이것들을 지우지 않았다는 나의 허술함을 책망하며 나는 메시지 전부를 날려 버렸다.

내친 김에 이청영 교수의 이름도 바꾸었다. 이 교수님. 깔끔하게 이름은 그냥 날려 버렸다. 그러고 나니 안도감이 확 번지면서 속이 탁 풀리더라. 내 핸드폰에 이제 내 부정에 대한 단서는 완전히 없어졌다.

깊은 안도감 속에 나는 핸드폰을 대충 옆에 던져 놓고 TV 화면에 시선을 고정했다. 남자 주인공이 바비큐를 열심히 굽고 있었다. 스테이크의 비주얼이 썩 훌륭해 보였다.

그나저나 오늘 고기 참 맛있었는데 다음에 이 사람한테 함께 먹으러 가자고 권해 볼까. 요즘 나 만날 때면 돈을 많이 쓰고 계실 테니 나도 뭔가 해 드려야 할 텐데. 고기를 먹는 장면을 보니 그런 멍청한 상념이 머릿속에 차오른다. 눈꺼풀이 무거워지며 나도 조금 잠이 왔다.

옆에서 이여운이 고른 숨소리를 내며 잠들어 있었다.

그와 섹스를 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심란했던 아까의 일이 아주 먼 옛날에나 있었던 듯이 느껴졌다. 지금의 내 마음은 그저 평온할 따름. 푹신한 침대로 푹 파묻히는 듯한 안정감이 정신을 나른하게 만든다.

참으로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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