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월요일. 많은 사람들에게 가장 싫어하는 요일로 꼽히는 날일 것이다. 기상 시간이 일정한 것과는 별개로 나 역시도 당연히 주말을 사랑하는 사람이었으니.
하지만 오늘은 어쩐지 시작부터 기분이 좋은 월요일이었다.
평소보다 15분 정도 일찍 눈이 뜨였는데 피로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눈을 한번 비비고 곧장 침대에서 일어나 뜨거운 물로 샤워를 했다.
얼마 전 송희와 아빠가 백화점에 갔다가 내게 잘 어울릴 것 같아서 샀다는 파스텔톤의 핑크색 셔츠에 회색 슬렉스를 입었다. 역시 남자는 핑크. 봄 향기가 물씬 풍기는 예쁜 분홍색이 놀라울 정도로 나에게 찰떡이었다.
내친 김에 시계도 차고 머리카락도 조금 더 공들여 세팅했다. 나 오늘 조금 더 멋져 보이는 것 같기도.
내가 늘 이렇게 자뻑이 심한 사람은 아닌데, 오늘은 거울 속 내 모습이 상당히 마음에 들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침부터 기분이 상쾌했기 때문이었다. 마치 햇살이 가득 내리쬐는 따사로운 봄날처럼 간질간질하고 붕 뜨는 기분이랄까.
이런 날 차를 운전해서 가면 얼마나 좋을까. 그럼 조금 더 멋있었을 텐데. 다가오는 시험에는 반드시 합격하리라.
새삼 아쉬운 마음을 안고 학교로 향했다. 캠퍼스를 분홍빛으로 물들였던 벚꽃도 거의 다 떨어지고 없는데 묘하게 가슴이 두근두근했다. 봄이란 이렇게나 설레는 계절인 것이다.
“올, 임재희 오늘 좀 멋진데?”
역시. 박의찬 놈의 말에 나는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오늘 멋진 것은 팩트인 듯하다.
“데이트?”
“아닌데.”
나야 물론 이여운을 매일 만나고 싶지. 하지만 오늘은 만날 수 없는 날이었다. 여운이도 자기 일로 바쁘고, 나도 이청영 교수와 논문 읽는 시간을 가져야 했다. 저녁에는 엄마랑 운전 연습을 하러 나갈 예정이었다.
“근데 뭘 이렇게 힘을 주고 왔어.”
어, 음. 그러게?
오늘 날씨가 너무 좋아서 조금 설레서 그랬던 것 같다. 어느새 하늘에 구름이 내려앉긴 했지만 아침에는 바람이며 햇살이 완벽한 봄이었잖아.
그리고 딱히 평소보다 더 꾸민 것도 아니지 않나. 그냥 잘 입지 않던 색깔의 옷을 입었을 뿐이다. 대답할 말이 없어 그저 어깨를 으쓱해 보이자 녀석은 더는 캐묻지 않았다.
“후배들 몇 명 점심 사 주기로 했는데 같이 가자.”
“굳이?”
나는 선후배와 크게 교류를 하지 않는 타입이었다. 자발적인 아웃사이더라고 들어봤나 모르겠네.
“아 내가 살게.”
“콜.”
하지만 아싸도 공짜 밥은 좋아해.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오케이했다.
“커피는 네가 사 주라. 누가 양주를 처먹는 바람에 통장에 빵꾸 났어.”
징징대는 말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러고 보니 그런 일이 있었다. 나를 학부 연구생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은 놈을 엿 먹이고 싶어서 비싼 술을 진탕 마셨었다. 나도 술병이 나서 한동안 고생했으니 실로 이 한 몸을 희생한 고육지계라 할 수 있었다.
그때는 이 새끼를 죽이고 나도 죽을까 싶었는데 사람 일이란 한 치 앞도 모를 것이었다. 이 새끼가 아니었다면 나는 이청영 교수와 얽힐 일이 없었을 테지만 그랬다면 오메가와의 섹스가 선사하는 열락 역시 몰랐을 터.
내가 우울한 목소리로 전화를 했다는 이유로 나와서 밥을 사 주고 달큰한 향기를 가득 뿜어내 위로를 해 주었던 이청영. 그가 실험실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으리라 생각하니……. 이상하게도 마음이 퍽 너그러워졌다.
“그래, 커피는 내가 살게.”
“아싸. 너 카레 먹지? 후문 쪽에 괜찮은 카레집 생겼는데 거기 가자.”
“그러든가.”
오전 강의가 끝나고 나는 박의찬과 함께 후문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만난 후배들은…….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선배님.”
“아, 네. 안녕하세요.”
봄날의 정취가 물씬 묻어나는 하늘하늘한 스커트를 입은 두 명의 여자 후배들이었다. 하얗고 말간 얼굴에서 웃음과 함께 피어오르는 달착지근한 꽃내음 덕분에 알 수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오메가라는 것을.
내가 슬쩍 미간을 찡그리며 박의찬을 보자 녀석은 내 시선을 피했다.
“하하하. 자, 갈까? 가면서 소개할게. 두 사람 다 재희 처음 보지?”
“신입생 환영회 때 잠깐 뵌 적 있었어요. 아, 인사는 못 드렸고요.”
“다른 테이블에 앉아 계셨는데 너무 빨리 가셔서 대화를 못 나눠 봤어요. 선배님 엠티도 안 오셨죠?”
“어. 일이 좀 있었어서.”
박의찬 이 새끼는 애인도 있다는 놈이 오메가 처자한테 밥을 왜 사 줘?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말도 모르나? 어디 감히 유교의 나라에서 임자 있는 알파가 외간 오메가와 숫자를 맞춰서 식당을 가?
하지만 마냥 떨떠름한 기색을 내보이는 건 이 두 후배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다. 그래서 통성명도 하고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며 카레 식당으로 향했다.
흑흑, 이건 절대로 바람이 아니다. 내가 이러고 싶어서 이러는 것도 아니고. 게다가 진짜 바람은 따로 있지 않은가.
그런데 나 왜 늘 박의찬한테는 이용만 당하는 느낌이지?
“선배님은 여자친구 있으세요?”
“나? 없는데.”
전에 분명히 예쁜이 만나러 가고 싶다는 소리를 하지 않았던가. 헤어지기라도 한 것인지 녀석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정하듯 애인의 존재를 부정했다. 저 돌 맞을 놈은 눈앞의 후배 중 하나를 점찍어 둔 게 분명했다. 혹은 둘 중에 누구라도 걸려라 하는 마음인지도 모르겠다. 역시 알파란 족속들은 죄 쓰레기야. 같은 알파라는 게 수치스럽다고.
“재희 오빠는요?”
“와, 소라야. 나는 선배라고 부르고 재희는 오빠야?”
“앗, 말이 헛나왔어요.”
“그냥 편하게 오빠라고 불러 그럼.”
얼씨구. 능청떠는 꼴을 보고 있으려니 소름이 쭉 끼쳐 왔다. 우리 아빠 딸내미도 나한테 오빠 소리를 안 해서인지 오빠 소리도 좀 이상하고.
“재희 오빠는 여자친구 있어요?”
“어. 나는 만나는 사람 있어.”
“아, 진짜요? 오래 만나셨어요? 우리 과?”
“우리 학교인데 다른 과야.”
“얘 애인은 베타야. 너희 1년 넘었지?”
“한참 넘었지.”
“와, 베타랑……. 엄청 예쁘신가 보다.”
음. 알파인 내가 오메가 남성도 아니고 베타 남성이랑 연애를 한다고 하면 아무래도 사람들이 낯설게 받아들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나는 그냥 어깨를 으쓱하며 웃고 말았다. 애인이 남자라는 게 부끄러운 건 아니었다. 분위기가 이상해질 수 있으니 말을 하지 않는 것뿐.
“진짜 대단하시다. 알파와 오메가가 서로 끌리는 건 본능이라고 하잖아요.”
“저는 가끔 알파 페로몬 맡으면 갑자기 막 두근거리고 관심 가고 그럴 때도 있던데, 오빠는 그런 적 한 번도 없으셨어요?”
“어. 딱히?”
지금도 그랬다.
눈앞의 후배님들은 분명 아름다운 오메가들이었다. 억제제를 먹는다 해도 페로몬이 지닌 향취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특별한 화학적 효과를 갖지 못함에도 사람을 매혹케 하는 향기가 마치 향수처럼 남곤 했다. 지금 내 코끝에 맴도는 싱그러운 향기 역시 저 오메가들의 체취였다.
게다가 한 명은 분명 나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게 명확했다. 애써 밝은 척하지만 묘하게 경직된 얼굴을 보면 알 수 있었다. 본의 아니게 인기가 많아 고백해 오던 이들을 숱하게 거절해 온 내가 어찌 모르겠는가.
그러나 내 심장은 요지부동이었다. 그녀들의 아름다운 얼굴도 늘씬한 몸매도 고혹적인 향취도 나를 설레게 하지 못했다. 그 이전에 내게 고백을 해 왔던 여러 오메가들이 그러했듯.
하지만 단 한 번도 오메가에게 흔들린 적 없다는 내 대답은 물론 거짓말.
흔들리다 못해 아예 넘어가 버린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것도 딱 한 사람에게, 여러 번.
“진짜 많이 좋아하시나 보다.”
“오빠 애인 좋겠다. 부러워요.”
장난스레 말하는 두 사람에게 나는 천연덕스럽게 웃어 보였다. 정말로 한 사람에게만 지고지순한 사랑을 바쳐왔다는 듯이 당당하게.
물론 사랑하는 건 한 사람이 맞다.
하반신이 반응하는 게 두 사람이라서 그렇지.
“음, 너희는 학교 생활 하면서 뭐 어려운 건 없어?”
내가 사랑꾼 이미지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시간이 너무 길어진다고 생각했는지 박의찬이 시의적절하게 화제를 돌렸다.
역시나 박의찬은 사람을 대하는 데 난 놈이었다. 굳이 내가 끼지 않아도 대화는 물 흐르듯이 진행되었고 나는 몇 마디 맞장구를 치는 것을 제외하고는 밥만 처먹었다. 인테리어도 괜찮았지만 음식 맛도 아주 좋은 식당이었다.
나는 대화를 흘려들으며 멍하니 딴생각을 했다.
여운이는 이런 일본식 카레는 좋아하지 않았다. 이청영 교수는 좋아하려나? 좋아한다면 한번쯤 같이 와서 먹어도 좋을 것 같은데. 아, 교수님과 단둘이 식사를 하기에는 너무 학교 근처일까. 하지만 지도 교수와 학부 연구생이 식사를 하는 게 뭐 그리 이상하게 보이겠어? 카레 좋아하시는지 한번 여쭤보기나 할까. 좋아하신다면야… 내가 만들어 드릴 수도 있고. 카레가 뭐 어렵나?
식사를 마치고 나왔을 때 세상이 조금 어두워져 있었다. 아침에 그렇게 맑았던 것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구름이 짙게 깔린 것이다. 금세 비가 쏟아질 것처럼 공기가 축축해졌고 묘한 비린내가 코끝을 자극했다.
오메가의 페로몬에는 아무 느낌이 없으면서 이런 비린내는 잘도 맡는단 말이지.
그리고 우리가 커피를 사서 나왔을 때는 정말로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바닥을 점점이 물들이는 빗방울이 꽤나 굵직했다.
“아, 저 우산 있어요.”
“저도 있어요.”
준비성 좋기도 하지. 두 후배님이 우산을 꺼내 들었다. 하나는 핫핑크에 다른 하나는 프릴이 잔뜩 달린 민망한 모양새였지만 우산은 우산으로서의 기능만 충실하면 되는 법. 하나를 여자애 둘이 나눠서 쓰고 다른 하나를 박의찬과 내가 쓰면 되겠거니 생각했을 때였다.
“아, 그럼 소라가 오빠 씌워 줄래? 고마워.”
나는 이번에도 박의찬에게 이용당했다.
내 의사를 묻지도 않고 박의찬이 소라라는 후배가 꺼낸 우산을 펼치더니 그 밑으로 쏠랑 들어가 버린 것이다. 여기에 소라 후배가 어버버 휩쓸려 가 버리니, 카페 앞 처마 밑에는 나와 다른 후배 둘만 남아 버렸다.
“저희도 갈까요?”
“어. 내가 들게.”
“감사해요.”
아까 얘가 자기 이름을 소개하긴 했는데, 잘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야 제대로 안 듣고 있었으니까.
어색한 침묵 속에 나는 여자애가 젖지 않도록 최대한 노력했다. 늘씬한 실루엣을 드러내며 흘러내리는 얇은 시폰 재질의 롱 원피스가 젖으면 이 친구가 꽤나 곤란해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프릴이 잔뜩 달린 3단 우산은 사이즈가 작은 편이라서 나는 거의 머리만 젖지 않는 수준으로 한쪽 어깨를 고스란히 빗물로 적셔야 했다. 아침에 공들여 만진 머리라도 젖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기껏 새 옷을 입었는데 비를 맞아서 속이 쓰리다고 해야 할지. 실험실에 갈 때 그리 깔끔한 꼴이 아닐 것 같아 괜히 조금 짜증이 났다.
“저기, 재희 오빠.”
그러고 보니 침묵 속에 걷고 있었다. 옷 젖는 게 자꾸 신경이 쓰여서 나도 모르게 그만. 하지만 이 친구와 딱히 할 말도 없었다. 내가 애인이 있다고 했더니 아쉬워하는 기색을 숨기질 못하던 친구랑 무슨 대화를 하냐고…….
“사실 제가 의찬 선배님한테 재희 오빠랑 인사 한번 하고 싶다고 부탁드렸었어요.”
“어…… 그랬어?”
아니, 굳이 이런 얘기 나한테 안 해도 되는데. 비가 내리는 탓에 기온이 떨어졌음에도 등줄기에 땀이 다 났다. 이거 좀 부담스럽다고.
“네. 오빠 저는…….”
오메가의 페로몬이 강하게 내 후각을 자극했다. 마치 밀실에 갇힌 것 같았다. 자그마한 우산이라는 천장 아래 폭포처럼 쏟아지는 빗줄기라는 벽으로 이루어진 밀실. 그 안에 가득 오메가의 향기가 차오르고 있었다. 그 정도로 페로몬이 흘러나오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는지 후배는 홍조를 띤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몸이 젖지 않도록 노력했음에도 빗방울이 튀었는지 아니면 습기 때문인지 속눈썹에 자그맣게 물방울이 맺혀 반짝거렸다. 그녀의 눈동자 역시 한층 더 촉촉해 보였다. 한 호흡 한 호흡마다 달큰한 향기가 쏟아졌다.
“저는 기다릴 수 있을 것 같아요.”
……이 오메가가 지금… 아마 작정을 하고 나를 유혹하고 있는 것이리라.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페로몬을 풀풀 흘려 대면서.
세상에, 요즘 오메가들은 다 이렇게 적극적인가. 잠시 뒷골이 당겼다. 물론 알파가 그러하듯 오메가도 욕구가 있고 감정이 있을 테니 페로몬으로 상대를 유혹할 수도 있기야 하겠지. 얘는 특히나 이제 막 성인이 되어 연애도 하고 싶을 어린애니까.
하지만 내가 아는 어떤 오메가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라 내가 조금 놀랐다. 놀라다 못해 거부감마저 들었다.
혹시 이청영 역시 어린 날에는 이렇게 상대를 유혹하기도 했었을까.
지금도 마음에 드는 상대에게는 적극적으로 대시를 하는지도 모른다. 나를 상대로 그러지 않는 것은… 내가 학생이라서.
아니면 그 정도로 매력이 있는 건 아니라서.
“…그러지 마.”
나는 조금 더 여자애와의 거리를 벌리며 말했다. 덕분에 어깨가 완전히 젖게 생겼지만 이 페로몬으로 샤워를 하느니 빗물로 샤워를 하는 편이 나았다.
“뭘 기다려. 나보다 괜찮은 놈이 세상천지에 널렸는데.”
“…….”
후배가 고개를 푹 수그렸다.
하지만 내 말은 틀린 말이 아니었다. 네 옆에 있는 사람은 사랑꾼인 척하는 쓰레기란다. 쯧쯧. 이 험한 세상 어떻게 살아가려고 이렇게 사람 보는 눈이 없어.
마침 의학관이 코앞이었다. 현관으로 들어선 뒤 나는 우산을 접어 팡팡 턴 뒤 후배에게 넘겼다.
“감사합니다.”
“뭘, 덕분에 비 안 맞고 왔네. 조심히 들어가 봐.”
“네, 커피 잘 마실게요, 선배님.”
음, 역시 호칭은 오빠보다는 선배가 듣기가 좋구만. 슬며시 웃어 보인 뒤 나는 강의실로 향했다. 두 시간짜리 강의만 들으면 이제 실험실로 갈 시간이었다.
그전까지 옷이야 다 마르겠지만. 강의에 들어가기 앞서 화장실에 들어가서 거울로 내 꼴을 확인한 나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높아진 습도 탓에 머리가 뻗치기 시작한 것이다. 이 빌어먹을 반곱슬. 오늘 아침에 나 꽤 괜찮았는데 아무래도 다 망한 것 같다.
“흠흠, 커피 잘 마실게. 임재.”
강의실로 돌아가니 옆에 앉은 박의찬 놈이 실실 쪼개는 꼴이 몹시 보기가 싫더라. 아오, 저 약아 터진 새끼. 콧구멍으로 마시는 커피의 맛을 알게 해 주고 싶다.
“애인이랑은 언제 헤어졌냐?”
“나? 작년에 잠깐 만나다 헤어지고 쭉 솔로인데?”
“얼마 전까지도 만나는 사람 있었잖아.”
“아, 썸만 타다가 잘 안 됐어. 내가 학기 초에 워낙 바빴잖냐.”
음, 역시 박의찬은 그렇게까지 쓰레기는 아닌가. 내가 녀석에 대한 평가를 상향조정하려고 했을 때였다.
킁킁. 녀석이 갑자기 내 쪽에 코를 가까이 해 냄새를 맡더니, 제 셔츠에 대고 또 킁킁 냄새를 맡는 게 아닌가.
“아, 얘들 진짜 향기 너무 좋다.”
“……드러운 새끼.”
“아 뭐. 왜. 솔직히 좋잖아. 이거 날아갈까 봐 너무 아쉬운데, 난.”
어우, 징그러운 새끼. 변태 새끼. 역시 알파들은 최악이다.
오메가와 잠시 밀착해 있었던 탓에 녀석에게도 나에게도 오메가의 페로몬이 은은히 묻어나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시커먼 알파 새끼가 내 쪽에 코를 대고 킁킁거리는 건 상당히 불쾌한 일이었다. 당장에라도 내 페로몬을 뿜어내 녀석의 콧구멍을 쑤셔 주고픈 충동이 일어난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참았다. 굳이 당장 이 페로몬을 내 것으로 몰아낼 필요는 없으니까.
물론 내가 저 박의찬처럼 오메가의 향기를 몸에 묻혀 다니며 좋아하는 이상성욕자는 아니다. 오히려 다른 이의 페로몬이 묻을까 봐 리무버도 늘 챙겨 다니는 깔끔쟁이라고.
다만 지금 습기와 함께 옷에 밴 오메가의 페로몬을 없애지 않는 까닭은…… 뭐, 그냥, 좀. 그러고 싶었다.
내 연인 이여운은 베타. 내가 오메가의 페로몬으로 샤워를 해도 눈치채지 못하는 베타였다. 실제로 사람 많은 지하철에 타든가 오메가와 조별 과제를 함께 하며 페로몬이 옷에 밸 때가 없지 않았으나 여운이도 나도 딱히 의식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청영 교수라면 어떨까.
내 몸에 다른 오메가의 체취가 남아 있는 것을 맡게 된다면 과연 그는.
마치 미운 일곱 살 사내아이가 그러하듯 나는 의미 없이 그런 장난을 쳐 보고 싶었다. 실없는 장난이지만 몹시 구미가 당겼다.
어쩌면 조금 불쾌해하려나? 오해를 하면 상황이 상당히 난처해질 것 같으면서도 속으로 실실 웃음이 샜다. 아 솔직히 궁금하잖아?
그렇게 혼자 장난을 칠 생각에 잔뜩 부풀어 강의에 집중하지 못하기를 두 시간. 마침내 강의가 끝났고 나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방을 챙겨 들고 실험실로 향했다.
그런데 내가 막 실험실에 도착했을 때.
“청영아.”
검정색의 정장을 입은 장신의 남자가 이청영 교수를 마주하고 있었다. 묵직하고 불쾌한 향취가 실험실에 꽉 차도록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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