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아직도 잊을 수 없는 18세의 늦가을. 그 어느 날.
전국 고교 검도대회의 결승전.
상대는 가장 친한 친구이자 라이벌이었던 정승조 녀석이었다.
마주 선 곳에 나와 녀석만이 있었던 그 세계에서 우리는 오로지 검으로 부딪치고 또 부딪쳤다. 그리고 극한의 집중력을 발휘한 그 어느 한 점의 순간, 아무리 노력해도 올라갈 수 없었던 꿈의 경지에 나는 한 발을 내딛고 말았다.
그것은…… 짧고도 고요하며 기분 좋은 세계였다.
- 와아아아!
갑자기 검 끝에 닿는 상대의 가슴을 느끼고 찬물을 뒤집어쓴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헉… 헉…….”
오로지 검만을 휘두르던 고요하고 평화로운 세계에서 강제로 끄집어내어져 어안이 벙벙했지만, 이내 주변을 둘러본 순간 한순간에 소리가 증폭되며 환호성을 지르는 관중들을 볼 수 있었다.
시선을 내리자 내 검 끝에 가슴이 닿은 채 넘어져 있는 승조도 보였다.
‘내가…… 이긴 건가?’
무슨 말이라도 꺼내야 할 것 같아 내려다본 승조는 까만 호구 때문에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우승컵을 손에 들자마자 몰려드는 축하의 물결과 인터뷰를 제치고 탈의실로 들어갔다. 우승 발표와 동시에 아무 말도 없이 먼저 사라진 승조가 걱정되어서였다. 그러나 탈의실에 들어서자 내 어깨를 거세게 치고 뛰쳐나가는 것은 바로 그 승조였다.
“승조야?”
당황스러움과 함께 뛰쳐나간 승조의 심상치 않은 기운에 놀라 트로피를 팽개치고 따라 뛰어갔지만, 승조는 내 목소리를 듣자마자 더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정승조! 기다려! 왜 그러는 거야?”
승조는 큰 충격을 받은 것처럼 흔들리고 있었고, 나는 검도대회가 열린 체육관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횡단보도 앞까지 가서야 승조의 어깨를 잡아챌 수 있었다.
“승조야, 너…….”
도대체 왜 그러느냐고 물으려던 나는, 승조가 돌아선 순간 말을 잃었다. 조용하지만 대범했던 성격의 승조 녀석이 울고 있었던 것이었다. 녀석이 우는 것을 나는 그때 처음 보았다.
당황한 내 손을 쳐낸 승조는 일그러진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좋았냐?”
그 슬프고 분노에 찬 어투를 기억한다.
“뭐?”
“좋았겠지. 오늘 너는 나와 시합을 한 게 아니니까 말이다.”
나는 녀석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무슨 말이야……. 설마 우승한 것 때문에 그러는 거냐?”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 그렇게 물었다.
“나 같은 놈이 너를 이기려고 발버둥 쳐봤자, 결국 너는 또다시 더 먼 곳으로 가 버릴 뿐이라는 사실만 잘 깨달았을 뿐이야.”
승조는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웃었다.
“……뭐?”
나는 일단 승조를 진정시켜야겠다고 생각해 앞으로 다가갔지만 승조는 차도 쪽으로 물러났다. 때문에 나는 멈출 수밖에 없었다.
“정승조, 너 이 자식……. 왜 그러냐고, 도대체!”
“강무헌. 나는 도저히 너랑 이 이상 얼굴 보고 싶지가 않다.”
승조가 웃었다.
“그래……. 그러니까 이제 다시는 만나지 말자.”
그렇게 말하고 횡단보도를 건너가는 승조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나는, 갑자기 분노가 치솟아 올라 쫓아가서 주먹으로 턱을 한 대 갈겼다.
“이 자식아, 뭐가 어쨌다고? 알아듣게 말을 하고 절교를 하든가 말든가 해야 할 거 아냐! 갑자기 왜 그래, 이 미친놈아!”
횡단보도 한가운데서 맞아 널브러진 승조가 입 안이 터졌는지 피 섞인 침을 뱉고, 일어섰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놈은 비틀비틀 내게 다가오더니, 별안간 내 배를 발로 찼다.
“컥…….”
바보같이 대응을 못 한 나는 순간 숨을 들이켜며 굴러갔다.
“이 세상에서 네가 제일 증오스러워! 이렇게 말하면 알겠냐?”
그 순간, 승조의 말에 대한 충격과 함께 나는 놈의 뒤로 달려오는 트럭을 보고 더 놀랐다. 그러나 놈은 트럭이 빵빵거리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 듯, 미친놈처럼 웃으면서 소리치고 있었다.
“왜 너 같은 놈이 세상에 태어나서 나를 이렇게 비참하게 만들었을까, 이렇게 말하면 알겠느냐고! 너는 검에 대한 재능도, 밝은 성격도 모든 것을 다 타고나서 항상 뒤에 머물러 있는 나를 비웃고 있었겠지! 네놈의 바보 같은 위선에 비참해지는 나를 너는 알기나 했어? 천재라고? 그런 게 다 뭐야!”
울고 있지 않은데도 우는 것처럼 울부짖는 승조의 외침이 내 가슴을 찔러왔지만, 더 생각할 틈이 없었다. 나는 재빨리 배를 부여잡고 일어나서 녀석을 향해 달려갔다.
녀석이 순간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난 다급했다.
차가 막 코앞까지 다가온 순간, 나는 승조를 세차게 밀쳤다. 승조가 커다랗게 홉뜬 눈으로 넘어져 굴러간 바로 그 직후에—
끼이이익!
쾅! 온몸이 부서질 것 같은 충격과 함께 나는 하늘을 날았다.
그리고 허공을 부유하는 그 짧고도 긴 순간, 마지막으로 승조의 눈동자에 비친 내 모습을 기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