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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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그아웃을 하고 캡슐에서 몸을 일으키려던 순간 오른쪽 다리에 지독한 격통이 찾아왔다.

“으윽!”

콰당탕!

그대로 걸려 넘어진 탓에 부딪친 턱의 고통과 무릎의 통증 중 어느 쪽이 더 아픈지도 알 수 없을 정도였지만 간신히 벽을 잡고 일어났다. 거실의 소파까지 질질 다리를 끌고 걸어가 엎어졌다.

“헉… 헉…….”

숨을 한참 고른 뒤에야 상태가 조금 나아졌다. 갑자기 이 정도의 무릎 통증이 온 것은 오랜만이었다. 그러나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니 이유는 간단히 알 수 있었다.

‘……비가 오고 있었군.’

내 다리는 일기예보가 따로 필요 없을 만큼 비만 오면 아프고는 했다. 장마가 오는 여름철에는 컴퓨터를 사용해 집 안의 습도를 자동으로 조절해 놓도록 했기 때문에 이런 고통이 덜했지만, 지금은 슬슬 추워지는 계절이라 자동조절 기능을 켜놓지 않았었다.

오랜만이라 그런지 뼈마디 안까지 스며드는 한기와 고통이 평소보다 유난했다. 이런 데 이골이 났다 해도 아픈 게 덜 아파지는 건 아니다. 이를 악물고 집을 관리하는 컴퓨터를 불렀다.

“컴퓨터. 집 안 습도 자동조절 해 줘. ……빨리.”

[ ……습도. 빠르게 조절하겠습니다. ]

‘빨리’라는 키워드에 응답해 움직이기 시작한 컴퓨터에 의해 곧 눅눅하던 집 안 공기가 좀 탁 트였다. 통증이 조금 나아지는 것 같았다. 살 것 같은 기분에 간신히 숨을 내뱉고, 일어나서 다리를 질질 끌며 진통제가 든 선반으로 향했다. 물까지 챙기러 갈 기력은 없어 바로 네다섯 알을 씹어 삼킨 뒤 다시 소파에 앉아 오늘의 일정을 떠올려 보았다. 특별히 갈 곳도 없었고 검도장에 가는 날도 아니라 다행이었다.

“컴퓨터. 부재중 메시지는?”

[ 부재중 메시지. ……없습니다. ]

그러면 방으로 가서 통증을 잊기 위해 잠을 잘까 생각하고 있는데, 갑자기 컴퓨터가 다른 말을 해왔다.

[ …부재중 갱신 확인 목록으로 설정해 놓으신 THE MIST 웹 페이지의 업데이트가 있었습니다. 확인하시겠습니까? ]

……업데이트?

저번 3차 에피소드 업데이트 이후에 나는 더 미스트 홈페이지에 공지가 새로 갱신될 경우 컴퓨터가 그것을 체크해 나에게 알려 주도록 설정해 놓았었다. 하지만 저번 에피소드 3의 동영상과 함께 새 공지가 올라온 것이 고작 2주쯤 전인데…… 벌써 새 업데이트라고?

이렇게 빨리 웹 페이지를 갱신한 적은 이제까지 한 번도 없었다. 의아함을 느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확인해.”

[ 확인하겠습니다. 웹 페이지로 옮겨갑니다. ]

자동으로 THE MIST 웹 페이지로 들어간 화면이 공지 게시판으로 바뀌었다. 맨 위에 떠 있는 게시글을 본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 에피소드 3. 기억의 재래 ~ 두 번째의 재래 ]

메인 에피소드 공지가 또 올라와 있었다. 제목은 두 번째의 재래.

의미심장함을 느끼며 클릭하자 또다시 동영상이 나타났다. 저절로 확대되어 벽면 한쪽만 한 화면에 가득 찬 동영상이 바로 재생되었다.

[ Episode 3. 기억의 재래 ~ 두 번째 재래. ]

먼저 글자가 떠오르고, 그다음에는 키온 형이 나왔던 영상과 비슷하면서도 훨씬 더 음울한 음악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이어서 나타난 화면은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잿빛 하늘 아래 어두운 폐허에 홀로 서 있는 검은 남자의 뒷모습을 아스라이 비추었다.

검은 투구에 검은 망토, 검은 실루엣 때문에 남자의 모습은 전혀 알아볼 수 없었다. 그의 앞에는 거대한 기둥이 하나 있었는데, 폐허에서 유일하게 그나마 멀쩡히 남겨진 부분 같았다. 계속해서 그렇게 서 있을 것만 같던 남자가 품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어 기둥으로 뻗자, 갑자기 어두운 빛이 불길하게 터져 나왔다.

후와아악!

마치 잡아먹을 듯 남자의 몸을 휘감았던 빛이 화면 전체를 하얗게 만들고 나서 사그라졌다. 그 후 나타난 풍경은 같은 장소였지만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그곳은 더 이상 폐허가 아니었다. 터만 남았던 건물은 거대한 신전이 되었고, 윗부분이 부서지고 닳아 있던 기둥 표면에는 아름다운 문양이 빼곡했다. 잠시 그 문양들을 빙 돌며 비추던 화면은 그곳에서 요사스러운 붉은빛이 새어 나오자마자 다시 남자의 뒤쪽으로 물러났다. 그는 기둥에서 빛이 흘러나오든 말든 그 자리에 그대로 변함없이 석상처럼 서 있었다.

[ 기다렸다. 500년을. ]

붉은빛 안쪽에서 문득 음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착각임을 알면서도 절로 한기가 느껴질 만큼 차가운 목소리였다. 교묘한 각도 때문에 얼굴이 전혀 보이지 않는 검은 투구의 남자는 아무 답 없이 그 말을 듣기만 했다. 곧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다른 말이 계속해서 흘러나왔다.

[ 오랜 시간을 잠든 채로 기다렸다……. 이 작은 세계는 원래 나의 것. 하지만 너무 오래 잠들어 있었다. ]

[ ……. ]

[ 이제 네가 나를 깨웠으니, 나는 그에 응답하여 너에게 무한한 힘을 주고자 한다. 동의할 경우 너는 나의 종이 되어 새로운 이름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어떤가. 받아들이겠는가? ]

화면의 남자는 고개를 슬쩍 기울였다. 고민하는 것 같기도 하고 흥미를 보이는 것 같기도 한 모습이었다. 그런 남자를 향해 다가간 화면에 아주 살짝 코와 턱이 드러났다. 그런데 어두운 곳에서 하얗게 드러난 그 얼굴의 일부를 보는 순간, 왠지 아주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뭐지?’

그 생소한 느낌에 어리둥절해하고 있는 동안, 남자는 마침내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동시에 무어라고 말을 하기도 했지만 들리지는 않았다. 단지 광소를 터뜨리는 허공의 목소리로 인해 그것이 승낙의 대답이라고 추측할 수 있었을 뿐이었다.

[ 하하하하하하. 잘 생각하였다. 인간이여. 이제부터 네가 나를 섬겨 받게 될 이름을 로드 나이트라 칭하겠다. 부디 이번에 나를 섬기는 종은 예전처럼 멍청하지 않았으면 좋겠군. ]

거기까지 말하고 나서 무언가 더 말하는 듯 목소리가 울렸지만 화면은 빙글빙글 돌면서 점점 멀어져 갔다. 그때, 남자가 손에 쥐고 있던 무언가가 화면 구석에 비쳤다. 나는 황급히 그것을 자세히 보았다.

‘보석……!’

형태는 잘 모르겠지만, 반짝이는 붉은 색만은 확실히 보였다. 그것은 기둥에서 나오는 빛과 똑같은 빛을 내뿜고 있었다.

음악과 함께 화면은 점점 상승하여, 아까까지는 폐허였으나 이제는 폐허가 아닌 건물을 위에서 비추었다. 검은 어둠 속에 고고하고도 불길하게 선 그 형상을 마지막으로, 붉은빛이 눈부시게 터져 나오며 화면이 다시 검게 물들었다.

영상이 꺼지기 전 마지막으로 번지듯 솟아오른 문장은 다음과 같았다.

[ 인간들이여. 이제는 그대들을 구해 줄 누구도 존재하지 않는다……. ]

‘기억의 재래. 2. To Be Continued…….’ 하는 안내를 마지막으로, 잠시 여운에 잠겨 있던 화면이 팟 하고 꺼지며 공지 게시판으로 되돌아왔다. 그러나 나는 움직이지 않고 영상에서 들었던 단 하나의 이름만을 머리에 새길 듯 떠올리고 있었다.

‘로드 나이트……!’

잘못 듣지 않았다면 분명히 그 이름이었다. 게다가 나에게는 단 한 가지로밖에 이해되지 않는 ‘500년’의 발언까지.

“…….”

이 영상은 많은 것을 나에게 가르쳐 주었다. 이 업데이트는 분명 나의 퀘스트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그리고 내 퀘스트의 최대 난관일지도 모르는 마신의 기사, 로드 나이트 또한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 또한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한참 뒤에야 겨우 영상 밑에 글이 좀 더 붙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시선을 옮겼다.

[ 기억의 재래 에피소드 동영상은 앞으로도 계속될 예정입니다. ]

‘앞으로도 계속이라……’

속 편하게 잠이나 자고 있을 때가 아니다. 재빨리 일어서기 위해 다리에 힘을 주던 나는 갑자기 들려오는 띠링 하는 소리에 다시 고개를 돌렸다.

‘메일?’

[ 01A-1169-G89SCB 번호에서 화상 전화가 왔습니다. 받으시겠습니까? ]

화상 전화라니, 거의 처음이다시피 한 전화에 의아해하면서도 나는 일단 수락했다.

“연결해.”

[ 연결하겠습니다. ]

팟 하는 소리와 함께 웹 페이지가 꺼지고, 사람의 상체가 홀로그램처럼 입체적으로 내 눈앞에 나타났다. 그 순간 나는 오늘의 운세에 대해 진지하게 고려해 봐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건 도대체 무슨 타이밍인가. 방금 더 미스트 웹 페이지에서 동영상을 보았는데, 마치 그것이 끝나는 것을 기다리기라도 한 듯 내 앞에 나타난 사람은 새턴의 한국 지부장 윤석호였다.

[ 안녕하십니까. 오랜만이지요? 강무헌 씨. ]

“일개 고객에게 지부장이 친절히 전화를 걸 만큼 한가하신가 보군요, 윤석호 씨.”

나는 눈앞의 활짝 웃고 있는 윤석호를 바라보며 느릿느릿 말을 내뱉었다. 그러나 윤석호는 전혀 개의치 않고 오히려 눈웃음을 치며 반문했다.

[ 요즘 즐거우신가 보지요? 눈빛도 많이 살아났는데요. 그러니까 더 보기 좋지 않습니까. ]

오랜만에 봐도 그의 능글맞은 성격은 여전했다. 나는 고개를 젓고, 입을 열었다.

“컴퓨터. 연결 당장 해제…….”

[ 안 들으시면 후회하실 겁니다? ]

당황한 기색도 없는 느긋한 목소리에 나는 순간 말을 멈췄다. 윤석호의 자신만만한 얼굴에서 반짝반짝 빛이 났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뿐이었다.

“해제해.”

차갑게 내뱉자 곧바로 컴퓨터가 대답했다.

[ 해제하겠습니다. ]

팟.

윤석호의 모습이 순식간에 사라지자 비로소 기분이 좀 나아졌다.

어이가 없군. 협박이라니. 내가 그따위 말을 듣고 멈출 거라 믿었다면 오산이다. 잡친 기분으로 일어서는데, 다시 띠링 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 01A-1169-G89SCB 번호에서 화상 전화가 왔습니다. 받으시겠습니까? ]

“아니.”

[ 01A-1169-G89SCB 번호에서 화상 전화가 왔습니다. 받으시겠습니까? ]

[ 01A-1169-G89SCB 번호에서 화상 전화가 왔습니다. 받으시겠습니까? ]

[ 01A-1169-G89SCB 번호에서 화상 전화가 왔습니다. 받으시겠습니까? ]

…….

이 자식. 지금 해보자는 건가?

컴퓨터를 끌 사이도 없이 계속해서 윤석호의 전화 시도가 들어왔다. 아무리 거절을 해도 소용이 없었다. 나는 결국 표정을 딱딱하게 굳힌 채, 팔짱을 끼고 컴퓨터를 노려보았다.

“수락해!”

[ 연결하겠습니다. ]

팟.

[ 아. 무헌 씨. 제가 잘못했습니다. 그러니 제 말을 먼저 들어 보세요. ]

나는 윤석호를 노려보았다. 쓸데없이 다리만 더 아파오기 시작했다. 불쾌한 데다 통증이 더해지자 짜증이 치솟았다.

“할 말이 뭡니까?”

윤석호는 뺀질거리는 낯으로 웃으면서도 아까까지와는 달리 좀 진지해진 태도로 대화에 임하기 시작했다.

[ 요즘 올라오고 있는 에피소드 동영상. 물론 보셨겠지요? ]

“예.”

듣는 순간 왠지 다음 말이 짐작되는 질문이었지만 일단 짧게 대답했다. 윤석호는 조용히 미소 지으며 ‘이야기가 쉽겠군요.’ 하고 말했다.

[ 그 영상 시리즈에 강무헌 씨의 캐릭터 출연을 요청드리고 싶습니다. ]

예상대로였다. 어떤 유저가 어떤 퀘스트를 수행하고 있는지 정도는 회사 측에서 당연히 파악 중일 테니, 마신의 기사 유저가 영상에 나왔다면 같은 퀘스트를 하고 있는 내게도 뭔가 연락이 오리라 생각했다. 비록 윤석호가 직접 연락할 줄은 몰랐지만 말이다.

“거절하겠습니다.”

나는 더 들을 것도 없이 딱 잘라 거절했다. 그러나 윤석호는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럴 줄 알았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 많은 이들 앞에 모습을 내보이는 일이니 물론 부담스러우시겠지요. 이해합니다. 이미 출연해 주신 분들도 처음에는 모두 그렇게 말씀하셨으니까요. ]

정중히 수긍한 윤석호가 신사복 카탈로그에 나올 것 같은 포즈로 턱을 쓰다듬었다.

[ 하지만 저희도 아무 대가 없이 무상으로 이런 요청을 드리는 건 아닙니다. ]

“…….”

[ 오늘 영상을 보고 예상하셨겠지만 강무헌 씨가 현재 진행 중인 퀘스트는 미스트의 메인 에피소드와 크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퀘스트를 위해 내딛는 한 보 한 보가 게임 전체의 미래를 좌우하는 큰 움직임이 될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사실 전 강무헌 씨가 이 퀘스트의 일원이 되셨다는 사실에 정말 놀라고 감탄했습니다. 제 사람 보는 눈에 전율이 일어 견딜 수가 없더군요……. ]

“계속 헛소리나 하실 거면 다시 끕니다.”

[ 우선 이해를 돕기 위해 영상에 출연을 부탁드린다고 말했습니다만, 강무헌 씨가 일부러 뭔가를 더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처럼 계속 게임을 하시면서 퀘스트를 중단하지 않은 채 진행하시면 그만입니다. 나머지는 저희가 원하는 최적의 타이밍이 왔을 때 알아서 전부 처리한 뒤 세부 사항을 전달해 드리고 협의하여 마무리할 뿐이지요. 얼굴을 드러내고 싶지 않으시다면 두 번째 영상 때처럼 가리는 것도 물론 가능합니다. ]

내가 또다시 통화를 종료할까 싶어 겁이 났는지, 윤석호의 말이 조금 빨라졌다.

[ 그리고 출연을 결정해 주실 경우, 게임 마케팅과 관련된 중요한 업무에 협력해 주신 것과 같기에 강무헌 씨와 계약을 맺고 그에 따른 금액을 지급할 겁니다. 액수는 몇몇 세부조건에 따라 차이가 생기겠습니다만……. 이 일의 중요성과 강무헌 씨의 소중한 초상권 모두에 부끄럽지 않을 만한 금액이라 자신합니다. ……어떻습니까? ]

“흐음…….”

윤석호는 이외에도 몇 가지 사항을 더 말해 주었다. 퀘스트가 도중에 자의로든 타의로든 중단될 경우를 대비하여 계약 자체는 섣불리 진행하지 않을 것이며, 내 영상이 당장 필요한 건 아니니 얼마든지 오래 고민해도 좋다는 말 등에서 나를 설득하고자 온갖 준비를 해 왔음이 느껴졌다.

처음에는 윤석호가 마음에 들지 않아 무조건 거절하려고 했는데 세부 사항을 들어보니 나는 그저 좋다고 한마디만 하면 이후에는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 수준이라 마음이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초상권이 어쩌고 하는 문제보다도, 실은 돈 쪽이 신경 쓰였기 때문이었다.

검도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는 있지만, 거기서 받는 월급과 본래 생활비로 쓰던 보조금만으로는 윤석호에게 갚을 캡슐비를 단기간에 마련하기 어려웠다. 언젠가 복학할 때를 대비해 학비도 저축해 둬야 하고, 몸 상태 때문에 여분의 병원비도 꾸준히 빼 두느라 내 통장은 언제나 아슬아슬했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는 티가 났는지 윤석호가 한마디를 더 덧붙였다.

[ 그리고 혹시 퀘스트 관련으로 질문이 있으시다면, 강무헌 씨께는 특별히 제가 이번에 한해 대답을 해 드리죠. 질문 있으신가요? ]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없을 리가 없었다. 이 게임을 진행하면서부터 느꼈던 의문점들이 어디 한두 개였던가? 난 재빨리 머릿속을 정리하면서 입을 열었다.

“오픈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이런 내용의 대형 에피소드 퀘스트를 벌써부터 시행하는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

그래. 바로 이것이었다. 스케일이야 둘째치고라도 스토리 자체가 늘 묘하다고 생각했다. 미스트 대륙 전체가 휘말리는 커다란 전란을 배경으로 한 이 퀘스트는 어찌 보면 게임 종료가 다가올 때나 어울릴 법한 배경 스토리를 갖추고 있었다. 그 생각은 오늘 올라온 두 번째 에피소드 영상을 본 순간 더욱 커졌다.

이건 마치…… 퀘스트가 끝나면 게임도 끝나는 것 같은 느낌이 아닌가.

윤석호는 질문을 듣더니 자신만만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 하긴 뭐, 그렇죠. 다른 게임이었다면 한창 우려먹은 다음 운영이 끝날 즈음에나 집어넣었을지 모를 스토리가 배경이긴 합니다. ]

그 뻔뻔한 인정에 나는 다시 한 번 말을 잃었는데, 윤석호는 오히려 기분이 좋아 보였다.

[ 하지만 미스트는 다릅니다. 이건 그저 시작일 뿐입니다. 수많은 연계 퀘스트가 메인 퀘스트와 연결되며 거대한 이야기의 시작을 완성하지요. 아마 퀘스트의 마지막이 다가왔을 때, 강무헌 씨도 이 말을 이해하고 동의하게 되실 겁니다. ]

시작을 완성한다는 게 대체 무슨 뜻인가? 끝을 모를 자신감이 어이없었지만, 내용만은 기이하게 가슴을 두드렸다. 나는 어느새 윤석호의 말에 빠져들어 갔다.

[ 이 첫 시나리오 퀘스트가 끝남과 동시에 대륙은 또 다른 세계로 변화하게 될 겁니다. 더 큰 재미를 선사하기 위한 최초의 한 발짝. 무헌 씨가 진행하는 퀘스트는 그 시발점이 되겠죠. 멋지지 않습니까? 아직도 남은 것이 얼마나 많은데요. ]

멋진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나는 안심했다. 어쨌든 미스트가 앞으로도 얼마든지 원활하게 서비스될 것이라는 확신을 얻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곧, 내가 멀쩡한 다리로 마음껏 활동할 수 있는 기간이 아직 많이 남았다는 말과도 같았다.

한결 부드러워진 표정을 보았는지, 윤석호는 다시 아까의 대화로 돌아갔다.

[ 그럼, 저의 제안을 받아 주시는 겁니까? ]

나는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윤석호가 그제야 마음을 놓은 듯 환하게 웃었다.

[ 후후후. 탁월한 선택이십니다. ]

…기껏 결정을 내렸는데, 왜 저 웃음을 들으니 갑자기 후회되려고 할까.

나는 그 이후에 윤석호의 이어지는 설명을 더 들었다. 하지만 대부분은 개인 정보 처리나 법률 등과 관련된 긴 이야기라 머리에 제대로 들어온 건 거의 없었다. 용건을 끝마친 뒤 윤석호는 ‘앞으로도 메일 자주 보내도 됩니까?’ 어쩌고 하는 말로 다시 나의 짜증 어린 눈길을 받았지만, 굴하지 않고 기어이 한마디를 더 했다.

[ 요즘 몸은 어떠십니까? ]

“남에게 걱정 받을 만큼은 아닙니다.”

[ 괜찮으신가 보군요. 다행입니다. 그럼, 언제라도 연락 주세요. 전 강무헌 씨 연락이라면 언제든지 시간 비워 놓고 기다릴 테니……. ]

“컴퓨터, 연결 해제.”

[ 연결을 해제하겠습니다. ]

팟!

방 안은 순식간에 다시 부슬부슬 비 내리는 소리만 들리는 적막한 곳으로 변했다. 마지막 말을 하면서도 작별임을 알고 눈짓으로 빠르게 인사해 보였던 윤석호를 떠올리며 나는 한숨을 쉬었다.

역시나 속에 구렁이가 백 마리는 든 듯한 인간이다. 마주 대하고 나니 이렇게 피곤해지는 것을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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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온 형과 팔튼의 안내를 받아 자그레브로 향하는 동안, 나는 유완과 크란을 보며 여러 가지 생각을 했다. 내가 윤석호에게 받은 제의는 곧 그들에게도 가게 될 것이다. 키온 형은 아마 제일 먼저 받았겠지. 형에게는 물어볼 것이 아주 많았다.

‘자그레브에 도착하면 할 일이 참 많겠어.’

목적지를 앞둔 막바지 산길에 들어선 지 얼마나 되었을까. 갑자기 옆에서 작게 헛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기, 잠깐만요.”

목소리의 주인공은 크란이었다. 그는 심각한 표정으로 어딘가를 가리키며 물었다.

“저기 앉아 계신 할머니는 누구시죠?”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나무 밑에, 작달막한 흰 옷의 할머니가 기대어 앉아 있었다. 망부석이라도 된 듯 움직임이 없어 발견이 늦었지만 분명 살아 있는 사람이었다. 키온 형은 그 기이한 광경을 보고도 아무렇지 않은 듯 대답해 주었다.

“아. 저분……. NPC야. 그런데 좀 특별한 NPC지.”

“……특별한 NPC?”

내가 묻자, 키온 형은 크란에게 대답할 때보다 더 기분 좋게 고개를 크게 끄덕여 보였다.

“엉. 자그레브의 치료신의 사제 유저들에게 퀘스트를 주는 사람이거든. 별건 아냐. 해당 유저들이 아니면 다른 사람들에겐 전혀 반응 안 해. 나도 처음엔 놀랐었어.”

키온 형이 그렇게 말하며 이제 막 가까워진 노인 NPC를 웃음기 어린 눈으로 바라보자, 팔튼도 고개를 끄덕였다.

“나름대로 꽤 유명할걸.”

노파는 형의 말마따나 누구와도 시선을 마주치지 않고 망부석처럼 앉아 있기만 했다. 우리는 차례차례 NPC의 곁을 지나치기 시작했다. 모든 이들이 그녀를 지나치고 마지막으로 크란이 앞을 지나던 순간이었다. 별안간 이변이 일어났다.

덥석!

“우와악!”

“크란!”

뒤에서 들려오는 비명에 돌아보자, 갑자기 눈빛이 살아난 할머니의 손에 발목을 꽉 붙잡힌 크란이 버둥거리고 있었다. 놀라 발을 빼기 위해 있는 힘껏 펄쩍거리는데도 발을 붙잡은 손은 절대 떨어지지 않았다.

“왜, 왜 이러세요 할머니? 놔주세요!”

한참 동안 공포에 질려 노파와 힘 싸움을 벌이던 크란이 마침내 울상을 지었다.

“이… 이거 사제만 된다면서요? 전 치료신의 기사이지 사제가 아닌데…….”

“아니…… 이런 경우는 처음인데? 넌 봤냐, 팔등?”

“아니. 나도 처음 보는데? 버그인가?”

키온 형과 팔튼은 놀란 표정으로 말을 주고받았다. 나와 유완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모두가 상황 파악을 못 하고 당황한 사이, 인형처럼 크란의 발목을 덥석 잡고 매달려 있던 노파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보게, 젊은이.”

“예… 예?”

“자네에게서 느껴지는 이 크고도 따사로운 기운……. 혹시 자네, 치료신을 모시는가?”

“그렇…습니다만 무슨 일이신지…….”

그러자 노파가 밝아진 얼굴로 자신의 다리를 가리켰다.

“이 늙은 몸이 말을 듣지 않아 조금만 더 가면 도착할 수 있는 자그레브까지도 가지 못하고 그만 여기서 눈을 감게 생겼네. 인정이 있다면 좀 도와주지 않겠수?”

노파의 대사를 들은 키온 형이 인상을 찌푸린 채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 대사…….”

“응?”

“저 대사 말이야. 원래 퀘스트를 줄 때 하는 말과 좀 미묘하게 다른 것 같지 않아?”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어.”

팔튼이 동의하며 크란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 말을 듣지 못한 크란은 막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중이었다.

“아, 당연히 데려가 드려야죠. 자, 업히세요.”

“아이구, 고맙네, 고마워…….”

등까지 들이대는 크란에게 감동한 듯, 노파 NPC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 넘치는 정의감이 역시 크란답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키온 형이 갑자기 버럭 고함을 쳤다.

“잠깐! 야, 인마! 그 할머니 업어 버리면……!”

“예?”

크란이 반문하며 돌아보았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그의 등에 업혀 있던 노파가 갑자기 죽는 시늉을 하며 몸부림을 치기 시작했다.

“아이고, 다리야! 갑자기 다리가 너무 아파서 살 수가 없네! 미안하지만 빨리 좀 가 줄 수 없겠나? 빨리이! 에구구구!”

“네? 네!”

노파의 비명에 놀란 크란이 후다닥 앞서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 뒤를 따라 달리면서 키온 형이 소리를 질렀다.

“원래 그거 할 땐 절대로 업으면 안 돼! 업는 건 금기야, 이 자식아! 원래는 위의 나무를 꺾어서 지팡이를 만들어 준 다음에 같이 걸어가는 거라고! 업어 버리면 그 NPC 재촉 때문에 시간제한이 걸린단 말이다!”

“……저, 정말로 떴네요, 30분 제한…. 목적지는 자그레브 내 치료신 루그의 신전……! 우왁!”

“아이고! 나 죽는다아아아!”

노파가 크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엉덩이를 걷어차며 몸부림을 쳤다. 울상을 지으며 앞서 나가는 크란을 보며, 팔튼이 웃음을 터트렸다.

“크크크. 사실 저거, 업고 뛰는 걸 성공한 사람이 몇 명 없어서 유저들 사이에 금기로 지정된 거야. 지팡이를 만들어 줘서 저 NPC에게 직접 걷게 하면 독촉도 안 받고 잘 갈 수 있는데 굳이 힘들게 업을 필요 없잖아? 저 퀘스트는 보상은 별것 없는데, 한 번 실패하면 다시는 못 받는 기분 나쁜 퀘스트거든.”

“…….”

정말 뭐 그런 퀘스트가 다 있나.

멀리서 또다시 뻥 차이는 소리와 함께 꽁지 빠지게 달리는 크란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어서 쫓아가야 하는데 아무래도 순수한 달리기 속도로는 마법사인 내가 제일 느렸다. 나는 한숨을 쉬고, 그냥 쉽게 가는 방법을 택하기로 했다.

“블링크.”

슈악 하는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일행들의 후미에서 맨 앞으로 나오자 뒤쪽에서 항의 소리가 거세게 들려왔다.

“아니! 그런 건 또 언제 익힌 거냐, 카르! 그거 둘은 같이 못 써?”

“…….”

키온 형에게는 미안하지만 블링크는 일인용이었고, 나는 일행들이 다가올 즈음 되어서 다시 한 번 블링크를 쓰는 방법으로 좀 더 편하게 앞질러 나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우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곧 자그레브에 도착했다. 블링크를 써서 온 덕분에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도착한 나는 사람을 압도하는 큰 도시의 위용에 놀라 걸음을 멈췄다. 크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크란이 할머니를 업고도 엄청난 스피드를 내는 기염을 토하더니, 마침내는 내가 뒤쫓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인파 속으로 사라져 버려 종적을 놓쳤기 때문이었다. 다행히도 놈의 목적지가 이 도시 어딘가에 있을 치료신의 신전이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기에 나는 당황하지 않고 나머지 일행들이 올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자그레브는 말 그대로 중앙 도시의 위용을 여실히 보여 주는 곳이었다. 다양한 색을 칠한 지붕 아래 늘어선 높은 건물들과 그곳을 장식한 꽃, 자갈을 타일처럼 깔아 무늬를 그린 질서정연한 도로, 경비병들이 지키는 아치형 문 너머로 우글대는 사람들. 지금껏 가 본 다른 대도시들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웅장한 느낌에 기분이 고조되는 것을 느끼며 나는 막 내 옆에 도착한 일행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 자식은 먼저 들어갔어?”

빈틈없이 얼굴을 가린 키온 형이 주변을 경계하며 물어보았다. 하긴 동영상에 그렇게 얼굴이 잘 잡혔으니 어쩔 수 없겠지.

“응.”

“흠…… 대신전은 여기서 별로 떨어져 있지 않으니까 그럼 이젠 좀 천천히 가도 되겠군. 자, 다들 가자고.”

자그레브에는 타 도시에 비해 유난히 사제복을 걸친 유저들이 많이 보였다. 키온 형은 그 이유가 이곳에 있는 치료신의 대신전 때문일 것이라 설명해 주었다.

“엄청 큰 곳이거든. 아무래도 눈에 띄니까 사제로 전직하는 사람도 많아진 거겠지.”

크란을 찾아 그곳으로 향하던 도중, 나는 키온 형과 같은 옷을 입은 사람들을 보고 고개를 돌렸다. 지금까지 키온 형과 같은 무늬의 옷을 입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에 내심 놀랐는데, 생각해 보니 전에 스가의 신전이 자그레브에 새로 생겼었다는 정보글을 본 기억이 났다. 형은 아무렇지 않게 그들을 지나쳐 성큼성큼 걸었다.

“흠. 지름길이 여기던가……?”

“잠깐만. 여기 우리 길드 근처인데, 난 그냥 먼저 그쪽에 가 있어도 될까.”

길을 가늠해 보려는 듯 키온 형이 잠시 멈춰선 사이, 갑자기 팔튼이 손을 들고 심드렁하게 입을 열었다.

“내가 꼭 같이 갈 필요는 없잖아?”

우리 길드라는 말에 의아해하는 사이 키온 형은 고개를 끄덕여 보이며 손을 흔들었다.

“그럼 그놈 찾아서 그쪽으로 갈게.”

“그래라. 열 받는다고 얼굴 가린 거 또 안 쥐어뜯게 조심하고.”

“어쩌라고. 내 마음이야. 꺼질 거면 빨리 꺼져.”

“크하하하하.”

냉정한 욕설에 웃음을 터트린 팔튼 때문에 주변의 시선이 모였으나 키온 형은 개의치 않고 코웃음을 날린 뒤 다시 앞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나와 유완은 서로 한 번 마주 보고 형을 따라갔다.

“다 왔다. 여기야.”

치료신의 대신전은 정말로 눈에 띄는 위치에 떡하니 세워져 있었다. 이 큰 곳에서 어떻게 사람을 찾나 싶었지만 다행히도 크란은 정문 앞 근처에서 금방 발견되었다. 막 크란을 부르려던 나는 길 잃은 아이처럼 축 늘어진 어깨와 멍한 표정을 보고 걸음을 멈추어 섰다.

‘퀘스트에 실패했나?’

할머니 NPC도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크란…….”

조심스럽게 이름을 부르려던 순간, 놀랄 만한 일이 일어났다. 유완이 앞으로 나서서 크란을 향해 손을 흔든 것이다. 그러자 크란이 바람처럼 고개를 돌리더니 이내 한 마리 강아지처럼 뛰어왔다.

“나 드디어 해냈어!”

“응?”

떠 있는 해가 무색할 정도로 밝아진 얼굴로 달려온 크란이 나를 덥석 껴안았다.

“……윽!”

“으하하하!”

아무런 대비도 하지 않고 있었기에 순간 신음이 터져 나왔지만 굉장히 기뻐 보이는 크란의 얼굴에 나는 평소 같았으면 마법 한 방쯤 써 주었을 것을 눌러 참았다. 요즘 들어 좀 침착하게 군다 싶었었는데, 저 반짝이는 눈을 보니 어쩌면 그건 침착이 아니라 기운이 없었던 게 아닌가 하는 뒤늦은 깨달음이 들었다.

“그래서… 대체 뭘 해냈다는 거야.”

“아, 그게……. 야! 뭐 하는 거야!”

대답해 주려던 크란이 유완의 손에 어깨가 잡혀 떨어져 나갔다.

“먼지 묻는다.”

“아니, 이 자식이 날 병균 취급해?”

오랜만에 아옹다옹하는 모습을 반갑게 지켜보고 있으려니, 키온 형이 곁으로 다가왔다.

“저놈들 원래 저래?”

“응.”

고개를 끄덕이자, 형이 묘한 눈빛으로 둘을 바라보았다.

“그래… 둘 다 좀 불쌍한 놈들이구만.”

“무슨 말이야?”

느닷없는 말에 반문했지만 형은 그저 웃음만 흘렸을 뿐, 그 이상 말하지는 않았다. 잠시 후 유완과의 소모전을 멈추고 제정신으로 돌아온 크란은 다시 해맑게 웃으며 양팔을 활짝 펼친 채 소리쳤다.

“나! 드디어 제대로 된 퀘스트의 실마리를 찾은 것 같다!”

“뭐?”

깜짝 놀란 나와 달리, 방금 전까지만 해도 크란과 다투던 유완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묵묵히 어깨를 쳤다.

“그래. 축하한다.”

“뭐, 켁!”

별로 세게 치지도 않은 것 같은데, 크란은 순간 앞으로 크게 휘청하면서 넘어질 뻔했다. 그것을 보자 예전에 내가 유완에게 가볍게 등을 맞았다가 바닥에 엎어지고, 체력은 체력대로 닳았으며 창피도 창피대로 당했던 기억이 떠올라 심경이 복잡해졌다.

‘저 녀석, 분명히 힘 스탯을 올렸겠지.’

그렇게 잠정적인 결론을 내리고 있을 때, 크란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 자식, 내가 먼저 이거 받아서 질투 나냐!”

그 말과 함께 크란이 무언가를 번쩍 치켜들었다. 그것은 투명하게 빛나는 노란 보석 펜던트였다. 나는 그 물건이 무엇인지 직감적으로 알아차리고 눈을 크게 떴다.

“설마 그거…….”

“그래, 이게 바로 500년 전 샤인 나…… 우왁!”

크란이 자랑스럽게 대답하려던 순간, 얼굴색을 달리한 키온 형이 크란의 뒷덜미를 거칠게 낚아챘다.

“잠깐…! 왜 이러세요?”

“형?”

“당장 손에 든 그거 집어넣고 입 딱 다물어. 카프랑 시커먼 놈 너희 둘도 따라와. 빨리!”

왜 그러냐고 묻기도 전에 형은 곧장 크란을 끌고 골목 쪽으로 몸을 날렸다. 나는 유완과 함께 그 뒤를 따랐다. 좁은 골목을 따라 계속해서 방향을 꺾으며 뛰는 형을 따라가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블링크를 쓰기도 마땅치 않은 곳이라 점점 더 뒤처지고 있으려니, 곁에서 속도를 맞추어 달리던 유완이 갑자기 손을 내밀었다.

“…왜?”

“내가 조금 더 빠르니까.”

조용하지만 단호한 답이 돌아왔다. 잠시 망설이다 그 손을 잡자 유완이 힘을 단단히 주어 꽉 붙잡고는 방금까지와는 비교도 안 되는 속도로 뛰기 시작했다. 순간 몸이 앞으로 쏠리며 후드가 벗겨져 버렸지만 다시 뒤집어쓰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빨리 와!”

키온 형이 재촉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유완에게 이끌려 어느 건물의 뒤쪽에 도착했다.

“여기야, 여기.”

형은 크란을 그 뒷문으로 거칠게 밀어 넣은 뒤 우리를 향해 손짓했다. 나를 먼저 문 안쪽으로 밀어낸 유완이 마지막으로 들어오며 문을 쾅 닫았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자 몇몇 사람들이 놀란 시선을 보냈다. 키온 형은 전혀 신경 쓰지 않은 채 위층으로 올라가 작은 방문을 두들겼다.

“누구냐?”

“나다, 이 자식아.”

형은 팔튼의 목소리가 들려오자마자 발로 문을 차 열고서 거침없이 들어갔다. 방 안에 있는 소파에 자연스럽게 털썩 주저앉은 형이 우리에게도 앉으라는 듯 고갯짓을 하자 팔튼이 떨떠름하게 물었다.

“무슨 일인데 이래?”

“저 새끼 때문에.”

“예?”

지목을 당한 크란이 눈을 깜박거리면서 반문했다.

“제가 뭘요?”

“너, 재수 발린 면상. 내가 묻는 말에 솔직하게 대답해.”

크란이 켁 하고 신음을 삼켰다. 무심코 웃었더니 기막힌 타이밍으로 크란과 눈이 마주쳐 버렸다. 어떻게 너마저 그러느냐는 듯 울상과 원망이 섞인 눈빛을 피해 슬쩍 고개를 돌리자 키온 형이 심각하게 입을 열었다.

“너 혹시…… 샤인 나이트 퀘스트 진행자냐?”

“예?!”

“뭐? 그건 또 무슨 말이야?”

“…….”

자리에서 펄쩍 뛸 만큼 놀란 크란, 갑작스러운 상황에 어리둥절한 팔튼, 그리고 눈을 날카롭게 뜬 유완과 나의 시선이 동시에 한 곳으로 향했다.

들켰다는 생각에 놀라 상대의 의도까지 알아챌 여유는 없는 듯한 크란과는 달리, 나는 형의 영상을 보았을 때 이미 키온 형이 우리와 같은 퀘스트 수행자이리라 예상하고 있었기에 그리 놀라지 않았다. 두 번째 영상 이후 들었던 윤석호 지부장의 이야기 또한 거기에 확신을 더해 주었으니 당연했다.

나는 토렐리트의 숨겨진 마법사 탑에서 만난 NPC 노마법사 베르먼이 들려준 이 퀘스트의 배경 스토리를 전부 기억하고 있었다. 우선 퀘스트는 모두 여덟 개. 중심인물로는 내가 진행 중인 로드 슈페리어, 유완와 크란이 각각 진행 중인 다크 나이트와 샤인 나이트, 그리고 톨랑에서 만났던 루크레이신의 섀도우 나이트가 있고 내가 아직 이름과 직업만 알고 있는 나머지 4인이 추가로 존재했다.

‘잊혀진 신의 사제라는 홀리 나이트, 활을 쏘았다는 일렉트릭 나이트, 전장의 사자였다는 블러디 나이트,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번에 두 번째 영상에 나온 마신의 기사, 로드 나이트.’

그중에서 키온 형이 진행하는 퀘스트로 추정 가능한 건 홀리 나이트 하나뿐이었다.

거기까지 생각하고 있었을 때 키온 형이 크란의 반응을 보고는 자신의 말이 맞다고 확신했는지 한숨을 푹 쉬었다. 하지만 형은 설마 나와 유완까지 같은 퀘스트 수행자라고는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원래는 여기서 우리도 같은 퀘스트 수행자라고 말해야겠지만 그러기에는 아까 형이 보여 주었던 지나치게 놀란 얼굴과 서둘러 도망치듯이 이곳으로 우리들을 끌고 온 이유를 아직 듣지 못한 것이 못내 신경 쓰였다. 보통은 같은 퀘스트 수행자를 알게 되었다고 해서 그런 반응을 보이지는 않을 텐데.

나는 일단 상황을 더 지켜보기로 했다.

“맞군. ……골치 아프게 됐어.”

“정말이야? 증표는? 봤어?”

“그런 것 같다. 저 녀석이 보석 들고 신전 앞 광장에서 노란 보석 들고 소리 지르면서 방방 뛰는 걸 끌고 데려왔거든.”

형의 말에 처음으로 좀 놀란 눈빛으로 우리 쪽을 바라보는 팔튼을 보고, 크란은 난감한 표정을 짓더니 내 쪽을 돌아보았다.

‘뭐야, 이게? 이거 알려지면 안 되는 거였어?’ 하고 뻐끔대는 입모양을 보며 나는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왜 그러는 건데?”

“카르. 너도 두 번째 동영상 봤지?”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 보이자 형은 인상을 살짝 찌푸리면서 이마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네 옆에 있는 면상 재수 털리는 놈이 진행하는 퀘스트…… 원래대로라면 같은 퀘스트 진행자 중 한 명을 또 알게 된 거니까 이건 좋은 일이야.”

그래. 내 생각도 그와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왜?

“……카르. 내가 해결하려고 떠났던 퀘스트 기억해?”

“물론.”

그걸 잊을 리가 없지. 내가 작게 대답하자, 형은 싱긋 미소를 지었다.

“간단하게 말해서, 그 퀘스트가 알고 보니 머리 아프게 여기저기 연결되어 있었어. 그래서 지금까지도 다 해결하지 못했거든. 네가 아직까지도 기다리고 있을까 봐 많이 걱정했는데, 여기서 만나서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

“두 달 기다렸는데.”

“……진짜냐? …너라면 사실 바로 가 버릴 줄 알았는데.”

조용히 말하자, 형은 의외의 말이었는지 놀라고 기쁜 표정으로 웃으며 내 손을 잡았다.

“고맙다.”

형의 따뜻한 목소리를 듣자 갑자기 이상한 기분이 찾아들었다. 신뢰에 찬 따스함과 서로 간의 믿음, 그리고 멋쩍음과 함께 가슴 속이 뜨거워지는 기묘한 기분. 나는 너무나 오랫동안 그런 것들을 느껴 본 적이 없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걸 몰랐다는 사실조차 잊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생경하게 주변을 돌아보니, 미스트를 시작한 뒤로 얼마나 많은 것이 바뀌었는지가 새삼 느껴졌다. 오른 다리를 잃고 인생에 패배한 강무헌이라면 분명 누구의 손길도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이 패배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더 비참했던 나라면 지금 이렇게 누군가와 다시 여러 관계를 맺고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을 상상도 할 수 없었겠지. 그저 자존심만 남아 남의 눈을 피하기에 급급했던 나라면…….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미스트에서의 나는 타인이 나에게 내민 손을 잡을 수 있게 되었고, 다른 이들과 관계를 맺어 부대끼는 것이 얼마나 뿌듯하며 가슴 벅찬 일인지도 알게 되었다.

혼자 집 안에 처박혀 있던 시간 동안 나는 모든 일에 완전히 자신감을 잃었었다. 그렇지만 지금의 나는 어떠한가. 내가 내뱉는 주문 하나로도 수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할 수 있음을 당연하게 여길 정도의 자신감이 내 안에 자연스럽게 자리하고 있었다. 마치 예전의 내가 내 몸 하나 정도는 지킬 실력이 있다고 믿었기에 다른 이들 앞에서 보일 수 있었던 자신감처럼.

그때는 그 정도의 자신감이야 당연히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고작 게임 속에서 쓸 수 있는 마법에 대한 자신감일 뿐인데도 그것 하나가 너무나 소중했다. 그런 것이 당연했을 때에는 몰랐던 감정이 있었다. 그건 바로 고마움이라는 이름의 감정이었다.

한참 뒤에야 나는 낯간지러운 기분에 소리를 내어 웃고 말았다.

“하하하…….”

나는 어느새 이렇게 변해오고 있었나 보다.

그렇게 웃다가 문득 주변을 둘러보자, 유완이나 크란뿐만 아니라 키온 형과 팔튼까지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들은 다 웃고 있지 않았다.

“……하.”

순식간에 좀 민망해져서 얼른 웃음을 입가에서 지우자, 그제야 키온 형이 퍼뜩 놀라 손을 놓으며 입을 열었다.

“너…….”

안 웃던 놈이 갑자기 웃으니 기겁한 모양이었다. 좀 미안해져서 무뚝뚝하게 입을 열었다.

“하던 얘기 계속 하죠.”

“카프…….”

크란의 한숨 같은 소리에 그쪽을 쳐다보자, 크란이 좀 묘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웃으니까 정말 보기 좋아. 진짜야.”

“그래. 이 나를 놀라게 하다니 대단한 줄 알라고.”

크란의 말에 이어 팔튼이 히죽거리면서 일어나 내 목에 팔을 걸고 가볍게 목을 조르는 시늉을 했다.

“안면근육이 아주 굳어 버린 줄 알았더니, 이런 표정도 지을 줄 알고. 맘에 들었다, 너.”

“콜록, 콜록, 뭐…….”

“애 놀랜다. 떨어져, 자식아.”

흔들리면서 의아해하고 있으려니 키온 형이 팔튼에게 주먹을 날리고는 이전에 비해 훨씬 편안해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무튼 중요한 건, 내가 지금 진행하는 퀘스트랑 카르 네 친구가 진행하는 퀘스트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거야. 더불어서 저 자식하고도.”

저 자식이란 말에 고개를 돌리자 눈이 마주친 것은 팔튼이었다.

‘그도…….’

아주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역시 그도 퀘스트의 일원이었던가.

‘마신의 기사는 아닐 테고, 그렇다고 활을 쓰는 것도 아니니 아마도 그가 받은 퀘스트는 블러디 나이트겠지…….’

놀라움은 없었지만 나는 짧은 시간 동안 갈등했다. 아직 형이 왜 크란이 퀘스트를 받은 자라는 사실에 민감하게 반응했는지 모르는 상황에서 나와 유완의 정체를 믿고 말해도 될까?

형이 좋은 사람이라는 건 안다. 하지만 아무리 믿는 상대라도 그 역시 나와 같은 마음일 것이라 쉽게 단정하는 건 자만임을 나는 예전에 뼈아픈 경험을 통해 깨달았었다. 이후부터 내 마음속 깊은 곳에는 늘 타인을 향한 근본적인 불신이 사라지지 않았었는데, 그것이 이번에도 불안하게 일렁이며 발목을 잡았다.

“놀랐지?…….”

치열하게 머릿속으로 고민하는 동안 형이 말을 잇기 시작했기에 나는 생각할 시간을 조금 더 얻을 수 있었다.

“아까도 말했지만 이건 원래는 나쁠 게 하나도 없는 일이야. 다만…….”

형은 갑자기 위압적인 기운을 뿜어낼 듯, 얼굴을 무섭게 굳혔다.

“다만, 장소가 이 도시라는 게 문제일 뿐이지.”

이 도시? 자그레브가 왜?

혼란스러운 마음을 알아채기라도 한 듯, 갑자기 키온 형의 말에 이어서 팔튼이 대답을 해 주었다.

“소개가 좀 늦었지만, 알다시피 내 이름은 팔튼이다. 이 자그레브를 거점으로 한 길드 [자이언트]의 마스터이기도 하지. 직업은…… 뭐 보시다시피 검을 쓰고.”

팔튼이 등 뒤의 대검을 툭툭 쳐 보이며 말했다. 저걸 진짜로 쓸 수는 있는 건가 의혹의 시선을 보내고 있을 때, 키온 형이 팔튼의 다리를 사정없이 걷어찼다.

뻑!

“악!”

“속지 마. 저놈 검사 아냐. 미친놈이야.”

냉정한 말투에도 팔튼은 다리를 부여잡은 채 히죽거리며 맞장구를 쳤다.

“엉, 그래. 그것도 맞긴 맞지. ……그나저나 키온 너, 힘이 좀 세졌는걸? 체력이 순식간에 팍팍 깎인다, 깎여.”

“한 방 더 차 줄까?”

“사양한다.”

보아하니 둘은 정말 많이 친한 사이인 것 같았다. 한쪽은 서슴없이 때리고 다른 한쪽은 인정사정없이 맞고도 별말 안 하는 모습에서 둘 다 상대를 믿고 있다는 것이 한눈에 보여 좀 부러워졌다. 예전의 키온 형과 나도 저렇지는 않았었다.

아니, 다시 생각해 보면 키온 형은 그랬을지도 모르지만 내가 완전히 마음을 열지 못하고 대했었다는 게 더 맞는 말이겠지. 지금 생각하면 미안한 일이었다.

그때를 떠올려 보자 내 옆에 있는 유완과 크란도 눈에 들어왔다. 나는 이 녀석들과 만나 정말 좋은 친구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녀석들도 나와 같을까?

크란이야 내가 말을 잘 못 해도 특유의 쾌활함으로 같이 있는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해 주는 녀석인 데다 워낙 하찮은 모습으로 잘 비비는 통에 나도 스스럼없이 마법으로 장난삼아 때리며 응수하는 일이 많아 만난 기간에 비해서는 어느새 굉장히 친밀한 느낌이 되어 있었다.

‘처음에는 참 부담스러운 놈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러면 유완은 어떤가 하고 생각하려던 순간, 문득 전에 내가 가볍게 때려 보라고 하자 눈에 띄게 망설이던 유완의 모습이 떠올랐다. 친구라면 서로 부대끼며 주먹질 정도는 애교로 해 주는 것이 보통 아니었던가? 정승조 놈하고도 별로 예외는 아니었는데……. 생각해 보니 유완과 나는 어깨동무 한 번 제대로 해 본 적이 없었다.

‘…….’

두근…….

갑자기 누구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조용하게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하지만 왜 기분이 가라앉았는지는 나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어쨌든 말은 태연하게 했어도 키온 형의 무시무시한 주먹에 더 맞기는 싫은지 고개를 젓는 팔튼에게 형이 씩 웃어 보였다.

“새끼, 꼭 때려야 말을 들어요. 계속 해. 카르 기다리잖냐.”

“넌 내가 아주 만만하지? 아무튼 아까 어디까지 말했더라? ……아, 맞아. 어쨌든 그래서 난 누구냐면, 블러디 나이트 퀘스트를 받은 잘나신 팔튼 님이라고 한다.”

“…….”

그 말이 끝나자마자 다시 달려든 키온 형의 화려한 연속기가 끝나고 나서야 팔튼은 제대로 입을 열 수 있었다.

“뭐…… 확실히 장소가 나빴어. 저 샤인 나이트놈이 얼마나 큰 소리로 난리를 쳤는지는 모르겠지만…….”

“제 이름은 샤인 나이트가 아니라 크란입니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인지 알 수가 없군요. 처음부터 좀 알아들을 수 있게 설명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제가 잘못을 했어도 뭘 잘못했는지는 알아야 할 것 아닙니까.”

발끈한 크란이 항의하자, 팔튼도 ‘음…….’ 하고 신음을 흘리며 소파 뒤로 팔깍지를 껴서 편하게 머리를 기댔다.

“그러니까 말이야, 그 치료신의 신전 앞에는 바로 광장이 있잖아. 사람이 아주 바글바글 끓지. 이 도시, 아니, 미스트 전체를 통틀어서 가장 인간이 많은 곳이 그 광장이라고 봐도 될 거야.”

“그런데요?”

“그런데 그런 곳 앞에서, 하필 키온 저 녀석이랑 있을 때 같은 퀘스트를 진행하는 네가 증표까지 들고 방방 뛴 건 너 죽이러 와 달라는 뜻이랑 똑같아. 지금 상황에서는 그래.”

“예?”

“왜 그런지 아냐?”

“모르……죠.”

당연히 모르는데 자꾸 감질나는 말만 듣자 짜증이 나기 시작할 정도였다. 크란의 눈앞에 손가락 하나를 들이민 팔튼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시선들을 한 번 죽 훑어본 다음, 은밀하고도 장난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자그레브는 지금 우리에게 가장 위험한 곳이니까. 이 도시에는 지금 우리 셋을 제외하고도 가장 위험한 여덟 번째 퀘스트 수행자가 있거든.”

“여덟 번째……?”

낮게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옆을 보았다. 유완이 뭘 생각하는지 이맛살을 약간 찌푸리고 있었다.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 여덟 번째란 우리 모두의 퀘스트에서 적대 관계로 이어져 있는 마신의 기사 퀘스트 수행자를 말해.”

“그리고 현재 자그레브의 가장 큰 길드 또한 그 잘난 여덟 번째 놈 거고. 알겠냐? 이 도시엔 지금 우리의 적이 사방에 깔려 있는 거나 마찬가지야.”

키온 형이 이제 알겠냐는 듯 팔튼의 뒷말을 이었다. 나는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함과 동시에 이제야 조금 전까지 고민하던 사항을 더 갈등할 필요 없이 말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잠깐. 말할 것이 있습니다.”

난 팔튼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딱딱하게 입을 열었다. 동시에 팔튼의 아무 생각 없어 보이던 눈에서 순간 이채가 번뜩이는 것처럼 보인 것은 착각이었을까?

“뭐냐?”

키온 형이 이 말을 듣고 너무 놀라지는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실은 저도 크란과 같은 퀘스트 수행자입니다. 여기 있는 유완도 마찬가지이고요.”

“…….”

“……엥?”

말이 끝나자마자 갑자기 조용해진 방 안에서 한참 뒤에야 키온 형의 당황한 듯한 대답이 들려왔다.

“어, 카르, 뭐라고?”

나는 대답 대신 팔튼을 주시했다. 그는 재미있다는 듯한 표정으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동시에 그의 붉은 눈동자 안에서도 막 피어난 불꽃같은 기세가 어른거렸다.

“그럴 줄 알았다. ……네가 바로 슈페리어냐?”

그럴 줄 알았다라. 역시 하는 짓만 보고 우습게 여길 사람이 아니었군.

나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팔튼은 탐색하는 듯한 시선을 유완에게로 돌렸다.

“그럼 너는?”

“다크 나이트.”

유완의 짧은 대답에 팔튼이 이를 드러내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거 재밌는데.”

“잠깐만! 그럼 지금 여기 있는 다섯 명 전부가 다 그놈의 퀘스트 관련자라고?”

키온 형이 벌떡 일어나 외침과 동시에 아까부터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던 크란이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키온 형에게 물었다.

“저기, 죄송한데 카프랑 깜장검사 놈도 퀘스트 수행자인 걸 원래 알고 계셨던 것 아니었어요?”

“알긴 뭘 알아!”

키온 형이 버럭 고함을 지르자 팔튼이 앉으라는 시늉을 했다.

“정신 사납다. 앉아서 얘기해.”

“내가 앉게 생겼냐? 여기가 지금 미스트에서 제일 위험한 장소로 바뀌었다는데!”

“반대로 제일 안전하기도 하잖아. 앉아라.”

“그러니까 내가 지금……!”

털썩!

무어라 고함을 지르려던 키온 형의 다리를 걸어 소파로 다시 쓰러뜨려 버린 팔튼이 아까까지와는 전혀 다른 눈빛으로 우리들을 돌아보았다.

“바보들만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던 거겠지. 일단 그쪽에서 먼저 이야기를 하지 않은 이유는 대충 짐작이 가니까 됐어. 중요한 건 키온과 내가 이미 8번째 퀘스트 수행자 놈을 만난 적이 있고, 그 결과 내 자이언트 길드와 놈의 길드가 적대 길드가 되었다는 거야. 그런데 저 바보 같은 샤인 나이트 놈이 한 짓을 광장에 있던 그쪽 길드원 중 누군가가 보기라도 했다면……. 아니군. 이미 봤을 것 같으니까 곧 뭔가 행동이 있겠지. 음…… 그쪽의 부길마 자식은 짜증 나는데.”

잠시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하던 팔튼은 곧 다시 입을 열었다.

“너. 아직 자그레브에서 볼일 끝난 거 아니지?”

크란에게 묻자, 크란이 딱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일단 너부터 볼일 끝내고 최대한 빨리 자그레브에서 뜨는 수밖에 없겠다.”

혼자서 결론을 내린 팔튼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섰다.

“다들 이 정도 퀘스트를 진행할 정도라면 실력은 괜찮을 거라고 생각해도 되겠지?”

위험한 미소에 먼저 반응한 것은 유완이었다.

“그 말, 그대로 돌려주고 싶은데.”

“하하하, 내 실력은 그냥 괜찮은 정도가 아니지.”

언제 진지했었냐는 듯 곧바로 자화자찬으로 들어가는 팔튼의 등을 소파 뒤로 넘어가 있던 키온 형이 번개같이 일어나 후려갈겼다.

“켁, 왜 또 때려?”

“할 얘기 이제 끝났으면 너희 셋 다 나가. 난 카르랑 잠깐 할 말 있어.”

“왜? 여기 내 길드야. 나가려면 당연히 네가 나가야…….”

“맞고 꺼질래, 그냥 꺼질래? 잠깐이라고 했잖아.”

“…….”

반항하는 팔튼을 말 한마디로 잠재운 키온 형은 나를 제외한 나머지의 등을 밖으로 사정없이 떠밀기 시작했다.

“갑자기 왜 이러십니까? 카프와 무슨…….”

“오랜만에 만난 카르한테 할 말 무지 많다고. 그러니까 나가.”

어이없어하는 크란에게 형이 눈을 찌푸리며 대꾸했다.

“아니, 그보다 아까부터 묻고 싶었는데 왜 카프가 아니고 카르라고 부르시죠? 카프는 카프인데 혼자 멋대로…… 우왁!”

키온 형이 끝까지 안 떠밀려 나가고 버티는 크란의 엉덩이를 발로 뻥 소리가 나도록 걷어차면서 외쳤다.

“그게 더 귀여우니까 내 맘이다, 새끼야! 나만 이렇게 부르라고 허락했으니까 딴 놈들은 부를 생각도 하지 마!”

“카, 카프? 진짜야? 그게 무슨…… 악!”

한참의 실랑이 끝에 마침내 크란이 발로 차여 쫓겨난 후 혼자 남은 유완이 말없이 내 눈을 들여다보았다.

“……나가야 하는 건가?”

나는 잠깐 고민하다 키온 형을 돌아보았다. 그 흉흉한 눈빛을 보고 나는 그냥 고개를 저었다.

“미안.”

“알았다.”

대답하는 유완의 표정은 기분이 불편한가 오해할 법한 딱딱한 얼굴이었지만, 목소리는 생각보다 부드러웠다. 유완이 내 팔을 툭 친 뒤 뒤돌아서서 나가자, 이제 방 안에 남은 이는 키온 형과 나뿐이었다.

“카르.”

짧은 침묵이 흐르고 나서 키온 형이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시선을 맞추었다.

“이제야 좀 제대로 대화할 수 있겠다.”

그 말은 많은 느낌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시작에 걸맞게 가볍게 안부를 묻는 형에게 나도 입꼬리를 슬쩍 올리며 대답했다.

“그냥. 잘 지냈어.”

“그래……. 벌써 반년도 넘게 지났네. 헤어졌을 때가 여름 막 되기 전이었는데 지금은 벌써 초겨울이잖아.”

형의 말을 들으니 나도 새삼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정말 오랜만에 만난 것 같았는데, 그 정도밖에 안 되었던가? 참 짧고도 길었다고 생각하고 있으려니 형이 한숨과 함께 말을 이었다.

“설마 너랑 같은 퀘스트를 수행하게 될 줄이야……. 아깐 정말 놀라서 말도 안 나왔었어. 형 놀란 건 봤냐? 자식.”

특유의 장난스러운 웃음을 지어 보이는 형의 눈은 여전히 따뜻했다. 낯이 좀 간지러웠지만 나도 마주 고개를 끄덕했다.

“나야말로, 동영상을 보았을 땐 정말 놀랐었어.”

“말도 마. 그것 때문에 내가 지금 고생을 말도 못 하게…… 아! 그러고 보니.”

진저리를 치던 형이 갑자기 눈을 퍼뜩 부릅뜨더니, 내 어깨를 붙잡았다.

“카르! 설마 너도 벌써 그 악마 같은 놈에게 연락 받은 거냐? 받았어?”

“누구?”

잡힌 채 흔들리면서 묻자, 형이 으악 하고 머리를 감싸 쥐면서 소리쳤다.

“그 자식 말이야! 더 미스트 지부장! 재수 없게 생긴 놈!”

아, 윤석호 말인가.

…잠깐. 윤석호?

“왜 그러는데?”

왠지 심상찮은 느낌에 묻자, 형이 고통스레 외쳤다.

“퀘스트 동영상 찍는 대신 돈 주겠다는 제안 말이야! 너도 받았어? 설마 수락한 건 아니지?”

“그게 왜?”

“절대 수락하면 안 돼!”

형이 온 힘을 모아 고함을 지르는 통에 귀가 다 울렸다.

“내가 돈에 눈이 멀어서 얼굴 공개하는 걸 우습게 보고 수락했다가 지금 어떤 꼴이 되었는지 알아? 가는 곳마다 죄다 알아봐서 도무지 게임을 할 수가 없어! 그뿐이냐? 현실 생활도 못 할 지경이라고! 넌 그거 절대 수락하지 마! 절대로!”

눈에 핏발까지 세운 채 고래고래 후회의 열변을 토하는 형의 말을 듣다 보니 아무래도 얼굴을 필사적으로 가리던 게 그것 때문이었던 모양이었다.

“수락 안 했지? 응? 설마 했다면 형 말 듣고 이제라도 취소하겠다고 해. 이건 진짜 인간이 견딜 수 있는 수준이 아니야!”

“음…….”

영상 출연 계약을 아직 확정 짓지는 않았지만, 아마 수락하게 될 거라 생각 중이었기에 형의 말이 몹시 신경이 쓰였다. 대체 얼굴을 공개했을 때 받는 돈이 대체 얼마나 되기에 사전에 설명을 다 들었을 텐데도 눈이 멀어 선택했다는 말이 나오는 걸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직 안 했어. 그래서, 얼마를 얹어줬는데?”

“…….”

내 말에 형이 날뛰던 것을 멈추고 시선을 피했다. 나는 형이 대답해 줄 때까지 쳐다볼 요량으로 끈질기게 침묵을 지키며 기다렸다.

“그냥, 기본 계약금에… 백…….”

아마도 백만 원 정도 추가하나 싶었지만 다음 말을 들은 순간 나는 귀를 의심했다.

“……150퍼센트 추가.”

“……150퍼센트?”

10퍼센트도, 20퍼센트도 아니고?

다시 한 번 되묻자 형이 눈길을 피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 응. 근데 다시 돌아간다면… 안 할 거야. 진짜로.”

형은 그렇게 말했지만 사람이라면 누구나 혹할 만하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다. 기본 계약금이 정확히 얼마인지는 아직 모르지만 윤석호 지부장이 절대 섭섭지 않게 주겠다고 했었는데, 거기에 그만큼을 더 얹어주었다니……. 형의 당시 선택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었다.

“설마 이 말 듣고 혹하는 건 아니지? 카르. 진짜 그건 하면 안 돼. 나는 하는 일도 하필 얼굴 팔리면 곤란한 쪽이라…… 에이 씨.”

“그 정도라면 승낙해도 될 것 같은데.”

“안 돼! 승낙하지 마!”

형이 고함을 지르면서 펄쩍 뛰었다.

“카르! 너 그렇게 돈에 굶주린 놈 아니었잖아! 이건 돈의 문제가 아냐! 게임을 즐길 수가 없다고!”

절규하듯 외치는 형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흘리면서 나는 예상보다 돈이 많이 생기면 무슨 일을 할 수 있을지 생각해 보았다. 다리를 못 쓰는 몸 때문에 할 수 있는 일이 제한되어 있겠지만 언제까지고 지금처럼 살 수는 없지 않은가. 돈이 전부는 아니라 해도 적어도 선택지는 더 늘어나리라 생각하니 갑자기 구미가 당겼다.

“정신 차려! 앞으로 남은 퀘스트를 처리하려면 얼굴 파는 건 진짜 최악의 수라니까! 형 말 듣고 있는 거지? 응?”

퀘스트라는 말에 겨우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돌리자, 형이 한숨을 푹 쉬면서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들어봐. 내가 처음 받았던 퀘스트는 말이지, ‘잊혀져 버린 여신의 신전을 다시 세우라’라는 퀘스트였어. 그걸 위해서 서쪽을 시작으로 돌아다니던 도중에 우연히 연계 퀘스트를 받았는데, 그게 바로 ‘홀리 나이트의 신위를 잇는 자’ 퀘스트였단 말이야? 그러다가…….”

거기서부터 시작해 형은 천천히 자신의 여정을 설명해 나가기 시작했다.

홀리 나이트 퀘스트는 잊혀져 버린 여신의 신전 퀘스트와 연계되어 시작된 것이었다. 처음에는 짜증과 귀찮음 이상을 느낄 수 없었던 형은 해결해 나가는 과정에서 얻게 된 보상과 흥미진진한 스토리에 매력을 느껴 점점 푹 빠지기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관련 퀘스트를 수행하던 다른 사람도 한 번 만났으나 곧 헤어졌다고 했다.

블러디 나이트 퀘스트를 수행하던 팔튼과는 퀘스트 때문에 마주쳤다는데, 알고 보니 둘은 동창 사이였다. 옛날엔 그다지 크게 친한 사이가 아니었다지만 미스트에서는 퀘스트 내용 면에서 겹치는 부분이 많아 서로 도움을 주고받을 겸 동행하게 되었다는데, 지금은 막역한 친구 사이로 발전한 모양이었다. 그 과정을 대충 들어보니 아무래도 유완과 나 같은 과정을 거쳐 온 듯했다. 그러다가 형의 퀘스트를 해결하기 위해 북쪽으로 향했을 때 둘은 처음으로 마신의 기사 퀘스트 유저와 만났다고 했다.

“처음엔 그냥 퀘스트일 뿐이니까 적대 관계라고 해도 별것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그거 꽤 머리 아프더라고.”

마신의 기사 퀘스트를 수행하는 유저는 그들에게 절대 호의적이지 않았으며, 그들은 퀘스트로 인한 적대 관계에서 서로를 죽이게 될 경우 엄청난 페널티를 받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페널티?”

내가 묻자, 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자식, 진짜 셌어. 1대7로 퀘스트를 해야 하는 놈 배려해 주느라 보상이 세게 나오기도 했겠지만, 원래부터 그 자식 실력이 보통이 아냐. 하여튼 중요한 건 이거야. 그놈한테 죽으면, 우린 퀘스트가 파기돼.”

“…….”

키온 형과 팔튼은 그와 맞붙었지만 승부를 내지 못하고 도망치게 되었고, 그 후 형은 퀘스트를 달성하는 데 간신히 성공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다음 퀘스트의 실마리가 나오지 않아 팔튼의 다음 퀘스트 준비를 위해 자그레브에 온 이후부터 상황이 꼬이기 시작했다고 했다.

자그레브는 원래부터 여러 쟁쟁한 길드들이 많이 있는 곳이었다. 팔튼은 원래 혼자 다니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이었지만 어쩌다 보니 여러 전투에서의 그의 모습에 반한 사람들이 많아 그들과 함께 길드를 만들게 된 것이 지금 우리가 있는 자이언트 길드라고 했다.

“그 자식 성격에 길드장이라니, 말이 된다고 생각하냐? 그놈은 그냥 미친놈이야.”

키온 형의 냉혹한 평가에 나는 조용히 대답했다.

“글쎄, 그렇게 보이진 않던데.”

그러자 형이 입에서 불을 뿜을 듯이 고함을 치기 시작했다.

“저놈이 정상으로 보이냐? 여기 저놈 없어서 하는 말이지만, 저놈 머릿속엔 싸울 생각밖에 없어! 직업도 뭔지 아냐? 음침하게 버서커다, 버서커! 저거 싸움 들어가면 아무도 못 말려. 죽은 것도 몇백 번은 될걸.”

“버서커?”

“보통 그냥 광전사라고 부르는데… 보면 알아. 어쨌든.”

형은 눈살을 있는 대로 찌푸리며 다시 이야기를 이어가기 시작했다.

“길드전 몇 번 벌이다 보니 그놈이랑 내 인상착의도 꽤 알려졌어. 솔직히 자이언트는 자그레브에서도 1, 2위를 다툴 정도로 세거든.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세력이 비슷했던 길드와의 길드전에서 전에 우리 둘 다 죽도록 튀게 만들었던 마신의 기사 놈이 나온 거야! 완전히 좆 됐지. 그 길드는 지금 자그레브 전체를 거의 장악했어. 그런 상황에서 내 얼굴 나온 동영상이 퍼졌으니 어땠겠어?”

형이 이를 바득바득 갈면서 내뱉는 것을 보니, 꽤나 원한이 쌓인 모양이었다.

“난 지금 마지막 퀘스트의 실마리를 알 수가 없고, 팔튼 놈은 네 번째에서 멈췄어. 미친놈 쪽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서로가 서로를 견제하고 있는 상황에서 너희들이 이 안으로 뛰어든 건 엄청난 사건인 거지.”

“아…….”

나는 드디어 완전히 이해하게 된 현 상황에 낮게 신음을 흘렸다. 하필 이런 껄끄럽고 애매한 상황에 같은 퀘스트를 하는 우리를 만났으니 얼마나 신경이 곤두섰을지 납득이 되었다.

형은 다 말하고 나자 시원한 표정을 지으며 소파 뒤로 고개를 푹 젖혔다.

“휴. 게임을 즐기려고 하지, 어디 쫓기고 견제하려고 하는 거냐? ……정말 지옥이었어.”

말과는 다르게 그래도 재미는 있었다는 듯한 형의 표정에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카르, 너는 어땠어?”

나는 마음을 가볍게 먹고 그동안 일어난 일들을 천천히 이야기했다. 키온 형이 떠난 뒤 만난 유완과 장장 한 달에 걸친 오기 대결 끝에 친구를 먹은 사건, 느끼했던 크란과의 만남과 셋이서 함께 헤쳐 나갔던 던전, 톨랑에서 루크레이신을 만나고 다시 5서클을 마스터한 이야기를 하는 동안 키온 형은 감정도 풍부하게, 하지만 중간중간 가끔 기묘한 표정을 보이면서 들어 주었다. 제법 긴 시간이 흐르고 나서 드디어 이야기를 끝내자 형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하다가 문 쪽을 흘깃 바라보고, 또다시 나를 보았다.

“음… 그래, 그랬구나.”

“왜?”

내가 살짝 눈을 가늘게 뜨며 뭔가 이상한 것이 있느냐는 뜻을 담아 묻자, 형이 ‘아니.’ 하면서도 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것은 할 말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말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망설이는 표정이었다.

“내 말에 이상한 점이라도 있어?”

그러자 형이 결국 머리를 긁적거리며 입을 열었다.

“글쎄. 내가 너와 함께 그 상황을 직접 본 게 아니라서 좀 이상한 질문일 수도 있겠지만……. 신경 쓰이는 부분이 하나 있어서 말이야.”

키온 형은 질문할 때에 저렇게 앞말을 길게 하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나는 왠지 묘한 긴장감을 느끼며 형의 말을 기다렸다.

“카르. 그 유완이란 놈 만났을 때, 나와야 할 보스가 원래는 한 마리였던 거지?”

뜬금없는 질문에 의아했지만 표정을 가다듬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고 들었어.”

“그런데 왜 두 마리가 나타났었는지는 후에 알아봤어?”

“두 마리?”

별생각 없이 반문하던 순간, 갑자기 머릿속이 서늘해졌다.

키온 형이 말하는 것은 내가 유완을 처음 만났던 아스가의 황혼의 동굴 보스 파티 때 일이었다. 그때 당시 파티원들의 말에 의하면, 원래대로라면 보스는 로드 스켈레톤 한 놈만 나타났어야 했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로드 구울까지 나타나 사람들은 경악에 빠져 죽어갔었다. 나는 그때 파티 사냥도 처음이었고, 던전에서 보스 몬스터를 본 것도 처음이라 그게 뭐가 이상한지 모른 채 그저 놀라워하기만 했다. 결국 보스 두 마리를 전부 처치하고 나서 보상으로 귀걸이를 얻은 뒤에는 지금껏 그 일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하지만 키온 형의 말을 듣는 순간 그 일이 다시 기억나면서 나는 당시 상황이 얼마나 이상한 것이었는지 새삼스럽게 자각했다.

미스트의 모든 것에는 이유가 있다고 한다. 보스가 두 마리가 나타났었다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알아본 적 없어. 그게 왜?”

혼란에 빠진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말하자, 형도 자신 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어 보였다.

“아니, 그냥 일단 물어보고 싶어서. 그때 살아남은 건 너랑 유완이라는 그놈뿐이야? 확실해?”

형의 말에 나는 고개를 날카롭게 쳐들었다.

“그건 확실해.”

“네가 거기서 받은 보상은 보스 몬스터 두 마리 중에 어떤 놈의 거였어?”

와르르 부서지던 로드 스켈레톤의 잔해. 그 속에서 발견한 반짝이는 귀걸이. 나는 천천히 기억을 되살리면서 입을 열었다.

“원래 그 동굴에서 나왔어야 할 보스 몬스터인 로드 스켈레톤에게서 얻었어.”

“그럼 원래 나오지 않았어야 할 놈 거는?”

원래는 없었어야 할 로드 구울은 유완이 마지막으로 처치했다. 그리고 나는 거의 죽기 직전의 탈진 상황에서 유완이 그 시체 속에 있던 무언가를 집어 올리는 것을 보았다.

“뭔가 나오긴 했었지만, 그건 유완이…….”

“그러면 그건 원래 거기서 ‘나올 수가 없는’, 없었어야 할 아이템이 나온 것이군. 그리고 그걸 얻은 게 네 친구고.”

나는 혼란스러운 기분으로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형의 말이 맞았다. 생각해 보면 그건 원래 그곳에서 나올 수가 없는, 나오지 않는, 없었어야 할 아이템이었다.

나는 보스 몬스터와 관련된 일을 제외하고도 그 당시의 파티 전체에서 이상했던 것은 없었는지 다시 한 번 세밀하게 되짚어 보았다.

처음 만난 이를 경계하고 있던 그때, 나는 조용히 다니다 위기 상황에서 갑자기 앞으로 나서던 유완을 수상하다고 생각했었다. 지금이야 내가 믿을 수 있을 정도로 진중한 놈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당시에는 유완의 무뚝뚝함이 굉장히 마음에 들지 않았었다. 그래서 내 마법을 보여 달라고 요청한 그와 오기 싸움을 시작한 게 아니던가. 하지만 유완은 그를 대놓고 수상하게 취급했던 때에도 한 번도 부정하거나 변명했던 적이 없었다.

아니, 이런 식으로 생각해서는 누구라도 수상해지겠군.

그래. 나도 게임에 대해 잘 몰랐던 때라 그냥 있는 대로 다 받아들였었으니 유완 또한 그랬을지도 모른다. 유완은 그때 이후 한 번도 관련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다. 만약 지금 내가 놈과 또다시 던전에 가서 비슷한 경우가 발생한다면 나는 무조건 유완을 믿고 함께 사냥할 것이었다. 거기까지 생각하고 나서 난 고개를 거세게 저은 뒤 형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확실히…… 다시 생각해 보니 이해가 가지 않는 사건이기는 하지만 유완은 믿을 수 있는 놈이야.”

유완은 내 친구이자 동료이다. 그런데 지금 키온 형의 말만 들어보면 그 이상한 상황이 마치 유완과 관련이 있다는 듯 들렸다.

초조함을 느끼며 낮게 말하자, 형도 고개를 끄덕였다. 찌푸린 얼굴에서 형도 이런 말을 하는 것을 그리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도 그게 꼭 굳이 그놈과 관계가 있다는 뜻으로 말한 건 아냐. 이상하다고 생각한 걸 말했을 뿐이니까. ……하지만 카르.”

형은 가라앉은 눈으로 내 눈을 바라보았다.

“내가 예전에 홀리 나이트 퀘스트를 받기 전에, 연결되어 있던 신전 퀘스트를 수행하기 위해 돌아다니던 때에 말이야.”

묵묵히 듣고 있는 모습을 확인한 형이 천천히 이야기를 이어 나가기 시작했다.

“우연히 어떤 도시에 있는 던전에 퀘스트의 실마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 그 던전은 다른 유저들도 얼마든지 이용하는 그냥 보통의 평범한 던전이었지. 그래서 나는 사람들이 잘 들어가지 않는 시간대를 이용해서 혼자 그 던전의 끝까지 갔어. 그랬더니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았던 그 던전의 벽 무늬가 내가 가지고 있던 퀘스트 아이템과 반응해 내가 얻어야 할 아이템을 뱉어내는 거야. 이것도 일반적으로라면 그 던전에서 얻을 수 없었을 아이템을 얻은 경우지.”

짤막하게 말한 키온 형은 굳은 표정으로 마지막 의문을 말했다.

“유완이란 놈도 그런 식으로 미리 그 상황과 연계될 만한 퀘스트를 가지고 있었던 것 아닐까? 너도 연계 퀘스트를 받아서 슈페리어 퀘스트까지 온 거였지?”

나는 부정했다.

“그건 아냐. 유완과 크란은 내가 슈페리어 퀘스트를 얻을 때, 그 빛에 반응해서 각각 퀘스트를 얻었어. 그 이전에 유완을 처음 만났을 때의 나는 그런 퀘스트와 아무런 상관도 없었고.”

빠르게 대답하고 나서, 나는 목소리에 힘을 주어 말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아무 문제도 없었어. 그 녀석들은 내 친구고. 뭔가 내가 모르는 문제가 있었더라도, 지금까지 괜찮았다면 된 거 아냐?”

“카르.”

키온 형이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그 녀석들을 그 정도로 믿고 있는 거냐?”

어떻게 보면 기분 나쁠 수도 있는 질문이었지만, 형의 어투는 내가 정말로 유완과 크란을 신뢰하고 있느냐고 묻고 있었다. 나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믿어.”

“휴……. 모르겠다. 내가 뭐라고 할 순 없지. 그렇지만…….”

형은 마지막으로 내 시선을 담담하게 받아냈다.

“아무리 좋은 친구라고 생각해도 예전의 너의 냉철함을 완전히 잃어서도 안 된다고 본다. 솔직히 네가 이렇게 쉽게 남한테 마음 놓을 녀석은 아니었잖아? 너는 브이티(VT.가상공간)세계에서의 인간관계도 좀 조심해야 한다는 걸 알 필요가 있어! ……라고 말하긴 했다만, 어차피 너한테 그 정도로 신뢰받지 못한 내 심술도 조금은 섞여 있는 말이니 못 믿겠지?”

키온 형은 그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살짝 콧잔등을 찡그리며 미소 지었다.

“카르. 너는 나를 어떻게 생각하냐?”

나는 순간 그 말의 의도를 알지 못해 형을 빤히 쳐다보았다. 형은 열기가 느껴질 정도의 시선으로 나를 주시했다.

“형.”

한참 만에야 난 약간 쑥스러운 기분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켁. 그냥 형, 그뿐이야? 멋진 형, 잘생긴 형, 기타 등등 많잖아!”

울상 비슷하게 징징거리던 형이, 그럼에도 미소를 잃지 않고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키는 서로 비슷한데도 어쩐지 키온 형이 나보다 훨씬 어른인 것 같은 느낌이 생소했다.

“그래, 그렇게 네가 날 형이라고 생각해 주면, 나는 언제까지라도 네 형이다.”

형도 조금 쑥스러운 듯, 목소리를 낮추면서 말했다. 나는 마찬가지인 기분에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며 웃었다.

“하지만 네가 친구라고 생각하는데, 상대는 아닐 수도 있어.”

“무슨 말이야?”

등 뒤가 서늘해지는 기분에 되물었다. 형은 피식 웃으며 일어나서는 내 이마를 살짝 검지로 찔러 밀었다.

“경험 반, 농담 반이다, 인마. 아까 보니까 영 기분이 미묘한 게, 좀 이상해서 말이야. 그럼 이제 나가자. 시간 진짜 많이 지났다.”

“아, 그럼 앞으로 우리는 어떻게 하면 될까.”

내가 형의 말을 더 자세히 생각할 겨를도 없이 붙잡고 질문하자, 형은 고개를 갸웃하다가 바깥쪽을 엄지로 가리켜 보였다. 자신감 넘치는 자세였다.

“당분간은 여기 있을 거잖아? 일단 못된 마신의 기사 놈 쪽에 들키지만 않게 잘 나다니면 돼. 그리고 아직 못한 얘기도 많으니까 그건 나중에 하자.”

굳이 못된 놈 쪽이라고 강조하는 것을 보면 키온 형이 놈에게 정말 감정이 쌓이기는 한 모양이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뒤로 물러서자, 키온 형이 기분 좋게 웃으며 문을 세차게 열었다.

“그럼 이제 당분간 최고의 마법사가 우리 길드 거구나! 우하하하.”

“무슨 소리야.”

형을 따라 나가며 웃고는 있었지만, 내 마음속에는 아까부터 한 사람의 이름만이 계속 맴도는 중이었다.

‘유완.’

사실은 아까 형에게 말하면서 몇 개 더 생각났던 것들이 있었다.

끝없는 미로에서 처음 퀘스트를 받았을 때, 크란은 자신이 정확히 어떤 퀘스트를 어떻게 받았는지 흥분해서 떠들며 알려 주었다. 반면 유완은 퀘스트를 받았다고는 했지만 자세한 설명 없이 그저 거절하면 검이 없어지는 페널티가 있더라고 짤막하게 이야기했었을 뿐이었다.

그렇다면 혹시 나는 크란의 말과 맞물린 타이밍 때문에 유완이 크란처럼 다크 나이트 퀘스트를 새로 받았다고 지레짐작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러고 나서 또 떠오른 것은 여기 자그레브까지 오는 길에 수시로 사라졌던 유완의 모습이었다. 보통 검 수련을 한다고 나가고는 했었지만, 생각해 보면 우리와 함께 계속 이동할 때도 아무렇지 않게 수련을 하곤 했었는데 굳이 도시에 있을 때만 따로 나가서 한다는 것도 이상했다.

내가 톨랑에서 유완의 안내로 구석진 곳에 자리 잡고 있던 특수 검 상점에서 검을 사게 되었을 때, 이런 곳은 어떻게 발견했느냐고 묻자 유완은 도시 뒷골목이나 필드 등에서 연습을 하다가 발견했다고 답했었다. 대체 도시 뒷골목을 돌아다니는 것이 검 수련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 크란의 경우 유완과 비슷한 실력이지만 도시에서 특별히 검 수련을 하지 않아도 여행 중 사냥하며 얻는 경험치만으로도 충분한 듯 보였다.

유완은 정말 수련을 하러 나갔던 것이었을까? 아니면…….

‘젠장, 정말 모르겠다.’

생각할수록 점점 자기도 모르게 신경이 날카로워지는 것을 느꼈다. 아까 키온 형에게 말했듯이, 지금까지 신경 쓰지 않아도 별문제가 없었던 만큼 그런 일들도 별일 아니었던 것이 분명한데.

‘아니. 정말로 별일이 아닌 게 맞나?’

나를 믿고 좋아해 주는 사람들이 생김으로써 느긋해졌다고 여겼던 내 안의 어두운 그림자가 키온 형과의 대화로 인해 다시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아무리 좋은 친구라고 생각해도 예전의 너의 냉철함을 완전히 잃어서도 안 된다고 본다. 솔직히 네가 이렇게 쉽게 남한테 마음 놓을 녀석은 아니었잖아?」

부정할 수 없었던 말이었다.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사람을 잘 믿게 되었다고.

「하지만 네가 친구라고 생각하는데, 상대는 아닐 수도 있어.」

따끔거리는 속이 쑤셔왔다. 그 말은 내가 얻었던 최악의 교훈과도 같은 것이었다. 내 다리와 인생을 대가로 주고 얻은 꿈에서도 잊지 못할 가장 비싼 교훈을, 나는 언제부터 잊고 있었나.

겉으로 드러나는 표정과는 달리, 내 마음은 급속히 식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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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삐릿. ]

[ 삐-. 지부장님, 비서실입니다. 운영관리부서 3팀 남무건 부장님께서 방문하셨습니다. ]

윤석호는 천천히 검토하던 종이에서 눈을 뗐다. 평소였다면 집중하던 것이 깨어져 꽤 불쾌했을 순간이었지만 기다리던 방문이라서인지 그런 느낌은 없었다.

“들여보내.”

[ ……. ]

잠시의 침묵 후 곧 문이 달칵 열리면서 익숙한 남자의 모습이 부장실 안으로 들어섰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흠. 얼마 전에도 미스트에서 보았었으니까 오랜만이라 할 순 없지.”

여유롭게 능글대는 말투에 정중하게 인사했던 남무건, 미스트 내에서는 GM 무건이란 이름으로 불리는 남자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아, 네. 앉아도 되죠?”

윤석호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털썩 주저앉은 무건은 목에 걸고 있던 사원증을 벗어 신경질적으로 바지 주머니에 밀어 넣었다.

“별일이군. 웬일로 대타 AI(인공지능)를 세워놓고 근무 시간 중에 여기까지 찾아오다니. ……미스트 동부에 무슨 일 있나?”

앉든 말든 별 상관없다는 태도로 다시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넘기며 시선을 내린 윤석호가 툭 하고 질문했다.

“별일 없습니다. 동부에 있던 H-ZERO 퀘스트 유저들도 전부 딴 지역으로 몰려가서 제가 할 일이 없을 정도니까요.”

“흠…….”

다시 서류 한 장을 넘긴 윤석호는 투덜거리는 무건에게로 잠깐 시선을 돌렸다.

“그러면 내가 부탁했던 일에만 집중하기 편했겠군?”

그러나 그 말을 들은 순간 무건의 표정은 있는 대로 찡그려졌다.

“아, 그것 말입니다. 사실 오늘은 그것 때문에 온 겁니다.”

무건은 의아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는 윤석호 쪽으로 일어서 다가가면서 손에 들고 있던 조그만 휴대용 저장장치를 내밀었다.

“가타부타 말할 필요를 못 느끼겠으니 일단 보시죠.”

윤석호는 오른손에 들고 있던 펜을 놓고 그것을 받아 들었다. 잠시 설명을 요구하는 눈으로 무건을 보았으나 그는 일단 보라는 굳은 의지만을 내보일 뿐이었다.

“그가 무슨 사고라도 친 건가? 최근 보고받은 일에는 그런 게 없었는데?”

중얼거린 윤석호는 자신의 옆에 있던 작은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아무것도 없던 책상 안쪽에서 곧 저장장치를 연결할 수 있는 구멍이 열렸다. 장치 안에 든 내용을 읽기 위한 작은 가동음이 침묵 속에서 울려 퍼졌다.

[ 인식 완료. 모니터 ON 하겠습니다. ]

“으음.”

윤석호의 불분명한 대답이 떨어지자마자 곧 무건과 그의 앞으로 홀로그램 입체영상이 허공에 펼쳐졌다.

그것은 위험한 전투의 중간부터 시작되는 장면이었다. 위쪽에서 앵글을 잡은 영상에는 평원으로 보이는 들판에서 벌레를 닮은 검고 거대한 몬스터가 쿵쿵거리며 날뛰고 있었고, 그 앞으로 재빠르게 잔상도 남기지 않고 깜박이듯 이동하고 있는 작은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그 사람은 엄청난 속도로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날 때는 순간 이동이라도 하듯 예측할 수 없는 방향에서 나타났다. 그런 식으로 몬스터의 추격을 따돌리고 있기는 했지만 맹렬한 기세를 내뿜는 몬스터 앞에서 인간은 너무나도 작아 보였다. 윤석호는 잠시 몬스터를 바라보며 질문했다.

“저 몬스터는 보스 몬스터 아니었나?”

“맞습니다. 파름 대평원의 보스 몬스터 칼랍 타이탄이죠.”

“그런데 이게 왜?”

“계속 보십시오. 아. 지금 시작하는군요.”

한참 도망치다가 잠깐 멈추어 있던 사람은 곧 한 번에 몬스터보다 훨씬 먼 곳으로 이동해 버렸다. 두리번거리다 노리던 사냥감을 발견한 몬스터는 곧 괴성을 지르며 그곳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사이 시간을 번 남자는 곧 빠르게 팔과 손을 움직여 빛나는 서클을 그리면서 무어라 주문을 외웠고, 곧바로 주문에 응답하듯 엄청난 토네이도가 그의 앞에 생성되었다.

“굉장하군. 5서클을 저렇게 빠르고 정확하게……. 게다가 마법 이미지도 완벽하고.”

그 모습을 바라보던 윤석호가 감탄사를 내뱉었다. 두 눈동자 위로 화면에 반사된 빛이 반짝였다.

“저 남자가 한국 서버뿐만 아니라, 전 세계 최초의 탑마스터일 겁니다.”

무건도 늘 투덜거리던 인상과는 완전히 달라진 눈을 홀로그램에서 떼지 못한 채 대답했다. 윤석호의 입이 빙긋이 미소를 그리며 올라갔다. 그렇게 그들이 이야기하는 사이에 홀로그램 속의 남자는 무언가 외치면서 양팔로 허공을 내리누르는 듯한 모션을 취하기 시작했다.

“저건 뭐지?”

그것을 발견한 윤석호가 눈을 가늘게 뜨면서 중얼거렸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가 힘겹게 움직일 때마다 굉장한 기세로 휘몰아치던 토네이도가 무언가 초자연적인 힘에 눌리는 것처럼 휘청휘청 아래로 눌리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저겁니다.”

GM 무건이 짧게 대답했다. 윤석호가 ‘뭐가?’ 하고 고개를 슬쩍 돌리려는 순간, 그는 믿을 수 없는 것을 목격하고 입을 살짝 벌렸다.

“……저건?”

윤석호는 순간 멀쩡한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지금 그가 보고 있는 것이 진짜라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 콰콰콰콱. ]

작게 들려오는 소리와 함께, 화면 속의 맹렬한 바람이 울부짖으며 그 형태가 점점 변화하기 시작했다. 위를 향하여 길게 휘몰아치던 것이 압축되듯 힘겹게 눌리다가는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억지로 잡아당기는 것처럼 옆으로 쭉 늘어났다. 형태 변형을 완전히 마친 후에 나타난 마법은, 마치 길게 늘어선 바람의 벽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윤석호는 눈을 크게 떴다.

화면 안의 검은 로브의 남자는 거기가 끝이 아니라는 듯 다시 주문을 외쳐 수십 개의 파이어 볼들을 생성해냈다. 거기까지 걸린 시간도 놀라울 만큼 짧았다. 순간적으로 엄청난 마법들을 쉴 새 없이 운용하는데도 남자의 안색은 놀랄 만큼 변함이 없었다. 뒤로 터질 것처럼 펄럭거리는 후드와 로브자락에 금방이라도 끌려갈 것처럼 말라 보이는 몸이었지만 그가 보기보다 단단하게 다져진 몸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윤석호는 알고 있었다.

정신없이 휘날리는 검은 머리칼 사이로 얼핏 드러난 몇 년간 해를 못 본 듯 창백한 얼굴에는 강한 의지가 서려 있다. 아직 눈가에 어두운 기색이 남은 날카로운 검은 눈동자는 예전에 윤석호가 회사의 포트 내로 무작정 찾아왔던 그 남자를 처음 보았던 때의 무감정한 죽은 빛이 아닌, 도전하는 인간다운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 무엇이든 꿰뚫을 것 같은 차갑고도 뜨거운 눈빛에 순간 오한 같은 전율마저 일었다.

그 눈이 만약 자신 쪽을 향했다면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폭발하는 생명의 기류가 그의 주변을 감싸고 맹렬하게 소용돌이치는 모습은 마치 칼날 같은 꽃잎들이 춤추는 것 같았다. 보는 이를 섬뜩하게 하면서도 눈을 뗄 수 없게 하는 광경이 계속되었다. 그 중심에 선 남자는 절대적인 어떤 존재처럼 보였다.

잠시 뜸을 들이던 남자는 곧 그의 앞으로 몬스터가 보일 듯 달려오는 것을 보자 망설임 없이 수십 개의 파이어 볼들을 조종해 한꺼번에 바람의 벽을 뚫는 듯한 형태로 던져 넣었다.

그러자 훨씬 더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억지로 형태가 비틀린 바람의 벽에 던져져 금방이라도 꺼질 듯하던 불꽃들이, 남자의 기합과 함께 맹렬한 기류의 안에서도 별개의 생명체처럼 후왁 하고 타올랐다. 바람의 벽에 불꽃이 박힌 듯한 모습의 그 마법은 남자의 손짓에 따라 몬스터를 향해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바람의 벽이 스스로 움직이면서 그 형태가 점점 흔들리며 변하기 시작한 것은 그때였다. 처음에는 느리게 나아가던 그것은 곧 점점 빨라졌고, 바람을 탄 듯한 불꽃과 함께 이제는 벽이 아닌 파도처럼 들판 위를 달려가기 시작했다. 엄청난 바람의 기류에 풀과 나무가 뽑혀 날아가고, 대기가 진동했다. 그래도 거기까지는 약과였다.

후와아아악!

“맙소사…….”

윤석호의 입술 사이로 자신도 모르게 낮은 신음이 터졌다.

처음에는 바람의 파도였을 뿐이었던 그것이, 어느 순간 속도가 빨라지면서 갑자기 불꽃이 바람에 엉겨 붙는 듯한 모습이 되어가고 있었다. 작은 불꽃이 바람에 번져 큰 숲에 옮겨붙는 것처럼, 그렇게 눈 깜짝할 사이에 ‘바람과 불’은 ‘불의 바람’이 되었다. 전설 속의 불새라도 나타난 것처럼 불 껍데기를 머리에 뒤집어쓴 거대한 바람의 파도가 피할 수도 없는 엄청난 기세로 달려들어 그 앞에서 너무나 작아 보이는 검은 벌레 형상의 보스 몬스터를 집어삼켰다. 화면 가득 자연을 역행하는 마법이 폭포수처럼 대지를 덮쳤다.

작기는 하지만 엄청난 소리가 화면을 뚫을 듯 터져 나왔다. 그 압도적 광경에 넋을 잃었던 윤석호는 순간 위에서 본 앵글에서도 화면 가득일 정도의 마법 범위에 혹시 그 마법 시전자마저 휩쓸리지 않았나 걱정하며 남자를 찾아보았다. 그리고 검은 로브가 안전하게 매직 실드까지 치고 뒤에 서 있음을 발견하고 나서야 짧게 숨을 내쉬었다.

잠시 뒤 마법이 사그라졌을 때, 윤석호는 다시 한 번 놀랐다. 보스 몬스터는 죽지 않고 그 불바다 안에서도 살아남은 상태였다.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던 것이다.

‘마법의 범위가 너무 넓어서 위력이 집중되지 못했을 수도 있겠군.’

화면 안의 남자도 놀란 듯 멈춰 서 있었으나 곧 마지막 힘을 다해 달려오는 몬스터를 피해 다시금 순간 이동 같은 마법을 쓰기 시작했다. 그 정도 마법을 쓰고도 아직도 마력이 남아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완전히 몬스터를 끝낼 만한 마법을 쓸 수 없는 것만은 확실했다.

한참 동안 도망치다가 결국 잠시 타이밍을 놓친 사이 남자의 지척까지 몬스터가 달려왔다. 빼도 박도 못하고 죽을 것 같던 절체절명의 순간, 어디선가 날아온 빛 덩어리들이 몬스터를 난타하면서 남자는 무사히 몸을 빼냈다. 그와 함께 화면도 지직거리며 꺼졌다.

“…….”

동영상이 끝난 후에도 윤석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건은 말없이 그의 답을 기다렸다. 한참 후에야 윤석호는 저장장치를 다시 꺼내면서 입을 열었다.

“직접 찍은 건가?”

“네. 임무대로 HR-02 유저를 지켜보던 도중에 찍은 겁니다. 다른 GM들이 발견하기 전에 뒤처리도 했지요.”

“흠……. 그래서 내게 보고가 안 되었던 거군.”

“그런데 제가 알기론 저런 식으로 마법이 섞여 발현될 수는 없는데. 아닙니까?”

남무건의 질문에 윤석호가 웃으며 무릎 위에 깍지 낀 손을 올렸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미스트의 모든 마법이 저런 식으로 섞이고 형태가 바뀌는 것이라면, 애초에 마법 이름까지 정리해서 만들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제가 개발부였다면 저 광경을 보고 울었을 겁니다.’ 하고 중얼거리는 무건을 보고 윤석호는 부드럽게 눈을 휘어 보였다.

“확실히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저런 광경을 다른 사람에게서 다시 볼 일은 앞으로 거의 없을 테니 그런 걱정은 제쳐 둬.”

“예?”

“이건 미스트의 마법이 구현되는 원리와 관련된 문제야. 꿈속에서는 원하는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는 말처럼, 마법은 인간의 뇌가 할 수 있는 상상력의 힘을 빌려 작용하지. 하지만 그렇게 되면 정말로 말도 안 되는 범위나 강도의 마법들까지 생길 수 있으니까 곤란하지 않겠느냐고 묻는다면, 그건 절대 아니거든. 왜냐하면 인간의 뇌가 활성화될 수 있는 데는, 즉 상상할 수 있는 데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야.”

“아…….”

무건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가 그러거나 말거나 윤석호는 설명에 열중했다.

“평생 뇌의 5퍼센트도 제대로 못 써 보고 죽는 평범한 사람들은 미스트에서 마법을 쓰겠다고 마음먹었을 때에도, 완전히 현실 같은 ‘정밀한’ 상상을 할 수가 없어. 실제로 꿈을 꿀 때의 우리의 뇌는 자기도 모르게 꿈속에서 구현되는 모든 것들의 크기나 질량, 무게, 강도, 느낌까지도 완벽하게 구현해 내지만 미스트는 가수면 상태에서 플레이하는 게임이거든. 깨어 있는 우리의 이성이 그것을 방해해 기껏해야 희미한 이미지를 떠올리는 것 정도가 한계지. 상상력의 범위 또한 마찬가지로 이성과 현실에 의해 제약을 받게 마련이고, 우리는 시스템을 통해 그걸 제어하는 거야.”

“이해가 잘 안 되는데요.”

“예를 들어 보지. 현실에 이미 존재하는, 혹은 매체에서 이미 보아 왔던 평범한 불꽃의 모양에 익숙한 사람이 세모 모양이나 별 모양 파이어 볼을 흔들림 없이 완벽하게 상상해낼 수 있을까?”

남무건은 고개를 저었다.

“어렵겠지요.”

“그래. 익숙하지 않은 일을 하면 뇌에도 부담이 가고 흔들림이 커지게 마련이지. 그것을 파악하고 제어하는 방식에 의해서 미스트는 게임의 룰을 가질 수 있게 된 거야.”

남무건은 완전히 질려 버렸다.

“굉장하네요.”

“당연하지. 누가 생각해 낸 통제방법인데. 사실 다른 방식도 더 사용하고 있지만 가장 설명하기 쉬운 게 저 정도야. 검과는 다르게 마법은 유저들의 상상력을 통제해야만 하는 거라 그 방법 생각하는 데에만 엄청난 시간이 걸렸어.”

‘자기가 생각했으면서 아닌 척하고 칭찬받으니까 좋냐?’

무건은 자화자찬에 빠진 윤석호를 향해 눈을 깔고 속으로 투덜거린 다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저 HR-02 유저는 어떻게 된 겁니까?”

“통제 시스템이 만능은 아니라는 산 증거지.”

윤석호는 눈을 다시 슬쩍 허공에 두면서, 동영상 속의 남자를 바라보는 것처럼 힘을 주었다.

“그가 해낸 방금 그 마법은, 자신의 기존 인식마저 순간적으로 완전히 비틀어 새로운 형태로 만들어 버린 것과 같은 거야. 평균에 맞춰져 있던 시스템의 제어를 벗어난 힘이라 볼 수 있지. 그런 일을 과연 어느 누가 저리 쉽게 할 수 있을까.”

그 말과 함께 그는 멋스럽게 올려붙인 올백 머리칼을 다시 한 번 쓸어 넘겼다.

“사실 어느 정도 예상하기는 했었지만… 설마 이렇게 빠를 거라고는…….”

“예?”

작게 중얼거린 목소리를 들은 듯, 무건이 눈을 동그랗게 떴으나 윤석호는 웃으며 고개를 흔들어 보였다.

“혼잣말이야, 혼잣말. 아, 이 영상은 내가 자료용으로 가져도 되겠지?”

“아, 예.”

애초부터 그에게 주기 위해 가져온 것이었기에 남무건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윤석호가 자리에서 일어서 입을 열었다.

“그럼 앞으로도 그 유저에게서 눈을 떼지 말도록 하게. 무슨 일이 있다면 바로 보고하고.”

“알겠습니다. 그런데 어디 가시게요?”

일어서서 자신 쪽으로 뚜벅뚜벅 구두 소리를 내며 걸어오는 그에게 무건이 묻자 윤석호는 어깨를 으쓱하며 바깥쪽을 가리켜 보였다. 그 짧은 동작조차도 잘생긴 남자가 하면 화보가 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낀 무건은 속으로 욕을 했다.

“이제 그만 VT 회의를 할 시간이라서 말이야.”

“아, 예. 잘 다녀오십시오.”

윤석호는 고개를 끄덕인 뒤 뒤돌아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의 뒷모습에서는 숨길 수 없는 즐거움이 풍겨 나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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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

키온 형과 대강의 이야기를 더 나누면서 방 안에서 나와 밑으로 내려갔을 때, 역시나 제일 먼저 달려와 내 목을 덥석 껴안은 이는 크란이었다.

“…….”

그리고 크란을 향해 살벌하게 눈을 치뜨고 있는 유완.

“카르. 그러면 난 그렇게 알고 팔등이 놈한테 가 볼 테니까, 웬만하면 로그아웃은 여기서 해. 알겠지?”

키온 형이 유완과 크란을 향해 그리 선량해 보이지 않는 눈을 위협적으로 부릅떠 보인 다음 나에게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응.”

고개를 끄덕이자 형은 바로 밖으로 나갔다.

우리는 이곳 길드원도 아니라 괜찮을까 싶었지만 안에 있는 사이 무슨 얘기를 해 놓았는지, 아까 들어올 때는 놀라 쳐다보던 길드원들이 지금은 남겨진 우리들에게 신경조차 쓰지 않고 소 닭 보듯 지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어쩐지 여기 길드원들은 전부…….’

아무리 둘러봐도 이 건물 내에는 깍두기 같은 남자들만 우글거리고 있었다. 여기도 인상 나쁜 놈, 저기도 인상 나쁜 놈뿐. 게다가 몇몇의 얼굴이나 몸에 있는 선명한 흉터 자국들은 캐릭터를 만들 때 일부러 만들 수도 없을 정도로 큰데 대체 현실에서 뭘 하는 사람들이란 말인가?

나는 그런 의구심과 함께 끌어안고 있는 크란의 팔을 풀어내면서 유완을 슬쩍 보았다. 뭐라 할 수 없는 감정이 유완을 볼 때마다 마음속에서 치솟았다. 배신감도 아니고, 미움도 아니고, 의문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기분 좋은 감정도 아니었다. 의아했다.

‘이상하군.’

왠지 가슴 근처가 근질거리는 듯한 나쁜 기분에, 나는 슬그머니 가슴을 쓸어 보았다.

“그런데 카프. 대체 안에서 무슨 얘기를 하고 온 거야?”

낑낑거리며 떨어져 나간 크란이 한숨을 쉬면서 물었다. 궁금해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렇게 큰 의미는 담고 있지 않은 의례적인 질문이었다. 나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유완과 시선이 마주쳤다. 순간 가슴 속이 불안하게 술렁였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얘기했어. 그리고 네 일이 끝날 때까지는 여기서 편하게 지내도 좋다고 형이 말했으니 너희도 참고해.”

“내 일? ……아.”

크란이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내 퀘스트……. 다시 확인해 봤는데, 생각보다 까다로울 것 같아.”

그 말에 의아해져 크란을 쳐다보자, 크란은 당황한 표정으로 손을 내저으며 크게 어색한 웃음을 터뜨렸다.

“아, 아니. 그렇다고 못 하겠다는 건 절대 아니고. 하하하하.”

“…….”

“그냥 이 도시의 NPC들하고 미니 퀘스트만 열 번 정도 열심히 수행하면 되는 거더라고! 별거 아니지! 하하하하하.”

“…….”

“……으으윽.”

난 아무 말도 안 했는데 혼자 웃다가 가슴을 부여잡고 ‘너의 그 냉정한 얼굴이 내 가슴을 찔러’ 어쩌고 하며 괴로워하는 원맨쇼를 벌이는 크란을 빤히 쳐다보다가 다시 유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언제나와 같이 무표정한 얼굴인데도 보고 있는 내 심정은 아까까지와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불과 한두 시간 전에는 내가 이들의 마음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것이, 주변에 있는 사람의 마음을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것이, 결국 또다시 자신만을 믿어야 하는 상황에 도달할지 모른단 것이 불안하고 초조했다.

그런 건 이제 별로 마음에 안 드는데.

“……카프?”

유완이 말없는 내가 이상했는지 손을 내밀려 했다. 나는 순간 흠칫하고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섰다.

그리고 반사적이었던 그 행동은 유완에게도, 나에게도 작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내가 왜 피했지?’

유완은 놀란 듯 멈칫했다가, 내 표정을 보면서 서서히 의아한 표정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 얼굴을 바라보자 머릿속을 가득 채운 감정들이 한층 더 복잡해지는 것을 느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유완을 보면 마음속 의문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올 것 같았는데 정작 지금은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결국 나는 지금보다 좀 더 감정이 정리되었을 때 말하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하고 입을 열었다.

“형이 여기서 편하게 지내라고 했으니 크란의 이번 퀘스트가 끝날 때까지는 나도 마법 수련을 하려고 해.”

최대한 평소와 똑같이 말하려고 노력하며 천천히 내뱉자 잠깐 의미를 알 수 없는 푸른 눈동자로 이쪽을 응시하던 유완이 한참 후에야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나도 수련을…….”

“어? 뭐야. 너무해. 나도 카프랑 같이 수련하고 싶은데!”

“아무하고도 같이 안 해. 너는 빨리 퀘스트 끝내는 데에나 신경 써.”

“이 가차 없는 공격에 체력이 닳는다……. 크윽.”

크란은 다행히 유완과 나 사이에 오갔던 미묘한 긴장감을 미처 눈치채지 못했는지 장난스럽게 가슴을 움켜쥐고 고통에 몸부림치는 연기를 했다. 나는 그런 크란의 행동에 어이없어하는 척하며 유완을 지나쳐 다시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쪽으로 향했다. 스쳐 지나가는 순간 유완의 시선이 등 뒤에 와서 박히는 느낌이 이상하게도 생생했다.

‘유완…….’

방 안에 틀어박혀 마법 수련만 하기로 결심한 지 이틀이 흘렀다.

이상하게도 집중이 하나도 되지 않아서 나는 처음으로 슈페리어의 검술 스크롤을 열기로 했다.

아이템창에서 하얀 스크롤을 꺼내자 돌돌 말려 있는 예스러운 종이가 한 손에 들어왔다. 그것을 펼치자 곧 빛이 새하얗게 터져 나오면서 몸을 감쌌다. 위험해 보이지는 않아 가만히 있었더니 곧 빛이 사그라지며 띠링 하고 안내창이 떠올랐다.

- 사용자의 자격이 충분합니다. 슈페리어의 마 ‧ 라키안 검술 제1식의 봉인이 풀렸습니다!

방금 그 빛은 슈페리어의 마법서 때처럼 역시나 5서클 이상인지 아닌지를 알아보는 자격 측정과 비슷한 역할을 하는 것이었던 모양이었다. 안내창이 사라지면서 땅에 툭 떨어진 스크롤을 손에 쥔 순간, 갑자기 또 다른 안내창이 나타났다.

띠링!

- 마 ‧ 라키안 검술 제1식의 스킬을 익히셨습니다. 자세한 설명은 스킬창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뭐냐, 이건?’

스킬을 마법서가 아닌 스크롤을 통해 배우는 것은 처음이라 좀 기대했었는데, 집어 들자마자 다 익혔다는 말과 함께 팔랑팔랑 가루로 변해가는 것을 보자 황당해졌다. 나는 형체가 완전히 사라진 스크롤의 잔해를 바라보며 멍하니 입을 열었다.

“스킬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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