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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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루미네가 준 종이의 끈을 살살 잡아당겼다. 금방이라도 부스러질 것 같아 조심스럽게 펴자, 그곳에는 이제까지와 같이 익숙한 마법 주문과 이름이 있었다.

[원하노니, 존재하는 것에서 벗어나 이 순간 그 숨결을 드러내 나를 위해 움직이라. - 에어리얼 서번트]

시동어가 제대로 존재하는 주문을 본 순간 반가움이 차올라 종이를 쥔 손에 힘을 너무 줄 뻔했다. 확실히 이루미네가 준 것은 슈페리어의 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지금까지 배워온 것과 같은 형태의 마법이었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어떤 마법이 될까 생각하고 있을 때, 옆에서 칼을 뽑아 들고 스킬을 수련한다며 부산을 떨던 크란의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들었다.

“왜?”

“어? 아, 아니.”

내 물음에 당황하던 크란은 여기저기로 눈을 굴리더니, 잠시 후 나직한 목소리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마법, 재밌어?”

듣는 내가 허탈해질 만한 내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묻는 크란의 표정은 한없이 진지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무시하려던 생각을 고쳐먹고 제대로 대답해 주기로 했다.

“재미없었으면 이 게임을 안 했겠지.”

“응…… 그거야 그렇지. 방금 표정이 되게 생기발랄해서 나도 모르게 그만…….”

“음?”

“아냐, 그냥 한번 물어봤어. 방해해서 미안, 계속 수련해! 난 나가서 할게.”

뒷말은 말끝을 흐려 제대로 듣지 못했는데 크란은 얼굴과 귀가 새빨개진 채로 크게 웃으며 내 등을 두드리더니 쏜살같이 방을 뛰쳐나가버렸다. 곧 바깥의 현관문까지 거칠게 열렸다 닫히는 소리를 듣고 나서도 한참 뒤에야 이게 무슨 상황인가 생각하고 있으려니, 잠시 후 다시 현관문이 끽 하고 열렸다.

‘나갔다 다시 들어오는 건 또 뭔 짓인지…….’

그게 크란답기는 하다만……. 내심 어이없어하며 기다리고 있는데, 발소리로 보아 방에 들어오지는 않고 바로 바깥에서 배회하고 있는 듯했다.

‘왜 다시 들어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자기도 좀 쑥스럽긴 하겠지.’

결국 아까와는 달리 천천히 다가와 소리 없이 문을 미는 것에 나는 무표정하게 한 마디를 던졌다.

“잊은 거 있으면 빨리 말해.”

내 말에 잠시 멈칫했던 문이 활짝 열렸다. 그쪽을 쳐다본 나는 잠시 당황해 입을 다물었다. 문 앞에 서 있던 것은 크란이 아니라 운오였던 것이다.

“…….”

어색한 침묵을 먼저 깨뜨린 것은 상대방이었다.

“죄송합니다.”

“아니. 오히려 내가 착각해서 미안. 크란인 줄 알고…….”

조금 민망하게 대답하자, 운오가 작게 웃고는 완전히 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무슨 말을 할까 고민했으나 예상외로 또다시 운오가 먼저 입을 여는 바람에 그럴 필요가 없게 되었다.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그래. 너는?”

“잘 지냈습니다.”

빈말은 아닌 듯했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에는 무척 피곤해 보였었는데 지금은 혈색이 괜찮았다. 그동안 녀석에게 정말로 무슨 변화가 있기는 있었던 모양이었다. 나는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네 여동생은?”

물으면서도 동생에 민감하던 운오가 안색을 바꾸어 날카롭게 대꾸하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돌아온 대답은 차분했다.

“아직까지는 별 차도가 없지만 괜찮습니다.”

그러면 이 녀석이 바뀐 게 동생 때문은 아니라는 건데. ……그런데, 가만 보니 말 편하게 하라고 했음에도 이 자식 은근슬쩍 똑같이 존댓말을 쓰고 있었다.

두 번씩이나 같은 사항을 권해 줄 성격은 되지 못했으므로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른 것을 물었다.

“그랬군. 그건 그렇고, 그동안 좀 바뀐 것 같은데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거냐?”

“좋은 의미십니까?”

“물론.”

단호하게 대답하자 운오가 바람 빠지는 소리와 함께 웃었다. 그 얼굴이 이제야 정말 열아홉 살 같았다.

“그냥……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여기’. 더 미스트 속의 세상을 지칭하는 말에 힘을 주자 운오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네.”

아…… 그랬군. 너도…….

나는 운오의 밝아진 얼굴을 살펴보다 함께 미소 지어 버렸다. 그 이상 말로 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건 나에게 찾아온 많은 변화처럼, 너에게도 조금 늦게나마 변화가 찾아왔다는 소리다.

내가 만났던 많은 이들처럼, 너도 너에게 무언가를 나누어 준 다른 이들을 만났다는 것. 늘 위태위태해 보였던 녀석이 이제는 한껏 세우고 다니던 발뒤꿈치를 내려 땅을 단단히 딛고 선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실은 얼마 전 관장님을 찾아갔었습니다.”

그 후 완전히 풀어진 분위기와 함께 처음으로 나는 운오와 편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염치는 없지만, 도장을 다시 다닐 수는 없으니 아무도 나오지 않는 시각에 두 시간 정도만 들어갈 수 있게 해 달라고 부탁드렸는데 흔쾌히 허락해 주시더군요.”

그런 일이 있었단 말인가. 놀라워하는 내 표정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운오가 입꼬리를 올렸다.

“아직 길이 보이는 것은 아닙니다만, 계속해서 노력할 생각입니다. 저도, 동생도.”

“…….”

한참 후 돌아온 크란은 사이좋게 마주 앉아 퀘스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우리들을 보고 제자리에 망부석처럼 굳어 멈춰 서버렸다.

“어……? 어어…….”

“뭘 그렇게 서 있어. 너도 와서 앉아.”

“카, 카프. 방금 네가 웃으면서 얘기하고 있던 거 맞아? 이, 이게 대체 무슨…… 무슨 상황이야?”

경악의 눈초리와 이해가 안 간다는 듯한 두려운 표정을 하고도 내 말에 따라 쭈뼛쭈뼛 다가와 앉은 크란은, 곧 사교성 좋고 단순한 놈답게 빠르게 이야기에 적응해 버렸다.

“뭐? 네가 전에 만났던 퀘스트 유저 중에 암살자 놈이 있었다고?”

“네.”

“케켁. 그 능글머리 왕재수 왕자병 자식, 죽지도 않고 계속 돌아다니고 있었다니……. 시저 그 자식은 그놈부터 안 잡고 뭐 한 거야?”

“확실히 재수 없긴 하더군요.”

“그렇지? 그래도 넌 괜찮았을 것 같다. 너도 한 싸가지 하니까.”

“……그거…….”

“칭찬이야, 칭찬. 물론 칭찬이지.”

예상보다 훨씬 잘 노니 다행이었다. 크란이 가끔 던지는 말에 운오가 눈을 찡그리고 뜰 때마다 등을 퍽퍽 때리며 넘어가는 크란의 태도는 내가 보기에는 놀려 먹을 만한 놈이 하나 생겨 좋아하는 것 같았다.

“형도 똑같은 것 같으니 그런 말을 할 자격은 없어 보입니다만…….”

“엥? 뭐야?”

아무렇지도 않게 싸늘한 얼굴로 큰 반격을 날리는 운오가 그렇게 얌전히 동생 노릇을 할 거라고는 처음부터 생각지도 않았지만……. 어쨌든 내가 입을 다물었어도 둘이 잘들 노는 모습을 보니 나는 이제 원래 하려고 했던 마법 이미징에나 들어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다시 종이를 폈다.

에어리얼 서번트. 이번에 도전해야 할 최초의 6서클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원하노니, 존재하는 것에서 벗어나 이 순간 그 숨결을 드러내 나를 위해 움직이라. - 에어리얼 서번트]

에어리얼 서번트는 곧 바람의 하인. 그렇다면 바람을 이용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하는 게 이 마법의 사용법이 되겠지. 굳이 바람을 사용함으로 할 수 있는 일이라…….

‘…….’

제법 많은 사용법이 금방 머릿속에서 떠올랐다. 역시 전투 중 보조로의 활용이 정석이겠지만……. 바람 계열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최대의 장점이다. 게다가 이 마법은 특히 응용할 수 있는 자유도가 높아 보이므로 그 장점을 더 잘 살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굳이 전투 중에 쓰지 않더라도…….

‘…….’

공중에 둥둥 뜬 돌멩이가 저 혼자 날아가 아무것도 모르는 크란의 머리를 한 대 딱 때리는 상상이 떠올랐다.

“훗…….”

그것도 재밌을 것 같다. 어쨌든 에어리얼 서번트…… 엘프가 준 마법답긴 하군. 직접살상력은 적겠지만, 그래도 6서클이라. 과연 그만한 값을 할까.

“……저, ……카프.”

갑자기 쭈뼛대며 묻는 크란의 목소리에 잠겨 있던 생각에서 깨어나자, 뭔가 못 볼 것을 본 것처럼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있는 크란과 표정이 약간 이상하게 변해 있는 운오가 보였다.

“……왜?”

“아, 아니. 방금…… 웃음을 못 참는 것 같은 소리가 났는데, 내 귀에는 왠지 그게 네 쪽에서 난 것처럼 들려서 말이야.”

설마 아니지? 같은 표정을 이미 가득 짓고 있는 채로 그렇게 물어봤자…….

“그냥 있었는데…….”

“아…… 그렇지? 그냥 스크롤 보고 있었던 거지? 하하. 내 귀가 먹은 거였군, 역시.”

“…….”

얼떨떨한 얼굴로 애써 웃으며 다시 고개를 돌리는 크란과는 달리 운오는 마지막까지도 의혹 어린 눈길을 진하게 보내다가 고개를 돌렸다. 나는 둘에게 보이지 않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 그냥 웃었을 뿐이지. 게다가 무슨 생각을 하다 그랬는지 안다면, 아무리 크란이라고 해도 좀 충격 받을 것 같았다.

속으로 웃음을 삼키며 나는 다시 이미징에 힘을 쏟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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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호의 전화가 온 것은 이루미네가 준 일주일 사이, 내가 한창 마 ‧ 라키안 검술의 퍼센티지를 올리기 위한 마력 주입과 에어리얼 서번트의 이미징에 정신이 없던 무렵이었다. 검도장에 가야 하는 날이라 모처럼 일찍 일어나 준비를 마쳤을 때, 갑자기 안내 소리가 울려 퍼졌다.

[ 01A-1169-G89SCB 번호에서 화상 전화가 왔습니다. 받으시겠습니까? ]

“……01A-1169-G89SCB?”

묘하게 익숙한 번호인데. 누구였지?

“받아.”

무심코 말하자, 곧 화면이 허공에 켜지며 정장을 매끈하게 차려입고 의자에 앉아 있는 남자의 모습이 나타났다.

[ 아, 강무헌 씨. 오랜만이죠? ]

나는 윤석호를 바라보면서 다음에는 이 번호를 꼭 저장해 놓고 수신 거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뭡니까?”

[ 아직도 제가 반갑지 않으십니까? 전 무헌 씨에게 관심이 참 많은데 이러실 때마다 얼마나 섭섭한지……. ]

“그 관심 집어치우고, 용건이나 말씀해 주십시오.”

[ 그 칼 같은 면모가 좋다니까요. 여하튼…… 뭐, 몸 건강히 잘 지내셨죠? ]

“아…….”

건강이고 뭐고 집어치우라고 대꾸하려던 나는 문득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예전 일에 눈을 날카롭게 떴다. 전에 윤석호에게 따지려다가 잊어버렸던 깡패들의 일이 떠올랐던 것이다. 젠장. 그렇게 중요한 일을 잊어먹다니…… 내가 미쳤었나?

“전혀 건강 못했습니다.”

[ 예? 여기서 보기에는 괜찮아 보이는데……. 혹시 무슨 문제라도 있으셨습니까? ]

눈빛이 날카로워진 윤석호가 화면 너머로 내 모습을 이리저리 훑어보는 것을 이상하게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얼마 전에 제가 일하는 검도장 앞에서 수상한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저에게 당신 사진을 내밀며 아느냐고 묻더군요. 하마터면 좀 위험할 뻔했습니다.”

말을 끝낸 순간, 늘 능글거리던 윤석호의 낯빛이 변했다. 말을 꺼낸 나조차 흠칫 놀랄 만큼 날카로운 눈빛이었다.

[ 다행히…… 크게 다친 곳은 없으셨던 것 같군요. ]

곧바로 표정 수습을 하기는 했지만 괜찮으냐고 물어보는 말치고는 지나치게 어색한 티가 나 말을 돌리려 한다는 것이 확연히 느껴졌다. 늘 돌리는 줄도 모르게 넘어가던 사람의 말이라기에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매끄럽지 않았다.

“윤석호 씨. 이건 제 신변과도 관련되었던 일입니다. 그런 말 돌리기로 넘어갈 생각하지 마십시오. 도대체 3년 전에 그곳에는 왜 왔었던 겁니까?”

내가 날카롭게 묻자, 윤석호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고개를 깊숙이 숙여 보였다.

[ 무헌 씨. 우선 저와 관련하여 그런 일이 있으셨다는 것에 깊이 사죄드립니다. ]

그러니까 그 사죄 같은 건 필요 없다니까…….

[ 우선…… 저도 굉장히 놀랐다는 사실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그 배후가 누구인지는 아직 알 수가 없군요. 일단 그 점을 저희 측에서 먼저 해결한 후에야 강무헌 씨의 질문에 대해 답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왜입니까?”

[ 여기서 제가 함부로 무언가 말할 경우, 그런 자들이 더 찾아오리라는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

‘…….’

뭔지는 몰라도 표정을 보니 농담을 하는 건 아닌 듯했다.

[ 아마도 그치들은 강무헌 씨와 제가 이렇게 관련되어 있을 줄은 몰랐던 모양이군요. 이런 사실을 이제야 알게 되다니……. 왜 진작 연락 주시지 않았던 겁니까? ]

이제는 심각하다 못해 화를 내는 듯한 윤석호의 어조에 나는 약간 미간을 찌푸렸다.

“잊어버렸습니다. 그렇게까지 심각한 사항일 줄은 몰라서…….”

[ 지금이라도 알게 되어서 천만다행이긴 합니다만……. 무헌 씨에게 손을 대다니. 용서할 수가 없는데요. 이럴 줄 알았다면 미리 경호원이라도 붙였어야 했나 싶네요. 귀하신 몸에 상처라도 나면 어쩌시려고요? ]

“……지금 제정신입니까?”

방금까지 심각했던 것이 다 농담이라는 듯 이마를 손으로 짚고서 과장된 미친 소리를 중얼대는 윤석호의 눈빛은, 그러나 아직까지도 진지한 빛을 띠고 있었다.

[ 어쨌든, 이 일은 저희 측에서 빠르게 해결한 후 다시 연락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무헌 씨가 뜻하지 않게 중요한 것을 제보해 주셨으니 저도 그에 대한 답례를 드려야겠는데요……. ]

“필요 없습니다.”

전에도 선물이니 뭐니 자기 마음대로 일을 해치웠던 전적이 떠올라 단호하게 거부했다.

[ 그렇게 거부하지 마시고. 이건 물질적인 답례가 아니니까요. ]

윤석호가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 강무헌 씨, 아니. 카프로스 님. ]

……응?

[ 6서클은 5서클까지와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

‘뭐?’

“당신 그걸 어떻게…….”

설마 내가 게임하는 걸 지켜보기라도 하는 거냐? 흠칫 놀라 묻는 나에게 윤석호는 즐겁게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

[ 6서클 마법은 일단 써 보신 후에야 감이 잡히실 테니까 속는 셈치고 한 번 시도부터 해 보시는 것을 추천합니다. ]

일단 써 본 후에야……라고? 명확한 형태를 잡지 못한 채 마법을 시도해 보았자 마력만 급속도로 날아갈 뿐인데. 그걸 모르는 건가? 미심쩍은 눈으로 바라보니 윤석호가 경쾌하게 웃어젖혔다.

[ 아…… 여기까지 가르쳐 드리면 곤란한데. 이미징은 말입니다, 지금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 후에 필요할 겁니다. 아시겠죠? 힌트는 여기까지 드리겠습니다. ]

“아…….”

아리송한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노라니, 윤석호는 나를 즐거운 눈으로 바라보다 다시 입을 열었다.

[ 뭐…… 그리고 오늘 제가 연락드린 진짜 이유는 말입니다, 새로운 퀘스트 영상이 곧 발표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마 이 전화를 끊을 즈음이면 웹 페이지에 올라와 있겠군요. ]

새로운 영상이라고?

[ 물론 이번 영상은 무헌 씨가 아닙니다. 다른 분이 먼저 조건을 충족하셔서 들어가게 되셨죠. 하지만 많은 것을 느끼실 수 있을 테니, 잊지 마시고 꼭 보아주셨으면 합니다. ]

“…….”

[ 아, 그러면 이제 끊어야겠군요. 이래 봬도 저도 바쁜 사람이라서요…… 하하. 무헌 씨, 그러면 몸조심하시고 다음에 또 뵙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이만. ]

핏.

갑자기 옆을 흘끔거리더니 자기 할 말만 하고 전화를 끊어버린 윤석호의 모습이 사라지자 집 안은 곧 정적에 휩싸였다. 나는 한동안 멍하니 서서 윤석호의 말들을 곱씹어 보다가, 새로운 퀘스트 영상이 곧 발표된다는 말이 떠올라 핫 하고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시간이…….”

2시10분. 검도장에 나가야 할 시간이 벌써 10분이나 늦어 있었다.

‘이런…….’

난 잠시 컴퓨터와 문을 아쉽게 바라보다 곧 현관문 쪽으로 발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지……. 다녀와서 봐도 될 테니까.

아르바이트를 하는 내내 정신을 어디다 팔고 있느냐는 사부님의 호통을 들어가면서도 새로운 퀘스트 영상에 대한 생각에 몰두하다 보니, 어느새 갈 시간이 다 되어 있었다.

“사부님, 그럼 전 이제 돌아가겠습니다.”

7시30분이 되자마자 평소에 절뚝이는 모습을 남들 앞에서 보이기 싫어했던 것도 상관하지 않고 다리를 끌며 사부님께로 달려가자, 사부님이 희한한 것을 보듯 나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허…… 참. 네가 이렇게 안달하는 모습은 또 처음 보는구나. 그래, 어서 가라. 하지만 다음에도 이러면 안 된다.”

“예. 안녕히 계십시오. 사모님께도 안부 전해 주세요.”

그러고는 곧바로 도복을 벗고 외투를 껴입는 나를 보며 사부님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싸범님! 애인 만나러 가요? 네?”

“어? 사범님 애인 있었어요?”

밖으로 헐레벌떡 나가던 도중 큰 눈을 또록또록 뜬 인우와 세종이가 순진하게 물어왔지만, 나는 피식 웃고 녀석들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 준 뒤 그냥 문 밖으로 나섰다. 문을 나서자마자 내 머릿속을 독차지한 것은 오로지 퀘스트 영상에 대한 것뿐이었다.

“택시.”

평소에는 추워도 꿋꿋이 걸어 다니던 길마저 택시를 잡으려니 웃기기도 했으나, 그보다는 궁금함이 더 컸다. 자랑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퀘스트 유저들은 다 만나 보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과연 이번 영상의 주인공은 누구일 것인가?

집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나는 급하게 입을 열었다.

“컴퓨터, 웹 페이지 켜서 더 미스트 공식 페이지로 가.”

- 연결하겠습니다. 2. 1.

팟.

신발을 벗고 지팡이를 세워놓은 뒤 외투를 그대로 입은 채 소파에 눕듯이 앉았다. 급하게 오는 동안 추위에 얼어 있던 얼굴이 녹기 시작하는 것이 느껴졌다. 곧이어 익숙한 웹 페이지의 대문이 허공에 크게 나타났다.

“들어가서 공지 사항으로.”

공지 사항란으로 가자, 윤석호의 말대로 새로운 게시물이 떠올라 있었다. 그제야 나는 한숨을 내쉬고 익숙한 제목을 두드려 안으로 들어갔다.

[ 에피소드 3. 기억의 재래 ~ 세 번째의 재래 ]

두 번이나 보았던 때처럼 팟 하고 화면이 점멸하며, 곧 까맣게 물들기 시작했다.

[ Episode 3. 기억의 재래 ~ 세 번째 재래. ]

글씨가 사라지고 나서 약간의 시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까만 화면에 의아해질 즈음, 희미한 소리가 화면 안에서 점점 크게 들려왔다.

똑…….

‘응?’

똑…… 똑…….

메아리를 남기며 점점 커져가는 소리는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 같았다. 동시에 화면이 아주 약간 밝아지면서 비틀거리는 누군가의 시커먼 실루엣이 가운데에 비춰졌다.

‘……누구지, 저건?’

아마 배경은 깊은 동굴…… 쯤인가? 약간씩 울퉁불퉁한 바위 벽 등이 간신히 식별할 수 있을 정도로만 비추어져 확실치는 않았지만 그런 것 같았다.

철퍽…… 철퍽…….

얼마간 길을 헤매며 비틀거리던 그림자의 발끝으로 화면이 클로즈업되고, 그가 막 한 발을 어느 땅에 내디뎠을 때 이변이 일어났다.

후와아아악!

발을 내디딘 순간, 그 발끝에서부터 시작된 새파란 빛이 그의 앞의 모든 지역으로 후왁 하고 포물선을 그리며 환하게 퍼졌던 것이다. 하지만 그 빛도 그리 밝지 않아 화면의 주인공은 여전히 옷차림조차 구별하기 힘들었다. 잠시 후 모든 빛들이 진정되어 은은한 빛만을 발하게 되었을 때, 위로 날아오른 화면으로 인해 나는 무엇이 변했는지를 알 수 있게 되었다.

‘저건……!’

저도 모르게 소리 없이 감탄했을 정도로 엄청난 마법진 같은 게 화면 가득한 모든 땅과 벽에 걸쳐 빛으로 그려져 있었다. 그건 도형과 도형들이 이어져 만들어낸 최고의 장관이었다. 감탄하며 쳐다보고 있자, 화면 끄트머리에 서 있던 사람 그림자는 여전히 약간 힘겹게 걸음을 끌며 마법진의 중앙으로 걸어갔다. 그가 간신히 마법진의 중앙, 속이 빈 원이 그려져 있는 곳의 땅을 밟았을 때 이번에는 두 번째 빛이 환하게 터져 나왔다.

파앗!

붉은빛이 한순간 중앙의 작은 원에서 뿜어져 나와 그림자를 감싼 뒤, 빛 안에서 스르르 검은 광택이 흐르는 검이 빠져나왔다. 검이 완전히 빠져나와 허공에 선 순간 빛은 꺼졌고, 화면은 사람이 아닌 검을 비춤으로써 또다시 주인공을 가렸다.

‘도대체 저 영상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알아야 할 것 아닌가? 짜증나는군.’

인상을 찌푸리며 화면을 보고 있을 때, 클로즈업된 검이 갑자기 부르르 떨더니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 아…… 잘 잤다. ]

[ ……. ]

[ 어이. 죽을 맛인 건 알겠지만 똑바로 좀 서 봐. 이거야 원. 얼굴도 못 알아보겠군. ]

[ ……. ]

검이 말을? ……놀란 나처럼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검의 주인 또한 그랬던 것인지, 그 순간 검에서 호탕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 푸하하하하. 내가 뭐라고? 난 당신이 지금까지 들고 잘 싸우던 그 검이다. 깨어날 때가 되어서 깨어난 것뿐이야. 이 바르가르트 님께서 드디어 열 번째로 깨어난 역사적인 날이라고. ]

검에서 말소리가 나올 때마다 붉은빛이 일렁거리며 강약 조절에 따라 넘실거렸다.

검의 목소리는 의외로 젊고 좋은 느낌을 주는 남자의 목소리였다.

[ 아아, 말이 너무 길었군. 정신 좀 차려 봐. 이제 나를 들고 이 원 중앙에 찔러 넣기만 하면 돼. 내가 바로 이 장소의 의식을 시작하는 열쇠와도 같으니까 말이야. 자……. ]

검이 스르르 그림자에게로 내려오자, 그림자는 잠시 멈칫거리며 검을 양손에 들고 서 있다가 배경음악이 고조된 순간 천천히 들어 올려서, 그대로 망설임 없이 땅으로 푹 찔러 넣었다.

쿠콰카카카칵!

그러자마자 갑자기 기류의 소용돌이 같은 것이 그를 중심으로 빙글빙글 돌다가 마침내는 마법진의 푸른빛들까지 섞여들어 환상적이고도 정신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그 한가운데에 서 있는 그림자는 얼핏 폭풍의 눈처럼 멀쩡해 보였지만, 그것도 오래 가지는 못했다.

홱!

순식간에 무언가에 이끌리듯 몸이 허공으로 떠오른 그림자 남자가 약간 당황한 기색을 보였으나, 그의 몸은 이내 무언가에 붙잡힌 듯 팔이 들려 십자가에 매달린 듯한 모습이 되었다. 빛에 형체가 더 드러나 남자임이 확실해진 그가 주변을 돌아보며 팔을 당겨 보았으나 꼼짝도 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이 고정되자마자 우렁우렁하는 목소리가 동굴을 부숴버릴 듯 울려 퍼졌다.

[[ 그대, 위대하고 어리석은 처단자들의 후예. ]]

점점 정신없이 고조되던 배경음악이 그 목소리가 나온 순간 뚝 하고 멎었다. 휘몰아치던 소용돌이도 한순간에 멎어버리고, 동굴 안은 곧 정적에 휩싸였다.

[[ 그대의 전임자 이후 벌써 500년. ]]

[[ 살아서 여기까지 기어 내려오다니. 무슨 일이 생길지 두렵지도 않은가? ]]

[[ ……. ]]

대답을 듣기라도 하려는 듯 잠시 조용해졌던 목소리는 곧 다시 들려왔다.

[[ 이곳은 옛 수도의 가장 어두운 지하. 나는 너를 진정한 처단자로 만들어 주기 위한 거대한 의지이다. 그러니까 정확히 말하자면, ]]

잠시 뜸을 들이던 목소리는 곧 귀청이 터질 듯한 우렁우렁한 소리와 함께 마지막 말을 끝마쳤다.

[[ 네가 제 발로 여기에 들어온 이상 나는 너를 열 번째의 마물 처단자, 다크 나이트로 만들겠다는 말이다. ]]

뭐…… 뭐라고? 다크 나이트……?!

순간 너무 놀라 눈을 부릅뜬 채 저도 모르게 소파에서 튀어나갈 듯 몸을 앞으로 내민 내가 화면을 뚫어져라 노려보든 말든 목소리는 계속해서 제 할 말만을 하고 있었다.

[[ 원래는 수많은 후보들 중 이 의식을 견뎌낸 자만이 살아남아 처단자가 된다. 하지만 세월이 너무 오래 지나 이제는 나라의 이름도, 처단자의 존재조차 잊혀졌고, 후보자는 500년간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9대 처단자는 이 상황을 이미 나에게 알려 주었다. 혹시라도 운이 좋다면,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10대째가 나타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이야. 그리고 바로 그 10대째, 너를 위해 원래는 네가 준비해야 할 것을 그가 나에게 먼저 주고 떠나버렸지. ]]

목소리가 나올 때마다 주변의 빛도 따라서 일렁였다.

[[ 알고 있는가? 처단자가 되기 위해서 마땅히 거쳐야 할 의식의 준비물은 바로 지금껏 네가 잡아온 마물들 중 가장 강한 녀석의 피다. 그 녀석의 피로 의식을 거쳐 그 속에서 살아남았을 때에야 비로소 진정한 처단자가 되는 것이지. 그렇지만…… 하하. 너는 정말 운이 좋은 녀석이야. 네 제물은 이렇듯 500년 전부터 미리 준비되어 있었고, 네 라이벌이 될 후보들은 존재하지도 않지. ]]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정보들에 머리가 과부하를 일으킬 것 같았다. 다크 나이트는 마물 처단자라고? 지금의 퀘스트 수행자 전의 다크 나이트라면 슈페리어의 친구인 그 다크 나이트일 텐데…….

[[ 그저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약속할 수 있다. 분명 너에게 주어질 힘은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클 것이다. 물론 거기엔 그만한 고통도 함께하겠지만 말이야. 나는 당사자의 의견을 중시하니 한 번만 물어보겠다. 어때. 너는 이 낙인에 동의하는가? ]]

[ ……. ]

오랜 침묵이 흐른 뒤, 턱만 클로즈업된 남자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가 혹시라도 내가 아는 그 녀석인지를 확인할 수 있을까 싶어 눈이 빠져라 쳐다보았지만, 화면은 일부러 그런 것처럼 교묘한 각도로 머리카락조차 제대로 비추지 않았다.

‘아니…… 일부러 그런 것처럼이 아니라 일부러겠군.’

윤석호는 얼굴이 나올지, 나오지 않을지는 본인이 결정하면 된다고 말했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저렇게까지 어두울 필요가 있었나 싶지만…….

[[ 하하하하하하하! ]]

그때, 남자의 동의에 만족한 것인지 또 한 번 엄청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동시에 또 다른 여러 개의 웃음소리들이 시끄럽게 울려 퍼지고, 처음의 목소리는 다시 유쾌하게 떠들기 시작했다.

[[ 처단자의 열 번째 후예가 다시금 태어났다. 축하한다! 평생을 원하던 힘과 함께, 그러나 그만한 대가를 치르게 되리라. 500년 만의 의식이다. 자아, 준비된 피를! ]]

후와악 하는 소리와 함께 허공에서 스며들듯 모인 액체들이 긴박한 노래와 맞추어 떠올랐다. 술렁거리며 남자의 머리 위에 떠 있는 액체에서는 기묘한 붉은빛이 났다.

[[ 이것은 그동안 의식에 사용되었던 피 중 가장 무서운 것. 너는 용의 피로 낙인을 찍고, 네가 잡아 죽여야 할 마물의 힘을 얻게 되리라. 진. 진을 그려라! ]]

노래와 같은 말과 함께 허공에서 이리저리 꿈틀대던 피가 울렁거리며 결합하고 벌어져, 마침내는 정말로 살아 움직이는 이상한 마법진 같기도 하고 문양 같기도 한 것을 만들어냈다. 분위기가 점점 불길하게 고조되어갔다.

[[ 이제는 돌이킬 수 없다. 마지막으로 주는 단 하나의 친절은, 네 앞의 아홉 명과 같은 운명을 밟고 싶지 않다면 네 힘에 지배되지 말라는 것뿐. ]]

[[ 헛소리, 헛소리! ]]

말이 점차 빨라짐에 따라 붉은 액체의 진에서 나오는 빛이 조금씩 더 강해졌다. 불에 벌겋게 달아오르는 쇠와도 같은 느낌이었다. 처음에는 한 가지 목소리만 나오던 공간은 이제 비웃어대고 낄낄거리는 여러 가지 목소리로 가득 찼다. 그 소리들이 점점 시끄러워져 마침내는 견딜 수 없게 되었을 때, 사형을 집행하는 집행인의 신호처럼 벽력같은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 새겨라! ]]

완전히 붉은빛 덩어리로 변한 액체가 허공에서 엄청난 속도로 빛의 꼬리를 끌며 남자의 등으로 떨어져 내렸다.

쾅!

곧 엄청난 소리와 함께 등의 옷이 찢겨나가고, 앞으로 휘어지며 드러난 잘 짜인 맨살에 천천히 도장을 찍듯 스며들어가는 진의 형상이 극적으로 비추어졌다. 그 순간 주먹을 꽉 쥔 남자의 등 근육이 팽팽히 긴장하는 모습이 보였다.

한참을 스며들어가던 빛이 마침내 완전히 새겨져 붉게 빛났을 때, 등에 맺혀 흐르는 땀을 보고 나는 긴장했다.

[ ……. ]

마침내 모든 것이 끝나자, 빛이 사그라지며 남자의 몸이 천천히 바닥으로 내려왔다. 바닥에 선 남자의 몸에서 기묘한 붉은빛이 맴돌다가는 천천히 꺼져들었다. 찢어진 옷 사이로 보이는 문양은 이제 검게 변한 상태였다.

[[ 너는 이제 명실공히 마물의 처단자이며, 다크 나이트의 이름을 이은 자이다. 그러나 동시에 마물도 아니고 인간도 아닌 자이며, 조금만 방심해도 곧바로 너의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이다. ]]

[ ……. ]

[[ 마지막으로 너의 앞길을 위해 도움을 하나 주지. 단 하나의 목적을 갖고 나아가라. 너의 목적은 무엇인가? 너에게 용의 피를 남겨 준 그 녀석의 목적은 단 한 사람과 함께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가장 빨리 죽었지. ]]

“……아!”

그때 나는 불현듯 소리를 냈다. 화면 속에서 여태 알아보지 못했던 게 이상할 만큼 익숙한 무언가가 보였기 때문이었다.

‘저건……!’

그것은, 유완이 늘 입고 있던 검은 갑옷 안의 목을 감싸는 광택이 독특했던 옷과 거의 똑같은 옷 조각이었다. 평소에는 갑옷에 다 감싸여 목과 팔 부분밖에 볼 수 없었던 것이지만, 지금 화면에 보였던 찢긴 옷이 그와 거의 흡사했다.

쿵. 쿵. 쿵.

순식간에 머릿속에서 엄청나게 많은 것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슬슬 명치가 답답해질 즈음, 그와 동시에 처음으로 낮고 약간 허스키한 목소리가 이 영상의 끝을 알리는 종소리처럼 들려왔다.

[ 목적과는 다르지만, 목적지는 하나뿐이다. ]

이젠 끝이었다. 크란은 나에게 생각하지 말라고 했지만, 그것은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던 것에 도장을 찍는 신호와도 같았다.

나는 그 목소리를…… 목소리의 주인을 알고 있었다.

목소리가 나오자마자 뒷모습이 점점 멀어지며 조금씩 밝아지기 시작하는 화면에 어둡던 동굴과 남자의 모습 전체가 그나마 알아볼 수 있도록 잡혔다.

영상이 끝났다. 화면이 암전한 뒤 익숙한 더 미스트 웹 페이지로 돌아와 있는 것을 확인하고도 차마 굳게 다문 입을 뗄 수 없었다.

지금 내가 느끼고 있는 감정이 살아 있어서 다행이라는 것인지, 살았는데도 약속대로 나를 찾아오지 않아 분노를 느끼는 것인지, 아니면 멍청하게 기다린 나에 대한 한심함인지 뭔지, 어떤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한참을 생각해 봐도 하나의 감정으로 남는 것이 없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그런 상태로 앉아 있었을까? 간신히 뭔가 다른 것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게임에 접속을 해야…….’

소파를 짚고 일어났을 때, 나는 갑자기 오른쪽 무릎을 들쑤시는 통증으로 인해 앞으로 넘어져 굴렀다.

“…으…… 젠장…….”

빌어먹게 익숙하고도 친숙하지 않은 통증 때문에 잠시간 무릎을 감싸고 웅크린 채 누워 이를 악물고 있자, 몇 분 뒤 통증이 서서히 가라앉는 것이 느껴졌다. 그래도 나는 일어나지 않고 계속해서 무릎을 붙잡은 채 누워 있었다. 문득 옛날에 들었던 상담의의 말이 떠올랐다.

「네 고통에는 트라우마가 결합되어 있어. 혹시라도 그 깊은 부분을 건드리는 일이 생긴다면, 아무런 육체적 이유 없이도 얼마든지 다시 통증이 일어날 수 있는 거야.」

그때는 웃기는 소리 한다며 넘어갔었던 것 같은데, 요즘 들어 다시 생각해 보니 그 말이 맞는 것도 같았다. 얼마 전 시저…… 정승조를 다시 만났었던 때에 느꼈던 다리의 고통. 크란은 그때 내 몸이 로그아웃될 때처럼 깜박거렸다고도 했다. 그리고 또 지금.

게임에 접속할 마음이 싹 사라져버렸다.

나는 눈을 감고 있다가 비척거리며 일어나 침대가 있는 방으로 걸어갔다. 침대 위에는 검에 익숙해지고 싶어 놓아두었던 목검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그것을 대충 밀어내고 누운 채로 나는 머리를 차갑게 하기 위한 강제적 수단인 잠을 청하기로 했다. 하지만 그날 밤이 새도록 잠은 결국 오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결국 해가 뜨는 것을 눈으로 보고 나서 나는 대충 씻은 뒤 처음으로 윤석호에게 먼저 화상 전화를 걸었다.

[ r.r.r.r.r.r…… r.r.r.r.r.r.r…… 삣. ]

- 연결되었습니다.

[ 강무헌 씨? 무슨 일이십니까. 이렇게 아침부터……. 처음에 전화번호를 보고 의심했는데 정말 무헌 씨군요. 기쁜데요. ]

이른 아침인데도 평소와 똑같이 완벽한 차림새를 갖춘 윤석호의 모습이 화면 안에 떠오르자마자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누르며 곧바로 본론부터 말했다.

“어제 그 영상 말입니다.”

[ 음? 그 영상……이라면, 아. HZ 말씀이십니까? ]

HZ고 뭐고 잘 모르겠지만 대충 뜻이 통한 것 같아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다크 나이트가 확실합니까?”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를 들은 윤석호는 잠깐 나를 바라보다가, 꼰 무릎 위에 여유롭게 손을 올려놓았던 자세를 턱을 괸 자세로 바꾸며 예의 그 속을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 예? 그거야 물론이지요. 다크 나이트의 언급도 영상에 나오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겨우 그것 때문에 굳이 바쁜 저에게 확인 전화를 거신 겁니까? ]

나는 기분이 급 하강하는 것을 느끼면서도 어쩔 수 없이 눌러 참았다.

“아닙니다. 그러니까 제 말은…… 그 영상의 퀘스트 유저가 지금까지도 퀘스트를 수행하고 있는 다크 나이트 유저인 것이 맞느냐는 겁니다.”

[ 무헌 씨. 그건 당연한 말이죠. ]

웃고 있던 윤석호가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 그렇지 않다면 어째서 굳이 그 유저의 동영상을 올렸겠습니까. 이상한 것을 다 물으시는군요. ]

놀려먹는 듯한 말투에 순간 울컥 화가 났다. 젠장. 그러니까 내 말은…….

“…….”

자연스럽게 그 뒷말을 생각하던 나는 흠칫 몸을 굳혔다.

……내 말은, 그 녀석이 유완인지 아닌지 확언을 듣고 싶단 거다.

갑자기 피가 싸늘히 식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미 내 눈으로 확인했으면서도 믿고 싶지 않아 새벽부터 전화질을 해대고 있는 지금의 내 모습이 매우 낯설게 느껴졌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그냥 막연히 윤석호가 대답해 주길 바라며 안 하던 짓까지 하고 있다니.

[ 강무헌 씨? ]

늘 똑같이 웃고 있는 윤석호의 얼굴도 지금은 나를 비웃는 것처럼 보일 지경에 이르렀을 때, 나는 집어치우자고 생각했다.

“……알았습니다. 귀찮게 해서 미안합니다. 그럼 이만.”

[ ……아……. ]

핏.

잠깐 윤석호가 뭔가 말하려던 모양이었지만 화면은 지체 없이 꺼졌다. 나는 앉은 채 눈을 감았다. 잠을 못 자서인지 짜증이 치솟았다. 그 짜증을 밟아서 밀어 넣으며 어떻게 해야 할까 생각했지만, 결국 지금의 내 기분을 인정하는 게 최선이란 결론을 내렸다.

그래. 솔직히 말하자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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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물 먹여, 지금?”

크란이 울분에 찬 표정으로 바닥을 내리쳤다. 나는 그것을 바라보다가, 운오의 무슨 일이냐는 듯한 표정에 시선을 돌렸다.

“아니, 도대체 진짜로 멀쩡하게 살아 있었으면서 왜 우릴 안 찾아와? 우린 일행도 아니었어? 어쩐지 그렇게 오래 안 올 때부터 좀 이상하다 했지……. 같이 다니기 싫으면 와서 말이라도 하고 가든가! 언제는 카프한테 손만 대도 난리를 치더니……. 그래도 친구 비슷하게라도 생각한 내가 바보다! 영상 찍을 틈은 있고 우리 찾아올 틈은 없었대? 살면서 이렇게 배신감 느껴보기는 처음이다!”

말 한마디 한마디가 심금을 울렸다. 크란의 말은 내가 했던 생각과 정확히 일치했다.

오늘 아침 내가 인정한 것은 치졸하다고 해도 할 말이 없을 분노였다. 그것도 전에 자그레브에서 유완을 의심했을 때 느꼈던 것보다 더 큰.

그도 그럴 것이 유완이 죽은 줄 알았을 때 크란과 내가 느꼈던 걱정과 허전함은 진짜였다. 그 녀석을 다시 만나려 노력했던 모든 것이 단숨에 부정 당한 느낌이었다.

‘그것도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유완과 연관해 나를 괴롭히고 있는 것은 자그레브에서, 지붕 위에서의 그 짧고 당황스러웠던 기억이었다. 그때는 결코 떠나지 않을 것처럼 말하던 놈이 고작 한 달 만에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어쨌든 스스로 인정하면서도 유치하다 여겼던 이 감정을 크란도 같이 느낀 것 같으니 다행이었다.

“카프. 내가 전에 했던 말은 그냥 취소할게. 분해서 안 되겠어. 잘 생각해 봐. 이 자식이 진짜로 살아 있는데 우릴 엿 먹인 거라면, 어차피 우리가 이 퀘스트를 계속 진행하다 보면 언젠가는 그 자식이랑 또 만나게 되어 있을 거 아냐? 만나기만 하면 그냥……!”

“별로 만날 생각 없어.”

“뭐?”

내 말에 크란이 고개를 돌렸다가 눈이 마주치자 무엇 때문인지 헉하고 기겁하며 뒤로 물러섰다. 나는 신경 쓰지 않고 말을 이었다.

“여기서 우리가 뭐라고 해 봤자 결국 다 그놈 마음일 테니까 나는 신경 끌 생각이다.”

“너…….”

“그러면 난 할 일이 있어서 잠깐 밖에 나갔다 돌아올게.”

결국 내가 낸 결론은 이것이었다. 그냥 신경을 끄는 것. 본인이 친구가 아니라고 했으니 아닐 것이고, 온다고 했으면 언젠가 알아서 오겠지. 무엇 때문에 내가 신경을 쓰고 기다렸나 싶어져 그렇게 결론을 내리자 마음이 매우 편해졌다.

그렇다고는 해도 유완을 나중에라도 만나게 되었을 때 내가 어떻게 행동할지는 알 수 없지만…… 그냥 지금의 상황에 충실하고, 일단 퀘스트를 풀어나가는 데에나 신경 쓸 생각이었다.

나는 집 바깥으로 나가 이전에 봐둔 곳을 향해 걸어갔다. 윤석호의 조언대로 일단 이 상태로라도 마법을 한번 실행해 볼 생각이었다.

아직까지는 윤석호의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지만, 일단 해 보면 그래도 뭔가 얻는 것이 있겠지. 뭐…… 실패해 봤자 마력만 급속히 빨려 들어가고 마법 실행은 안 되는 정도니까.

“후…….”

걸음을 멈추고 똑바로 섰다. 천천히 숨을 고르며 잡념을 지우는 데 노력하자, 오랫동안 검도를 하며 익숙해진 명상 습관대로 빠르게 깊은 곳으로 잠겨드는 정신이 느껴졌다.

그렇게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 주변에서 들려오는 소리까지도 민감하게 신경 쓸 수 있게 되었을 때, 나는 지금까지 잡아놓았던 에어리얼 서번트의 이미지를 확실히 떠올리려 애쓰면서 팔을 뻗어 천천히 원을 그렸다.

화악.

손끝을 따라 원이 완성되자마자 내가 서 있던 곳부터 시작해 사방으로 초록색 수식 세계가 가로세로로 쫙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마침내 저 먼 숲의 경계선까지도 희미하게 수식 세계가 채워버렸을 때 나는 오른팔을 원 안에 밀어 넣었다.

순간 바람 소리 같은 것이 나면서 몸에 확 하고 히터 바람이 쐬어지는 것처럼 따뜻한 느낌이 들었다. 앞머리가 부드럽게 비상해 이마를 스쳤다. 오랜만에 느껴 본 감각들을 기분 좋게 음미하면서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원하노니, 존재하는 것에서 벗어나 이 순간 그 숨결을 드러내 나를 위해 움직이라.”

범위는 내 앞 1미터 정도로, 원하는 것은 돌멩이를 집어 올리는 것.

“에어리얼 서번트.”

마지막 주문을 끝마쳤을 때였다.

갑자기 보이는 세계가 두 개가 되었다.

“…….”

순간적으로 내가 두 명으로 나뉘어버린 줄 알았다. 나는 분명히 여기에 서서 앞을 바라보고 있는데, 다른 한쪽에서는 1미터쯤 앞에 서 있는 나를 바라보고 있는 시야가 함께 보였던 것이다.

앞에는 아무것도 없는데!

너무 놀라 뒤로 한 발짝 물러선 나는 급격한 현기증을 느꼈다. 동시에 두 개의 시야에서 한쪽은 내가 뒤로 물러서는 감각만을 느끼고, 다른 한쪽에서는 1미터쯤 앞에서 하얗게 질려 있던 내가 뒤로 비틀거리며 한 발짝 물러서는 모습을 TV로 보듯 보아야만 했다.

시야를 반으로 나누어 오른쪽 눈에 보이는 것이 다르고 왼쪽 눈에 보이는 것이 다른 그런 현상이 아니었다. 동시에 인식하고 있으면서도 뭔가 다른 이 기상천외한 감각에 나는 엄청나게 당황했다.

쿵!

“윽!”

결국 어지러움을 견디지 못하고 엉덩방아를 찧었다.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던 나는 잠시 숨을 헐떡이다가 이내 급하게 들이켰다.

‘아…….’

눈을 감았으니 당연히 앞이 보이지 않아야 하는데, 이번에는 감은 눈 안쪽으로 1미터 앞에 넘어져 있는 내가 보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번엔 그 하나의 시선만 인식했기 때문인지 그렇게 어지럽지는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보인다’라기보다는 보이는 것과 비슷할 정도로 뇌에서 인식하는 듯한…… 희한하고 이상한 느낌이었다.

일단 눈을 감았을 때는 원래는 없었던 ‘두 번째 시야’만이 보인다는 것을 알게 된 나는 천천히 상체를 일으켜 세워 앉았다. 놀랍게도 눈을 감고도 내가 뭘 하고 있는지 어이없을 정도로 생생히 볼 수 있었다. 그래도 그것은 단지 시야뿐이고 다른 모든 감각들은 내가 여기 제대로 앉아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어 혼란스러웠다.

‘젠장…… 뭐가 뭔지……. 일단 원래대로 좀 돌아갔으면 좋겠는데…….’

파앗.

그렇게 생각한 순간, 갑자기 두 번째 시야가 감은 눈 안에서 사라져버렸다.

“……어?”

다시 눈을 떠 보니 시야는 원래대로 돌아온 상태였다.

‘그… 그러면…….’

그 순간 나는 퍼뜩 깨달았다.

“……이게 바로 해 보면 안다던 6서클 마법이었다는 건가?”

어안이 벙벙한 채 일어나서 곰곰이 생각해 보자 이 결론에 확신이 더해졌다.

내가 시도한 마법은 에어리얼 서번트. 공기를 부리는 마법이었다. 처음 이미지했을 때 내가 목표로 했던 것은 1미터쯤 앞의 허공에서 마법이 시전 되는 것이었는데, 아까 그 ‘제2의 시야’의 위치는 한결같이 내 1미터쯤 앞쪽에 고정되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혹시 모르니 한 번만 더 해 보자.’

아직까지도 믿기 힘든 그 감각을 되새겨 보며 난 다시 서클을 그리고 범위를 지정해 보았다. 이번의 범위는…… 내 바로 뒤쪽.

“-에어리얼 서번트!”

마찬가지로 주문을 끝내자마자, 확 하고 머릿속이 어찔해졌다.

“……헉.”

그리고 잠시 후 인식되기 시작한 ‘두 번째 시야’는, 내 뒤통수를 아주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그에 놀라 뒤돌아보았을 때 나는 또 다른 사실을 깨닫게 되었는데, 그것은 내가 움직였을 때 변하는 것은 첫 번째 시야, 즉 내가 원래 내 눈으로 인식하는 시야뿐이고 두 번째 시야는 여전히 그 자리, 그 방향에 그대로 고정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윽!’

……즉 나는 내 얼굴을 바로 코앞에서 들여다보는 꼴이 되었다.

한참 뒤 이것저것 시험해 보면서 나는 바로 이 ‘두 번째 시야’의 정체가 에어리얼 서번트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에어리얼 서번트 자체가 이 시야가 아니라, 내가 에어리얼 서번트의 시야를 공유한다고나 할까…… 그런 느낌이었다.

처음에는 울렁증과 어지럼증으로 혼자 움직이다 볼썽사납게 구르기도 했지만 연습을 반복할수록 점점 익숙해지면서 이것의 무서운 위력을 깨달을 수 있게 되었다.

나는 가만히 선 채로 에어리얼 서번트만을 이용해 내 뒤쪽을 훑어본 뒤 입을 열었다.

“돌멩이 두 개만 들어올려.”

작게 속삭이자마자 내 이미징에 따라 땅으로 내려간 에어리얼 서번트는 곧 바람에 휘감긴 돌멩이 두 개를 띄워 올렸다. 조금만 멀리 떨어져서 봐서는 허공에 돌멩이 두 개만 둥둥 떠 있는 것처럼 보일 테지만, 내 인식 속에서 현재 첫 번째 시야는 앞을 보고 있고, 두 번째 시야는 뒤쪽에서 돌멩이 두 개가 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그 상태로 주위를 한 바퀴 돌아.”

말과 함께 내 주위를 돈다는 이미지를 떠올리자 곧 부드러운 바람이 몸을 한 바퀴 휘감고 지나가는 감각이 느껴졌다. 동시에 두 번째 시야가 내 주변을 한 바퀴 돌았다.

‘이거 재미있는데……?’

컴퓨터 뇌가 이럴까 싶을 정도로 익숙해질수록 머릿속이 거울처럼 맑아지는 느낌이었다. 놀랍도록 정밀하게 인식되는 에어리얼 서번트의 ‘시야’가 나에게는 마치 미지의 세계와도 같이 느껴졌다.

‘그랬군……. 이제야 그 말뜻을 알겠어.’

수수께끼와도 같았던 윤석호의 말뜻을 이제는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일단 마법을 써봄으로써 이해하고 나자, 이 마법을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는 그 다음에 직접 움직임으로써 이미징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직 에어리얼 서번트 하나만을 써보았기 때문에 잘은 모르겠지만, 6서클은 지금까지와는 다를 거라던 이루미네나 윤석호의 말들이 실감나게 와 닿았다. 정확히 어떤 부분에서 차이가 나는지는 시간이 좀 더 지나 봐야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았으나, 이것 하나만으로도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감각을 맛볼 수 있었다. 마치 맨 처음 마법을 배울 때 서클을 그리고 범위를 지정하며 이미징을 시도했을 때 느꼈던 희열과도 닮아 있는 느낌이었다.

서서히 가슴이 뛰면서 어제와 오늘의 모든 고민이 싹 날아가고, 대신 기분 좋은 긴장감과 흥미로움이 내 안에 가득 차는 게 느껴졌다. 보통의 6서클도 이럴진대, 이루미네가 다른 마법과는 차원이 다르다고 말할 정도였던 슈페리어의 6서클 마법들은 과연 어떻단 말일까? 궁금해서 몸이 다 근질거릴 지경이었다.

“후우…….”

하지만 일단은 이 마법을 성공했다는 것이 더 중요했다. 나는 기분 좋게 웃으면서 에어리얼 서번트를 해제한 뒤 크란과 운오가 있을 집 쪽으로 향했다. 약속한 일주일도 어느새 성큼 줄어들어 바로 내일로 다가와 있었다. 이제 이루미네에게만 한 번 더 가면 이 마을에서도 떠날 수 있을 것이다.

드디어 약속한 일주일이 지났다.

동굴에서 다시 만난 이루미네는 여전히 단정한 자세로 앉아 우리를 맞이했다.

“안녕하세요.”

이번에 만나면 새로 묻고 싶은 점이 있었으나 그것은 볼일을 먼저 다 본 후 하자고 생각하며 인사하자, 이루미네도 미소를 띠고 고개를 끄덕였다.

“응. 드디어 왔네, 둘 다. ……그런데 너는 또 왜?”

“…….”

이루미네가 의아하게 쳐다본 상대는 우리 뒤에 서 있는 운오였다.

사실 운오가 따라온 것은 나에게도 의외였다. 굳이 따라오겠다고 말하는 것에 거절할 이유도 없어 데려오긴 했는데……. 구경이라도 하고 싶었던 건가?

운오가 말없이 시선을 돌리고 있자 이루미네도 굳이 답을 듣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는지 “뭐, 대답하기 싫으면 됐다만.” 하며 도로 우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상태를 보아하니…… 가르쳤던 건 대충 어떻게 다 배운 것 같군.”

“네.”

“그래, 그러면 증거를 보여 줘야지.”

그 말을 기다려왔다. 망설임 없이 앞에 나선 뒤 나를 바라보고 있는 시선들을 느끼며 그동안 수없이 연습했던 마법을 준비했다. 범위는 이루미네의 앞쪽에 가까운 곳으로.

“에어리얼 서번트.”

잠시 후 어찔한 현기증과 함께 시야가 두 개로 나뉘었다.

‘좋아……!’

마음먹은 대로 잘 되었음을 확인하고 나서 조용히 원하는 것을 속삭였다.

“머리카락을 한 번 휘감아라.”

후욱 하고 에어리얼 서번트가 움직여 날아갔다.

“동굴 안인데 바람이……?”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던 운오가 의아하게 중얼거리는 순간 이루미네에게로 돌진한 에어리얼 서번트가 그녀를 부드럽게 한 바퀴 휘감아 돌았다. 이루미네의 눈이 살짝 커졌을 때엔 그녀의 긴 머리카락을 휘감아 위쪽으로 끌고 올라갔던 바람이 다시 내 의지에 따라 사라진 뒤였다. 긴 머리칼들이 뒤늦게 팔랑거리며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

잠시 후, 놀란 표정을 지운 이루미네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처음으로 보는 진심으로 기뻐 보이는 얼굴이었다.

“정말 해냈구나. 그래. 그 정도는 되어야 자격이 된다고 할 수 있겠지. 내가 가르쳤고, 그의 후인이니까.”

띠링!

기다리고 기다렸던 안내음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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