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시저가 사라졌던 곳으로 다시 다가간 순간, 나는 눈을 의심할 만한 광경에 우뚝 멈춰 섰다.
그곳에는 서로 검을 맞대고 있는 두 사람이 있었다. 한쪽은 물론 방금 사라졌던 시저였지만, 그 반대쪽의 사람은 폭이 넓은 후드 달린 망토 때문에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가가가각 하고 두 개의 칼날이 맞물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게…….”
그 두 개의 칼날을 바라보다 나도 모르게 입을 연 순간, 두 명의 움직임이 딱 멎었다. 정확히는 시저를 밀어붙이듯 검을 밀어내고 있던 한 명이 그대로 멈춰버리자 시저 또한 멈췄다는 것이 맞을 터이다. 로브를 쓴 상대는 그야말로 얼음처럼 굳어 있었다.
시저가 흘깃 내 쪽을 바라보고는 다시 상대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것이 보였다.
“……어쩔까.”
잠시 적막해진 공기를 깨며 시저가 나지막이 뇌까렸다. 차갑고 비웃는 듯한 목소리였다. 그 말을 듣자마자 격앙된 듯한 상대는 검을 밀어내며 뒤로 물러선 뒤, 갑자기 방향을 우회하여 내 쪽으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뭐…….’
몸을 낮춘 채 달려오는 엄청난 속도에 막 블링크를 외치려고 했을 때, 앞으로 다가오면서 급격히 몸을 펴는 상대의 얼굴이 일순 로브 안쪽에서 훅하고 모습을 드러냈다.
‘…이럴 수가.’
놀라 눈을 크게 부릅뜬 것과 상대가 나를 잡아채듯 끌어간 것은 동시였다. 순간 시저와 다시 한 번 눈이 마주쳤지만, 놈은 검을 늘어뜨린 채 쫓아올 생각은 없는 듯 무표정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이 점차 멀어져갔다.
“플레임 스트라이크!”
후왁!
처음에는 너무 놀라 끌려 다녔으나, 생각을 정리하고 나서 한참이 지나도 멈출 생각을 하지 않는 상대를 향해 가차 없이 불꽃 덩어리들을 이미징했다.
퍼져나간 불의 구체들이 위협적으로 주변을 포위하자 놈이 드디어 멈추었다.
“일단 팔부터 놔라.”
놓고 싶지 않은 것처럼 저항감이 느껴지던 손은 한 번 더 힘을 주자 그제야 풀렸다. 나는 분노를 억누르며 상대의 얼굴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그것도 벗어.”
놈은 잠시 아무 말 없이 서 있다가, 곧 한 손을 들어 쓰고 있던 후드를 옆으로 끌어당겼다. 몸에 휘감기듯 걸쳐져 있던 것이 잠시 팽팽해지다가는 곧 툭 하는 소리를 내며 벗겨져 나갔다.
익숙한 머리와 푸른 눈동자가 연한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자그레브를 떠난 후 처음으로 하는 유완과의 재회였다.
“…….”
눈앞에서 다시 이렇게 마주 본 것이 굉장히 오래 전의 일 같았다.
못 보던 갑옷이나 건틀렛을 포함해 바뀐 점을 확인하고 있는 동안 유완 또한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것을 눈치챈 나는 플레임 스트라이크를 거두고 지금까지 쓸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던 보조 마법을 하나 머릿속으로 이미징했다.
이 마법을 통해 얻을 수 있는 효과는 근력의 증가. 단지 아주 일시적이지만 육탄 공격의 파워를 올려 주는 마법이기도 했다.
“스트렝스!”
팟! 후욱…….
소리 내어 말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터져 나온 밝은 빛이 내 몸을 연하게 감싼 후 사그라졌다. 뜬금없는 주문에 말없이 서 있던 유완의 눈이 깜박이는 것이 보였다.
“유완.”
“……응.”
확인 절차 삼아 부르자 약간 느리게 대답이 따라왔다.
그 즉시 나는 주먹을 들어 턱을 한 대 갈겨버렸다.
뻑!
“…….”
때린 내가 좀 놀랐을 정도로 심하게 고개가 돌아간 유완이 비틀하고 두어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오, 이거 내 생각보다 더 효과가 괜찮은데. 한쪽 입가가 비뚤게 올라갔지만 솔직히 말해서 웃을 만한 기분은 아니었다.
유완은 한 대 맞은 턱에 손을 댄 채 나를 쳐다보다가 내 사나운 눈초리에 곧바로 시선을 내렸다. 맞을 만했다는 것을 암묵적으로 시인하는 태도였다. 나는 나머지 한 손도 사이좋게 날리며 미소를 지었다.
“좀 때려도 될 거라 믿는다.”
그 이후, 나는 마법이 풀리면 걸고 풀리면 걸고를 반복해가면서까지 두들겨 팼다. 유완은 아무 말 없이 묵묵하게 그것을 다 맞았다.
나름대로 예전에는 어디 가서 맞고 다니지는 않을 정도의 싸움 실력은 된다고 생각했었는데, 아무리 통각이 줄어든 미스트의 세계라지만 이렇게까지 별 변화가 없는 표정을 보니 분노가 더 치솟아 올랐다.
아무리 때려도 처음 빼고는 충격다운 충격을 받은 기색조차 없어 때린 내가 다 체력이 소모될 지경에 이르렀을 때, 유완이 처음으로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쳤다.
“이제 그만 해도…….”
“그러지 뭐.”
“…….”
순순한 대답에 내가 체력이 많이 소모된 것을 알고 말한 듯한 유완의 눈이 순간 의아하게 변했지만, 나는 조용히 한 손을 들어 보였을 뿐이었다.
“라이트닝.”
파직! 지지지직!
곧바로 짜릿하게 감겨오는 푸른 전기에 유완의 시선이 박힌 것을 바라보며 시원하게 미소를 지었다.
“마력은 아직 많이 남았거든. 크란 몫까지 해 줘도 되는 거냐?”
과연 그 말은 묵묵하게 맞아오던 유완의 표정에도 미묘한 변화를 일으킬 만한 말이었던 듯했다. 내려치기 위해 망설임 없이 손을 들어 올린 순간, 유완이 갑자기 허리를 확 하고 깊숙이 숙였다.
“미안.”
“…….”
허공에 들어 올린 손이 순간 멈췄다.
“잘못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유완은 계속해서 말했다.
“화가 났을 거라 생각했지만 그 이상 하면 네가 힘들어져. 나중에 괜찮아지면…….”
“생각했다고?”
어이가 없어 주먹 쥔 손이 저절로 한 대 더 때리는 쪽으로 움직이려는 것을 참으며 묻자, 허리를 숙인 놈이 고개를 미미하게 끄덕이는 것이 보였다.
“내가 왜?”
“그때 나는 죽은 것이 아니었지만 다시 너를 찾아가지 못했으니까.”
죽은 것이 아니었음은 물론이고 안 찾아왔다는 것까지 본인이 직접 인정했다. 하지만 거기서 사용된 ‘못했다’라는 단어에 나는 눈을 찡그렸다.
“무슨 말이냐.”
“이 이상은 말할 수 없어. 미안하다.”
이 자식이……?
“지금 나와 장난하자는 건 아닐 테고.”
정수리밖에 보이지 않는 유완을 노려보며 말했다. 유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 필요 없고…… 이것만 물어보마.”
손에 휘감긴 라이트닝 볼트를 소멸시키며 이마를 짚자 유완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너는 나를 우습게 생각해서 동료로서 같이 가는 것을 집어치운 거냐?”
“너를 우습게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어.”
‘우리를 동료로 생각하긴 했던 거냐?’ 했던 크란의 분노도 함축한 그 질문에 유완은 서슴없이 고개를 저었다. 나를 가장 분노하고 혼란스럽게 만들었던 그 질문에 대해 아니라는 대답을 듣자 지금까지의 혼란스러움이 순간 어느 정도 사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면 왜?”
“사정이 있었다.”
조금 가라앉은 내 질문에 유완은 눈을 내리깔며 대답했다.
“그동안 어디에 있었는데?”
“사정이…… 있었다.”
“지금도 돌아올 수 없는 거냐?”
“…….”
세 번이나 같은 대답을 하기에는 본인도 괴로운 듯 입술을 꾹 다문 유완의 죽 뻗은 미간이 찌푸려졌다. 나는 작게 숨을 내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무슨 놈의 사정인지 이야기할 수 없다면, 그래. 그렇다고 쳐라.”
순간 암울하게 가라앉아 있던 유완의 눈이 번쩍 뜨여 나를 보았다. 나는 어느 정도 홀가분해진 채로 유완에게 다가갔다.
“얘기하기 싫다는 건 굳이 묻지 않아.”
“…….”
“단지 나는, 네가 내가 싫어서 떠났다고 친다면 말 정도는 하고 갔어야 한다고 생각했을 뿐이야.”
“그건 아니라고 했어.”
“예를 들어서 그렇다는 거다.”
“그런 예라면 들지 마.”
“…….”
지금 네가 반박할 때냐? 포인트는 그게 아니라는 뜻을 담아 인상을 찡그리자 놈이 침묵을 지켰다.
“나중에는…… 돌아올 거냐?”
마지막으로 천천히 건넨 내 질문에 대한 유완의 대답은, 거세게 끌어안는 팔과 진심이라는 것을 알 수밖에 없을 정도의 목소리로 말한 단호한 한마디였다.
“돌아갈게. 반드시.”
내가 말하긴 했지만 닭살 돋는 질문이라고 생각했는데 놈은 이상할 정도로 기쁜 얼굴로 시간이 지나도 도저히 팔을 풀려고 하지 않았다.
유완을 간신히 떼어내고 나서 뒤로 물러서자 뚫어질 듯한 시선이 따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잘생겼지만 무표정한 얼굴에 지금은 아쉬움이 확연히 보일 정도로 드러나 있었다.
“돌아올 거라면 지금은 퀘스트 때문에 자리를 비운다고 생각해 둘게. 예전에 키온 형도 그랬었고.”
“…….”
말을 들었는지 안 들었는지 유완은 계속해서 내 쪽만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뭔가 한 마디 하는 것이 좋겠다 싶어 입을 열려 했을 때 놈이 갑자기 이마 근처로 손을 뻗어왔다.
“머리 색이…….”
“그건 변장.”
이마 옆의 머리카락 쪽에 손가락이 닿은 것을 밀어내며 대답하자 눈썹이 슬쩍 올라갔다.
“정작 마주치기 싫었던 놈한텐 바로 들킨 걸 보니 소용없었던 것 같아서 원래대로 돌릴 거다. ……그러고 보니 너도 바로 알아봤던가?”
말을 하다가 아까 유완도 나를 보자마자 칼부림을 멈추었던 것이 떠올라 묻자, 유완이 뭔가 할 말이 있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가는 곧 입을 다물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보였다.
‘정말 하나도 소용없었군.’
순간 염색은 둘째치고라도 이 따위 가면은 왜 썼나 싶은 울컥함에 확 떼어내자 유완이 이제 조금 여유를 찾은 듯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머리는 검은 쪽이 더 나아.”
“응.”
“그것도 쓰지 않는 쪽이 더 좋아.”
“…….”
“눈이 보고 싶은데.”
나는 새삼스레 유완을 다시 쳐다보았다. 왜 그러냐는 듯한 천연덕스러운 표정을 보니 뭐라 할 말이 없어지는 기분이었다. 그래. 이제야 완전히 내가 알던 유완과 재회했다는 실감이 났다. 얼굴만 보아서는 영화배우 같은 놈이 가끔 이상한 쪽에서 말이 많은 게 딱 지금과 같았다.
“후…… 그러면.”
“……잠깐.”
어쩐지 안도감을 느끼며 막 다음 말을 하려고 했을 때였다. 갑자기 평온해 보이던 유완의 얼굴이 급격하게 일그러졌다.
“왜…….”
그 변화에 내가 입을 다문 순간, 유완의 몸이 반투명해지는 것처럼 뿌연 은빛에 감싸였다.
‘……뭐냐, 저건?’
그런 모습은 처음 보기에 놀라 쳐다보자, 내 말을 막는 것처럼 유완이 한 손을 들어 보이고는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무어라 말을 했다. 하지만 빛에 감싸인 채여서인지 그 말은 들리지 않았다.
안 들린다는 표시로 고개를 흔들어 보이자 더욱 굳은 표정을 지은 유완이 시선을 내리고는 허공을 바라보며 무어라 입술을 움직여 말하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손도 몇 번 가져다 찍는 것을 보니 나에게는 보이지 않는 안내창 같은 것이라도 떠오른 모양이었다.
그때마다 유완의 몸은 멀쩡해졌다가는 다시 반투명해지고, 또다시 멀쩡해지기를 반복했다. 마치 로그아웃이 되려다 마는 사람의 모습 같았다. 그러기를 몇 번, 간신히 유완의 몸이 반투명에서 원래대로 돌아왔다.
- 후와악…….
돌아온 유완은 잠시 고개를 몇 번 흔들고 잔뜩 일그러진 표정으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하다가, 나를 향해 고개를 확 돌렸다.
“방금 그건……?”
놀라움을 완전히 감추지 못한 내가 질문했지만 들은 둥 만 둥 한 유완은 다급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번호를 가르쳐 줘.”
“뭐?”
“연락할 수 있는 번호를 가르쳐 줘.”
순간 무슨 소리를 한 것인지 내가 잘못 들었나 싶어 되물었지만 유완은 방금 전과 똑같은 말을 미간만 더 찌푸린 채 외쳤을 뿐이었다.
“왜?”
혼란스러워져 묻자 아까 몸이 깜박이던 것에서 벗어나자마자 무엇을 경계하기라도 하듯 여기저기로 시선을 돌리던 유완이 목소리를 낮추어 빠르게 말했다.
“시간이 없다. 네가 이런 걸 원하지 않는 건 알지만, 여기서는 안 되니까…… 가르쳐 줘.”
아무래도 이 자식은 질문을 하면 거기에 먼저 대답을 해야 한다는 상식이 좀 부족한 놈 같다. 절박하게까지 물어오는 모습에 당황했던 머리가 차갑게 식자 일단 가르쳐 주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의 여부가 머릿속을 채우기 시작했다. 역시 유완도 그때 이후 크란이나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던 것에는 틀림없어 보였다.
‘여기’가 아니더라도 현실이 있었다는 사실을 놈은 언제쯤 깨달았을까. 우리처럼 저놈도 좀 후회했을까?
지금 번호를 가르쳐 달라고 하는 것을 보면 그랬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 그간 배신감에 잠도 안 올 정도였던 것이 스르르 사라지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방금 실컷 두들겨 패고 대충 마음을 풀었다고는 해도, 괘씸함은 아직 좀 남아 있었다.
‘어쩔까…….’
장난이라도 쳐 볼까 싶었지만 유완의 표정은 정말로 심각하고 절박해 보였다. 고민하고 있으려니, 유완이 꺼질 듯한 낮은 목소리로 마지막 말을 속삭였다.
“……제발.”
“너…….”
내가 내 얼굴을 볼 수는 없었지만 놀란 탓에 제법 볼 만한 표정이 되어 있었을 것이다.
절대로 ‘제발’ 따위는 꺼내지도 않을 것 같은 놈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장난으로 싫다고 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어쩔 수 없군.’
키온 형도, 팔튼 형도, 크란도 내 번호를 알고 있는데, 저놈만 모른다면 그것도 말이 안 되지 않겠는가.
자그레브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내 번호를 가르쳐 줄 때에, 나는 이제 타인과 관계되기 싫어 먼저 상대를 거부하는 마음 따위는 버리자고 생각했었다. 다름 아닌 저놈으로 인해서…….
“……03B.”
조용히 집 화상전화번호의 첫 자리를 부르자 굳어 있던 유완의 눈빛이 순간 확 하고 변하는 것이 보였다. 그것이 너무나 극적인 변화라 입을 연 나조차도 놀랐을 정도였다. 나도 모르게 입을 다물자 유완이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속삭이듯이 입술을 움직였다.
“……다음은?”
“348.”
“그 다음.”
“S267KA.”
마지막까지 끝낸 순간, 눈만 번쩍이던 무표정한 조각 같은 얼굴에 처음으로 꽃물이 번지는 듯한 미소가 배어 나왔다. 형언할 수 없이 기쁜 감정이 마음속에서부터 우러나오는 듯한 그 표정을 말을 잃고 쳐다보고 있을 때, 타이밍 좋게 또다시 반투명해지기 시작한 유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마지막 말을 남겼다.
“꼭 연락할게.”
“카프! 조금만 더 늦었으면 찾으러 나갈 뻔했어! 아니 근데 가면은 왜 벗었어?!”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
다시 여관으로 들어서자마자 발을 동동 구르고 있던 크란이 엄마 찾은 강아지처럼 나에게 매달렸다. 운오도 드물게 걱정 어린 눈빛을 드러냈다. 잠깐 동안 너무 많은 일을 겪어서인지 이런 것이 다 평화롭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작게 숨을 내쉰 뒤 매달려 있는 크란을 향해 마법을 쓸 때처럼 손바닥을 위로 들어 내밀자, 놈이 반사작용처럼 후다닥 물러났다.
“크란.”
“응?”
“말을 나누던 사람이 은빛으로 반투명해지는 건 무엇 때문에 그런 거지? 로그아웃은 아닌 것 같았는데.”
머리와 옷을 어느새 원래대로 갖춰 입은 크란은 내 질문에 잠시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별로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바로 대답했다.
“그거? 캡슐 바깥에 있는 사람이 캡슐 안에서 THE MIST를 플레이하고 있는 유저를 호출하는 거잖아. 일종의 화상전화라고나 할까. 미성년자 유저 빼고는 대부분 꺼놓고 살지만……. 근데 그건 왜?”
“아…… 그렇군.”
고개를 끄덕이고 도로 뒤돌아서면서 나는 아까의 유완의 모습에 대해 떠올렸다. 그러면 유완은 캡슐 밖의 누군가가 게임을 끝내라고 호출했다는 건가? 그럴 만한 대상은 부모님 정도밖에는 떠오르지 않지만, 유완의 굳은 표정으로 보아서는 그런 것 같지도 않았다.
‘뭐가 뭔지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런 거였군.’
속으로 수긍하면서 나는 크란에게 또다시 말을 건넸다.
“아까 시저 만났어.”
“시저? 음, 그래, 시저……. ……자, 잠깐만. 누구라고?!”
“설마, 마신의 기사 유저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순간 아무렇지도 않게 수긍했던 크란이 곧바로 기겁해 튀어 올랐다. 날카로워진 표정으로 묻는 운오를 보며 나는 저 녀석도 시저를 알고 있었군, 하는 생각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유완을 만났는데.”
“시저 그놈이 여기는 왜! 아니, 그전에 카프는 어떻게 돌아온 거야? 잠깐, 또 누구? 유완이라고!”
“그건 누굽니까?”
연이은 충격으로 비명을 지르는 크란과 이번에는 의아해하는 운오를 향해 나는 피식 웃고 대답해 주었다.
“전에 너도 봤을 텐데. 다크 나이트 영상의 유저.”
오랜만에 무선 키보드를 앞에 놓고 손을 올리자 낯선 감각이 손끝을 통해 전달되어왔다. 평소 내가 자주 사용하는 컴퓨터 모드는 음성 인식 홀로그램 모드였지만 현재는 내 바로 앞쪽에 비교적 작게 띄워진 화면과 키보드 연결로, 웹 서핑이나 작업을 할 때 쓰는 축소 수동 모드를 사용하고 있었다.
내 경우 수동 모드는 귀찮아서 웹 서핑을 할 때도 음성 인식 모드만 사용해 왔지만 오늘은 키보드가 필요했기에 어쩔 수 없이 돌려놓은 것이었다. 그래도 키보드 치는 방법이 쉽게 잊히거나 하는 종류는 아니라 그나마 다행이었다.
어디 보자. 크란이 가르쳐 준 주소가…….
타각타각, 탁, 하는 생소한 소리를 끝으로 엔터를 치자 달칵하는 소리와 함께 연결되는 것이 보였다.
[ 당신을 위한 또 하나의 세계. MIST BAY WORLD COMMUNITY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
반짝거리는 안내 문구와 함께 거대한 웹 페이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뭐야, 왜 이렇게 커?’
자리를 메우고 있는 엄청나게 많은 메뉴들과 옆면에 표시되는 수많은 동시 접속자 수, 속속들이 올라오고 있는 새 글들의 모습에 나는 놀라 손을 멈추었다. 대충 크게 보이는 것만 해도 자유 게시판, 정보 게시판, 동영상/스크린 샷 게시판, 경매/시장 게시판, 도시별 게시판에 그 밑으로 또 많은 소규모 게시판들이 자리 잡고 있어 어디부터 보아야 할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잠시 어디를 먼저 보아야 하나 눈을 돌리기에 바빴던 나는 먼저 가장 큰 자유 게시판을 들어가 보기 위해 키보드 옆면의 터치 패드 위로 검지를 움직였다. 곧 엄청나게 많은 글들이 화면 위로 나타났다.
[ 블란테 최고 의상 편집샵, ! ☆오프라인서도 겸업☆ ] [23]
└ [ Re :: 가게 홍보는 홍보 게시판에서.. ] [89]
[ 오늘 베를 늪지에서 도와주신 레인져님 찾아요.. ^^ ] [151]
[ 저희 결혼해요! 소드댄서 별란♡사제 JB (23일에 오프에서 먼저!) ] [578]
[ 요즘 바가지 씌우는 상인들이 너무 늘어난 것 같네요..주의가 필요할 듯 ] [223]
[ 솔직히 말해서 FM같은 놈은 없다고 생각한다. ] [1181]
[ 로든마을 순심이네 대장간 주인이신 순심아빠님 정말 최고! ] [123]
[ 젠장 마법한번 쓰기가 왜이리 힘든가.. 마법 계열들에 대한 고찰 ] [442]
[ 미스트에서 고통 수치를 낮추는 방법 좀요! ] [139]
[ 드디어 토렐리트 외곽에 내집 장만 ^0^ ] [336]
[ 말을 키우고 있는데 살쪄서 타기가 미안해요..ㅠㅠ ] [110]
[ 특수직업 헤븐보이서, 멜라민 길드 연연소님을 보다! 인증 스샷! ] [298]
[ 현재까지 새턴측이 업데이트라고 내놓은 것들.. 영상빼면 뭐가 달라졌나 ] [662]
…….
공식 홈페이지에서보다 훨씬 격렬하고 빠르게 돌아가는 흐름은 따라가기가 힘들 정도였다. 그렇게 읽어내려 가던 도중 문득 내 눈을 붙잡은 제목이 하나 있었다.
‘솔직히 말해서 FM 같은 놈은 없다고 생각한다……?’
벌써 네 자릿수를 넘길 정도로 엄청난 댓글수를 보니 현재 화제로 떠오른 게시글인 모양이었다.
FM이라면 설마 전에 크란이 말했던 나를 지칭한다는 그 웃기지도 않는 말인가?
망설임 끝에 조용히 클릭해 보자 내용이 나타났다.
[ 솔직히 말해서 FM같은 놈은 없다고 생각한다. ]
동영상 한번 잘 찍혔다고 연예인보다 더 뜬 그놈의 에프엠..
저번에는 발라에서 잘못 알아보고 딴사람 잡는 소동까지 있었다고 한다. 이게 무슨 쪽팔리는 일이냐?
FM때문에 요즘 검은로브입고 다니는 놈들도 무지 늘었다고 한다. FM이 도대체 뭐라고?
내가 보기에 FM은 그냥 그럴싸한 사기꾼일 뿐이다.
5서클이라고 나온 그 마법, 정말로 5서클이라고 생각하나? 확실히?
솔직히 4서클까지는 내가 이해를 한다.. 자그레브에 한 사람 있다고 들었으니까
근데 5서클 유저면서 지금까지 사람들 눈에 띄지도 않고 다닌다는 거, 그거 말이 안 되잖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마법이 아니라 다른 스킬로 인한 속임수일 가능성이 높다는데도 미지의 실력자란 컨셉에 다들 이렇게까지 환장할 줄 몰랐다.
이 난리에 아직까지도 안 나오는 걸 보면 답 나오지.
그러니까 결론은 FM 없으니 제발 이제 설레발 좀 그만 치자
맨날 그놈의 FM FM FM FM FM..여기가 무슨 팬클럽인 줄 아나 진짜